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3. 23:18ㆍ시,좋은글/詩
껍데기는 가라 / 신동엽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현대한국문학전집 제18권 [52인 시집] (신구문화사, 1967)
신동엽은 1930년 8월 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농사를 짓는
아버지 신연순과 어머니 김영희 사이 1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3년 부여초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국가에서 숙식과
학비를 지원해 주는 전주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48년 동맹 휴학으로 학교가 잠시 쉬자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던
신동엽은 1949년 부여 주변에 있는 국민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시인은 3일 만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가 그해 9월 말까지
부여 민족청년회 선전부장으로 일하다 국민방위군에 징집됐다.
한국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국민방위군)에 각각
징집되어 동족상잔의 비극을 체험한 후 첫 작품 〈나의나〉를 완성했다.
특히 국민방위군 시절 부패한 군간부와 공무원들이 군수품을 임의로
처분하는 바람에 많은 고통을 겪게 되는데, 그것 때문에 강한 사회 비판과
현실 참여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먹은
살아있는 가재 때문에 간디스토마에 걸려 일생을 두고 고통을 겪었다.
1953년 단국대를 졸업한 뒤 제1차 공군 학도간부 후보생에 지원,
합격을 했으나 발령은 받지 못했다. 그 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자취방을 얻었다.
그리고 친구의 도움으로 돈암동 네 거리에 헌책방을 열었다.
신동엽은 이때 이화여고 3학년이던 부인 인병선[1]을 만났다.
1957년 인병선과 결혼한 뒤 고향으로 낙향했다.
이때 인병선은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부여 읍내에 양장점을 열었다.
이와 함께 신동엽 또한 충남 보령군 주산농업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58년 각혈을 동반한 폐결핵을 앓게 되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 돈암동 처가에 아내와 자녀를 올려 보낸 뒤
고향 부여에서 요양하며 독서와 글쓰기에 빠진다.
1959년 독서와 문학 습작에 몰두하다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를
석림(石林)이라는 필명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0년 신동엽은 건강을 되찾아 서울에 있는 '교육평론사'에 취업한 뒤
성북구 동선동에 터를 잡았다. 그해 《학생혁명시집》을 집필하며
4·19 혁명에 온몸으로 뛰어들었다. 그래서 신동엽을 가리켜
'4.19 시인'으로 평가하는 문인들이 많다.
그리고 훗날 4·19 혁명의 기억을 되살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가 나올 수 있었다.
1961년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안정된 직업을 얻게 되어
시작에 몰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1964년 건국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출간하고
1967년 장편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
1969년 4월 7일 간디스토마가 간암으로 악화되어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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