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정맥 8구간 (終, 진고개에서 구드래나루까지)

2010. 4. 15. 00:39山情無限/금남정맥(完)

 

 


금남정맥 8구간 (終, 진고개에서 구드래나루까지)




○ 산행일자 : 2010. 4. 10(토) 08:30 ~ 15:30 (7시간 00분)
○ 산행날씨 : 흐림, 비, 산행하기 좋은 날씨
○ 참석인원 : 원조산악회 금남종주대 18명
○ 산행거리 : 도상거리 : 18.5km        누적거리 : 133.2km
○ 산행코스 : 진고개-262봉-가자티고개-182.9봉-오산고개-금성산 통수대-부여여고-부소산 사자루-구드래나루
○ 소 재 지 : 충남 공주시 탄천면, 조촌면 / 부여군 부여읍



1. 구간별 진행시간

① 접근

05:25~08:25   이동(울산-진고개)

② 구간별 산행 시간

08:30         진고개 출발 (87m)

09:27         262봉

09:50~57      가자티 고개

11:06         조석산

13:14         석목고개

13:33         금성산(121.2m) / 통수정

14:00         부여여고

14:55~15:25   부소산(106m) / 사자루

15:30         구드래나루

③ 복귀

16:05~21:40   이동 (구드래나루~울산)



오늘은 금남정맥을 졸업하는 날이다.
역시 시작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그냥 끊임없이 가다보면
종착점에 닿게 되는 것 같다. 길지않은 기간, 멀지않은 거리에도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오늘 이렇게 끝내려 하니 얼마나 감사한가.
4시반에 일어나 짐을 챙겨 아지트 신복로타리로 나가니 버스가
막 도착하고 있다. 버스를 탔는데 그동안 함께 했던 몇 사람이
오늘도 보이지 않는다. 함께 했으면 좋으련만 아쉽다.

금남의 마지막 구간은 유서깊은 백제의 왕도 부여로 들어서지만
의외로 이 지역은 산꾼의 관심을 끌만한 지명이 없다. 들머리 진고개도
지도에만 표시되었을 뿐, 현지에서는 잘 불리지 않는 이름이고, 산 이름 하나
제대로 가진 봉우리가 없다. 금성산, 부소산 역시 특별히 산에
관심있는 사람 외에는 이름을 알지도 못한다. 정상석이 있을
자리에 정자가 있고 지도에는 삼각점도 여럿 표기되어 있다.
마지막 구간 보너스라도 받는듯 오르내림도 심하지 않은
산책길 같은 길을 걸어 마지막 부소산공원 길을 걸어
종착점 구드래 나루터로 간다 





(들머리 진고개)





(봄은 생명의 색깔로 변신중)





(160.5봉의 삼각점)





(오늘 부드러운 산책길의 서곡을 알리기라도 하는듯..)





(제비꽃도 얼굴을 쑤욱 내밀었는데..)

남산제비꽃인지 태백제비꽃인지.. 둘 중 하나일 것 같긴한데..
제비꽃도 종류가 하도 많아서..





(금강이 지나가는 쪽의 골안개)





(감나무골 고개(153m))

바로 발밑이 남산리에서 감나무골로 넘는고개.
감나무골고개를 건너 오늘의 최고봉 262봉 오르는 길은
20여분 지긋이 올라야 한다. 동네 뒷산같은 야산이지만
그래도 정맥은 정맥이다.





(오늘의 최고봉 262봉)

오늘 구간 최고봉인 262봉에 올랐지만 별다른 표식도 없고
허물어진 묘와, 덕지덕지 달린 시그널이 맞아줄 뿐이다.









(어떻게 이루어진 숲인데.. 이렇게 마구 잘라도 될까)





(이렇게 좋은 숲을.. 송림길이 정겹다)





(가자티고개(123m), 철망 개구멍 통과하느라..)

262봉에서 20분 정도 진행하니 아스팔트 도로가 넘어가는
가자티 고개. 절개지 아래 개구멍에 왠 사람들인가 했더니
서울 X산악회에서 온 금남정맥팀이었다. 우리와 역방향인
대 부대가 간발의 차로 개구멍에 먼저 들어서는 바람에
(40명이 넘는) 인원이 다 통과하기를 7분 넘게 꼼짝없이
기다려야 했다. 서울에는 역시 사람이 많은가 보다.





(우리도 개구멍을 통과하여.. 도로를 건너)







(제비꽃과 얼마있지않아 하얀 꽃을 피울 찔레)





(백장미님 만큼이나 고고하게 달려있는 세월시그널)

가자티고개를 올라 진행하던 마루금은 공주시 탄천면에서
부여군 조촌면으로 왼쪽을 넘기고 공주의 탄천면 경계를 타던
마루금은 신양고개를 조금 더 지나 187봉에 오르면 오른쪽을
부여읍에 넘기면서 종점 구드래나루까지는 부여군을 지난다.





(감투봉 갈림길)





(마루금은 하늘을 덮은 키 큰 참나무와 소나무 숲길을 지나..)







(진달래, 두견화라고도 하는 진달래를 소월은..)

진달래꽃 / 김소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23)





(182.9봉의 허물어진 성터)

둥글게 축대를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는 봉우리를
오르면 이후 잘 정비된 산책길 같은 등산로를 이어가는데
182.9봉 부터는 백제의 왕도 부여 땅이다.







(26)





(27)





(참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이 멋지다 했는데..)





(무슨 권리로 이렇게 좋은 숲을 훼파한단 말인가?)





(선진국은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벨 수 없다는데..)





(벌목지 너머로 보이는 곳은 능산리)





(청마산성 이정표)

편치않은 마음으로 벌목된 산허리를 돌아 오르니
등로에 '청마산성 01-04' 표지목이 서 있다.





(33)





(부여 청마산성(扶餘 靑馬山城))

'부여 청마산성' 안내판도 서 있다.
성터 흔적이 있는 돌무더기 앞에 '靑馬山城'이라고 쓴
표지석이 고색창연하여 꽤나 오래된 표지석이겠구나 하고
뒷면을 봤더니 '大韓民國'이라고 씌어 있는 것 아닌가!

이 성은 해발 118m 되는 산의 능선을 따라 쌓은
백제시대 최대의 산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6.5km이며
높이는 4~5m 가량된다. 성을 쌓는 방법은 흙과 돌을 함께 쓴
토석 혼축식이며, 형태는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이다.
포곡식 산성은 내부에 물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넓은 공간도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어 많은 인원이 장기간 머물러 살기에
좋다. 청마산성은 유사시 사비도성 내에 있는 군.관.민이 모두
함께 도피할 목적으로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성 안에는
군창으로 추정되는 큰 건물터가 3 곳이 있으며, 각시우물이라
불려지고 있는 우물터와 경룡사라는 절터가 남아 있다.

'청마산성'은 부여읍 능산리 산1-1에 소재한 사적 34호.





(청마산성에서 오산고개 내려서는 길.. 숲길이 좋다)





(오산고개를 건너)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넘는 오산고개 양쪽으로
민가가 턱밑이다. 이정표는 산꾼도 가스를 충전하고
가야하는듯 끝까지 가스충전소를 안내할 모양이다.
왠 이정표에 가스충전소를 그렇게 안내하는지..





(금남길을 홀로가는 울산분인가보다)





(숲 속에 왠 십자가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





(잘 손질된 무덤가에는 유난히 노오오란 개나리가..)





(표고버섯 재배단지)





(4번 도로가 지나는 석목고개)

표고버섯 하우스를 우측으로 끼고 내려서니
4번 국도가 지나는 석목고개. 한 시간 넘게 산길을 안내하던
그 '가나다LPG충전소'가 오른쪽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다.
작동되지 않는 건널목에 신호등은 있지만 작동을 않는다.
자동차들이 속력을 내어 달리지만 이쯤이야.. 88고속도로도
횡단한 대간꾼들 아닌가..ㅋㅋ 길 건너 석목리 버스정류장
부스는 통째로 떠밀려 넘어질듯 비스듬하게 서 있다.





(금성산을 향하여)





(여기는 숲속 표고버섯 재배단지)





(이동통신 중계탑 경고)





(오름길은 힘들다)





(수렛길같은 넓직한 길로)





(금성산(錦城山, 121.2m) 팔각정 통수대(統帥臺))

금성산 정상에는 팔각정이 서 있다.
그것도 삼각점 위에.. 부여의 각 성들을 지휘했다는
통수대에 올라서서 보니 부여시내도 보이고 금남정맥
마지막 봉우리 부소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통수대에서 바라보는 부소산 방향)





(통수대건립기)





(팔각정은 금성산 삼각점 위에 서 있다)





(가던 길을 뒤돌아 보고..)





(53)





(계백교)





(낙화암 시비)





(마루금을 찾아.. 궁터의 사선을 넘어..)

계백교를 지나 시멘트길을 따라 가는데 여기서부터
마루금 찾기가 쉽지않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 활궁터를 지난다.
오른쪽에 표적판이 셋이 보이는데 궁터로는 위험해 보인다.

이후 어디가 마루금이다 하기 어려울 정도로 평탄해진 길은
시내 골목길을 지나 도로를 건너지만 그래도 조금 볼록하게 마루금이
표가 난다. 부여도서관을 돌아가니 부여여고가 나왔다.







(시내를 통과 부여여고 정문으로 들어섰다)

부여여고 정문 앞에서 선두조 단체사진을 한장 남기고
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뒷쪽으로 향한다.







(목련)

여자고등학교답게 학교도 잘 꾸며져 있고
화단에는 각양각색의 꽃들이 봄을 노래하고 있었다.





(화단에 피어 있는 수선화)





(학교 뒷문(?)으로 빠져 나가니 부소산..)

학교 뒤편 철조망 사이로 샛길이 열려있고 그 길로
비탈을 조금 오르면 부소산 공원길과 연결이 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소산은 입장료 2000원을 내야하는
유료공원이라는데 우리는 본의 아니게 공짜로 들어왔다.
부소산에서 볼 것도 많은데 공짜로 들어와서 많이 보기
미안하게 되었다. 그럼 조금만 보고 갈까?







(영일루)

부여에 있는 부소산 동쪽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에서 보면 멀리 공주 계룡산의 연천봉이 아득히 바라다 보인다.
원래 이곳에는 영일대가 있어서 계룡산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이 건물은 고종 8년(1871)에
당시 홍산 군수였던 정몽화가 지은 조선시대의 관아문이다.
1964년에 지금 있는 자리인 부소산성 안으로 옮겨 세운 뒤,
집홍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영일루라고 고쳐 불렀다.
영일루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정면에는 '영일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다른 관아문에 비해 그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이 특징이다.





(낙화암 방향으로)





( ? )







(옛 군창지)

백제 때 군대에서 쓸 식량을 비축해 두었던 창고터로
부소산 동쪽에 있는 부소산성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군창지는 1915년 땅 속에서 불에 탄 곡식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1981년과 1982년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로
건물터의 규모를 자세히 밝혀냈다. 백제 때부터 자리잡은
이곳 군창지를 조선시대에도 다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가운데에 공간을 두고 동 서 남 북으로
건물을 배치하여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장송)

아직 손에 익지않은데다 산행하면서 들고 다니기 거추장스런
큰 카메라를 큰맘먹고 챙겨왔다. 꽤나 무게가 나가는 녀석이 힘들게
했지만 제대로 한 컷이라도 담으면 좋겠다 싶어 배낭에서 꺼낸다.
2~3년을 뜸들이다 장만했지만 아직 제대로 맑은 날을 못 만났다.
맑은 날 제 색깔을 한번 잡아봐야 하는데..







(반월루에 올라.. 부여 시가지가 펼쳐진다)

부여(夫餘)는 백제 26대 성왕 때(538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부터 이곳으로 옮겨 제31대 의자왕(660년)까지
123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던 왕도로, 동쪽으로 논산시,
서쪽으로 보령시와 서천군, 북쪽으로 청양군과 공주시,
남쪽으로 전라북도 익산시와 접하며 동서간 34.3km,
남북간 33.6km의 군이다.





(낙화암 가는 길)

사자루와 낙화암 갈림길까지 왔다. 구드래나루는
낙화암 가는 길 좌측 연리목 있는 볼록한 능선으로 내려가면 된다.
카메라 챙기는 사이 먼저 간 선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후미는 오지 않았으니 일단 낙화암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신이 난 아이들..)





(낙화암 위에 세운 백화정)

"백화정은 부소산성 북쪽 백마강변의 험준한 바위 위에
6각형으로 지은 정자로 백제 멸망 당시 궁녀들이 이곳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다. 죽은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하여
1929년에 세운 것이다. 정자의 바닥을 지반에서 높이 띄우고 남쪽에
나무계단 하나를 두어 출입할 수 있게 했다. 마루 바닥 주변에는
간단한 평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천장에는 여러가지 연꽃 문양을
그려 놓았다. 정자에 올라서서 보면 주변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 안내문 인용 -

낙화암은 부소산 서북쪽 강변의 단애로 백제의 700년 왕조가
무너지던 날 의자왕의 3,000 궁녀와 함께 최후를 맞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삼국유사를 인용하고 있으나, 이는 철저하게 백제를
무너뜨린 당사자인 신라가 문화대국 백제왕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3,000 궁녀는 궁녀가 아니라 대부분 쫓기고 쫓기던 병사와 민초들이라
한다. 3,000 궁녀는 패배한 의자왕의 사치와 방탕을 강조하려는
교묘한 각색이라는 주장으로 본다.





(낙화암 위 백화정 옆에 있는 천년송)





(아! 금강, 백화정에서..)

낙화암 절벽 위에는 1929년에 지은 백화정이 서 있다.
백화정에 서면 푸른 강물이 내려다 보이고
그 너머로 흰 모래톳이 곱게 펼쳐진다.
멀리 시선을 던지면 구룡평야를 적시며
유유히 흘러가는 금강줄기가 아스라이 이어진다.

금남정맥과 함께 한 금강은
전북 장수군 수분마을 뜬봉샘에서 발원하여
용담호를 거친 다음 대청호에서 큰물을 만든다,
대청댐을 빠져나온 금강은 미호천 갑천 물까지 합하여 흐르다가
이곳 부여에서 백마강이 된다. 백마강은 금강의 별칭으로
특별히 부여에서 그렇게 부르는데 그 유래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소정방의 무용담이 얽혀 있기 때문에 썩 유쾌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소정방이 부소산성을 공격할 때
안개가 자욱해서 강을 건너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 때 사람들이 이르기를 백제의 무왕이 호국룡이 되어
강을 지키고 있어 안개가 걷히지 않는 것이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소정방이 백마의 머리를 미끼로 용을 낚아
올리자 짙은 안개가 걷히고 백제를 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부여를 감돌아 흐르는 금강을 백마강으로,
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강 가운데 바위섬을
조룡대로 불렀다고 한다. 산경표에는 조룡산,
대동여지도에는 조룡대로 표기되어 있다.





(움, 겨우내 꿈을 키웠을..)











(사자루(泗자樓))

부여 부소산성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누각으로,
이곳은 달구경을 했다는 송월대가 있던 자리이다. 조선 순조 24년(1824)에
군수 심노승이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 임천의 관아 정문이었던 배산루를
1919년에 이곳으로 옮겨 짓고는 사비루라 이름하였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사방이 개방되어 있으며, 오른편 북쪽 칸에는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만들었다.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건물 앞면에는 조선 후기 의친왕 이강이 쓴
'사비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백마강 쪽으로는 '백마장강'이라는
현판이 함께 걸려 있다. 사비루는 사방이 트여있는 높은 곳에 있어
부여의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누각이다.





(시나브로의 忙中-閑, 팔도에게 걸렸다)







(구드래나루 가는 길)

진달래 / 신동엽

부소산 낙화암
미끼 묻은 바위서리 핀
진달래
너의 얼굴에서
사랑을 읽었다.

숨결을 들었다
손길을 만졌다
어제 진
백제때 꽃구름
비단 치마폭 끄을던
그 봄하늘의
바람소리여









(아! 종착점 구드래나루터.. 이유도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구드래나루의 '구드래'는
어원을 일본어 '구다라'에서 찾고 있다.
'구다라'는 '큰 나라', 곧 섬기는 나라, 본국,
대국(大國)이라는 뜻이며, 동시에 백제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말하자면 구드래는 먼 옛날 부여 백마강을 오르내리던 돛단배들이
쉬어가던 가장 큰 나루터쯤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

낙동정맥 끝내고 호남정맥 가면서 금남정맥도 같이
가려했는데 원조에서 계획이 잡히고 권유도 있고하여
호남을 끝내고 오는 바람에 몇 달 늦은 졸업인데다
하구도 아닌 허리춤에서 어정쩡하게 끝내는 바람에
낙동정맥이나 호남정맥의 종착점에 당도했을 때와 같이
상기되거나 야릇한 설레임은 없고 오히려 허전함이..
그러나 어쩌랴 목적지가 여기였던 것을..





(종착점에서 단체 기념사진)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이 열정 그대로 1대간9정맥 완주의 그날까지..







(어중간하게 끝난 금남정맥은.. )

금강은 구드래 나루 이후로도
논산천 물줄기를 받아안고 금강을 완성하며
서해를 향해 자세를 낮추며 유유히 흘러간다.

그렇게 길지 않은 130여 km 남짓한 금남정맥,
그러나 그 마저도 20km 넘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야반도주하듯 앞사람 꽁무니만 보고 내달렸고
15km 가량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을 지나왔다.
기상이야 하늘의 일이니까 차치하더라도 산에 드는 시간은
사람들 소관인데 산줄기가 어디서 어디로 이어가고
물줄기가 어떻게 갈리는지를 살펴봐야하는 다시 오기
쉽지않은 정맥산행이었기에 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산자분수령에 따른 실질적인 금강의 남쪽 울타리가 되는
대동여지도상의 금남정맥을 꼭 따라가 봐야 할 것 같다.
일단은 산경표상의 1대간9정맥을 둘러본 다음에..




 
(금남의 산줄기, 청색이 산경표 금남정맥, 주황색이 대동여지도 금남정맥)

백두산에서 뻗어 내려오던 백두대간이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 태백산
덕유산으로 줄기차게 내려오다 전북 장수군 백운산 가기전 영취산에서 갈래를
쳐 금남호남정맥을 이루어가다 전주 진안간 국도 모래재 위에 있는 조약봉에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으로 나뉜 후 운장산-대둔산-계룡산-금성산-부소산으로
이어가다 부여 구드래 나루에서 금강으로 스며드는 도상거리 130여 km의
비교적 짧지만 명산들을 꿰차고 있어서 정맥의 꽃이라 불리는 금남정맥.

이번에 지나온 금남정맥은 금강하구가 아닌 이곳 부여 구드래나루에서
맥을 다하다 보니 완전한 금강 남쪽의 울타리가 되지 못한다. 금강 남쪽의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는 장군봉 지나 작은싸리재 직전에 만나는 (진안군
주천면과 완주군 동상면, 운주면 삼면봉인) 750봉에서 서쪽 왕사봉쪽으로
방향을 틀어 이름없는 야산을 꿰차며 논산천의 물길까지 모아 명실공히
금강의 아래쪽 울타리가 되어 금강하구인 군산의 장계산에서 바다로
스며드는 산줄기이다 보니 정맥의 이름에 대한 논란이 되고 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에 따라 이 산줄기를 '금강정맥',
'실질적 금남정맥' 등으로, 금남정맥을 '금강기맥'으로 새 이름을
지어 부르기도 하지만 산경표상의 금남정맥은 그대로 두고 금강하구로
향하는 산줄기를 '대동(여지도) 금남정맥'으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