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북정맥 10구간 (꽃조개에서 45번도로(나본들)까지)

2010. 4. 12. 01:15山情無限/금북정맥(完)

 

 

 

금북정맥 10구간 (꽃조개에서 45번도로(나본들)까지)







○ 산행일자 : 2009. 4. 2(금) 07:25 ~ 16:15 (8시간 50분)
○ 산행날씨 : 맑음, 오후 약한 황사
○ 참석인원 : 홀로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15.3km         누적거리 : 199.15km
○ 산행코스 : 꽃조개-남산-하고개-백월산-까치고개-홍동산-육괴정-덕숭산-45번 도로(나본들)
○ 소 재 지 :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홍성읍, 홍북면 / 예산군 덕산면


구간 진행시간

① 접근

07:05~15      이동 (홍성읍 = 꽃조개 / 시내버스

② 구간별 산행 시간

07:25         꽃조개(21번 도로) 출발

08:32         하고개

10:00~05      백월산(394.3m)

10:39         까치고개

11:48         홍동산(308.9m)

13:10~50      육괴정 / 점심

14:45~55      덕숭산(495.2m)

16:15         나본들(45번 도로)

③ 복귀

17:00~10      이동 (45번 도로-덕산) / 히치

17:45~18:35   이동 (덕산-홍성)      / 시외버스

18:10~19:50   이동 (홍성-해미-서산) / 승용차



길 들여 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전에는 그냥 이정표만 보고도 길을 잘 찾아 다녔는데
네비게이션을 달고 부터는 도로 이정표 보다는 거의 네비에 맡기고 운전한다.
물론 최신자료를 계속 업데이트 시켜야하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네비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지난 청양구간 오갈 때 대전-당진간 새고속도로를 인식 못하는
네비 땜에 30여분 손해(?) 본 생각이 들어 이번에는 업데이트를 하여 가기로 했다.
그러나, 미리 작업 못하고 어젯밤 늦게서야 업데이트 해 놓고는 별 문제 없겠지 했다.
그런데.. 출발하려고 네비를 켜니 작동을 않는 것 아닌가.. 하필이면 이럴 때..
다시 업데이트를 시켰는데 바쁜 시간은 아랑곳없이 1시간 넘게 걸려 겨우 성공했다.
늦게 출발은 하지만 약속시간은 정해져 있고.. 가는 길 마음이 바빠져 나도 모르게
가속페달을 밟으며 과속으로 시간을 보충한다. 네비가 없으면 없는대로 이정표를
보면서 가면 될 것을 꼭 네비게이션이 꼭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자신..
'문명의 이기'가 편리하기는 하지만 조금씩 멀리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연습해야 할 것 같다. 길들여 진다는 것.. 겁나는 일이다.

일을 마치고 오후 늦게 이번 구간 베이스 캠프로 이용할 홍성으로
도착하여, 읍내를 한바퀴 돌고는 일찍 '홍성온천 보석사우나'에 들었다.
PC 동전교환기가 고장나 있어 갖고 있던 동전 2개로 메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했지만 시설은 좋았다. 찜질방에서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계속 밀리는
산행기 정리나 좀 하려고 PC 가능한지를 먼저 확인하는데도 제대로 확인
안될 때가 많다. 카운터에서 좀 정확하게 알려주면 인근 PC방에 들렸다가
찜질방에 잠 자러 가도 되는데 아까운 시간을 이렇게 보내야 하다니..

금북도 거의 마무리단계다. 오늘의 덕숭산과 내일 지날 가야산을 끝으로
이름있는(?) 산은 더 이상 없고 태안반도 끝점, 바다를 향해 내려 앉는다.
이번 구간은 구간 자르는면서 고심을 했다. 이제 꽃조개에서 금북정맥 날머리
안흥진까지는 도상거리 103.7km. 4구간으로 나누면 26km 정도로 2번만 나서면
되는데 이번 구간 꽃조개에서 26km 인근에서 자를 곳이 마땅치 않아서이다.
45번 도로에서 끊으면 10km가 짧아 다음 구간들이 늘어나고 개심사 갈림길까지
가면 32km 가까이 되는데다 뒷산, 가야봉, 석문봉 등 마지막 기세를 높히는
고봉들이 버티고 있는데다 개심사 갈림길에서 도로까지 접근거리도 만만찮아
나분들에서 끊기도 했다. 다음날 무르티고개까지 진행하면 60km 정도
남는데 
컨디션만 좋으면 2구간으로도 될 것 같기는 한데.. 







(홍주아문(洪州衙門))

이 문은 조선왕조때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의 외문으로서
1870년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이 성의 동문인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대 같이 세운 것이다.
현재 이 건물에 걸려있는 홍주아문(洪州衙門)이란 현판은
대원군의 친필로 사액(賜額)한 것이라 하며 이 아문은 우리나라
아문중에서도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사적 제 231호인 홍주성)

최초 축성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 백월간 중턱에
위치했던 해풍현이 현재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 성을 축조한
것으로 추측되며 규모는 1,300척의 토성으로 400개의 성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확장을 하였고 조선시대 고종 7년(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봉금 3천냥과 원납금, 지세부과금으로 석성을 개축하여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하면서 650개의 첩과 130개의 치, 2개의 곡성, 4곳의우물과
연못을 신설한 다음 동서에 수문을 두어 서문천의 물을 끌어 동편 수문을 거쳐
남문천과 금마천으로 흐르게 하고 동서북에 문을 세우고 남문은 문루가 없는
홍예문으로 하였다. 같은 해 대원군이 휘호한 문앵ㄱ을 받았는데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운 망화문이라 하였다. 그 후 홍성지방 일본인들이 서문과
북문을 훼철하고 성곽 곳곳을 철거하면서 동문마저 훼철하려던 것을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하였다. 홍주성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810m만 현존하며
성내에는 관아 건물이 35동에 이르렀으나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만 남아 있다. 1978년 10월 7일 강도 5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성곽의 일부가 붕괴된 것을 계기로 성곽주변 가옥 64동 철거와 토지를
매입하여 주변정비 및 성곽을 보수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고 있다.





(홍성읍내, 저 앞에 '홍성온천보석찜질방'도 보이고..)





(조양문)

현재는 홍성 시내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조양문..
홍성군청 앞 조양문은 홍주성의 동문이며 홍성군의 관문으로
동학운동이나 항일의병의 흔적들이 곳곳에 묻어있는 곳으로
현재는 부분적인 보수로 조양문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항일의병때 일본인들이 파괴하기 전까지는
서문인 경의문, 북문인 망화문도 있었다고 한다.





(8)





(꽃조개 교차로)

버스에서 내리긴 제대로 내렸는데..만해 동상 올라가는
입구를 지나쳐 교차로 직전 우측 절개지를 타고 올랐다.





(정맥은 남산정상 전망대로 가기 직전 왼쪽으로 꺾어 내려선다)

절개지를 타고 오르니 희미한 길은 거친 잡목숲으로 들고
시작부터 잡목숲을 헤치느라 말이 아닌데 조금 더 진행하니
오른쪽 아래에서 넓직한 남산 오르는 산책로가 나타나는 것 아닌가!
이런 좋은 길을 두고 잡목숲을 헤쳐 오르다니..





(조망이 훤히 트인 조망처에서 바라보는 마온리 방향)





(바로 아래로 '홍성남부순환도로'가 지나간다)

'홍성남부순환도로'가 발아래 터널로 지나간다.
도로를 따라 멀리 오서산이 보여야 하는데 박무로 보이지 않는다.







(노란 생강나무꽃과 길마가지나무꽃)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육골마을)







(날씨가 싸늘하다 했더니 서리가 하얗게 내려..)





(물길을 가르는 밭둑)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수리고개에서 지나고,
다시 조금 더 진행하면 시멘트로 포장된 맞고개다.





(맞고개를 건너니 또 산을 무지막지하게 까뭉개고 있었다)





(이 시간 이런 길을 걷는 기분이란..)





(하고개, 교통량도 많고 자동차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29번 국도를 횡단할까 하다가 터널아래로 한참을 에둘러 건넌다)

하고개를 넘는 29번 도로는 4차선으로 거의 고속도로 수준.
마루금을 따라 고갯마루 도로로 횡단할까도 해봤지만 자동차들이
너무 속력을 내는데다 중앙분리대 넘기도 겁이나 우측 지하차도를
따라 올라가 도로을 재빨리 건넜는데 그러나 그게 다 건넌게 아니었다.
도로 하나를 더 건넌 후 다시 맞은편 들머리를 찾아 되돌아 온다.
고개의 유래는 홍성장 보러 가는 장고개 서쪽으로 내려가는
지역에 있는 고개라 하여 "하(下)고개"라 한다고..





(아스팔트 포장된 옛국도로 고갯마루 민속박물관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 내려오니 '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 앞으로 등로가 열린다)

밭둑을 올라서니 옛 국도가 보이고 국도를 따라 오른 고갯마루는
절개지로 접근이 안되어 다시 돌아 내려오니 오른쪽으로 길이 열리면서
'홍주병오의병주둔유지비'가 보인다. '충절의 혼이 살아있는 홍성"으로
소개를 하듯이 홍성에는 인물이 많다. 고려말의 최영장군, 성삼문,
한용운, 김좌진장군을 배출한 지역이다. 하우령고개라 표기한
이곳 역시 병오년에 나라를 찾으려는 의병들이 모인 곳이라 한다.

홍주병오의병주둔지 '하우령고개'
홍주의병은 1906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된 다음 해에
결성되었으며, 당시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의 봉화가 홍주의
하우고개에서 맨 처음 올라, 의병들이 홍산, 서천, 남포, 보령을
거쳐 광천에 와서 대부대가 되었으며, 이 주력부대가 광천에서
구항 마을과 신당곡을 거쳐 하우고개에 당도하였고, 천북, 결성,
서부에서 궐기한 의병들도 서산도로를 따라 하우고개에 집결하였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홍주성 탈환의 진군나팔이 울리어
1906년의 병오의병 거사가 발화되었다.





(백월산 오르는 이정표가 길을 안내한다)

이 지역은 백월산이 꽤나 좋은 이름인가 보다
2구간전 청양에서 백운산을 만났는데.. 오늘도 또 백월산!





(136.2봉 삼각점, 표식도 알아보기 어렵다)

올라선 136.2봉에는 이끼가 끼어 고색창연한 삼각점이 있다.





(홍성읍 방향으로 조망이 열린다. 아래는 밤나무 밭)





(양지바른 곳에서 잠시 휴식하려는데 마구잘린 나무들이.. )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살포쟁이고개 )





(明暗, 그리고 생명)





(진행방향 우측으로 조망이 트이면서 홍성읍이 보이는데..)

옅은 황사로 홍성읍이 뿌옇게 보인다.
봄철이면 연례행사같이 찾아오는 황사도 중국과 몽고지역의
사막화가 가속화되어 그 정도도 갈수록 심해질텐데 이래저래
우리나라는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 같다.





(백월산 정상 조금 아래까지 임도가..)

'백월산 0.3km'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고,
우측 시멘트길로 올라온듯한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다.
헬기장을 지난 후 5분 정도 오르면 백월산 정상.





(공리저수지, 그 뒤쪽이 갈산면.. 그 너머가 서해 천수만..)





(드디어 백월산 정상이.. 얼마만에 만나는 사람들인가?)







(백월산(白月山, 日月山 393.6m) 정상에서, 증명사진도 한 장 담고..)

오랫만에 정맥길에서 사람을 만났는데 60세 전후의 분들로
그 중에서 한 분은 금북정맥을 하다 지금은 쉬고 있다는데
이 주변 산과 지리를 꿰어차고 있는 것 같았다.

백월산은, 이조 말엽 홍주 이방으로 있던 명필이며 문장가인
이종근의 시에 나오는 '백월산하(白月山下)'라는 구절을 따서
백월산이라 한다'는데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는 白月山도 日月山도
아닌 월산(月山)이고 국립지리원의 고시지명은 일월산이다.





(백월산 정상에서 홍성읍 방향 조망)

백월산도 일급 조망처로 우측 홍성읍과 좌측으로는 서해바다까지
한 눈에 펼쳐지는 곳인데 오늘은 황사로 인해 조망이 방해를 받는다.





(무슨 바위? 이름이 있을듯한데.. 바둑이 머리같기도 하고..)

정상에서 내려서면 특이한 모습의 바위를 지나 다음 봉우리에
오르면 '홍주청난사중수비'와 사당이 있고, 사당 안에는 백월산신과
'홍가신(洪可臣)'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홍가신'은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민심이 동요되자 선조 30년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켜
홍주성으로 쳐들어 왔을 때 홍주목사로 있던 홍가신이 난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청난공신(淸難功臣) 1등에 봉해진 인물이라고 한다.





(정맥길은 험한데.. 미럭골고개 방향에서 오르는 등로는..)

백월산이 백월산인지라 마루금은 거칠지만 미럭골고개쪽에서
오르는 등로는 목책을 설치하여 정비를 잘 해 놓은 것 같다.
전면으로는 가야할 올망조망한 봉우리들과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오늘 넘어야 할 홍동산, 덕숭산. 그 너머 내일 오를 뒷산과 가야봉까지
일렬로 도열해 있는데 산이 높으면 높아서 힘들다 하겠다만
높지도 않은 산들이 고개까지 내려가면서 고도를 다 까먹고
다시 올라와야 하니 큰 산이나 별반 다를게 없다.





(기우뚱한 종탑, 어떤 마을인지..)

거친 급비탈로 신나게 내려서니 길이 부드러워지고,
아담한 산속에 마을이 나타난다. 등로 바로 옆에 교회당
녹슨 종탑이 피사의 사탑같이 옆으로 곧 넘어질듯 기울어 있다.
이전에는 뎅그렁 뎅그렁하며 울려퍼지던 교회당의 종소리가 정겨웠는데..
개 한마리가 유난스럽게 짖어댄다







(까치고개, 까치고개에 있는 '고개쉼터'식당)

홍성군을 가로질러 북진하던 마루금은
까치고개에서부터 왼쪽은 예산군, 오른쪽은 홍성군 경계를 타다가
홍동산 지나 모래고개를 지나면서 부터는 홍성군과 이별하고
예산시 덕산면 광천리인 산행날머리 나본들로 향한다





('홍성환경사업소'가 있는 방향으로 직진 시멘트길을 따르다가..)

고개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건너편 홍성환경사업소로 가는
시멘트 길로 가다가 환경사업소 정문에서 왼쪽 울타리를 따른다.
울타리가 끝나고 30여 정도는 엉망으로 파헤쳐 볼썽 사나운
벌목지를 지난다. 정맥 시그널도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이 땅의 산은 산대로.. 강은 강대로 똑같이 수난 당하는 것 같다)







(이곳에도 벌써 진달래가 피었다)





(홍동산 오르는 길.. 산불지대를 지나..)

부드러운 길을 가던 등로가 시커멓게 불에탄 산불지역을 지난다.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큰 불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 넓은 지역에
걸쳐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생명은 위대한 것, 화마가 휩쓸고 간
황무지에도 새싹이 돋고 꽃이 핀다. 소나무는 다 불타 지리산 제석봉
고사목같이 처량하게 서 있는데 잡목들이 돋아나 빠르게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 소나무는 날로 더워지는 기상변화를 버티면서 진을
빼고 있는데 이렇게 불이라도 만나면 다시 숲을 이룰 수 없으니
이 땅에서 소나무가 사라질 날도 얼마남지 않은 것 같다.
여름에는 이 길을 지나기가 보통 힘들 것 같지 않다.





(지나온 백월산과 공리저수지)

산불지대를 지나 능선에 오르니 조망이 트이고,
뒤돌아보니 공리저수지 뒤로 백월산이 점잖게 한발이나 물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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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동산(弘東山 308.9m))

홍북면에 있는 홍동산은 "서쪽으로는 산이 첩첩으로
쌓여있고 이 산에서부터 동편이 열려 있다"라는 의미라 한다.

그동안 홍성군을 관통하며 북진하던 마루금은 말미고개에서
홍성군과 작별하는데옛 홍주군과 결성군을 합한 군으로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를 지주사로 고쳤다가 홍주로 다시 고쳤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군이 되었고, 1914년
옛 결성군을 합쳐 홍성군이 되었다. 홍성은 홍주성(洪州城)의
줄임말로 산경표나 대동여지도에는 모두 홍주로 기재되어 있다.
호서지방의 주요 읍성이었고 이 고을을 중심으로 발전한 홍주는
서쪽에 일월산, 북쪽에 용봉산이 홍주를 호위하는 형국이란다.

마루금에서 1.5km 가량 벗어나 있는 용봉산(龍鳳山 381m)은
산이 크고 험하지는 않으나 산 전체가 기묘한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남한의 금강산'이라 불릴만큼 아름답다. 산 이름은
용의 몸집에 봉황의 머리를 얹은듯한 형상에서 유래한다.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한 숨 자고.. 길이 좋다)

이제 말미고개부터는 예산군에 들어서는데
지난 4구간 봉수산에서 만났던 예산을 5구간 장학산에서 작별하였다가
2달동안 에둘러 다시 예산의 서쪽 경계를 타게 된다.

양지바른 무덤가에서 점심으로 어제밤 마트에서 산
야채햄버그를 먹으려는데 맛이 이상한 것 같아 그만 두었다.
이대로 가면 오후 2시쯤이면 산행을 마칠 것 같아 점심은
산행 마치고 먹어도 될 것 같아 대신 물 한 모금 마시고
햇살이 내리쬐는 무덤가에서 30분 정도 맛있게 잤다.





(수덕고개(132m), 육괴정(六槐亭))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잘 먹었는데...)

수덕고개를 그냥 넘으려다 육괴정을 보고 가려고
내려갔지만, 그럴듯한 정자는 보이지 않고 일렬로 늘어선
식당들을 장식한 음식간판만 눈에 들어온다. 그러자 때가 때인지라
시장기까지 느껴 손님이 북적이는 집에 들어 산채비빔밥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주인에게 육괴정을 물었더니 육괴정은 정자가 아니고
음식점 앞 '느티나무 여섯그루'를 말하는 것이었다.





(해미에서 덕산으로 가는 40번 도로가 지나는 수덕고개)





(왼쪽으로 길이 잘 나있지만 마루금은 철조망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 희미한 길을 따라 올라야 한다.
잡목을 헤치며 오르면 암릉이 나타나고 암릉에 올라서면
조망이 트이면서 서쪽 아래가 훤히 보인다. 수덕고개에서
맛있게 먹은 점심이 오름길 발걸음이 붙잡는다.





(복당리 방향의 조망)





(조망이 훤히 트인 암릉을 타고 오르면)





(이내 키작은 소나무 숲으로 들고..)





(정상 직전 조금 거친 길을 오르면)





(덕숭산(德崇山 修德山 495.2m) 정상)

산경표에는 수덕산, 대동여지도에는 덕숭산으로 되어 있고,
국토지리원 고시지명은 수덕산으로, 예산군의 각종 자료에는
덕숭산으로 되어 있는 등 산이름이 2가지로 불리는데 대체로
덕숭산으로 부르는 것 같다. 덕숭산 정상에서 북쪽방향으로
우뚝한 가야봉과 원효봉이 키재기를 하는듯 하다.

도시 인근으로 오니 정맥길답지않게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20여 명이나 되는 젊은이들로 덕숭산 정상이 왁자지껄하다.
워크숍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덕숭산을 올랐다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그렇듯 힘든 산행이 싫은듯 다음에는 등산을 빼잔다.
유독 DSLR에 관심갖는 친구에게 사진을 부탁해 봤다.





(내일 지나 갈 가야산이 지척이고 그 옆은 원효봉인데..)





(뒷산 방향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저기는..)





(드디어 날머리, 오늘도 쉬운 길을 어렵게 걸었다)

다시 덕숭산을 올랐다가 45번도로가 지나는 나분들고개로
내려왔으니 40분 거리를 1시간 20분이나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유가 있어 크게 부담은 없었고 이런 일이 아니면 언제 그 길을
가 볼 수 있겠냐고 자위해 보기도 하지만 근래 방심하다 제법 옆길로
가는 것 같다. 카메라는 배터리가 다 되어 철조망도 조망바위에서의
조망도 담지못하고 갈림길이 없는 길로 내달려 45번 국도 절개지
위에 섰다. 마지막이다 싶어 셔트를 누르니 찰칵한다.





(절개지를 타고 내려 온 철사다리도 찍고..)





(고갯마루에 찜질방과 식당이 있어 얼씨구나 했는데..)

식당은 폐업중이고 찜질방도 수리중이라며 휴업중.
찜질방에 PC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김치국물부터 마셨는데
결국은 덕산까지 나가서 홍성으로 가고, 홍성서 해미로 갔다가
끝내는 서산까지 가게 될 줄이야.. 그만 홍성서 머물껄..
정맥길을 다니면서 고갯마루에서 느끼는 가슴아픈 풍경들..
한 때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았겠지만 새 길이 열리고
터널이 뚫리면 사람들은 썰물빠지듯 모두 빠른 길로 몰리고
고갯마루의 휴게소나 식당은 그만 문을 닫게된다.





(대치리를 지나는 버스 시간표)

버스정류장에 붙어있는 버스시간표는 언제 것인지..
버스가 오지 않는다.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걷는게 낫다.
길이 좋으니 손을 들기 미안할 정도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길이 좋으면 히치도 어려운 법, 경주하듯 내달리는 승용차는
그냥 보내고 RV나 승합차가 오면 손을 들어 보지만 대부분의
자동차들은 관심없다는듯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냥 내 달린다.
드디어 포터가 한 대 오길래 손을 들었더니 백발이 성성하신
분이 차를 세워 주신다. 어디까지 가느냐시길래 홍성 갈건데
가시는 데까지만 태워달라고 했더니 덕산까지 태워줬으면
좋겠는데 그기까지 못태워줘서 미안하다고 하시며 신평1리에서
내려 주신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속으로는 '오르신 내내
건강하시고 복많이 받으이소!'하며 복을 빌어 드렸다.
빤히 보이는 면소재지까지야 걷는게 주특기인데.. 거리도
얼마 안되는데다 걸으면서 시골풍경도 볼 수 있어 좋았다.
17시가 다 되어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는데 17:45분 버스가 있다.
정류장 옆 중국집에 들어 저녁먹으면서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중국집답잖게 얼마나 빨리 나오는지.. 먹고 어디 갔다오기에는
짧은 시간 그렇다고 기다리기에 제법 지루할 시간.. TV만 켜면
나오는 천안함 뉴스보며 주인 아주머니와 입만 열었다면
거짓말만 내뱉는 국방부를 성토하며 시간보낸다.







(홍성으로 돌아와 애마를 회수하여.. 꽃조개에서 마루금은..)

해미 가는 길에 아침에 조금 벗어나 올랐던 들머리를 찾았다
도로를 내느라 지형이 엉망이 되었지만 저 앞쪽 우뚝한 부분을 지나
바로 앞 도로를 건너 만해 동상 있는 쪽으로 오른다.





('한국고전건축박물관'을 기웃거리며.. 셔트 몇 번을 눌러본다)

해미 가는 길 멋진 기왓집이 있길래 차를 세우고 봤더니
'한국고전건축박물관'이었다. 시간이 지나 입장이 안되는데다
날도 어두워 밖에서 몇 컷 담아 본다.













(75)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 산 152-18에 소재한 한국고전건축박물관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대목장(大木匠) 전흥수옹이 설립한 박물관으로
전시관은 모두 3개로 나누어지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의 국보급 문화재
축소모형 150여 점을 전시하고 있으며, 박물관 입구에는 강을 객사문을
원형 그대로 복원해 놓고 있다. 앞으로 양반사대부가옥, 평민가옥,
초가삼간, 중국관, 일본관, 연수원등도 건립할 계획이라고 한다.
과거 목수들이 사용하던 연장, 기구, 건축재료 등을 전시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옛 건축발달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해미읍성, 너무 늦게 왔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에 소재한 사적 제116호의 해미읍성은
이 성은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병마절도사영으로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에 옮겨져서 해미읍성으로 이용되었고, 1914년까지
겸영장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 및 작청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다.





(성안 풍경)

전남의 낙안읍성, 전북의 고창읍성과는 달리 해미읍성은
관아와 군대가 주준하여 주민은 살지 않았다 한다.











(해미는 정해현과 여미현이 합쳐서 해미현이 유래라고 하는군요)







(깃발)







(성밖 풍경)







(성벽)

오늘 7시간도 채 걸리지 않을 길을 9시간 가까이 걸었다.
양지바른 곳에서 한숨 자고, 육괴정에서는 식당에 들려 점심까지 먹으며
여유를 부리다가 덕숭산에서 엉뚱한 길로 내려서는 바람에 1시간 가까이
알바까지 하다보니 그렇게 되긴했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고도 이른 시간에 산행을 잘 마칠 수 있어 감사하다.
 
내일 또 한 구간을 더 잇기 위해 하룻밤 잠잘 곳을 찾아 해미까지
왔는데 모텔은 보이지만 찜질방은 보이지 않아 인근 마트에 들려
해미에 찜질방 있냐고 물어봤더니 '해미에는 찜질방이 없으니 서산까지
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럴줄 알았으면 그냥 홍성에 머무는 건데..
주인 아주머니가 갑자기 '혹시 경상도 사람 아니냐?' 하며 묻는다.
맞다며 울산서 왔다 하니까 자신도 울산 무거동에 친정이 있다면서
무거동은 가끔씩 간다고 한다. 무거동이라면 나도 무거동인데..
세상 참 좁다. 여기서 동민을 만나다니.. 반갑기도 하고..
덕분에 소개까지 해준 서산의 '금강산보석사우나'를 쉽게 찾아
컴퓨터 사용이 가능하다하여 들었는데 컴퓨터가 없어 이렇게 여유있는
시간에 밀린 숙제하면 딱인데.. 특별히 할 일도 없고하여
일찍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