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 (2/3)

2010. 8. 16. 21:53여행/여행기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 (2/3)




○ 위  치 : 중국 요녕성 단동, 길림성 집안, 백두산    

○ 일  정 : 2010. 7. 30(금) ~ 8. 4(수)

7. 30(금)~31(토)   울산 ~ 인천 ~ 단동

31(토)          단동 ~ 집안 ~ 통화

8. 01(일)          통화 ~ 백산 ~ 백두산 ~ 통화

02(월)          통화 ~ 집안 ~ 단동

03(화)~04(수)   단동 ~ 인천



 

고구려 두번째 도읍지 집안(集安)을 찾아

날씨 : 맑고 무더움


 

8.02(월) 07:50 ~ 10:15   이동(버스) / 통화 ~ 집안

10:20 ~ 11:20   광개토대왕비

11:25 ~ 12:00   장군총

12:30 ~ 35      위나암성(환도성 / 차창 조망)

12:45 ~ 13:25   점심 / 김녕불고기(집안시)

14:05 ~ 14:45   조선족 가정 방문

14:45 ~ 19:20   이동(버스) / 집안 ~ 단동




 

통화에서 집안(集安) 가는 길


이번 여행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보는 것과,
오랫동안 버려졌던 고구려 역사의 현장을 보는 것이 주 목적인데
감사하게도 어제는 백두산에 오르니 날씨도 쾌청하게 하늘을 열어주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천지를 볼 수 있었으니 한 가지는 이루었다.
오늘은 또 고구려 두번째 도읍인 집안으로 가서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장군총 등을 돌아보며 그 옛날 요동벌을 호령하던 고구려 역사의
현장을 돌아볼 계획인데 한편으로 기대되기도 하면서 우리 고대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이틀 밤을 묵었던 만통호텔, 나와서 보니 별이 4개나 달려있다)

룸에 냉장고도 없고, 서비스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별이 4개나 달려있다. 우리나라는 호텔등급을 무궁화로 나타내지만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은 무궁화대신 별을 사용한다. 5개부터 특급호텔이고,
두바이의 버즈알아랍처럼 7성급 호텔까지 있다. 중국도 별을 사용해 등급을
표시하지만 엄격한 기준하에 별을 매기는 유럽이나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의
별은 특별한 기준없이 멋대로 붙히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듣긴
했지만 4성급 호텔로서는 시설이나 서비스가 못따르는 것 같다.

이 참에 중국의 호텔(숙박업소)등급을 살펴보면,
중국의 제일 낮은 등급은 여관(旅館)으로 우리로 치면 여인숙 정도로
외국인 숙박은 불가한 수준이라 한다. 그 다음은 초대소(招待所)로 우리의
게스트 하우스 수준으로 가격이 저렴하여 배낭여행자들이 이용한다고 한다.
다음은 빈관(賓館)으로 1~2성급 호텔로 우리의 모텔수준으로 이 등급부터 외국인들이
묵을 수 있는 호텔로 중국에서 외국인들은 원칙적으로 별 표시가 있는 성급(星級)
이상의 곳에서만 숙박을 할 수 있게되어 있다고 한다. 다음은 주점(酒店)으로
보통 4성급인데 3성급도 많은데 우리의 관광호텔 수준.일반적으로 주점이라하면
별이 3~4개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반점(飯店)은 5성급의 특급호텔로
반점이 붙으면 신뢰할 있는 수준이라고 한다.





(교문이 특이하고 지붕도 녹색기와로 이었다)





(도로변 풍경)

가이드에 따르면, 이 지역 사람들은 장뇌삼을 많이 재배하여
남루해 보여도 집집마다 현금 10만元(한화 1,800만원)은 갖고 있다한다.
중국은 가난하게 사는 것 같아도 부자들이고, 미국은 부자같이 살아도
빚쟁이들이고.. 과연 어느 편이 제대로 사는 방법인지?





(집안시로 이동하는 중에 시골 시장터에 둘러..)







(장터나 야시장 구경도 여행의 별미)









(시장통에 가 보면 볼거리도 많고.. 문화나 풍습 등을 파악하기 쉽고..)







(시골장터답게 종자(씨앗)도..)





(발목 묶인 닭들.., 이전 우리 시골장터 모습과 비슷하다)





(대화내용은 알아 들을 수 없으나 사뭇 진지해 보인다)







(위 휘발유, 아래는 경유, 우리보다 기름값이 비싼편)

우리가 타고 다니는 버스는 연료탱크가 어마어마하게 컸다.
하긴 중국에서는 도시에서 도시간 이동거리도 멀고 한번 출발하면
장거리여서 그런 것 같은데 연료를 가득 채우지는 않았다.
마을도 자주 나타나지 않고 주유소도 드문드문 보인다.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위나암성을 찾아







(고구려가 요동벌을 호령하던 역사의 현장에 왔는데..)

먼저 맞이하는 것은 2004년 5월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인증서를 붙힌 팻말.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켜려는 의도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우리는 요동벌을 호령하던 고구려의 기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도
고구려 역사를 중국사로 만들기 위해 조직적이고 치밀한 프로젝트를
진행해도 우리 정부는 꿀먹은 벙어리 마냥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일본이 온 세계지도에 독도를 죽도로 도배시키고 동해를 일본해로
바꾸기 위해 전세계를 상대로 외교력을 총동원하여 홍보하며 야욕을
불태우고 있을 때 우리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니 오히려 쟁점화되면
불리하다며 수수방관 무대응으로 일관하던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
한 나라의 정부가 하는 일이 민간단체 '사이버외교관 반크'가 하는 일
발바닥도 못따라 가지 않는가? 기둥뿌리가 썩어내려도 자신이 맡고 있는
동안만 문제없으면 된다는 역사의식이라고는 찾아보기도 힘든 모습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우리 역사를 침탈하기위해 치밀하게 치고
들어오는데 과연 우리는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 것인가?
한심한 건 학생들에게 국사도 안가르키는 나라 아닌가!





(고구려의 기상을 말해주듯 우뚝한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陵碑))

광개토대왕비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줄여서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그리고 현재 비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서남쪽 약 200m 지점에 있는
태왕릉(太王陵)을 광개토왕의 능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왜냐하면 부근에서 ‘태왕릉이 산악과 같이 안정되고 굳건하기를 원한다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라는 명문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비는 광개토왕의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왕 2년(414년)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당시 수도였던 압록강 유역인 중국 길림성
통화전구 집안현 통구성에서 동북쪽 약 4.5km 지점의 태왕촌(太王村)에 있다.
비는 각력응회암(角礫凝灰岩)의 사면석이나 자연스러운 모습의 긴 바위 모습이다.
비는 대석과 비신으로 되어 있고, 비신이 대석 위에 세워져 있으나, 대석과 비신
일부가 땅속에 묻혀 있다. 높이는 6.39m로 한국 최대의 크기로 고구려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너비는 1.38~2.00m이고, 측면은 1.35m~1.46m로 불규칙하다.
비의 머리 부분은 경사져 있다. 대석은 3.35×2.7m 이다. 네 면에 걸쳐 1,775자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통상 알려져 있다.(판독 여부가 불분명한 부분이 있고
비석이 불규칙하여 글자 수 통계에 이론이 있다.) 본래 비석만 있었으나,
1928년에 집안현 지사 유천성(劉天成)이 2층형의 소형 보호비각을 세웠고,
다시 1982년 단층형의 대형 비각을 세워 비를 보호하다가 최근 유네스코
등재를 하면서 주변을 정리하고 유리로 비각을 감싸고 있다.





(함께한 일행들..)





(비석을 제대로 찍어 보고 싶었는데 사진촬영금지라 하여..)

몰래 찍느라 제대로 찍지 못했다. 사진을 찍으려니 제지를 하는데
왜 사진을 찍지 말라는지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벽화나 전시장 같이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서 별도 조명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일광상태의 조명을 그대로
받고 있는데.. 비석의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만지지 말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플래쉬를 터뜨리는 것도 아닌데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천지와 광대토대왕비를 제대로 찍으려고 큰 카메라 메고 왔는데..


 

     


(광개토대왕비의 4면 모습, 클릭하시면 펼쳐집니다.)

북쪽의 거란, 말갈족을 다스리며
중화권 한족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가 멸망한 후 1천년 이상
세인의 무관심속에 묻혀 있다가 1875년 밭갈이하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한다.





(호태왕비비문/ 중국학자 양권휘(王建群)가 많은 글자를 복원했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제1면 1행 ~ 6행)은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의 세계(世系)와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을 기록해 놓았다. 둘째 부분(제1면 7행 ~ 3면 8행)에는
광개토왕 때 이루어진 정복활동과 영토관리(만주 정복, 백제 정벌, 신라 구원,
동부여 및 숙신 정벌)에 대한 내용들을 연대순으로 기록해 놓았다.
비문의 기록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64개의 성(城)과 1,400개의 촌(村)을 공파
(攻破)하였다. 왕의 외정에는 정토복속(征討服屬)과 토경순수(土境巡狩)가 있으며,
한반도 내는 전자의 대상이 되어 동일세력권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다.
그러나 영락 10년(400)조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왜는 축출의 대상이었고 정토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와 같은 실체를 찾아볼 수 없다.
셋째 부분(제3면 8행 ~ 4면 9행)은 능을 관리하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煙戶)의
숫자와 차출방식, 수묘인의 매매금지에 대한 규정이다. 이 부분은 고구려 수묘제
(守墓制)의 실상과 함께 수묘인의 신분 등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압록강 북쪽에 큰 비가 있다는 사실은 <용비어천가>를 비롯한 조선 전기의
몇 몇 문헌에 언급되어 있지만, 조선후기까지 비문을 직접 확인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청의 만주에 대한 봉금제도(封禁制度)가 해제된 뒤에야 비로소 발견되었다.
비석이 발견된 소식이 알려지자 여러 서예가나 금석학자들이 탁본을 만들었는데,
초기의 탁본은 대체로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다
정교한 탁본을 만들기 위해 불을 피워 비석 표면의 이끼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면의 일부가 탈락되었고, 또한 석회를 발라 비면을 손상시킴으로써 이후
연구에 논란을 일으켰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시키고
논쟁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 것은 둘째 부분의 신묘년 기사(辛卯年記事)이다.

일본에서 처음 입수한 비문은 만주지역에서 정보수집활동을 수행하던
포병 중위 사쿠오[酒句景信]가 1883년에 가져온 쌍구가묵본이었다.
이를 기초로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해독작업을 진행했고, 그 결과 1888년에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가 아세아협회의 기관지인 『회여록(會餘錄)』 제5집에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를 게재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다. 여기에서
신묘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 등을 깨고 신민으로 삼았다.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 : □는 훼손된 문자 )”고 해석했는데,
이후 이 신묘년 기사를 4세기 후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했다는『日本書記』의 기록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 결과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정설로 정착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한국인들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여 1908년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에
비문이 수록되었고, 1909년에는 박은식과 신채호가 언론에 간단히 소개하기도 했다.
민족주의사학자 정인보는 1930년대 말에 저술한 '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문석략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에서 ‘도해파(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왜가 신묘년에 왔으므로, (고구려/광개토대왕)가 바다를 건너가 왜를 깨뜨리고
백제와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일본과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

1972년에는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참모본부의 이른바
'석회도부작전설(石灰塗付作戰說)'을 주장하여 큰 파문이 일어났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현대사는 물론 고대사까지 조작 왜곡하여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극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과거 불분명했던 자획까지도
분명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석회도부의 결과로, 고마쓰[小松宮] 탁본을 참고하여
미다쿠[三宅米吉]가 쓴 「고려고비고추가(高麗古碑考追加)」가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하고, 그 결과 '왜이신묘년래도해파'(倭以辛卯年來渡海破)도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진희, 『광개토왕비의 연구』, 일조각, 1982)

이를 계기로 기존의 임나일본부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1981년 이형구(李亨求)는 비문 자형(字型)의 짜임새[結構], 좌우행과의 비교에서
나오는 자체(字體)의 불균형 등을 근거로 '倭'는 '後'를, '來渡海破'는 '不貢因破'를
일본인이 위작(僞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럴 경우 신묘년 기사는 “백제와
신라는 예로부터 고구려의 속국으로 조공을 바쳐 왔는데, 그 뒤 신묘년(331)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백제·왜구·신라를 공파해 신민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된다.
이 주장대로라면 일본 사학계의 이른바 ‘남조선경영론’이 근거를 잃게 된다.

지리적 이점이 큰 중국에서 최근에 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1984년에는 중국의 왕젠췬[王建群]이 장기간의 실지조사를 토대로 『호태왕비연구
(好太王碑硏究)』를 발표했는데, 그는 이제까지 잘못 읽은 부분은 시정하고 탈락된
문자를 복원했다고 주장하고, 비문의 총 글자를 1,775자로 확정했다. 그리고 비문에
등장하는 왜(倭)를 일본 기타큐슈[北九州]의 해적집단으로 보아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진희의 석회조작설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에도
한계가 발견되고 있다. 도회부분은 탁공(拓工)들이 고가판매를 위한 무지의 소치라고
주장하였는데, 발견 초기의 탁본은 고가 판매를 위한 것이 아닌 것임에도
조작된 것이 나타나는 부분에 대한 해명이 부족하다.

광개토왕릉비의 내용은 그 주체가 고구려(광개토왕)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나 그 외의 것이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이 비는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의 실상을 풀어줄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내용의 정확한 판독이 이루어짐으로써 한국 고대사를 분명하게 해줄 것이다.
나아가 한·중·일 3국간 특히 일본과의 관계를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3국간의 협동연구가 보다 심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한 결론은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장우>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인용>







(태왕릉과 석실 내부)

광개토대왕릉은 태왕비로 부터 약 200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직경 60m 높이 15m의 거대한 돌무덤. 원래는 이 릉도 피라미드형이었으나
내부가 도굴당하고 파헤쳐지는 바람에 능의 제 모습이 남아 있지않고
산처럼 되었다고 한다. 붕괴된 돌무덤 속에서 '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
이라고 양각된 명문(銘文)이 들어 있는 벽돌이 출토된데서
태왕릉(광개토대왕릉)이라 부른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와 왕릉이 있는 태왕촌 주변)

유네스코에 등재시키면서 주변 집들을 이주시키고 정비를 하였다고 한다.
우산같은 나무는 느릅나무





(호태왕릉에서 우산 방향, 장군총과 일직선상에 있다)





(빨래터, 이전 우리 시골모습 같다)





(다음은 장군총으로..)





(장군총 역시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시겼다)

"東北工程 2차 보고서"(2003년 10월 중국 사회과학원이 발간한
'古代中國 高句麗歷史續論')내용 중에 이런 글이 나온다.

".. 중국 정부는 학자들의 조직적 연구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도록집을 간행, 배포하는 등의 작업도 병행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남북한 등에서 나온 출판물이나 전람회에 전시되는
중국의 고구려 유물과 유적의 사진·실물에 대해서도
지적소유권(知識産權)의 원칙에 의거해 배상을 요구해야 한다. .."

중국이 동북공정을 어떻게 몰고 갈 것인지?
앞으로 우리의 고대사는 어떻게 되어 갈지..?





(장군총의 위용, 아파트 5층 높이다)





(장군총 앞에서..)





(고구려 돌무덤 중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장군총)

장군총은 집안에 남아있는 1만 2,000여 개의 고구려 무덤중에서
현재까지 가장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적석총으로 무덤은 총 7층의
단계식 피라미드로 방단계단적석묘(方壇階段積石墓 : 돌을 계단식으로
네모지게 쌓아올린 형태의 무덤)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길이가 5.7m인 엄청난 화강암 1100여 개를 계단식으로
쌓아 올렸는데 평면은 장방향으로 한 면의 길이가 31.5m~33m이며
무덤의 높이는 현재 14m로 아파트 5층 높이에 해당하는데 그 모습이
크고 웅장하고 빼어난 조형미로 동방의 금자탑으로 불린다.

이 무덤 주인을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일 것이라는
2가지 설이 있지만 현지 학자들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고분의 유품이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 일반적인 무덤의 명칭※

릉(陵, 또는 능)은 확인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세손과 왕세손비나
왕의 생모인 빈(嬪)과 왕의 친아버지의 무덤을 말하고,
묘(墓)는 그 외 왕족 혈통과 일반인의 무덤을 말한다.
또, 총(塚)은 주인이 누구인지 알 지 못하지만 벽화 등
특징적인 것이 무덤에 있을 경우에 부르는 이름이고,
분(墳)은 주인도 모르고 특징점도 없을 때 부르는 이름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아직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사방에 세워놓은 버팀돌, 무게가 50톤이 넘는다고 한다)

수 많은 고구려 고분들 가운데 이 장군총에는 특별한 점이
두가지 있는데, 바로 이 적석총 사방을 둘러싼 12개의 받침돌
(호석:護石)과 주변의 배총(陪塚)이다.

받침돌은 돌을 쌓아 올린 무덤이 빗물이나 외부압력에 의해
밀려 나거나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4면에 3개씩 총 12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유실되었다.







(장수왕 첩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은 묘실이 다 드러나 있다)

장군총의 배총(陪塚)은 현재 하나만 남아 있는데
과거에는 이 장군총의 네 모서리 방향에 있어
피라미드의 스핑크스처럼 수호신을 상징했던 것으로
추정하며 이 무덤은 장수왕 첩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인돌 형태는 묘실로서 묘실을 감싸고 있는 중상부의
기단들이 유실되어 묘실이 드러나 있는 상태다.





(고구려 두번째 도읍으로 추정되는 국내성(國內城) 터)

고사에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卒本)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졸본은 고구려의 첫번째 도읍인
흘승골성(紇升骨城)과 같은 곳이다. 고구려는 AD 3년(유리왕 22)에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그 위치는 대체로 지린성(吉林省) 지안현에
있는 성터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 나오는
통구성(通溝城)이 국내성이라고 보고 있다. 국내성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86m이며 동서가 남북에 비해 약간 길다.
고구려는 3∼427년 국내성을 수도로 삼았다가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를 행하였다.

국내성은 지금은 집안시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여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약간의 흔적만 남아있다.
중국은 20년 안에 아파트를 철거하여 국내성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한다. 중국이니까 가능한 일이기는 하겠지만
목적은 고구려 역사는 중국역사에 편입시키고 관광지를
조성하여 한국인을 상대로 장사하겠다는 계획아닐까.





(위나암성(尉那巖城)에서 산성자산성, 환도산성으로)

지안현 서북쪽 2.5km 지점 해발 676m에 위나암성(尉那巖城,

山城子山城)이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남측성벽과 망대 등
일부만 남아있다. 평지에 있는 국내성이 유사시 공격받을 경우 이곳으로
피란하여 대적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나암성은 뒤로 가파른 산능선을 두르고
있고, 앞에는 퉁거우강(通溝河)이 흐르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평가되는
곳으로 이곳에서는 국내성과 압록강까지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적의
움직임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다. 위나암성은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공격루트가 남문 한 곳이기 때문에 이곳만 방어하면 되는 난공불락의
산성이었다. 성벽 둘레는 약 7km, 동쪽 성벽 높이는 6m이다.





(집안시 고구려 유적분포도)





(자료 : 졸본성, 오녀산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복원하면서 원형을 변형,변질시켰다)

처음에는 계획되어 있었는데 도중에 스케쥴이 변경되는 바람에
고구려 첫도읍 졸본성(오녀산성)은 멀리서나마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단동에서 통화로 곧장 이동했더라도 구름이 짙게 끼고 비가 오는 날씨여서

보기어려웠을 것 같기는 한데 단동에서 통화로 바로 가는 길이 막혀

집안으로 우회해서 가는 바람에 구름속 모습도 보지 못했다.
오녀산성은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 오녀산에 있는

산성으로 고구려의 첫 도읍지 졸본성(卒本城)으로 추정된다.
환런현(桓仁縣) 중심에서 8km 정도 떨어진 해발 820m의 산악지대로.
200m 높이에 이르는 절벽의 천연 지세를 그대로 이용하여 장벽을 쌓고
동쪽과 남쪽의 산세가 완만한 곳만 성벽을 쌓았다. 졸본성은 전체가
평면으로 직사각형에 가까우며 남북길이 600m, 동서너비 130~300m.
1996년부터 1998년 발굴조사에서 고구려 유물 2천여 점이 발굴되었으며,
저수지, 망대, 병영 등의 건물터가 남아 있으며, 성안은 넓고 평평하며
중앙부에는 천지(天池)라고 하는 샘이 있는데 어떻게 요새같은
산악지대에 첫도읍을 정하였는지.. 2004년 다른 고구려 유적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고 복원한다면서 원형을 변형,

변질시켜 중국역사 유적화 하고 있다.





(4세기경 고구려 전성기 영토 / MBC !느낌표 배포지도 中)

위 지도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고구려 전성기 때 영토이다.

하지만 광개토대왕 비려(거란일족) 원정기를 살펴보면 대싱안링 산맥 서쪽까지

진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광개토대왕 때 이미 대싱안링 산맥 동쪽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우리나라에서 공식 인정하고 있는

이 지도에는 동부여에 복속에 대한 영역표시가 애매할 뿐더러, 북부여에 대한 영토

해석을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하고 있다. 또 남쪽으로도 한강 이남까지 광개토대왕이

진출하였지만 여기에 대한 영토 표시도 미흡하다.

진한색이 현재 교과서에 나오는 고구려 영토이고,

조금 옅은 색은 간접통치 영향권에 있는 영토며,

옅은 색은 고구려의 영향권에 있는 영역이었다.

 

직접 고구려 역사의 현장을 찾아보니 훼손되고 허물어지고
유물이 사라진 모습이 안타깝고 가슴아프지만 그 옛날 요동벌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기상만은 느낄 수 있었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역사마저 빼앗으려 하지만 하루빨리 남북한이 공동으로 대응하여
우리의 자랑찬 역사를 지켜내고 드디어는 남북이 통일되어
옛 고구려의 기상을 전 세계로 떨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나만의 감상일까..!

고구려 역사를 대략해 보면,

BC37 주몽 졸본에서 고구려 건국 (~A.D. 668)
BC28 부위염, 북옥저 병합
BC 3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
AD32 낙랑군 정벌
194 진대법 실시
209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
313 낙랑군 멸망시킴
372 태햑설치
400 광개토대왕, 신라에 군사지원
427 장수왕 평양 천도
598 수문제 30만 대군 침공
612 을지문덕 살수대첩 (수나라)
642 연개소문의 정변발생
645 안시성 싸움 승리 (당나라)
646 천리장성(千里長城) 완성
668 고구려 멸망 (보장왕 26년, 나당연합군)





(동북공정 2차 보고서(古代中國 高句麗歷史續論))
2003년 10월 중국 사회과학원이 발간한 (고대중국고구려역사속론)이라는 책은
동북공정의 2차 보고서격이다/북한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만수산에 위치한 왕건 왕릉


이번 고구려 유적지 극히 일부를 주마간산식으로나마 보며
옛 고구려의 기상을 느낄 수 있어 감격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우리 역사를 빼앗기 위해 목을 조여오는 중국의 치밀하고도 조직적이며
광범위하게 현실화되고 있는 동북공정의 후속 모습을 보며 전율을 느낀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에 큰 도전이 다가오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하고 있는가?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라고 알려지고 있다.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동북문제를 국가의 핵심연구과제로 지정 개발연구작업을 준비하여
2002년 국책프로젝트 "동북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
선포식을 통해 5년 간 약 3조원의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고구려를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으로 규정하는데 역점을 두고 진행했다.
고조선을 부정하고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으로 원래부터
평양도 중국영토였다는 식의 주장까지 하며 기존 한반도 역사를
통째로 뒤엎는 주장을 계속하고 있고, 고구려 유적이 집중된 지안
등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작업도 병행하며, 2004년 고구려 유적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고, 동북공정은 학술적 차원을 넘어
전방위적으로 확대하여 이제 일반인은 물론 교과서에까지 실어
학생들에게까지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겠다고 있다.
중국은 왜 고구려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인가,

첫째로, 중국내 조선족의 동요를 막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다.
중국은 이미 서북공정을 통해 티벳, 위그르, 신장 자치구 등
소수 민족과 관련된 역사문제는 이미 마무리한 상태라 한다.
둘째로, 지금의 조선족 자치구 등 남북통일 이후 생길 수 있는
분쟁에 대비한 장기적인 포석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셋째로, 북한 지역에 대한 영유권 지배권까지 염두에 둔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패권주의적 전략이 드러난 것으로
단순히 역사문제로만 한정해 바라볼 수만 없다는 점이다.

이 싯점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적 차원의 관심과 지원,
특히 남북한 공동의 체계적인 연구와 대응이 시급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할 연구기관 설립이 필요할 것 같다.
고구려의 역사와 기상은 늘 자부심이 되어오지 않았는가?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빼앗긴다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송두리채 빼앗긴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훗날 후손들에게
뭐라 할 것인가? 우리 역사 바로알기와 역사 지키기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참에 고구려 왕의 계보를 살펴보면..)





(퉁거우강(通溝河))





조선족 가정 방문





(집안 압록강변 김녕불고기 식당에 들려 점심을 먹고..)







(중국땅에서 한국에서 보다 더 한국음식을 많이 먹는 것 같다)





(집안시는 시가지가 깨끗하고 잘 정돈된 도시였다)





(그늘에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금 40돈짜리 목거리를 걸고.. )





(점심먹고 잠시 압록강변에 나갔다)







(물이 많이 빠졌는데도 강 건너 북한 쪽에는 물에 잠겨..)







(조선족 가정(가이드 김순씨 친정집) 탐방)







(옥수수, 계란도 삼고, 돼지고기도 굽고.. 완전 잔치집 분위기)





(텃밭도 있는 아담하고 잘 정돈된 시골집)





(마당 한 켠에는 청포도가 익어가고..)







(안방, 작은 방도 구경하고..)





(부엌에도 들어가 보고..)





(그늘 밑에서는 연회가 벌어지고..)

가이드 김순씨 가정은 교육자 집안으로,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직 하셨고,
가족 중 또 다른 분도 교사가 있고, 김순 가이드도 초등학교
교사라고 하였다. 가정은 주위의 중국 가정들보다는 잘 사는
편이고, 아버지와 오빠도 근래 한국에 아르바이트 하러 나갔다
왔다 한다. 어머니는 시골 옆집 아주머니같이 다정하고 친근하게
맞아 주시고 많은 음식을 준비해 주셨는데 점심을 먹고 곧바로
방문한 바람에 그 많은 음식을 남기고 오기가 미안했다.





(텃밭에서 딴 고추와 호박)





(조금 있으니 한국 아버지가 사줬다는 베르나를 타고)

장뇌삼과 주문한 참깨를 트렁크에 싣고 나타났다.
누구 말이 맞고 어느 것이 진짠지 알 수 없지만 가이드 집
안마당에서 이뤄지는 일이라 모두 무장해제당한 기분.
싼 맛에 장뇌삼도 맛 보고 주문한 참깨도 찾아 챙긴다.





(?강, 옥수수밭이 흙탕물에 잠겨 버렸다)

지루하여 차를 세우고 잠시 볼 일도 보며 여독을 푼다.
강으로 돌팔매질을 하는데 바로 밑에 보이는 강이 얼마나 먼지
강을 넘어갈 것 같은 돌맹이가 강에 떨어지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합하듯 모두 달려들어 돌팔매질을 하는데 속수무책, 그러다가
조금 가까워 보이는 쪽으로 던지니 돌맹이가 강에 떨어지는게
보인다. 그러자 다시 버스에 올라 단동으로 향한다.





(6년전 백두산 가는 길에서 인상깊게 봤던 루드베키아)





(압록강 하구.. 이제 거의 단동이 다되어 가나 보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