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24. 00:38ㆍ山情無限/백두산
백두산 종주기 (3/3)
○ 전체일정
8/1일: 부산 김해 - 북경 - 연길 - 백산호텔
8/2일: 서파 산문 - 금강대협곡 -송강하빈관
8/3일: 백두산 종주 산행.
8/4일: 도문 두만강 - 대성중학교 - 곰 농장 - 연길공항 - 북경공항
8/5일: 북경관광(만리장성 - 이화원- 자금성 - 천안문 - 중의연구소 - 서커스관람)
8/6일: 북경 - 부산.
8/4(맑음) 도문 두만강 - 대성중학교 - 연길 - 북경
07시 30분에 풍정원을 출발하여 용정으로 가는데 왠지 마음이 무겁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곳에서 자신과 자신 가족들의 모든 것을 바쳐 나라를 사랑한 선각자들…, 국내에서도 독립군의 후손들이 어렵게 살기는 마찬가지지만 조선족이 제일 많이 살지만 연변조선족자치구에서 가장 못사는 곳 중의 한 곳인 용정, 일제시대 때 항일독립운동의 본거지인 용정에 들어서면서 가이드의 설명이 가슴에 불을 지른다. 모두 선구자를 목청 높여 불러본다
은진학교 시절 문익환(뒷줄 가운데)과 윤동주(뒷줄 오른쪽)
26살에 일본의 감옥에서 알 수 없는 약물시험으로 죽어간 윤동주 민족시인의 모교인 대성중학교에 들렸는데 시설은 그렇게 좋은 것같지 않았다. 역사관에 들러 대성중학을 거쳐간 선각자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항일운동에 대해 진열한 사료들을 보지만 상해에서 임시정부청사를 볼 때 느꼈던 그 초라함과 정부의 무관심에 가슴이 아프다. 교정에는 윤동주(尹東柱) 시비(詩碑)가 상징처럼 서 있다.
윤동주의 시비 앞에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는 한갓 휴지조각에 다름 아니다. 역사적인 유물을 잘 보존하고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상징적인 곳은 잘 지켜내야 할 것이다. 하긴 중국은 지금 '동북공정'이니 뭐니 하면서 우리 역사를 송두리째 말살하려 하는데 우리는 역사과목마저 교과과정에서 빼는 가당찮은 짓을 하고 있다. 어찌 부모없는 자식이 있으며, 나라없는 국민이 있겠는가? 항일독립투사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용정도 그렇거니와 여기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평강평야는 발해의 도읍지가 아니던가?
윤동주의 자필 "서시(序詩)"
대성중학교를 무거운 마음으로 나와 오른편에는 그 선구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일송정이 있던 곳 정자를 보며 여러 생각이 떠 오른다. 일송정은 항일독립운동의 혼과 기상을 상징하던 소나무가 있던 곳으로 일제가 이 소나무를 죽이기 위해 한 밤 중에 나무 주변을 파고 황산을 부어서 결국 나무가 고사했다고 한다. 지난 91년 나무가 있던 자리에 정자를 짓고 백두산의 작은 소나무를 옮겨와 심었다고 가이드가 설명하자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선구자' 노랫말에 나오는 혜란강은 조그만 강이었고 혜란강을 가로지르는 용문교는 채 200m도 안 되는 평범한 다리였다.
왼쪽으로 멀어져 가는 일송정 정자를 보며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배나무 과수원을 거쳐 곰 농장으로 갔다. 돈벌이가 되는 일이니 뭘 못 하겠냐만 제 정신으로 보기는 역겨운 광경이 벌어진다. 웅담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국인들의 상대로 한 것이라 생각하니..., 곰 쓸개에 호스를 꼽고 담즙을 빼내는 인간들이나 그렇게 만든 웅담에 목 매는 인간들이나 간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니 더 문제겠지만…
그 곰 농장은 2,000마리도 넘는 곰을 키우면서 웅담을 생산한다는데 곰을 개복(開腹)하여 담도(膽道)에 카테터를 심고 일주일에 한 두 번 고인 담즙을 모아서 농축하고 냉동 건조해서 웅담을 만드는데 그 방법을 중국당국으로부터 특허를 받았다고 자랑까지 한다.
곰에게는 고통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뻔뻔해 보일 수 없고 천지도 모르며 재롱부리는 저 어린 곰도 4살이 되면 쓸개에 빨대가 꼽혀 웅즙 생산공장이 되어야 한다니 인간이 정말 밉다.
연길에서 도문을 향하는 차창 밖으로 끝없는 옥수수 밭이 이어진다. 두만강이 다 되어 갈쯤 가이드가 한 곳을 가르키며 하는 말이 요즘 탈북자가 늘어나는 바람에 다 수용을 할 수 없어 감옥을 확장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두만강변에서, 저 너머가 북한땅이다
드디어 두만강에 도착했는데 이게 왠 일인가? 강이 넓고 강물이 푸를 줄 알았는데 흙탕물이 아닌가? 때로는 그냥 상상 속의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좋은데…. 아무리 상류에 있는 북한의 철강공장과 중국의 종이공장에서 폐수를 흘러 보낸다지만 너무 실망스럽다.
강폭은 30여m. 수심도 그렇게 깊지 않은 것 같다. 강에는 모터보트를 띄워놓고 목하 성업 중이다. 보트는 한 번에 6명이나 태우고 500m도 안 되는 거리를 갔다 오면 우리 돈 6,000원이다. 강변에는 북한 초소가 촘촘히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북한쪽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사항이다.
두만강 상류를 따라 연길로 돌아 오는 길, 바로 조그만 개울 같은 강 하나만 건너면 북한인데… 중국쪽 산과 대비되는 헐벗은 산과 산자락에 걸려 있는 구호들, 그리고 산꼭대기까지 일궈 옥수수를 심은 모습이 북한 실상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연길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북경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려는데 옆 버스 가이드가 박스 하나를 들고 탄다. 뭔가 자세히 봤더니 비디오 테잎이다. 이미 테잎에 대해서는 들은 것이 있는지라 우리 차에도 가이드가 테이프 박스를 들고 타길래 "요즘 한국에서는 테이프 보는 사람이 없어 사주고 싶지만 사 줄 수가 없다. 한국에는 요즘 DVD로 다 바뀌어 간다"며 아예 꺼내지도 못하게 했다. 그러자 "그렇냐" 하면서 강매는 않는다. 다행이다. 그런데… 그런데 왠걸 연길공항에 도착하여 수속을 하고 있는데 우리 가이드 손에 CD-ROM이 한 묶음 들려 있는게 아닌가! 정말 대단한 사람들… 물론 당국으로부터 할당받은 금액이 있기는 하겠지만… 할 수없이 내가 대표로 CD 한 장 사는 것으로 끝냈는데 집에 와서 돌려보니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다.
백두산 종주를 잘 하고 왜 이렇게 장황하게 가이드에 대한 글을 쓰냐하면 가이드들이 너무 돈을 밝히는데 정도를 넘기 때문이고 그들이 그렇게 된데는 한국 관광객들의 책임도 크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디 다른 나라 사람들 한데도 그렇게 하는가 말이다. 정말 외국에 나가서 사고 싶은 물건이 있더라도 경쟁적으로 사는 모습은 피해야 한다. 중국사람의 상술은 처음에는 큰 돈을 쓰게 만들고 나중에 돌아 올 때는 잔 돈까지 다 옭아가는 것 아닌가?
또 연길공항이 난장판이다. 가이드가 수고료를 더 달라고 한다. 그만큼 물건을 팔아 줬는데도 우리가 물건을 많이 팔아주지 않아 수입이 적어졌다는 말도 나오고 원래 종주안내 수고료는 별도로 내게 되어 있었다며 1인당 얼마를 더 내란다. 중국사람들과 계약할 때는 정말 잘 따지고 계약해야 할 것 같다.
아수라장 같은 연길 공항을 떠나 북경공항을 거쳐 AVIC호텔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은 시간. 내일 일찍 아침을 먹고 7시까지 탑승하라는 공지를 듣고 각자 숙소로 향했다.
8/5(맑음)
어제 저녁, 내일은 일정이 빡빡하기 때문에 아침을 먹고 7시까지 버스를 타라고 몇 번이나 공지를 했는데도 단체 관광 때 꼭 그런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있다. 둘째 날 백산 호텔에서도 1시간이나 늦게 출발하는 바람에 결국 왕지도 보지 못하고, 금강대협곡도 어두워 제대로 보지 못했다. 셋째 날 백두산 오르는 날은 나오지 않은 사람을 아예 떼어 놓고 갔고, 오늘도 한 가족 부부가 30분이나 늦게 나오는 바람에 바쁘게 시내를 빠져나가도 벌써 만리장성 가는 길이 밀린다.
만리장성
중국도 교통체증이 말이 아니다. 북경 서북쪽에 위치한 天下第一雄門을 거쳐 마오쩌둥의 친필로 '장성에 오르지 않고서는 호인이 될 수 없다(不到長城非好漢)'라는 글귀가 있는 (四通)八達嶺에 도착하니 9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쌓기 시작했다는 5,000여㎞의 장성. 서쪽 가욕관에서 동쪽 산해관까지 1800여 년에 걸쳐 쌓고 보수한 세계 4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만리장성. 그 당시 만리장성을 쌓으러 가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열명이 가면 한 명이 살아오기 힘들었다는 대공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이별을 당했는지를 생각하자 그냥 감탄만 하기에는 너무 큰 대가를 건축물인 것 같다.
만리장성을 떠나 SILK 매장인 "동오사주관"에 들렀는데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지갑을 열게 유혹하지만 나는 그럴수록 마음을 다잡는데 가이드는 생각보다 매상이 많이 올랐다고 기분이 좋다.
점심은 그 유명하다는 북경오리요리 전문식당이라는데 어찌나 양이 적든지 제대로 맛도 느껴보지 못할 정도다. 고기 한 점이나 제대로 먹었는지 모르겠다.
점심을 먹고는 근처에 있는 중국 차 매장에 들려 그 좋다는 물건은 사지도 않고 차만 한 잔 얻어 마시고
서태후의 여름별장인 이화원으로 갔다. 48년 동안 어린 황제를 셋이나 거느리며 절대 권력을 누리면서 결국 淸을 망하게 했던 여장부요 독부.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는 신해혁명으로 청이 망해도 혁명군에 사살되지 않고, 74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 했다고 하는데 그녀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그 비결이 무엇일까? 혹, 혁명군에게 필요했을 비자금 카드라도 썼을까?
이화원
권륭황제는 어머니인 그녀의 여름 쉼터를 위해, 여의도보다 큰 인공 호수를 만들고 산을 쌓고, 자기는 자금성에서 배로 유유히 드나들고, 어린 황제는 유배시켜 놓았던 곳. 지금은 관광명소가 되어 중국사람뿐만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려 관광수입이 엄청나겠지만 그 당시 고통에 힘겨웠을 사람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왜일까?
지금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으로 인민들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챙기고 있으니 후세를 위한 투자였다면 선견지명이라 할 수도 있을는지... 만리장성이나 자금성이 다 그렇지 않은가?
이화원에서 자금성으로 이동하였다.
영화 '마지막 황제'의 무대인 '자금성'. 우선 규모와 웅장함과 화려함이 놀랍다.
북경의 내성(內城) 중앙에 위치하는 '자금성'은 1407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가 남경[南京]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기 시작할 때부터 건립하여 1420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명·청 시대를 통하여 궁전과 궁문을 여러 차례 보수·개축하였으며 명칭도 바뀌었다고 한다. 남북 약 1,000m, 동서 약 760m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1구획으로 둘레에 도랑을 파놓았다.
명(明). 청(淸) 양 대의 황궁으로 쓰던 곳으로 9문을 통과해야만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는 절대 권력의 상징, 한편으론 황제를 바보로 만들기에 그지없이 좋았던 곳.
자금성
남문으로 빠져나오니 '천안문 광장'이다. 생각보다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천안문 사태! 중국인들은 더 이상 그것을 지금 논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세월이 가면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는 생각 만만디의 여유로움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그 넓은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을 1시간 반 만에 훑은 우리도 대단하다는 생각이다.
'천안문'에서 '한의원 중의연구소'로 향했다.
왠만한 사람들은 의사 앞에 서면 주눅이 든다. 이곳 한의사들도 세계 최고라고 하는데 어찌 장삿속을 교묘히 포장한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호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과 카드까지 빤히 보고 다 털려는 심사같다.
오늘 일정의 마지막 순서인 서커스를 관람하는데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때로는 손에 땀을 쥐게도 하고 때로는 정말 사람이 하는 동작일까 할 정도의 신기에 가까운 동작을 보며 1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이어 9시가 다된 시간 늦은 저녁을 먹고 숙소에 들어서니 10시
이제 공식적인 일정은 다 끝났다.
8/6(맑음)
집에 간다고 그런지 오늘은 모두 4시 반에 일어나 정확하게 5시에 각자 아침 도시락을 지급받고 북경공항으로 향한다. 아무리 여행이 좋다고 해도 집 떠나면 고생이고 몇 일만 집을 떠나 있어도 가고 싶은 곳이 집이다. 돌아갈 집과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몇 년 전 상해를 보던 모습 그대로 하늘높이 치솟는 북경의 모습을 보면서 잠자던 호랑이가 잠에서 깨어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감을 받았다. 이 세상 물질은 인간들이 나누어 쓰면 쓰고도 남을 충분한 양이건만 독점하고 편중되니 호구지책마저 어려운 사람들이 생기는 것 아닌가? 그런데 2008년 북경올림픽을 유치한 중국이 설치면 아마 우리나라는 심한 몸살을 앓을 것이고 어쩜 지구촌 전체가 재앙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기우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차는 북경공항에 도착하였고 2시간이 넘게 걸린 탐승 수속을 마치고 2시간을 날아 김해 공항에 도착. 공항에 도착하니 아늑하고 편안하다. 어디를 가던 내 땅 내 조국이 제일인 것 같다.
백두산 종주에 덧붙이는 생각
만주벌판이 옛 고구려 땅이었고 그 위쪽 광활한 곳에 발해왕국이 자리했었다 해도 지금은 잃어버린 땅.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와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들 기세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중국의 조선민족 마저 한국을 어머니의 나라로 생각하지만 그들의 가슴속에는 중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서 안타까움이 더한다.
엄격하게 말해 백두산은 북한 땅, 장백산(창바이산)은 중국 땅.
이번에 남의 땅을 밟고 돌아 장백산 서파에서 북파까지 종주한 것이다. 백두산을 종주했다고 자위를 해 보지만 가슴 한 곳 횅하니 찬 바람이 불 듯 허전한 맘 감출 수 없는 것은 엄연한 중국영토를 걸은 탓이리라.
언제일지도 몰라도 일본의 농간에 넘어간 간도도 되찾아야 하고, 잃어버린 역사 발해도 되찾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실지를 회복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 안에 그런 불씨를 키워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 더 큰 의미가 되는 것 같다.
통일이 된다면 이번에 걷지 못한 북한땅 5호경계비에서 6호경계비까지 종주할 날을 기대해 보며, 힘이 된다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뻗어 내린 4000리 백두대간을 걸어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백두대간 이남구간만이라도 하루빨리 시작을 해야겠다.
2004. 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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