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든 회사를 떠나면서 - 송별사

2013. 12. 31. 00:42여백/살아가는이야기







- 마지막으로 사내게시판에 올린 글 -



정든 회사를 떠나면서


존경하는 현대기아차 선,후배 여러분!

이제 제 젊음과 열정을 쏟아 부었던 정든 현대기아차를 떠납니다.
뒤돌아 보니 세월이 유수같다는 말이 실감되고, 회사형 인간도 아니면서 격랑의 세월을 잘 헤쳐 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의 도움 덕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77년 입사 당시 3개월도 다니기 힘들 것 같았는데 무려 36년 1개월 5일.
오전 7시에 시작해서 자정을 넘긴 다음날 1시까지 콘베어를 타며 포니를 만들었던 시절, 강도 높은 노동에 녹초가 되고, 인격적인 차별에 모멸감을 느끼면서 울분을 참아야만 했던 힘들고 어두웠던 시절. 몇 년간 준비한 노동조합 설립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회사가 선수를 쳐서 급조한 어용노조가 들어서고.. 그것을 뒤집고 민주노조를 설립했던 일.(지금은 노동조합의 역기능만 부각되어 안타깝지만, 순기능도 큰데 여기서는 논외로 하겠습니다.)
조합활동을 할 때 부서에서 업무를 줄여 주겠다는 제의도 거절하고, 업무를 병행하면서 새벽에 출근하여 밤늦게 퇴근하던 시절, 만년 과장에 머무르면서도 남들의 평가에 앞서 올곧게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진정성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왔다는 것이 지금 이 시간 회사를 떠나면서도 떳떳하고 당당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삶의 터전이자 정들었던 현대기아차를 장강의 앞 강물이 뒷 강물에 떠 밀려 흘러가듯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 떠나면서, 회사(사측)와 후배들에게 한 마디 드리고 싶은 말은,

회사에게는,

싸움에서 이겼다고 정의가 아니고 진리가 아니듯.. 대형 로펌을 통해서 겨우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하나 사원수첩에도 등재하지 못하는 것이 무슨 취업규칙이며, 한 번도 전문이 공개된 적 없는 '간부취업규칙'.. 과연 글로벌 top-5를 자랑하는 회사의 모습입니까? 글로벌 스탠다드는 이런 꼼수로는 어림없습니다.
또한, 이렇게 해서는 조직 구성원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는 상품의 기술력과 품질도 중요하고 가격경쟁력은 필수요건이고, 개인과 기업의 도덕성이 한 기업의 명운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 회사를 지망하는 고급인력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 있고, 고급인력들이 물불 가리지 않고 밤을 낮같이 밝히며 경쟁적으로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나 종업원의 마음을 얻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싯점이 된 것 같습니다. 결국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후배들이여!
노동조합을 통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가 된 바웬사도 있고, 룰라도 있습니다.
노동운동이 사회를 변화시키며 인간답게 살기 위한 활동인즉, 내가 중요하듯 나 보다 약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더 큰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겠습니다.
가깝게는 함께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동료들부터 협력업체 직원들.. 관심과 배려 대상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 나갈 때, 우리 노동조합이 고립에서 벗어나고 국민들도 원성을 거두고 우리들에게 박수를 치며 우리 편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사소한 것 같지만 사소하지 않은 꼭 한 가지.. 퇴근시간도 되기 전에 정문에 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 이런 모습은 정말 고쳐 주었으면 좋겠군요. 얻는 것보다 잃는게 너무 많을 것 같습니다.


회사와 노동조합 모두에게 드리는 이런 제안 어떨까요?
회사 울타리를 넘어 '국민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경쟁'을 해 보는 것..
정말 멋질 것 같은데..


끝으로 '노동으로 축적한 자본이 노동을 몰아 낸다'고 하지만, 회사의 발전이 개인의 발전과 행복에도 이바지 할 수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회사생활 중 저의 부덕으로 혹 속상하고 서운한 일이 있었던 분들이 계시다면 혜량해 주시기 바라며, 일일이 찾아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렇게 글로써 대신하게 됨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의 추억들을 뒤로 하고, 이제 저는 어릴 때 가졌던 꿈을 찾아 새 출발을 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13. 12. 30   이신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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