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기에 산이 있으니까" 조지 리 맬러리(1886~1924)

2011. 5. 19. 22:59山情無限/등산학교

 

 

 

   

조지 리 맬러리

George Herbert Leigh Mallory 1886~1924

세상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눠보자. 산에 오르는 사람과 오르지 않는 사람으로. 산에 오르지 않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진지한 호기심으로, 혹은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으로 이렇게 묻곤 한다.

“도대체 그 고생을 해가면서 산에 왜 오르는겁니까? 어차피 내려올 거면서.”

나 역시 그런 질문들을 자주 받는다.

내겐 그럴 때마다 피식 웃으며 들려주곤 하는 장난스런 모범 답안이 있다.

“당신은 왜 사십니까? 어차피 죽을 텐데.”

그러나 산과 관련된 우문현답 혹은 선문답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따로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문은 이런 것이다. “왜 산에 오르려 합니까?” 현답은 이렇다.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문답은 잘못 전해진 것이다.

 

1923년, 영국 산악인 조지 리 맬러리(1886~1924)가 세 번째 에베레스트 원정을 떠나기 앞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미국으로 강연 여행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

 

미국의 한 신문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왜 에베레스트에 오르고 싶어하십니까?” 이 수도 없이 반복되는 질문에 넌덜머리가 난 맬러리는 피곤하고 짜증스러운 말투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것이 거기에 있으니까요.(Because it is there)”

‘그것’이란 당연히 에베레스트를 말한다. 맬러리는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으니까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한다”고 답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그의 이 퉁명스러운 말대꾸는 이후 등반사상 가장 유명한 선문답이 된다.

 

단순히 재치 있거나 모호한 답변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에베레스트 등반이었고, 에베레스트는 세상의 모든 산을 의미하는 대표명사처럼

인식되었으며, 맬러리 자신이 세계 등반사의 유령 혹은 신화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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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리 맬러리는 1886년 영국 체셔주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전형적인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다. 10대 중반 시절부터 암벽 등반을 즐기긴 했지만

남달리 빼어난 솜씨를 지녔던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의 성격은 증언자들에 따라 크게 다르게 전해진다.

 

어떤 이는 그가 덤벙댔을 뿐 아니라 건망증마저 심했었다고 전하고,

다른 이는 그가 매우 충동적이며 과감한 성격을 지녔었다고 전한다.

 

이후 그의 등반 경력을 보면 이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맬러리는 생애 최후의 등반에 나설 때조차 손전등을 챙겨가는 것을 잊었고,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 이르러서도 뒤 돌아보지 않고 정상을 향해 전진했던 것이다.

 

그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은 훗날 영국산악회의 회장직을 역임했던 제프리 윈스롭 영이었다.

맬러리에게 빙벽 등반 기술을 가르친 것도, 그를 에베레스트로 이끈 것도, 그에게 ‘새로운 꿈’을

심어준 것도 모두 제프리 윈스롭 영이었다.

따분한 교사 생활과 궁핍한 경제사정 때문에 풀이 죽어 있던 맬러리에게 영은 이렇게 말했다.

 

“에베레스트에 올라가! 그리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써! 그러면 자네는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게 될 거야!” 갈등을 겪던 맬러리가 기꺼이 1921년 제1차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여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산악문학작가’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단 한 권의 책도 쓰지 못했다. 대신 사후 숱한 산악문학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1922년 제2차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마저 쓰라린 좌절만을 겪고 돌아왔을 때,

맬러리의 심신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만약 아내와 세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그는 더 이상

그 ‘지옥의 산’에 도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듯 그는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에베레스트에 오르려 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돈과 시간을 벌기 위해’ 그토록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막대한 국가적 재정 지원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손수 원정 비용을 마련해야만 했다.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으니까 오른다’는 그 유명한 선문답 내용은 이 과정에서 빚어진 하찮은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1924년 제3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사실 맬러리의 존재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개성이 너무 강하고 충동적이어서 도무지 명령 따위가 먹혀 들지 않는 이 고집불통의 사나이가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 국민들은 맬러리가 참가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맬러리는 그때 이미 ‘에베레스트의 사나이’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영국의 집착은 대단했다. 자신들을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겼던 그들은

북극과 남극이 모두 ‘이방인들(foreignersㆍ영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첫 발자국을 내어주자 ‘제3의 극’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에베레스트 초등에 목숨을 거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할 때 에베레스트 정상에 첫 발자국을 디딜 사람은 다름 아닌 맬러리여야만 했던 것이다.

 

1924년 6월8일, 조지 리 맬러리는 에베레스트 북측 8,220m의 제6캠프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아내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가슴을 친다.

“아주 힘들었어. 돌아보면 엄청나게 노력을 했고 진이 다 빠져버렸다는 기억 밖에 없어.

텐트 문 밖을 보면 희망은 사라지고 눈만 덮인 황량한 세계가 눈에 들어와.”

하지만 그는 결국 텐트를 박차고 나와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그리고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향년 38세. 그가 그렇게 살다 간 이유를 다른 데서 찾는 것은 옳지 않다. 부와 명예 혹은

국가적 숙원사업 따위는 유치한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단지 에베레스트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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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맬러리-어빈 수색원정대

 

정상 향해 손 뻗은 채로 하얀 대리석처럼…

조지 리 맬러리가 최후의 등정을 함께 한 파트너는 당시 22살의 앳된 청년 앤드류 어빈이었다.

1924년 당시 이 두 사람이 어디까지 올라갔을까 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세계등반사상 최고의 미스터리로 꼽혀왔다.

 

영국인들은 그들이 정상에 올랐다고 믿고 싶어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1953년 텐징 노르가이와 에드문드 힐러리가 세운 초등 기록을 무려 31년이나 앞당기는 셈이다.

하지만 올랐다는 증거도, 오르지 못했다는 반증도 찾을 수가 없었다.

 

1999년 그들의 실종 75년을 맞이해 특별한 임무를 가진 원정대가 구성되었다.

영국의 국영방송 BBC 다큐멘터리팀이 꾸린 ‘맬러리-어빈 수색원정대’이다.

최강의 산악인들과 최고의 방송 스태프들이 꾸린 이 원정대는 훗날 ‘2005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의 한 전례가 되기도 했다.

 

1999년 5월1일, 이 원정대의 톱클라이머 콘라드 앵커는 8,520m 지점에 있는

한 테라스(암벽이 불쑥 튀어나와 평평하게 되어 있는 곳)에서 맬러리의 시신을 발견했다.

 

에베레스트의 유령 혹은 신화로 불리웠던 역사 속의 사나이가 무려 75년 만에 자신의 자태를 세상에 공개한 것이다.

 

등산복은 이미 삭아서 없어져 버렸지만 그의 피부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눈과 햇볕에 바래 하얀 대리석 같은 피부였다. 정상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그의 자세는 추락 직후까지

의식이 남아있었음을 보여준다. 75년 만에 발견된 그의 시신과 유품들은

또다시 격렬한 ‘에베레스트 초등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BBC 다큐멘터리팀은 오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보다 높은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 원정대는 화보 중심의 ‘에베레스트의 유령’, 논문 중심의 ‘그래도, 후회는 없다’라는 두 권의 책을 발표했는데, 이들 중 후자는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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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2006-04-12

산악문학작가 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