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후사, 삼국지의 영웅들을 만나다

2013. 9. 15. 23:30여행/여행기

 

 

 

 


유비와 제갈공명의 사당이 있는 무후사
(삼국지의 영웅들을 만나고, 실크로드 시발점을 걷다)



○ 2013. 8. 2(금)  날씨 : 흐렸다가 맑음
○ 중국 사천성 성도시. 무후사(한소열묘), 금리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 청두)는
삼국지 촉나라의 수도, 판다의 고향, 매운 음식, 차마고도,
변검,
세계 최초의 지폐 사용 도시, 쓰촨 지진 등으로 대변되는 중국 사천성(四川省)하면
먼저 떠오르는 중국 서남 지역의 풍요로움을 대표하는 도시로 평균 해발고도가 400m인
분지에 온난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로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하였다. 또한 서남 지역 교통의
요지이기도 한 이곳은 인구 천만 명이 넘는 중국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다고 한다.
삼국지의 도시 성도에 왔으니 제갈량의 사당과 유비의 묘가 함께 있는
무후사(武侯祠 우허우츠)에 들려 유비와 제갈량을 만나 볼 일이다.
한소열묘'와 같은 담장안에 이웃하고 있다.

원래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는 유비의 아들 유선에 의해
도시 외곽에 작은 봉분의 형태로 조성됐었다. 그러다 남북조 시대
청두에 성한(成漢)을 건국한 이웅이 제갈량의 사당이 도시 외곽에 있어,
백성들이 찾아 가기 힘든 것을 아쉬워 해 청두시로 무후사를 옮겼다.
이를 다시 명나라 초기에 이 자리로 옮겨 오면서 한소열묘와 합치게 되었고 
지금의 무후사와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 청나라 강희제 때.
명나라 말기 농민 봉기로 폐허가 된 것을 강희제가 직접 명령하여
중건 확장했다고 전한다.





한소열묘 대문으로 들어선다

정문 현판이 '한소열묘(漢昭烈廟)' 되어 있지만
제갈량 사당인 무후사로 불리는 것은, 본래 성도의
제갈량 사당은 유비의 아들 유선이 도시 외곽에 작은 봉분 형태로
조성했던 것을 5세기 초 남북조시대 청두에 성한(成漢)을 건국한
이웅이 제갈량의 사당이 도시 외곽에 있어 백성들이 찾기 불편하다 하여
성도 시내로 옮겼고, 이를 다시 명나라 초기에 오늘의 자리로 옮겨 오면서
유비의 묘와 합치게 되면서부터 원래 유비의 사당인 한소열묘(漢昭烈廟)를
사람들이 유비보다 제갈량을 더 높게 평가했기 때문에
제갈량의 죽은 후의 시호인 충무후(忠武侯)에서 따서
무후사라고 부른다고 한다.





대문 왼쪽벽에 무후사라고 새겨져 있다

유비와 제갈공명의 사당, 무후사는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인 유비 현덕과 그의 가신들을 모신 사당.
정식명칭은 한소열묘. 6세기경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14세기에 이르러 유비와 제갈공명의 사당이 합쳐져 지금에 이른다.
대표적인 명칭이 유비의 묘가 분명하고, 현판도 '한소열묘'로 되어 있는데
무후사로 불리는 것은 후대인들이 보는 제갈량에 대한 평가가 높고
인기가 높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제갈량의 사후에
충무후의 시호를 내렸기 때문에 사당을 무후사로 부른다.

무후사는 3만 7000㎡의 규모에 혜릉, 무후사, 삼의묘 등
유적과 문물들로 구성되어 있고, 정문을 지나면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재상이자
신출귀몰한 전략가로 이름난 제갈공명의 업적을 기린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최대의 삼국유적 박물관으로 1961년 국무원이 전국 중요문물 보호단위로 정했다.
유비의 사당인 '한소열사'에는 황금으로 치장된 유비의 상과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 그 가족의 조각상이 있으며 회랑에는 조운 마초 강유 등 28명의
가신 조각상이 늘어서 있다. 소열사 가까이에 삼국지 문물진열관이 있고,
제갈량의 소상이 있는 무후사를 지나면 유비의 가묘인 혜릉이 나온다.

제갈량의 묘는 제갈량이 죽은 협서(陝西 산시)성 한중(漢中)시
면(勉 멘)현 정군산(定軍山 딩준산)에 있다.





한소열묘 가는 길 양쪽으로 당비(唐碑)와 명비(明碑)가 있다









무후사 안내도와 설명

순서는 당비 명비 → 이문→ 한소열묘(무장랑·문신랑)
→ 무후사 → 혜릉 → 삼의묘 순으로 둘러 볼건데 그마저도
저녁식사 예약시간에 쫓겨 자세히 보기 어려울 것 같다.






한소열묘, 무후사, 삼의묘를 가르키는 이정표를 따라..









무후사 입구를 들어서면 좌우로 명비와 당비가 있다.
오른쪽의 당비(唐碑)는 서기 809년에 세운 것으로 원래 명칭은
'촉승상제갈무후사당비(蜀丞相諸葛武侯祠堂碑)'. 당나라 명승상
배도가 글을 짓고 명세가 유공탁(유공권의 형)이 명필을 남겼으며,
명공예가 노건이 각문을 조각. 문장, 서법, 조각이
모두 정예하여 '삼절비'로 불린다.

아래 거북이 등에 올려져 있는 왼쪽의 비는 명비(明碑).
1547년에 조각했으며, 장시철이 문장을 짓고
고등이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目+月)良天古(명량천고)

한소열묘 입구의 '명량천고(日+月 良天古)'란 편액.
자세히 보면 '明'을 눈'目'변에 달'月'자를 합성한 글자다.
이는 청나라 강희제가 쓴 '明君良臣, 流傳千古'에서 따온 말로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오래도록 수범이 된다'는 뜻.
'明'자를 '目+月'으로 쓴 것은,
명나라의 나라 명칭인 '明'을 쓸 수 없다는 설과,
날 일(日)변의 명은 자연의 밝음이지만, 눈목(目)변의 명은
인지(人智)의 밝음으로 유비의 인덕이 그만큼 밝았음을
뜻하기 때문에 썼다고 하는 설(說)이 전해진다.







유비전 전면 회랑에 있는 전출사표와 후출사표

유비전(昭烈殿)으로 들어가는 문 옆 벽면에는
유비가 죽은 후 위나라 정벌에 나서면서 유선에게 바쳤다는
제갈량의 그 유명한 출사표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위 / 전출사표는 중국 삼국시대(三國時代, 220~280년)에
당시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 184~234)이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북벌을 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으로
흔히 출사표라 하면 전출사표를 말하는 것이고, 후세 사람들이
이 글을 보고 울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고..
이 글씨는 남송의 장군인 악비(岳飛)가 쓴 친필이다.

아래 / 후출사표는 제갈량(諸葛亮 184~234)이
당시 위(魏)나라와의 1차 북벌에서 실패한 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출정하기 전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에게 올린 두 번째 상소문.
1차 북벌 이전에도 제갈량은 후주에게 출사표를 올린 적이 있기
때문에 후세에선 이 출사표를 후출사표라 부른다. 전출사표와
더불어 내용이 매끄러우나 후출사표는 후세에 윤색하였거나
조작되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한다.





고금의 명문으로 통한다는 전출사표 전문(위: 사진 클릭하면 펼쳐짐)과 해석(아래)


 

신 제갈량은 아룁니다: 선제께서 창업을 아직 반도 못이루시고, 중도에 돌아 가셨습니다.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지고 익주가 피폐해졌는데, 이는 진실로 위급하고 존망이 달려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모시고 호위하는 신하들이 안에서 게을리하지 않고  충성스럽고 뜻있는 장수들이 제 몸을 잊는 것은  대체로  선제의 특별한 대우를 기리어, 폐하에게 값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성스러운 견문을 넓게 열어서 선제의 남기신 덕을 빛내시고 뜻있는 선비들의 기개를 넓히셔야 하며, 망령되이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고 여기셔서 잘못된 비유를 끌어들여 (올바름을 잃고) 충간의 길을 막아버리시 면 안됩니다.

궁중과 부중이 모두 한몸이 되고 잘한 이를 상주고 잘못한 자를 벌주는데 있어서 차이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간사한 짓을 하거나 규율을 범하는 자나 충성스럽고 착한 사람이 있거든 마땅히 관리에게 맡겨 형벌과 상을 논하게 하여 폐하의 공평하고 밝은 다스림을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며, 사사로운 정에 치우쳐 안과 밖의 법을 달리해서는 안됩니다. 시중.시랑인 곽유지.비위.동윤 등 이들은 모두 선량하고 성실하며  뜻과 생각이 충성스럽고 순수하니 그런 까닭에 선제께서 그들을 선발하여 폐하께 남겨주셨습 니다.

제가 생각건데 궁중의 일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그들에게 자문하시고 그런 후에 시행하시면 반드시 모자라고 빠진점을 보충할 수 있고 널리 이로움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군 상총은 성정과 행실이 훌륭하고 공평하며 군대의 일에 밝게 통달하여 옛날에 그를 시험삼아 써보시고 선제께서 그를 칭한하여 "유능하다"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뭇사람들이 의논하여 상총을 도독으로 천거하였습니다. 제가 생각건데 군대의 일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모두 그에게 자문하시면 반드시 진영이 화목하게 되고 뛰어난 자와 열등한 자가 제자리를 얻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한 것, 이것은 선대의 한이 흥성하고 융성한 까닭입니다. 소인을 가까이 하고 어진신하를 멀리한 것, 이것은 후한이 기울어지고 쓰러진 까닭입니다. 선제께서 제위에 계실 때 매번 신과 더불어 이 일을 논의 하실 때마다 환제. 영제의 일을 탄식하고 통한스러워하지 않은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시중. 상서. 장사. 참군. 이들은 모두 곧고 밝으며 죽음으로써 절개를 지킬 신하들 입니다. 바라건데 폐하 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하시고 그들을 신뢰하십시오. 그러면 한 왕실의 융성은 날짜를 세면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본래 평민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갈며 구차하게 난세에 생명을 보전하면서 제후들에게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이 스스로 몸을 굽혀 방문하시어 초막으로 신을 세번이나 찾아와 당시의 일을 신에게 자문하셨으니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에게 부지런히 내달리기를 허락하였습니다.

훗날 나라가 기울어지고 뒤집어질듯한 때가 되어 군대가 패전하는 때에 임무를 받고 위태롭고 어려운 때에 명을 받들었는데 그런 뒤로 21년이 되었습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신중하다는 것을 아시고 돌아가실 때에 신에게 큰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명을 받은 이래로 밤낮으로 근심하고 걱정하며 맡기신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선제의 영명함을 손상시키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으로 깊이 들어간 것입니다.

지금 남방은 이미 평정되었고 군사와 무기는 이미 풍족하니 마땅히 삼군을 독려하여 거느리고 북쪽으로 중원을 평정해야합니다. 바라건대 보잘 것 없고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물리치고 한 왕실을 회복하고 흥성시켜 옛도읍으로 돌아 가고자 합니다. 이는 신이 선제께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 을 다하는 직분입니다.

손익을 미루어 살피고 충성스러운 말을 다 아뢰는 것은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임무 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적을 토벌하고 (한 왕실)을 회복하고  흥성시키는 성과를 맡기시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신의 죄를 다스려 선제의 영에 고하시고 덕을 일으키는 말이 없거든 곽유지. 비의. 동윤 등의 잘못을 책망하여 그 태만함을 드러내십시오.

폐하께서는 또 마땅히 스스로 살피시어 선도를 자문하고 바른말을 살피고 받아들여 선제의 남기신 명을 깊이 따르십시오. 신은 은혜를 받음에 감격하여 지금 멀리 떠날 때가 되어 출사표를 대하니 눈물이 흘러 말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명문으로 통하는 전출사표 전문을 해석하면..







( 위 : 조운과 손권, 아래 : 방통과 관옹 )

유비전과 이어진 좌우의 긴 회랑에는
문신과 무장 28좌상이 있다. 문신 상에는 방통을 위시해서
14명의 촉한 문신들이, 무신상에는 조운(자룡)을 좌장으로 14명의
촉한 무신들이 도열하듯 줄 지어 있다. 이곳에는 심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촉한의 영웅호걸들을 모두 만날 수 있는 장소다.

관직에 맞는 복장, 인물과 어울리는 얼굴 표정 등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어 마치 삼국지의 한 장면들을 보는듯
생생하다. 각 좌상 옆에는 간략한 업적이 설명되어 있다.






유비상 앞에 걸려 있는 '업소고광(業紹高光)'

유비 사당 계단길에 황제임을 뜻하는 용문양의 조각상이 있고,
유비상 앞에는 '業紹高光'의 현판이 걸려있다. '業紹高光'은
한고조 유방과 광무제 유수의 대업을 이어 발전시킨다는 뜻.






유비 현덕은,
후한 연희 4년(서기 161)에 시골마을에서 짚신을 삼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가는 홀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실패하기를 거듭하여 50세가 지나도록 운이 따르지 않았다.
유비는 난세의 진심을 다해 질긴 인내로 '천운'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는 모든 것을 자연에 맡겨두고 흐르는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를 접했던
인물들은 모두 후덕해 보이는 그의 인품에 반해 관우, 장비, 유회, 공손찬,
도겸,
제갈량들이 모여 그들과 함께 221년 60세에 위, 촉, 오의 삼국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관우가 오나라에 죽자 사의(私義)에 의한 원수를 갚기 위해
대원정을 나섰다가 이릉전투에서 대패를 하고 목숨을 건졌으나
그곳에서 병을 얻어 223년에 62세로 생을 마감한다.

유비는 황제의 면류관과 곤룡포를 입고 인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유비의 좌우에는 아들 유선과 유심의 상이 있었다고 한다.












아들 유선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썩은 나무뿌리만 하나 놓여 있다.
삼국지에 보면 유비가 양자강변 백제성(白帝城)에서 죽으면서 제갈량을 불러
아들 유선(劉禪)에게 후주를 맡겼다. 그러나 제갈량이 죽고 위나라 대군이
시시각각 조여들어 멸망 직전에 놓이자, 촉나라 황제 유선은 자신의 다섯째 아들
유심이 죽더라도 결전장에서 죽자고 일전(一戰)을 재촉했으나
목숨이 아까워 옥새를 바쳐 투항하고 말았다.

원래 유비전이 조성될 때 유선의 좌상이 놓였으나 누군가가
유선상을 훼손하였고 지방관청은 이를 복원하였으나 그 후에도 똑같은
행위가 반복됨으로써, 청나라 때에 중건하면서 아예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썩은 나무 뿌리는 촉한 왕조가 단절되고 싸우지 못하고
투항한 것에 대한 청두시민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유비의 손자인 유심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가 없어
그 길로 이 유비묘를 찾아와 통곡을 한 다음 처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목을 스스로 날려 순국했다. 이 유심의 장렬한 최후는
중국 역대의 연극 소재로 가장 많이 선호되어 공연돼 왔으며,
유비의 왼쪽에 영원히 좌정할 수 있게 했다.






'業紹高光(업소고광)





무후사는 유비전(한소열묘) 바로 뒤에 있다.
화려하고 위엄 있는 유비전과 달리 무후사는 상대적으로
고아하고 수수하다. 사당 안에 들어가면 제갈량상이 중앙에 앉아있다.
제갈량상은 온후한 표정에 제갈건을 쓰고 제갈선을 들고 있어 살아 있는 듯 생생하다.
무너진 한나라 황실을 다시 세우겠다는 유비의 극진한 정성이 담긴 삼고초려,
그것에 감동해 세상에 나온 제갈량은 유비가 죽은 후에도 그가 세운 나라
촉한에 충성을 다했다. 황제에 버금가는 지휘를 뜻하는 무후라는 호는
제갈량이 죽은 후 유비의 아들 유선이 그의 공적을 기려 하사했다.
눈에 띄는 것은 제갈량상 곁에 있는 '제갈고(諸葛鼓)'라 불리는 쇠북.
제갈량이 직접 발명했다고 하는 이 북은 전시에는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데 쓰고 평시에는 엎어서 솥으로 쓰거나 잠 잘 때 베고
자면서 멀리서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를 감지했다고 한다.
이것이 제갈량이 추구하는 실리였고 백성들에게 추앙받는 이유일지도..
'무후사' 현판은 쓰촨출신 역사학자인 궈모뤄(郭沫若)가 썼다.










제갈량 위에 있는 '정원당(靜遠堂)'의 편액

정원당의 '정원(靜遠)'은 제갈량의 글 '계자편'에서
"편안한 침묵으로 영원을 관조한다(寧靜以致遠)"에서 따온 말.

제갈량이 제갈건(諸葛巾)을 쓰고 제갈선(諸葛扇)을 든 온후한
표정의 제갈량이 오른쪽에 아들, 왼쪽에 손자를 거느리고 앉아 있다.
제갈량의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후(忠武侯)이며, 낭야군 양도현에서
181년에 태어났다. 호족(豪族) 출신이었으나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주
(荊州)에서 숙부 제갈현(諸葛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後漢) 말의 전란을
피하여 출사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207년(건안 12) 조조(曹操)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
(天下三分之計)'를 진언(進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을 얻은 것을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 '水魚之交'에 비유하였다.

이듬해 오나라의 손권(孫權)을 설득하여 유비와 연합하게 하였고,
적벽의 싸움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쳤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신기묘산
(神機妙算)으로 조조의 대군을 격파하는데 결정적 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지만,
역사서인 '삼국지(三國志)'에는 별다른 활약상을 찾아볼 수 없고, 형주와 익주 등
강남을 손에 넣은 유비가 제갈량을 군사중랑장으로 삼아 영릉, 계양, 장사 등
3군(郡)을 감독하게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214년(건안 16) 유비는 성도(成都)를 평정하고 나서 그를 군사장군
(軍師將軍)으로 삼아 자신이 출병한 뒤 군량과 병사를 대도록 하였고,
촉한의 황제에 오른 뒤에는 그를 승상(丞相)으로 삼았으며,
죽음을 앞두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대업을 이루도록 당부하였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자신의 아들 유선(劉禪)을 보좌하되,
아들이 무능하면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취하여도 좋다고 유언하였으나
제갈량은 끝까지 후주(後主) 유선을 보필하였다. 재차 오나라와 연합하여
위나라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民治)를 꾀하고,
윈난[雲南]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한의 경영에 힘썼다.

그러나 상승하는 위나라에 비하여 국력의 열세가 뚜렷한 가운데
오장원(五丈原)에서 위나라의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하다가
병이 들어 234년 사망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명세우주(名世宇宙)' 편액이 걸려있는 제갈량 사당

'명세우주(名世宇宙)'는
제갈공명의 '이름이 온 천하에 알려진다'는 뜻.
지붕 위의 원숭이 등은 제갈량과 관련되었다고 하며
내부 '정원당'에는 제갈량의 소조가 모셔져 있다.









'천추늠연(千秋凜然)'

입구에 '영웅의 기세는 천년이 지나도 늠름하다'는 뜻.
벽돌 담안에 있는 '한소열황제지(漢紹烈皇帝之)'의 비문은
청황제 강희제가 직접 썼다고 한다.

이 정원을 따라가면 유비의 묘(惠陵 혜릉)가 나타난다.







유비의 묘(惠陵 혜릉)

혜릉(惠陵)은 둘레 183m, 높이 12m의 아담한 능원.
벽돌담으로 둘러 싸여 있다. 진수의 삼국지에 223년 8월에 유비를
이곳에 매장하였고 앞뒤로 감부인과 오부인도 합장했다고 한다.
무덤을 조성한 지 1700여 년이 지나도록 한 번도 도굴되지 않은
황제릉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인즉,
첫째는, 유비의 평소 성격으로 금은 보화를 묻을 리 없다는
추측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 하고.., 실제 위, 오나라에 비해 국력이
뒤처졌던 촉한은 유비 사후에 화려한 능원 건설을 엄두도 못냈다.
둘째는, 묘를 도굴하다가 비명횡사한 도굴꾼이 한둘이 아니고,
유비 묘의 나무를 꺾었다고 해서 후손이 팔병신이됐다고 하거나
무덤 풀을 뜯어 먹은 양이 갑자기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금기시했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제갈량의 일대기를 전시해 놓은 공명원(孔明苑)

공명원에는 제갈양이 만들었다는 각종 발명품과
그 당시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다는데 들어가 볼 시간이 없다.
공명원 주위에는 분재들과 수석들로 정원을 가꾸어 놓았다.
회색 돌바닥, 붉은 벽, 푸른 대나무 등이 조화를 이룬다.









유비, 관우, 장비를 추모하는 사당인 '삼의묘(三義廟)'

무후사의 마지막 코스인 삼의묘(三義廟)는,
도원결의를 한 유비, 관우, 장비를 추모하는 사당이자
기념하는 곳으로 안쪽에는 유비, 관우, 장비의 좌상이 있고,
뒷마당에는 도원결의를 상징하는 조각상이 있다.









도원결의, 대업 성취는 이루지 못했지만..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에 모여
의형제가 되기로 하고 한 해 한 달 한 날에 죽을 것을
결의했었다. 비록 삼형제는 한 날에 죽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한소열묘에 모여 대업 성취를 위해 분투하는 듯하다.

유비의 좌,우측으로는 도원결의를 한 장비와 관우가 나란히 있다.
'삼국지연의'에 장비(168~221)의 얼굴 형상을 "범의 수염을 곧두세우고
고리눈을 부릅뜨고"라고 했다. 삼국지에서 장비는 무지하고 교양이 없으며,
광폭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신도 두려워할 용맹성과 전투 수행능력은
천하대업의 꿈을 가지고 있는 유비에게는 더 없이 필요했던 장군.

관우는 용맹이 지나치고 자만심이 강해 무리하게 침공을 하게 되었고,
이를 간파한 오나라의 전략에 말려 들어 붙잡혀 참형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송나라 이후에는 관우를 군(軍)의 신이자
장사의 신으로 모시는 사당 건립 움직임이 일어나고 관제묘가 생겨
이제는 재물의 신으로 굳혀져 크게 대접을 받고 있다.







좌로부터 유비, 장비, 제갈량, 장비

14세기경 나관중(羅貫中)에 의해 씌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 진나라 진수(陣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三國志)를
토대로 하고 한진춘추(漢晉春秋)'와 '삼국지주(三國志注)'를 참고로 하여 얼마간의
가공 인물을 가미하여 재미있게 꾸며 놓은 이야기로, 정사(正史)와 연의(演義)의
비율이 7:3 정도로 70퍼센트 이상이 정사에 있는 역사적 사실이이라고 한다.

도원결의(桃園結義) 편에서
유현덕(劉玄德 유비)과 관운장(關雲長 관우) 그리고 장비(張飛) 세 사람이
생사를 같이 하기로 하고 피로 형제의 결의를 맺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펼치는 파란만장하고 현란한 사건들이 정말 장관이다.
유비의 삼고초려 끝에 합세하는 제갈량.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동남풍을 빌어
적을 무찌르는 제갈량(諸葛亮)의 지모가 있는가 하면, 꾀 많은 조조(曹操)의
백전백승하는 전법이 있고, 우직한 여포(呂布)가 왕윤의 꾀임에 빠져 동탁을 죽이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함이 있다. 만인지적 장비의 장팔사모,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적진을 돌진하는 위풍당당한 관우의 모습.
비상한 전략을 써서 적을 힘들이지 않고 굴복시키는 손책(孫策)의 놀라운
지략이 있는가 하면, 제갈량이 만들어 놓은 팔진도(八陣圖)에 들어가
나오지 못하고 쩔쩔매는 오나라 육손을 그의 장인이 구해 내기도 한다.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와 더불어 중국의 4대 기서(奇書)의
하나로 불려지는 '삼국지연의'는 비교적 짧은 1백년 동안 6백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난세의 영웅 호걸들에 매료되어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내려 놓기 어려울 정도로 흥미진진한 작품. 제갈량(제갈공명)을 비롯하여
유비, 관우, 장비, 조운, 마초, 황충, 방통 등 삼국지의 영웅호걸들을
오늘 이곳 무후사에서 그들을 실제로 만난듯 감격스럽다.

유비의 삼고초려하는 마음에서 리더의 품성과 그의 중후한
인품에서 덕(德)을 배우며, 제갈공명의 통찰력과 지혜를 보며 
어떤 난관도 넘을 수 있는 삶의 예지를 닦으며, 관우의 의리와 용맹,
장비의 무용에서 세파를 헤쳐나갈 당당함과 용기를 얻는다.







금리(錦里, 진리)

무후사 삼의묘에서 샛문을 나오니 패루(牌樓)가 보이며
상가들이 줄비하게 줄지어 있다. 오가는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이 붐비는
서울 인사동 거리와 비슷한 삼국시대 촉한의 전통거리 모습을 재현해 놓은
또다른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금리(錦里)는 이름에 '비단 금(錦)'자를 쓰는데서도
알 수 있듯이 비단에서 유래한다. 성도는 금관성이라 불릴 정도로
예로부터 비단으로 유명하였다고 한다. 2004년에 문을 연 금리 거리는
성도 사람들이 삼국시대 역사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영화에나 나올법한 2층 구조의 전통 양식에 기와를 얹은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는 가운데 주위를 기웃거리기만 해도 흥미로운
노천 가게에는 기념품들과 먹음직한 먹거리가 유혹하고 있다.











금리거리에서 꼭 봐야할 것은 '천극'과 '그림자극'

중국의 대표적인 전통극으로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경극(京劇)'과
사천을 중심으로 한 '천극(川劇)'을 들 수 있는데..
이름에 베이징을 의미하는 '경(京)'과 스촨을 의미하는 '천(川)'이 들어가는
것을 보아서도 북경과 쓰촨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적인 공연이라임을 알 수 있겠다.
특히, 천극은 가무, 연주, 그림자극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천극'을 대표하는 것은 이곳 쓰촨의 '변검'이라고 한다.
북경 등지에서도 변검공연을 볼 수 있지만 사실 이 변검은 극소수의
중국 쓰촨성 남자에게만 계승되던 민간예술이었으나 시대가 변하여
지금은 '변검'이 가진 상업성이 극대화되면서 쓰촨출신이 아닌
타지역, 외국인, 여자에게까지 전수가 되어 중국 유명 찻집이나
레스토랑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매력적인 공연이 되었다.

보통 천극 공연은 입장료가 30달러 인데, 우리는 20달러를
더 내고 50달러하는 중국 전통문화의 정수와 사천성의 정취를
아름답게 그린 대서사시 천부촉운을 관람하기로 했다.
물론, 천부촉운에도 변검이 나온다.











금리의 주요 특징은 사천 서부의 민속문화를 보여주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현지의 민풍과 민속을 보여준다.
또한 금리의 민속문화에는 삼국문화도 융합되어 있다.
금리의 민속문화는 두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삼국의 역사를 토대로 한 역사적인 특징이고
다른 하나는 민속문화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설탕을 녹여 갖가지 형체를 만들어 내는 장인들

한 참을 기다렸으나 아쉽게도
직접 만드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전통의 색채가 강하게 느껴지는 금리거리

금리거리는 중국의 여느 전통거리보다 화려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유명관광지라 인파는 붐볐지만 거리는 깨끗했다. 보통 문화유적지라고 해도
보통 천편일률적인 기념품들이 많았는데 금리는 쓰촨성의 전통과 문화,
특색이 담긴 물건들을 판매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사조지로(絲綢之路 실크로드)

촉나라의 비단 촉금(蜀錦)은 이곳 청두(成都)를 출발하여
실크로드의 출발점이라고 하는 산시성 시안(西安)을 거쳐
둔황(敦煌)→트루판→쿠차를 거쳐 서역(西域) 땅에 전해졌다.





금리 안내도





금리 입구, 우리는 역방향으로 돌아 나오는 바람에..

성도시 남쪽에 위치해 있는 길이 350여 m의 금리 거리는
성도시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곳으로 큰 홍등이 걸린 입구에 서면
안쪽으로 고색창연한 거리가 펼쳐진다. 청석돌이 깔린 거리의 양쪽은 한결같이
고대 삼국시대 모방건축이 줄지어 있으며 점포나 차방은 모두 2,3층으로 되어 있는데
청회색의 벽돌과 암홍색의 기둥들은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이곳의 삼국시대 상점거리 점포는 주로 골동품상점들로 도자기들이 많았고,
특히, 비단길답게 아름답게 비단에 놓은 자수가 눈에 띄고 각종 수공예품들도
만나볼 수 있고, 사천지역 고유의 먹거리를 맛볼 수 있다.

무후사 샛문을 통해 역방향으로 돌아 입구로 나오니 금리 입구.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먼 과거에서 현재로 돌아온 듯한 묘한 느낌.




무후사 입구에 서 있는 삼국성지 표석

성도는 예로부터 '천부지도(天府之都)'라 불릴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고 기후가 적절하며, 명승지와 고적이 많은데다
전통공예품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고 민속민풍과 전원풍광이 인상적이며
관광자원 또한 유달리 풍부한 곳으로 '팬더의 고향', '역사문화도시',
'천부의 전원풍경'은 성도를 대표하는 3대 특징이라고 한다.
특히 삼국지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삼국지의 중심인물 유비의 나라
촉의 수도였던 것만으로도 친근감을 느낄 수 있는 성도!

여행중에는 언제나 부족한 것이 시간인데 이번에도 역시..
저녁 식당예약 시간맞추느라 시간에 쫓겨 어렵게 찾은 삼국지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무후사에 30분도 머물지 못하고, 삼국시대 거리를
재현해 놓은 금리는 3~4분만에 빠져 나가려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무후사를 찬찬히 돌아보고, 금리의 그 고색창연한 찻집에서 차라도
한 잔 했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여행중 식도락도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즐거움이지만 생각같아서야 저녁먹는 즐거움 하나와 바꾸어서라도
무후사와 금리를 제대로 보는게 훨씬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

삼국지! 덕장 유비의 뒤에는 뛰어난 지략과 충심을 가지고 따른
제갈량을 비롯한 관우와 장비, 마초, 황충, 조운. 손권과 방통, 관옹 등
수 많은 영웅들이 있었기에 그가 존재할 수 있었다. 삼국지의 주인공을 누구로 보든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초빙한 제갈량을 참모로, 스승으로 모시기까지 한
유비! 그는 용장이 지장을 이기지 못하고, 지장은 덕장을 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잘 주었다. 현대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다.
삼국성지 무후사와 금리는 쓰촨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듯
그 분위기만으로도 매력넘치는 곳이었지만.. 밤 새워 읽으며
마음 홀렸던 삼국지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감회가 남다른 곳이었다.
구채구 영롱한 물빛을 보러 왔다가 촉의 수도에서 유비와 제갈량..
삼국지 영웅호걸들까지 만났으니 이 얼마나 신나고
의미있는 여행인가! 감사할 뿐이다.

 

 

 

赤壁 ~大江東去~
Song By a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