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1. 22:07ㆍ이래서야/더불어살기위하여
나를 체포하라, 나는 가지 않겠다
[기고] 용산참사 장례식 건으로 다시 소환장을 받으며
송경동(시인)
2010년 3월 29일. 경찰로부터 다시 소환장을 받았다. 내용을 보곤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그리곤 금세 끓어오르는 분노와 싸늘한 전의를 느꼈다. 미안하지만 난 이 싸늘한 전의를 사랑한다. 일상에 허덕이고, 스스로도 어쩌지 못할 모순의 늪에 빠져 허우적일 때, 역사에 대한 회의와 번민이 저물녁 산그늘처럼 무거울 때,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막막하고 조금은 무력해질 때, 시시때때로 나를 긴장하게 하는 이 싸늘한 전의를 나는 사랑한다.
내용은, ‘2010. 1. 9. 서울역에서 남일당까지 도로에서 용산화재 사망자 장례 관련 질서유지 근무자에게 폭력행사, 경찰관의 공무집행 방해’ 건이었다. 왜 당시 남일당 앞 도로를 무단 점거하고 추도시 낭송을 하며, “무너져야 할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3자 연대가 아니라 / 저 자본의 카르텔, 저 권력 담합 / 광화문 네거리 저 독재자의 파란 집일 뿐”이라고 “저 저항의 망루 투쟁의 망루 연대의 망루 / 해방의 망루”를 우리가 다시 쌓아 올리자고 반사회적 궐기를 선전 선동한 죄는 걸지 않는가. 일반 공무집행 방해를 넘어, 이 불량한 자본의 체재를 무너뜨리고 다른 세계를 꿈꾸자고 내놓고 선전 선동하는 나의 시집은 왜 탄압하지 않는가.
보낸 곳은 그 대단한 용산경찰서다. 2009년 1월 20일 새벽.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전격적인 진압 작전 와중에 자신의 동료 1명과 철거민 5명을 불태워 죽인 그 경찰서다. 그러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단 한 번의 사과도 없이 그 가족들과 사제들과 문화예술인들과 무수한 시민들을 지난 1년 내내 짓밟고, 끌고 갔던 그 경찰서다. 늘 맨 먼저 출동해 작전에 나서는 것은 용역 깡패들이었고, 신고를 하면 태연히 와서 용역들 건너편에서 서서 지켜만 보고 있다가 불법을 저지르면 연행하겠다고, 힘없는 철거민들과 시민들에게 엄포를 놓던 그 용역 깡패들의 견실한 2중대였던 용산경찰서다.
사제들과 가끔 들리는 의원나리들에게는 사과를 해도, 정작 나라의 주인인 철거민들과 시민들 알기는 무슨 버러지들이나 불가촉천민들이라도 보듯 하던 그 용산경찰서다. 종교인들이 오시고, 의원 나리들이 걸음을 하기 시작하고, 각계의 지식인들이 나서며 다시 범국민적인 연대의 물결이 생기기 전까지는 치사하게 간이 화장실마저 치워가고, 분향소 앞 영정과 추모탑을 강탈해 가고, 고성능 스피커 차를 세워두곤 매일 밤마다 ‘연행’만을 되뇌며, 추모문화제를 방해하던 그 용산경찰서다. 그들 앞에서 우린 매번 내가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나는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닐 수도 있다는 모욕을 전달받아야 했다.
그것도 다른 날도 아닌 장례식 날 건이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사과는 하겠지, 양심은 있겠지,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 1년이 되었었다. 다섯 구의 시신을 차가운 냉동고에 가둬둔 채 유가족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날을 보내야 했다. 1년 내내 우리 사회 모든 양심있는 이들이 죄책감과 부채감과 미안함에 시달려야 했다. 그 와중에 수백명의 사람들이 다시 경찰서로 끌려갔다 와야 했다. 수 만개의 양초들이 심지 끝까지 타들어갔고, 수백만 개의 발걸음들이 ‘용산참사역’에서 내려야 했다. 반성하지 않는 소수의 권력 때문에 다수의 양심들이 안타까워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끝내 우리는 이기지도 못했지만 지지도 않았다. ‘사인들 간의 분쟁’이므로 국가와 정부는 관여할 수 없다던 이명박 정부의 옹고집은 이 무수한 연대의 물결 앞에 꺾일 수밖에 없었다. 충분치 않은 것이었지만 비로소 국무총리가 대통령과 정부를 대신해 ‘유감’의 뜻을 표하고, 유가족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용산4가 철거민들에게 역시 최소한의 보상을 해주는 선에서 우선 합의하고 ‘장례’를 치러드리게 되었다.
사실 안타까웠다. 압력밭솥 안에 갇힌 증기처럼 가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무엇도 시원찮게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수십 년은 끄떡없이 멀쩡할 도시 서민들의 공동체 주거 공간을 재개발/재건축/뉴타운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투기 건설자본들에게 내주는 ‘살인 개발의 중단’도, 관련 법 제도 정비도, 현대판 사제용병에 다름 아닌 용역깡패 폐지도, 투기 개발이 아닌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공동체 사회 건설에 대한 논의도, 자신들의 논리대로라면 ‘사인들 간의 분쟁’에 개입해 가난한 자국민을 상대로 대테러전을 수행함으로서 일부 권력층과 자본의 용병들로 전락한 국가공권력에 대한 책임도 물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법정에서 철거민들은 이웃을 불태워 죽인 ‘과실치사’의 중범죄자고, 사회 불안을 획책하고 법질서를 무너뜨린 극렬 좌경분자였다. 여전히 법정에서
우리는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개입한 제3자였다.
그러다보니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누구나 어느 순간 갑자기 ‘도심 테러리스트’가 되고, ‘사회 불온세력’이 되고, ‘불평불만자’가 되고, 효율성 없는 군더더기 인생, 쓰레기 인생, 기생 인생들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흉폭한 사회 체재에 대한 전면적인 반성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수의 자본가들과 이들과 과실의 일부를 나눠먹는 기생족들 외에 이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은 기실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국민이 아니지 않는가. 모멸 속에서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린 860만 비정규직들이 사람인가. 평생을 일해 이 사회 모든 이들의 먹거리를 생산해 주었던 ‘농부’들이 사람인가. 자기 가족 명의의 집 한 채, 가게 한 채를 가지기 위해 평생을 일하고도 전세/월세에 사는 사람들이 이 나라의 국민인가.
‘아직은’이라고 당신은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갑자기 철거민이 되었을 때, 정리해고자가 되었을 때, 3개월짜리 6개월짜리 길어야 2년 이내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갑자기 문자로 계약해지를 당했을 때도 ‘아직은’이라는 부사를 사용할 수 있을까. 경찰청에 쫒아가 봐도, 법정엘 쫒아가 봐도, 노동청엘 쫒아가 봐도 모두가 정작은 당신의 편이 아니라 소유하고 쫓아낸 자들의 편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을 때도 당신은 ‘아직은’이라는 부사를 쓸 수 있을까.
이렇게 정작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물음들에 대한 답이 이루어지 않았기에 현실의 용산은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수십 년 일했던 공장 옥상을 최후의 망루 삼아 올라간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돌아 온 것은 용산 하늘에 떴던 그 작전용 헬리콥터들과 곤봉들과 군홧발이었다. 용산 열사들의 장례도 지내지 못했을 때 용산5가의 철거민이 다시 더 오를 곳 없는 생존의 망루에서 목을 매달았고, 무엇도 흔쾌히 풀리지 않은 용산 상황에 절망한 수원 신동의 또 한 철거민은 점거해 들어간 빈집에서 돌연사하고 말았다. 또 다시 강제 철거에 맞서 홍대 앞 두리반 건물로 들어간 유채림 씨 부부의 외로운 점거농성이 벌써 100일이 넘었다. 철거 현장이 아닌 생계 터전에서 퇴출당한 노동자들의 형편은 더 극악해 몇 년 넘게 투쟁하는 곳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이런 쓰라린 현실도 분노스러운데 이제 다시 출두하라고 한다.
최소한의 양심이나 결자해지의 마음도 없다. 1년 동안 온갖 사회적 출혈을 겪다 비로소 안타까운 장례를 치룬 날이었다. 백번 양보해 비좁은 서울역에서 영결식을 치루면서 어느 누구나 삼가 마음을 여미는 날이었다. 떠나는 날만큼은 조용히, 엄숙하게 보내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정부와 경찰은 그날마저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렸다. 명동성당에 갇혀 있던 상주들이 먼발치에서나마 잠깐 장례의 예를 갖추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면서 마찰을 유도했다. 중무장한 전경들을 배치해 추도객들을 자극하고, 영정도와 만장이 장례길 떠나는 것을 막아섰다. 무리하게 차선을 줄이며 장례 행렬을 자극했다.
노제에 쓸 엠프 차량을 한강대교 변에 억류하고, 중무장한 병력이 장례 행렬을 막아섰다. ‘마지막 가는 날까지 이게 뭔 짓이냐고, 너무하지 않냐고’ 누구나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용산서 정보과장과 그 무리들이 나타났다. 불쌍한 전의경들이 무슨 죄일까 싶어, 말도 듣지 않고 가버리려는 그들을 붙잡고 반은 절규로, 반은 애원으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들이냐고, 빨리 길을 터라고.’ 생각해 보니 그 정도가 ‘폭력’이고, ‘공무집행 방해’다.
어릴적, 시골 읍내에 살다보니 상여 나가는 풍경을 자주 접하곤 했다. 상여는 몇 번이고 가다가 도로 중간에 주저앉곤 했다. 고인이 이곳에 사연이 있어 쉬었다 가잔다고도 했고, 이곳에 얽힌 미련이 떨쳐지지 않아 못가겠다고 한다고도 했다. 까닭 없이 앉아버릴 때도 많아 난감하기도 했다. 주로 다리 위에서 자주 주저앉곤 했다. 요령꾼이 염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한정없이 가고, 하지만 그러한 때 어떤 이들도, 어떤 차량도, 어떤 경찰/공무원들도 따져 묻거나, 비키라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가와 가난한 호주머니를 열어 노잣돈을 꽂아주며 명복을 빌어주었다. 혹 장례 과정에서 분쟁이 생겨도 그게 다 해원의 일들이려니 했다. 그게 우리의 미풍양속이었다. 이 나라 정부와 경찰은 그런 예의와 미풍양속에 대한 고려의 마음조차 없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죽어도 이번 소환에 응할 수 없다. 내 발로 순순히 출두할 수 없다. 립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줄 알지만, 정부를 대표해 국무총리가 사과를 하고 간신히 치룰 수 있었던 1년만의 장례식이었다. 해당 작전 수행 담당자였던 용산경찰서는 이 시대 앞에 백배사죄를 해도 그 죗값이 적지 않다. 작년 한해 용산 남일당 앞에서 있었던 무수한 충돌을 생각해 보면 그날 잠깐의 마찰이란 사실 아무것도 아닌 헤프닝이거나, 살풀이 정도였을 것이다. 공무집행이 현저히 방해될만한 정황도, 자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괘심죄인가? 단 한번도 저희들에게 굴하지 않고 싸웠던 내가 미웠던가? 사실 내가 봐도 한없이 무모하곤 했다.
몇 달 동안은 내내 오늘 잡혀가나 내일 잡혀가나 하는 생각이었다. 정신없이 싸우거나 발언하다 보면 어느새 유가족들과 철거민 분들이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송경동이 연행해.’라는 무전 소리를 들었다며 몇 번이고 저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 편들에게 연행(?)되어 남일당 분향소 안이나, 레아 건물로 끌려가기도 했다. “송경동이 뒷빽이 누구야. 왜 안 잡혀가는지 이해가 안돼.”라고 문정현 신부님이 핀잔을 놓기도 했다. 그렇기도 한 게 내가 마이크만 잡으면 용산경찰서장도, 이명박 대통령도 모두 ‘이 개새끼들아.’였다.
이런 경우가 전에도 있었다. 2006년 포항에서 공권력에 맞아 뒷머리가 열려 죽었던 비정규건설일용노동자 하중근 열사 추도제 때의 일이다. 당시 불법 추모제에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라>라는 추모시를 통해 폭력집회를 선전선동했다는 명목으로 소환장을 받았다. 하지만 하중근 열사의 죽음이 명백한 공권력 타살임에도 불구하고 의문사로 남아있는 동안에는 나는 죽어도 출두할 수 없다고 했다. 4차례까지 소환장을 받고도, 장례가 치러지고도,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해 지도부들 모두 출두하고 갔다는 달콤한 회유의 말을 들으면서도 나는 갈 수 없었다. 가기 싫었다. 잡아 갈테면 잡아가라고 했다.
이제 와 말하지만 너무 멀기도 했다. 몇 푼 되지 않는 차비가 궁하기도 했다.
당시엔 하중근 열사 한 분이기도 했다. 이번엔 자그마치 그 안타까운 죽음이 다섯 분이다. 하중근 열사 역시 의문사로 남겨진 채 치러진 안타까운 장례였지만, 용산 열사들의 죽음 역시 어떤 진상규명도 이뤄지지 않은 채로 치러진 원통한 장례였다. 그렇게 용산 열사들을, 나를, 우리를, 이 시대를 다시 어둔 땅 속에 묻는 것만으로도 서럽고 분통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외로운 마음과 몸이 망가질 데로 망가져 있는데, 이제 출두까지 하라니. 난 도저히 나를, 이런 경우를 용납할 수 없다.
물론 한번쯤 고개 숙이고 들어가, 모르는 사이들도 아니니 적당히 하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수들끼리 왜 그러냐고, 다 끝났으니 좋게 좋게 정리하자고 은근히 엄포를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별일 아닌 듯 불구속으로 벌금 얼마나, 집행유예 한 10월 쯤 받으면 되기도 할 것이다. 늘 미안한 조영선 변호사님 말을 따라 빨리빨리 진행시켜서 이미 진행 중으로 4월 23일이면 1심 결심이 나오는 지난 해 3월 7일 용산 건과 이것도 병합시키면 될지도 모른다. 작년 6월까지 두 차례 받아 둔 미결 소환장 건도 아예 정리하고 넘어가도 될 것이다. 그럼 기륭 관련 두 건과 더불어 총 댓 건이 병합되는 건가. 어차피 한 번에 털어야 하니 신경 꺼버려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난 갈 수 없다. 이런 무식한 법의 전용과 남용을 인정할 수 없다. 당신들에게만 그토록 넘쳐나는 권력의 힘에 승복할 수 없다. 지난 1년 국민들이 용산에 모아준 연대의 간곡함을 이런 식으로 희화화해버리고 마는 이 정부의 불순한 작태에 순순히 응해 줄 수 없다. 아직 용산 학살은 끝나지 않았다는 당신들의 투철함에 경의를 표하지만, 그릇된 당신들의 무대에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 행인 1이 되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더더욱 소환자가 나만이 아니라, 용산 범대위 일꾼으로 대정부 협상 담당자였던 천주교 인권위 김덕진과, 당일 질서유지원으로 일했던 전국철거민연합 회원 몇도 포함되어 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더더욱 갈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보복을 넘어 이건 기획 수사다. 용산경찰서만의 기획이 아니다. 장례 지난 지도 벌써 석달여. 우리가 용산을 까맣게 잊어가던 그 시간동안 그들은 우리를 잊지 않고 추적해 왔다. 그러고 보니 요 근래 있었던 몇 가지 용산 관련 사업들이 기억난다. 장례가 끝나고도 여전히 끝나지 않는 용산을 문제 삼는 사업들이 있었다. 용산 파견미술인(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들이 진행한 <미영씨가 시킨 전2-끝나지 않는 미술제>가 그것이다. 이들은 용산 장례식 당시 장투닷컴에서 실사 출력으로 뽑아주겠다는 만장을 극구 사양하고, 밤새워 160장의 만장을 손수 쓴 이들이다. 2월 첫주부터 매주 금요일을 <용산과 함께 하는 날>로 정하고, 이어 레아 호프에서 25회에 이르는 <끝나지 않는 전시전>을 열었던 불굴의 예술가들이다.
이 바보스런 인간들은 정세 판단이란 게 무엇인지를 잘 모르거나, 알려고 하지 않아 용산 문제가 장례 이후 잠잠해지고 난 뒤에도 용산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끝나지 않는 전시전>을 계속해서 이어나가겠다는 무모한 사람들이다. 지난 1년은 용산 현장으로 사람들을 부르기 위해 했다면 이젠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우리가 용산 문제를 가지고 찾아가겠다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 천진난만함에 혀를 내두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지난 1년 동안 용산에서 무슨 일을 했던가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미술 관련 에세이집이자 창작 및 미술 정신의 지침서가 될 <끝나지 않는 전시-용산 파견미술가 추모집>(삶이 보이는 창 펴냄)을 보면 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평범하면서도 유쾌하고 숭고한 책을 많이 보지 못했다.
또 열사 평전 형식의 만화책 <내가 살던 용산>(보리출판사 펴냄)을 펴낸 만화가들이 그들이다. 이들은 9개월에 걸쳐 남들이 거리에서 양껏 분노를 표출하고 있을 때 골방에 갇혀 우리가 더 깊이 들어가야 할 용산의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만화로 그려야 했던 이들이다. 우리 시대가 유배 보낸 이들이다. 가까스로 작업을 마치고 딱 1년이 되던 지난 1월 20일 헌정만화집을 내준 이들 역시 용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젠 행동으로 나서겠다고 뒤늦게(?) 나선 이들이다. 매달 1회씩 용산을 기억하는 북콘서트를 열겠다고 했고, 그 첫 회를 얼마전 홍대 앞 대안문화터인 <클럽 빵>에서 성대히 치뤘다.
이 모든 일들이 아직도 쉬고 있는 중이라 전혀 내가 관여한 일들이 아님에도 어떤 연관성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만약 그 때문이라면 번지수가 틀렸으니 다시 찾아보길 바란다. 어쩌다보니 용산 관련한 문화예술 사업들을 맡아하게 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내가 아니다. 가르쳐준다면 그건 전미영이고, 이윤엽이고, 신유아이고, 나규환이고, 이윤정이고, 전진경이고, 전윤희고, 김종도이고, 이철재고, 김기호 등이다. 김홍도와 여섯 명의 만화가들이고, 금세 홍대 두리반 철거 현장으로 옮겨가 있는 조약골이다. 4대강 사업을 막으려고 서서히 기지개를 켜며 봄나들이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작가회의와 작가선언6.9의 젊은 문학인들이다. 내가 아니다. 난 그들 앞에 부끄러운 사람일 뿐이다.
그럼에도 끝내 소환하고 싶다면, 내 발로는 못 가니 체포하라.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을 체포하라. 작은 한 몸이지만 너희들의 치졸함이, 극악함이 어떤 것인지를 묶여서 증거하겠다. 너무 빨리 마음을 놓아버렸던 것을 반성하고, 다시 전의를 불태우겠다. 860만 비정규 사회 전체가 감옥이고, 모든 이들의 삶이 소수의 이윤을 위해 무슨 가공육처럼 다뤄지는 이 사회 전체가 강제 노역장 아닌 곳이 따로 없으니 들어가 살던, 나와 살던 별반 차이도 없고, 더 두려워 할 것도 없으니, 차라리 너희들의 뜻대로 잡아 가둬라. 하지만 너희가 가둔다고 해도 나의 꿈만은, 의지만은 가두지 못할 것이다. 얼마 전 펴낸 시집의 졸시에서도 얘기했듯 ‘이미 나의 꿈은 이 세상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돌이켜 실제 소환되어야 하는 이들은 여전히 당신들임을 명심하라. 현실의 법은 당신들이 쥐고 있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법, 민중의 법은 언제고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듯 다시 용산 참극의 악행을 물어 당신들을 소환하고 말 것이다. 물론, 내가 아무 죄도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많다. 생각해보면 당신들은 지금 훌륭하게 공무를 수행하고 있는 모범 공무원들이다. 법 질서를 확립해가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을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다. 대상도 잘 잡았다. 맞다. 나는 당신들의 ‘공무 집행’을 한사코 반대하고 싶은 사람이다. 이전에도 그랬고, 이후에도 그럴 것이니 싹을 철저히 잘라버려야 하고, 개전의 정이 전혀 없으니 용서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돌아보라. 당신들이 집행하는 공무가 누구의 편에 철저히 편파적으로 선 것인지를. 나는 그런 당신들의 공무를 ‘공무’로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진정한 공동체사회의 평화와 평등을 저해하는 위험한 반사회적 범죄 행위로 여긴다. 이렇게 아예 당신들이 집행하는 ‘공무’ 그 자체의 뿌리를 부정하는 사람이니, 당신들의 세계에서는 처벌받아 마땅할 만큼 죄가 많을 것이다.
그래서 소환장을 받아들고, 오히려 미운 것은 당연한 일을 주도면밀하게 하는 당신들이 아닌, 우리 내부다. 너무 착하고 순박하기만한 우리 시대의 가난함이다. 적당함이다. 불철저함이다. 아니 그렇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꿈이, 용기가 작아져가는 나일뿐이다. 체포하라. 이런 나의 반성과 쓸쓸함을. 이 여유와 멈칫거림을.
<참세상> 2010년04월19일
[출처] 저항의 글쓰기 위원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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