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옥중 마지막 순국시

2020. 3. 25. 21:55시,좋은글/詩


 옥중 마지막 순국시​ / 안중근
   


 북녘 기러기 소리에 잠을 깨니
 홀로 달 밝은 누대 위에 있었다
 언제고 고국을 생각지 않으랴
 삼천리가 또 아름답다
 형제의 백골이 그 삼천리 땅속에 의의하고
 부조(父祖)는 청산에 역력하다

 우리 집에는 무궁화가 만발해서 기다리고 있고
 압록강의 봄 강물은 돌아가는 배를 가게 해준다
 남자가 뜻을 육대주에 세웠으니
 일이 만약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죽어도
 조국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나의 뼈를 어째서 선영에다 묻기를 바랄소냐
 인간이 가는 곳이 이 청산(靑山)인 것을
 나막신과 대지팡이로 동네를 나오니
 강둑의 푸른 버드나무가 빗속에 즐비하다

 모든 벌이 어찌 금곡주(金谷酒)와 같겠는가
 무릉도원을 배타고 찾는 것이로다
 여름의 풍류는 인간이 다 취하고
 가을은 세상일이 손님이 먼저 들기를 기다린다
 주인의 풍치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다
 흥이 푸른 나무들의 연기에 충분하고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을 나가서자
 푸른 산과 흰 들 사이에 꽃이 간간이 피어 있다

 만약 화가로 하여금 이 경치를 묘사하게 한다면
 그 나무안의 새소리를 어떻게 그릴까
 갈대꽃 위에 누구의 이름을 새길까
 헤아려 눈속에 들어간 뒤에 글자마다 분명할 것이다
 차라리 대동강의 물이 다 마를지언정
 남자가 처음 한 맹세를 배반 못하겠다
 해동에 밝은 달은 선생님의 얼굴이요
 북풍 맑은 곳은 처사가 있는 곳
 붉은 꽃, 푸른 버들은 작년 봄과 같고
 여름이 지나고 서늘함이 생기니 가을이 왔구나

 일어나서 머리와 얼굴을 가다듬으니
 누가 나와 함께 여기에 있는가
 누런 나뭇잎 덮인 사양길에
 조금 전엔 작은 어느 가게에 있었는데
 백운명월(白雲明月)은 다시 공산에 떠 있다
 희미하게 생각나는 것이 전생의 꿈과 같은데
 고요한 혼백은 죽지 않고 돌아올 수가 있었다

 나의 혼백만이 짧은 지팡이를 짚고 나의 살던 집을 찾아가니
 부엌의 등불 하나만 나와의 관계인 것이다
 일보 이보 삼보 다가가서 서니
 풀은 산과 흰 들 사이사이에 꽃들이 피어 있다
 불그레한 안방에 향기가 그치질 않았고
 여인은 반은 교태를, 반은 부끄러움을 머금었다
 내 죽은 뒤에 가만히 나를 생각하겠는가고 물으니
 두 손을 모으고 금비녀 머리를 끄덕인다

 마음속에서 이별의 말은 계속되고
 이별의 술잔이 손에 닿는 것이 더디기만 하다
 살아서는 오히려 생각하는 날이 있었는데
 죽은 뒤에는 어찌 저 홀로 가는 때를 견디어 내겠는가
 만난 인연이 오래오래 막혔다고 말하지 말아라
 평생에 오히려 근심 속에 기약하는 것이었을 것이나
 편지 한 장을 날려 천문(天門)에 도달하게 할 수가 있어
 나의 사정을 호소하면
 그대로 혼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자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바른 마음을 속일까보냐
 판사 검사가 어찌 나의 속마음을 알까
 원수는 갚았고, 곧 외로운 혼은 땅에 떨어진다    

 출처 : 옥중 마지막 순국시​, 안중근 

 

1910년 3월 26일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선봉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린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장군이 처형 당했다. 

110년 전의 일이다.

 

1879년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안중근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 소식을 듣고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는사재를 털어 삼흥(三興)학교, 

돈의(敦義)학교를 세워 인재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 폐위, 군대 해산 등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김두성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고,

1908년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해 경흥, 회령 등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했다.

 

그 후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연추(煙秋) 등을 

왕래하면서항일투쟁방안을 강구했고, 1909년에는

김기열(金基烈), 백낙길(白樂吉), 박근식(朴根植) 등

동지들과 함께 단지(斷指)동맹을 결성했다.

 

1909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10월 26일 오전 9시 무렵,

하얼빈역에서 기차에서 내려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해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쏘아 

3발 모두 명중시켰다. 일제 헌병이 체포하려고 하자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뤼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돼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이때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공박하고,

한국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해

일제 경찰과 판사도 감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고

1910년 3월 26일 순국하셨다.

 

정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이제훈, 안중근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안중근 의사 사형 집행 기록

“살인죄명으로 사형… 유해 뤼순에 매장” 

일제 관동도독부 민정장관 대리 사토 도마구마가 1910년 3월 26일 

이시이 기쿠지로 외무차관에게 보낸 안중근 의사 사형집행보고서(오른쪽). 

‘안중근 본일(금일) 사형집행, 유해 뤼순에 매장’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다. 

사형집행 명령문(왼쪽)에는 한국인 33세 안중근을 살인죄로 처형하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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