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 / 김기덕 감독의 영화

2012. 9. 17. 01:27잡학/상식

 

 

 

 

2012-09-15 (토)

LOTTE CINEMA

5회 / 20:25 ~ 22:10

 

 

 

'피에타' : 삶이여, 부디 스스로를 구원하소서
[윤광은의 문화 해독기] 관객의 머리 위에 씌우는 가시 면류관

 

 

 


한 감독의 영화를 정의하는 것은 언제나 많은 증빙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김기덕 영화의 어떤 단면을 성급하게 정의해 보자면, 김기덕의 영화는 현시와 자각의 영화다. <피에타>는 성서적 구원의 이미지와 메타포를 차용하고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아마 알아 챌 것이다. 하지만 나는 구원의 차원에서 <피에타>를 설명하는 것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유가 아닌, 이 영화가 현실과 폭 넓게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 도구를 동원해 텍스트에 내장된 구원의 모티프를 분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구원은 쉽게 찾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말하기도 힘든 것이다. 잠시의 망설임을 모두고 이 글을 쓰게 된 건, <피에타> 역시 현시와 자각의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

 

김기덕의 영화는 방향을 제시하거나 주창 한다기 보다, 세계에 엄연히 내속된 무언가를 끄집어내 다만 보여준다. 그것은 대개 가학과 피학의 고통인데, 김기덕은 그 고통을 관객에게 전이시키며 받아들이길 강요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대면하는 그 착잡하고 무거운 이물감이 바로 자각의 과정이다. PIETA. 구원과 대속을 위해선 우선 구원을 요청하는 현실의 고통을 환기해야 한다. 불구와 죽음이 만연한 사회의 이면, 버려진 강도의 삶과 복수의 역설. 그리고 이 모든 인과관계의 배후, 돈. <피에타>는 고통의 실존을 관객 앞에 증명한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필연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는데, 그 가능성을 묻기 위해선, 어떤 자각의 차원에서 <피에타>를 바라봐야 한다. 결론에 이르기 위해선 먼저 강도와 ‘엄마’를 통해 영화를 꼼꼼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런 후 영화 속 구원의 의미를 두드려야 한다.

 

 

불구와 죽음의 사회, 세상을 향한 미숙아의 복수

 

<피에타>에는 불구와 죽음이 만선이 돼 가득 차 있다. 영화의 오프닝. 한 남자의 얼굴 앞으로 교수대의 밧줄처럼 쇠사슬이 내려온다. 사형의 집행, 혹은 강요된 자살. 무엇으로부터? <피에타>는 이 질문을 채우기 위해 서사의 노를 젓는다. 무대는 청계천 공단. 높게 들어선 빌딩들로 고립된 사바세계(娑婆世界)는 양극화의 단면을 극명히 지시한다. 그 세계 속에서 영화는 시작되고 강도(이정진)의 하루도 시작된다. 수금업자 강도가 공단을 돌며, 어김없이 불구와 장애가 일상처럼 생산된다. 자신의 몸을 대가로 한 연체의 애원, 열배가 넘는 이자를 거부한 원금만의 상환. 강도의 대답은 간명하다. 남의 돈을 빌려갔으면 책임을 지라. 누군가는 팔을 잃고, 누군가는 다리를 잃는다. 혹 다른 누군가는 수금 전에 이미 목숨을 끊었고, 심지어 어떤 누군가는 추가 대출을 요청하며 자신을 불구로 만들어 달라 울부짖는다. 불구와 죽음의 사회. 혹은 불구와 죽음의 필연. 닫힌 철문 너머, 보이지 않는 고통의 실존은 절규를 토해낸다.

 

죽음과 장애의 집행자. ‘인간 백정’ 강도. 하지만 그의 ‘집행’이 단순한 가학이라 볼 수는 없다. 이를 테면 ‘복수’에 가깝다. 무슨 얘기인가. 그 역시 ‘불구’의 몸이란 것. 아니, 그는 어쩌면 태어 날 때부터 불구 그 자체였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해보자. 사실 강도는 아직 제대로 태어나지도 못한 존재다. 강도에게는 ‘기원’이 없다. 출생과 동시에 버림받은 30년. 그는 자신의 어미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래서 자신의 시작도 알지 못한다. 시작이 없는 존재에겐 도중과 마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서른이 넘었지만, 아직도 사춘기 소년처럼 몽정에 괴로워하고 여자를 품지 못하는 미숙아다. 그에게 시작은 삭제되어 있기에, 자신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 실감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마치 어린아이가 사물의 모상인 장난감을 통해 세상을 확인 하 듯, 살아있는 생명을 도축하며, 자신의 생존을 질문하고 확인하려 든다. 도살 후 화장실에 남겨두는 어중간한 길이의 붉은 색 줄 같은 고깃덩이. 어쩌면 탯줄. 말하자면 그는 인큐베이터에 영치된 미숙아, 혹은 아직도 탯줄을 끊지 못한 채 성장을 멈춘 주체다. 영화의 초반, 계속해서 무언가를 밟고 미끄러지듯, 강도는 세상에 발 딛지 못하고 유막 위에 서있다. 출생하고도 출생하지 못한 존재. 세상에 존재하고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 고깃덩이가 탯줄처럼 널 부러진, 자궁 같은 방안에서 강도는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 창밖의 십자가처럼, 구원은 강도를 가둔 세계 너머에만 존재한다. 그리하여 자신을 불구로 방치한 ‘무책임’한 세상에 칼을 꽂고 (강도의 집에 걸어둔 반라의 여자 그림) 타인을 불구로 만들며 무차별한 복수를 행하는 것이다.

 

강도가 도축을 멈추고, 비로소 세상의 지면을 디디는 건, 정체불명의 ‘엄마’(조민수)가 찾아오면서다. 어머니. 즉, 기원의 등장. 미끄러지며 던진 나이프가 유리창을 박살 내 듯, ‘엄마’의 등장과 함께 강도의 세계는 균열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번엔 미끄러지지 않고, 유리를 제대로 밟고 지나간다.) 갑작스레 나타나 용서를 구하는 엄마의 등장, 혼란에 빠진 채 괴로워하는 강도. 그는 ‘엄마’가 정말로 자신의 기원인지 알고 싶어 한다. 분노, 원망과 함께 범벅이 된 양가적 감정. “당신이 진짜 내 엄마면 이걸 먹어봐.” 강도는 자신의 살점을 ‘엄마’에게 먹인다. “내가 정말 여기서 나왔어? 그러면 다시 여기로 들어가도 되지?” 그는 근친을 범하려 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시작이 없기에 목적도 없고 방점도 없는 버림받은 불구의 삶. 그는 그렇게라도 다시금 어미의 체내에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구원에 대한 열망, 하지만 불가능한 바램. 강도는 암담하게 자괴한다. 하지만 결국, 그는 현재의 멈춰진 시간에서 성장을 재개하는 것을 선택한다. ‘엄마’를 받아들인다.

 

강도는 ‘엄마’의 손을 잡고 거닐고, 풍선을 머리에 쓴 채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퇴행한다. 아니, 중지된 유년의 성장을 시도한다. 강도는 ‘엄마’를 통해 세상과 대면하기 시작하고, 조금씩 그 고통의 의미와 마주친다. 멀쩡한 사람을 불구로 만들고 죽음을 택하게 만드는 악마의 주문. 모든 것의 시작과 끝. 혹은 복수의 영매. 바로 돈. 아마 강도의 친모가 그를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역시 ‘돈’ 때문이었으리라. 강도는 삶을 실감할 수 없었기에, 아랫배에 수놓인 창상의 자국처럼 보복과 죽음을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강도에게 ‘기원’이 설정된 순간, (혹은 그렇다고 착각한 순간) 그는 삶을 시작하게 된다. (강도는 처음엔 살아있는 닭을 가져와 집에서 잡는다. 하지만, ‘엄마’와 융화되는 와중엔 토끼와 장어를 죽이지 않고 살려둔다. 그리고 ‘엄마’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난 후엔 ‘죽은’ 생선을 사온다. 더 이상 죽음을 통해 생을 확인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복수를 두려워하게 된다. ‘돈’의 의미,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

    
 
모든 파괴와 고통의 막후, 돈의 현현

 

강도는 외부의 공격에 불안해 하지만, 돈이 모든 것의 시작과 끝이듯, 사실 ‘엄마’야 말로 강도에게 자애와 기원인 동시에 복수의 내습이다. 강도가 채무자들을 습격했듯, ‘엄마’도 문득 강도의 집을 찾아왔다. 둘은 모두 자신의 복수를 수행중이다. 둘 모두 내면의 고통이 더 크기에 닫히는 철문에 손이 부딪히고도 고통을 모른다. 강도의 집에서 첫 번째 밤을 보낸 아침. ‘엄마’는 강도가 살려둔 장어를 꺼내 목을 친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고, 혹은 맞이할 수밖에 없는 파국. 그리고 강도의 방안에서 묵묵히 몰두하는 뜨개질. 뜨개질은 인과의 연쇄를 한 땀 한 땀 꿰어가는 복수의 메타포다. 그 뜨개질로 만드는 옷의 진짜 주인, 상구를 위한 복수.

 

강도가 ‘엄마’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삶을 향해 걸음마를 시작하는 순간, 복수는 바로 그 때 개시된다. 그리고 이 국면에서 모든 불구와 죽음의 배후, ‘돈’이 영화에 직접 등장한다. ‘엄마’가 강도를 교란하고 유인하려, 시뮬레이션을 취하는 장면. ‘엄마’는 허공에 비명을 지르고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하는 마냥 혼자서 집기를 파괴한다. 여기서 이 납치와 파괴를 수행하는 것은 기실 ‘엄마’ 자신의 연기가 아니라 바로 ‘돈’이다. 인과와 복수의 연쇄, 모든 것의 시작과 끝. 돈의 현현. 영화의 모든 죽음과 불구를 초래한 장본인은 처음부터 강도가 아니었다. 청계천 공단 채무자들의 사지를 망가뜨리는 건, 그들이 사용하는 기계 혹은 공중에서 추락하는 그들의 하중이다. 그리고 그들을 개 작두 같은 기계 앞에 붙들어 매고, 콘크리트 건물 위로 올려 보낸 근원, ‘돈’.

 

영화의 첫 번째 채무자는 강도가 찾아오기 전, 이미 기계에 의해 절단의 위협을 겪는다. 불구의 위험이 상존하는 사회. 그러니까, 그는 강도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팔을 잃었을 것이다. 세 번째 채무자는 강도가 도착하기 전 이미 죽어있다. 네 번째 채무자도 강도가 나간 후, 보험금을 위해 스스로 신체를 훼손한다. 두 번째 채무자도 강도가 건물위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해도, 마지막 채무자처럼 생의 활로 없음을 절감하고 결국엔 자신이 몸을 던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청계 공단에서 머무는 한 강도가 아니었다 해도 언젠가는 불구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리고 강도에게 퍼붓는 사장의 경멸. “돈 받아 오라고 했지 병신 만들라고 한 적은 없어” 그게 그 말 아닌가? 원금을 변제하기도 근근한 채무자들에게 이자를 받아내기 위해선, 쥐어짜는 수밖에 없다. 강도는 채무자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투사했지만, 그건 동시에 본질적으로 ‘돈’의 지령이었다. ‘엄마’가 강도를 마지막 장소로 유인해 복수의 종지부를 찍는 장면. 아들을 잃은 채무자의 어머니는 뒤에서 몰래 다가선다. 그녀가 ‘엄마’를 밀려 손을 막 내미는 순간, 그럴 필요도 없이 ‘엄마’는 몸을 날린다. 강도 역시 채무자 아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연쇄와 순환처럼 그녀의 손에 숨을 거둔다. 마치 돈이 만들어 낸 죽음과 복수의 컨베이어 벨트. 결국 채무자들을 불구로 만든 것도, 강도를 불구로 태어나게 한 것도, ‘엄마’의 아들 상구의 목에 사슬을 건 것도 모두가 ‘돈’이었던 것. 영화의 종반, ‘엄마’의 복수가 개시되며, 이 모든 파괴와 고통의 막후, ‘돈’이 실체를 드러내는 것이다.

 

‘엄마’는 복수를 위해 강도에게 접근했지만, 그렇기에 진범이 강도가 아닌 돈이란 것을 알게 된다. 침대에서 뒤척이며, 몸부림치는 강도도 마찬가지 불구임을 깨닫는 것. 애초에 자신의 아들을 앗아간 것이 강도가 아닌 ‘돈’이었다면, 결국 복수 역시 대상을 잃은 무의미한 것 아닌가. 하지만 측은히 몽정을 도와주고서도 뒤돌아 악물며 손을 씻어 내 듯, 이미 시작된 복수는 멈출 수가 없다. ‘돈’은 그렇게 모든 시작과 끝을 추동한다. 거리로 방생한 토끼가 결국 자동차 바퀴에 압사하듯, 모든 것은 불구를 거쳐 예정된 죽음으로 향한다.

 

복수 혹은 구원. ‘엄마’의 목표 잃은 복수는 강도를 세상과 혹은 돈과 확연히 대면시킨다. 실종된 ‘엄마’를 찾아, 망가진 채무자들의 삶을 확인하며, 자신의 악업을, 아니 돈의 만행을 절절히 각인하는 것. 누군가는 철 계단을 밟고 올라가고, 누군가는 철 계단을 타고 내려가지만 결국 삶과 죽음은 예언처럼 동시에 착륙한다. 돈은 시작과 끝의 매개자인 동시에 예정된 죽음의 인도자다. 어쩌면 강도를 찾아 온 ‘엄마’처럼 ‘돈’은 기원인 동시에 파멸의 서곡이다. 강도는 ‘엄마’가 마련한 파국의 나선을 밟으며, 역설적으로 영혼을 참회하며 후회와 고통 속에 성장한다. 자신이 ‘엄마’로 인해 삶의 의미를 알았기에, 채무자들의 파괴된 삶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나선의 끝에 구원은 과연 존재하는가.

    
▲ 미켈란젤로, <피에타>

 


대속과 부활의 바람, 그리고 구원의 가능성

 

강도는 ‘엄마’를 소나무 밑에 묻으며, 퍼렇게 냉동된 상구의 시체를 발견한다. 복수의 완성, 혹은 복수를 통한 구원의 요청.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기원을 박탈당한 채 아직도 시작하지 못한 인생을 사는 강도. 생의 종말을 고했음에도 냉장고 속에 안치된 채 안장되지 못한 상구. 이미 시작했음에도 끝을 볼 수 없고, 끝을 맺었음에도 시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엄마’의 두 아들. ‘돈’이 배태한 두 명의 사생아. 강도와 상구. 그러므로 이 장면에서 강도가 ‘엄마’와 상구의 정체를 깨달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강도와 상구는 복수의 양방임에도 결국은 공히 희생양이요, 동일한 ‘엄마’의 자식들이다. 강도는 ‘엄마’의 곁에 태아처럼 비껴 누워, 드디어 자신의 기원을 정초한다. 같은 무덤에 누운 엄마와 두 아들. 이미 죽어있는 아들. 이제 막 숨을 거둔 엄마. 그리고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할 아들. 강도는 상구의 옷을 바꿔 입고, 자신이 ‘엄마’에게서 태어났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방금 전 맞이한 시작에 이어 끝을 향해 걸어간다.

 

<피에타>의 종착은 영화의 해석에 있어 예수적 순교와 구원의 코드를 불가결하게 요구한다. 강도는 첫 번째 채무자 아내의 트럭 밑에 누워 가만히 최후를 부탁한다. 이것이 명백히 예수적 결단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죽음은 단죄가 아닌 ‘대속’이기 때문이다. 말했듯, 채무자들의 불행과 고통은 강도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강도는 단지 또 하나의 불구자였을 뿐, 이 모든 죽음과 장애를 초래한 것은 바로 돈이다. 강도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처럼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았지만 자신을 향하는 증오와 고통, 복수를 지고 가기로 참회하고 결심한다. 그는 속죄양이 되어 사슬에 묶인 채 대속의 길로 향한다. 그 길의 끝에서 꼭 부활하길 염원했을 것이다. 새로운 시작을.

 

서두에서 김기덕의 영화가 자각과 현시라고 규정한 것은 관객이 강도가 겪는 불구와 복수, 참회와 대속을 대리 체험하기 때문이다. <피에타>는 파괴된 가족, 삶의 참상과 절규를 관객 앞에 그대로 들이민다. 다른 김기덕의 영화가 그렇듯 <피에타>는 무언가를 정화하거나 배설시키지 않는다. 관객이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어떤 것을 억지로 집어넣는다. 그렇기에 <피에타>엔 어떤 카타르시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은 영화관을 나서고도 한동안 납덩이를 무겁고 착잡하게 달고 다녀야 한다. 김기덕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강도가 지고 간 십자가와 가시면류관을 당신도 써보라 관객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곧 현실에서 은폐된 고통의 환기다. 그렇기에 <피에타>를 현실의 차원에서 사유 한다면, 마찬가지로 ‘구원’의 의미도 현실로 연결된다.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건 영화가 제시하는 건 구원의 요청이지 가능성은 아니라는 것.

 

우리는 강도를 이해하게 된 ‘엄마’와 강도의 뉘우침, 혹은 채무자 부부가 화해하며 의지하는 엔딩에서 ‘바람’이 아닌, 어떤 ‘가능성’을 발견해선 안 된다. 나는 그런 결말이나 해석엔 반대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쉽게 찾아 올 희망이었다면, 구원은 처음부터 희구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해와 믿음은 황폐한 삶을 어루만지지만, 고통을 제거할 순 없다. 이 모든 고통과 복수는 애초 미움과 불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인이 아닌 결과에 불과하다. 설령 강도가 죽음으로 구원받는다 해도 <피에타>의 세계는 한 치도 구원받지 못한 채 공전 할 것이다. 처음부터 모든 불구와 죽음의 배후는 강도가 아닌 바로 ‘돈’이었기 때문. 우리가 이 영화에서 어떤 믿음과 이해를 대안으로 받아들인다면, 영화가 현시한 고통을 온전히 받아 안지 못하는 것이다.

 

영화의 엔딩. 강도는 사슬에 매달린 채 트럭에 끌려간다. 틀림없이 강도는 십자가처럼 열십자로 누워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읽으면, 강도가 예수처럼 십자가에 매달린 것이 아니라 강도 자체가 십자가가 된다. 즉, 강도가 끌려가는 것이 아닌, 채무자 아내의 트럭이 십자가를 끌고 가는 것이다. 이렇듯, 돈의 세계에서 지상의 모든 삶은 저 마다의 십자가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피에타>를 보는 것은 관객들이 ‘현실’에서 자신이 짊어진 고통과 ‘돈’의 십자가를 자각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해와 믿음, 구원의 ‘소망’을 넘어선 구원의 ‘가능성’은 바로 거기에서야 간신히 시작될 것이다. 영화 속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구원의 가능성. 하지만 그렇기에 요청되는 자각의 필요성. 삶이여, 돈이여, 복수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혹은, 우리 스스로를 구원케 하소서. PIE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