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21. 18:08ㆍ시,좋은글/詩
배냇골 가는 길 / 백현국
69번 도로를 타고 언양 배냇골로 가려면
먼저, 청도 금천의 물질 좋은 운문댐 물이 어떻게 흘러 드는가를 물어 봐야 한다
고향집을 고스란히 물 속에 남겨놓고 밭뙈기 농사 대신
군에서 주는 붕어잡이 면허로 붕어 잡아 회 뜨는 김씨를 만나
고향집 느티나무가 누런 머리를 조금씩 보여주는 가뭄 때마다
울컥 울컥 소주병 들고 물 속으로 쳐들어 가고픈 숭악한 생각이 들더라고
눈시울 붉히는 까닭을 물어 봐야 한다
굳이 운문 상류의 1급 물질을 가늠하려 한다면
지느러미 몇 개는 부러뜨릴 각오로 거슬러 오르는 피라미들 처럼
낱낱이 샅샅이 모래와 자갈돌에 온몸을 부딪혀 봐야 한다
싯누런 황토물이 흐르거나 실개천으로 말라붙더라도
천변에 선 느티들은 강이 물린 젖으로 행복하기 때문이다
배냇골로 가려면 운문에서는 언양 재라고 부르고
언양에서는 운문령이라고 부르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왜 같은 고개가 서로 다르게 불리는지 묻지 말아야 한다
같은 산에 나는 산 사과를 두고도
언양 사람들은 가지산 사과라 부르고 밀양사람들은 얼음골 사과라 하기 때문이다
해를 먼저 받는 가지산 산비탈에 나는 사과는 가지산 사과요
해를 나중에 받는 가지산 뒤편의 사과는 얼음골 사과이기 때문이다
가지산에 가서 산이 왜 험한지를 물어서는 안 된다
겸양스런 계곡이 스스로 몸을 낮춘 까닭은 산이 높기 때문이다
산은 높아도 물은 아래로 흐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산 아래로 흐르는 물은 水芹이니 靑芹 이니 하는 그 유명한 미나리꽝을 키우고
산 허리께 포장 치고 냄비 국수 파는 집엔 멸치 냄새 구수한 국수물이 된다는 것이다
산에 오르더라도 자기 세상인양 소리 지르지 말아야 한다
밤이면 쥐새끼만한 다람쥐는 물론이고
강아지만한 너구리와 오소리 송아지 만한 고라니들이 막아서서 山主人을 자처할 때는
겸손히 차를 세우고 헤드라이트를 꺼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이 험하다고 한 번도 생각 해 본적 없는
온산이 생육번성하는 터전인 진짜 주인이기 때문이다
사는 게 시들하면 운문사에 들러도 좋다
운문사 가는 길에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고구마 순을 지르다 돌아오는 비구니에게 운문사엔 힘좋은 비구들은 없냐고 물어 보라
그러면 笑而不答의 극치를 알게 될 것이다
가지산 너머 석남사에도 힘좋은 비구 없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通道의 길은 음양의 이치와 확연히 다름인 까닭이다
석남사를 거쳐 밀양으로 가던 길에도 배냇골이 있다
배냇골에 가거든 梨川이라고 배나무를 찾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배꽃이 흐르던 물이 여자의 배냇같은 배냇골로 불리고부터는 줄줄이 비탈마다
봄이면 밤꽃 향이 찐해져서 계곡에 놀러온 숱한 처녀들이
졸지에 입덧하는 까닭 없는 꼴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산을 두어 개 넘으면 원동으로 나가는
얉은 내리막길 우편에 앉은 솟대 나무 서너 개 외발 버티고 선 집이 있을 것이다
얼키설키 흙으로 붙이고 왕죽으로 깔았다고 국적 없는 집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세속이 싫어서 떠난 주인에게 쓸데없는 문명의 말로 따지지 말아야 한다
장국에 밥 한 공기 말아먹고 차 한 잔 얻어 마셨거든
솟대나무 끝에 기러기가 보는 남쪽으로 곧장 내려갈 일이다
원동에 가는 샛길 험하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경운기도 한숨 돌려야 비켜갈 수 있는 길
너나 없이 막가는 인생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다 넓어진 신작로 우편에 러브호텔 하나 보일 것이다
숨겨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도 권태로 철갑을 한 마누라와도 같이 있다면
하룻밤 풋사랑처럼 치러도 좋을 것이다
경수 끝난 나이라도 어쩌면 자궁 가득히 담아갈 만한 배냇골이 아닌가
살가운 피붙이 하나 만들어 갈 수도 있는 법이려니
자궁이 답답한 여인네와 씨알이 부실한 남정네들은 반드시 자고 갈 일이다
배냇골은 청도 금천에서 운문으로, 언양 석남사에서 배냇골로
밀양에서 얼음골로 원동에서 거슬러 오르면 만나지는 곳에 있다
백현국
시인, 평론가
경북 영천 출생
계간 현대시문학 평론 당선
동국대 국문, 영남대 대학원
제1회 랭보 문학상(작가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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