조지 리 맬러리는 1886년 영국 체셔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다. 10대 중반 시절부터 암벽 등반을 즐기긴 했지만
남달리 빼어난 솜씨를 지녔던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의 성격은 증언자들에 따라 크게 다르게 전해진다.
어떤 이는 그가 덤벙댔을 뿐 아니라 건망증마저 심했었다고 전하고,
다른 이는 그가 매우 충동적이며 과감한 성격을 지녔었다고 전한다.
이후 그의 등반 경력을 보면 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맬러리는 생애 최후의 등반에 나설 때조차 손전등을 챙겨가는 것을 잊었고,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도 뒤 돌아보지 않고 정상을 향해 전진했던 것이다.
그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훗날 영국산악회의 회장직을 역임했던 제프리 윈스롭 영이었다.
맬러리에게 빙벽 등반 기술을 가르친 것도, 그를 에베레스트로 이끈 것도, 그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준 것도 모두 제프리 윈스롭 영이었다.
따분한 교사 생활과 궁핍한 경제사정 때문에 풀이 죽어 있던 맬러리에게 영은 이렇게 말했다.
“에베레스트에 올라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써! 그러면 자네는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게 될 거야!” 갈등을 겪던 맬러리가 기꺼이 1921년 제1차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산악문학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못했다. 대신 사후 숱한 산악문학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1922년 제2차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마저 쓰라린 좌절만을 겪고 돌아왔을 때,
맬러리의 심신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만약 아내와 세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더 이상
그 ‘지옥의 산’에 도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듯 그는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돈과 시간을 벌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막대한 국가적 재정 지원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손수 원정 비용을 마련해야만 했다.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으니까 오른다’는 그 유명한 선문답 내용은 이 과정에서 빚어진 하찮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1924년 제3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사실 맬러리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개성이 너무 강하고 충동적이어서 도무지 명령 따위가 먹혀 들지 않는 이 고집불통의 사나이가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맬러리가 참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맬러리는 그때 이미 ‘에베레스트의 사나이’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영국의 집착은 대단했다.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그들은
북극과 남극이 모두 ‘이방인들(foreignersㆍ영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첫 발자국을 내어주자 ‘제3의 극’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에베레스트 초등에 목숨을 거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할 때 에베레스트 정상에 첫 발자국을 디딜 사람은 다름 아닌 맬러리여야만 했던 것이다.
1924년 6월8일, 조지 리 맬러리는 에베레스트 북측 8,220m의 제6캠프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가슴을 친다.
“아주 힘들었어. 돌아보면 엄청나게 노력을 했고 진이 다 빠져버렸다는 기억 밖에 없어.
텐트 문 밖을 보면 희망은 사라지고 눈만 덮인 황량한 세계가 눈에 들어와.”
하지만 그는 결국 텐트를 박차고 나와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향년 38세. 그가 그렇게 살다 간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부와 명예 혹은
국가적 숙원사업 따위는 유치한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단지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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