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지도, 소매물도 등대섬, 그리고 통영나들이 (5/5)
2009. 8. 7. 09:58ㆍ여행/여행기
2009. 7. 4 ~ 5
낯선 곳을 여행할 때
여행이 훨씬 재미있고 이해하기도 쉽고 대략의 방향과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므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해외여행 때 잘 이용하는 방법이다. 도시마다 그 도시를 상징하는
높은 타워나 건물이 있는데 도쿄의 도쿄 도청, 상해의 동방명주탑,
타이페이의 타이페이 101, 토론토의 CN타워 등이 좋은 예다.
물론, 형편이 여의치 않을 때는 먼저 바닥을 훑고
나중에 전망대에 올라 정리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일테고...
이제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에 올라 통영시내와 섬과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바다를 감상하고, 피톤치트향 그윽한 편백숲,
해저터널, 박경리 생가, 동피랑 골목화랑, 충렬사, 세병관 등을
가야하는데 시간관계상 다 돌아볼 수는 없을 것 같고..
다음에 또 오기위해서라도 몇 곳은 남겨두어야 할듯..
12. 이번엔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에 올라...
(여자들만 케이블카 타러... 남자들은 차를 대기시키려 미래사로 가고..)
(케이블카를 타고 미륵산을 오르면서 보는 통영앞바다)
통영시 남쪽, 미륵도 중앙에 우뚝 솟은 산이 미륵산(461m).
미륵산 자락에는 용화사와 산내 암자 관음암, 도솔암, 미래사가 있고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명산으로서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울창한 수림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갖가지 모양의 기암 괴석,
바위굴이 있다. 약수, 봄 진달래와 가을 단풍이 빼어나고 산정에 오르면
한려해상의 다도해 조망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게 보이며,
청명한 날에는 일본 대마도까지 조망할 수 있다.
한려수도 조망 케이블카는 국내 최장(1,975m).
미륵산 정상에 오르면 한산대첩의 역사적인 현장과 한산도에서
여수까지 300리 한려해상국립공원, 일본 대마도, 지리산 천왕봉,
여수 돌산도까지 조망이 가능하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미륵산 전망대 오르는 길)
(미륵산 전망대에서 본 통영시 전경)
한려수도 삼백리 물길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경남 통영은
비취빛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150여개의 크고 작은 섬들..,
섬과 바다가 연출하는 빼어난 풍광으로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통영.
더욱이 맑은 자연과 함께 온화한 기후, 한산대첩의 역사적 문화유산에다
극작가 동랑 유치진, 시인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소설가 박경리,
미술가 김용주, 전혁림, 이한우, 김형근 등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이 태어난
문화예술의 고장으로 곳곳에서 역사와 예술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미륵산 정상이 바로 위지만...)
가이드한다고 남자 대표로 케이블카 타고 올라온 것이 조금 미안..
미륵산 정상을 오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등산복장도 아닌데다
미래사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들 생각에 서둘러 하산한다.
13. 하산하는 길에 편백숲에 들러 호흡을 가다듬고...
(미륵산 전망대에서 미래사로 내려가는 길 처음엔 거칠었으나 나중에는..)
(삼나무 숲길로..., 편백나무와 어떻게 다른지?)
미륵산에서 미래사 내려가는 길의 쭉쭉 뻗은 나무는 삼나무라하고
미래사 입구의 나무는 편백나무라고 하는데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미래사 입구의 편백나무숲, 숲사이로 난 오솔길)
미래사 입구에 있는 편백나무 숲, 피톤치트향이 코를 자극한다.
이 숲은 70여 년 전 일본인이 심어 가꾸다가 해방이 되어 돌아가자
미래사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고 한다. 보기에도 시원한 하늘높이 뻗은
편백나무들... 숲 사이로 난 흙길은 맨발로 걸었으면 좋겠다
14. 해저터널에도 갔다오고
(규모는 크지 않았으나 아직도 현지인들이 소통하는 편리한 도로)
1년 4개월에 걸쳐 1932년에 건립한 동양 최초의 바다 밑 터널.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 규모이다. 바다 양쪽을 막는 방파제를
설치하여 생긴 공간에 거푸집을 설치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하여 터널을
만든 뒤 다시 방파제를 철거하여 완공했다. 터널 입구는 목조기둥에 왕대공
트러스 구조이다. 예전에는 통영과 미륵도를 연결하는 주요 연결로였지만
충무교와 통영대교가 개통되면서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양쪽 터널 입구에 한자로 ‘용문달양(龍門達陽)’이라고 쓰여 있는데
‘용문을 거쳐 산양(山陽)에 통하다’라는 뜻이다. (용문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물살이 센 여울목으로 잉어가 여기를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산양은 바로 미륵도이다.
경남 통영시 당동~미수2동에 있다. [네이버백과사전]
(터널 내부, 한쪽 벽면에는 통영을 소개하는 간판이 설치되어 있다)
(통영의 문화예술인 소개도 하고...)
(한번쯤 가 볼만한 곳)
아직도 현지인들에게는 편리한 길이자 관광객들에게는
찾고 싶은 여행지. 관광객들의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정겹다.
시간이 부족하여 사진촬영을 제대로 못했지만 터널내부의 조명이
적당한 어둠이 사진찍기에도 좋은 소재가 될 것 같았다.
갈길이 먼데 벌써 오후 네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아직 충렬사, 세병관, 박경리 생가, 동피랑 골목도 가봐야 하는데
갈 길이 멀어 다 가보지는 못할 것 같다. 일단 충렬사로 향한다
15. 통영에 오면 꼭 들려야 할 충렬사...
(삼문(三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충렬사 입구 정문)
선조 39년(1606) 제 7대 통제사 이운룡이 왕명으로
이충무공의 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
경내에는 이충무공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비롯하여
내삼문, 중문, 외삼문, 정문, 홍살문 등 다섯 개의 문이 있으며,
중문 안에는 향사(享祀) 때 제수를 준비하던 동재(東齋)·서재(西齋)가,
외삼문 안에는 사무를 관장하던 숭무당(崇武堂)과 인재를 양성하던
경충재(景忠齋)가, 외삼문 좌우에는 충렬묘비(忠烈廟碑) 를 비롯한
6동의 비각이, 외삼문 밖에는 1988년에 복원한 강한루(江漢樓)와
전시관 등이 있다. 지금 정침과 외삼문에 걸려 있는 충렬사「忠烈祠」
현판은 현종 임금의 사액현판(賜額懸板)으로 문정공 송준길의 글씨.
* 규모 - 부지 2,743평, 연건평 220평, 전시관 35평
(강한루(江漢樓))
정문을 들어서 동백나무를 지나면 아름다운 누각 강한루가 나오는데
강한루는 통제사 이승관(충무공 8세손)이 1840년에 지었다고 한다.
'강한루'라는 제호는 중국의 옛지명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강한은 양자강과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곳으로 삼국지의 무대가 되어온 중국의 요충이다.
그 곳은 중국의 서호에 비견되는 이름난 경승지로 충렬사를 찾는 시인묵객들이
여기에 올라 충무공의 덕을 되새기며 동백고목과 후원의 푸른 죽림을 자주
시제(詩題)에 올렸던 유서깊은 누대이다. 전형적인 조선의 팔작지붕
양식으로 1988년에 복원된 건물이다.<출처: 통영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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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윗쪽에 위치한 충렬사)
1598년 11월 19일에 이순신 삼도수군 통제사가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1633년에 향인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를 슬퍼하여, 초옥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 추모함에 따라 현령 이성건이 충민공비를 세웠다. 1643년에
충무공 시호가 책봉되었고 1658년에 조정에서 사당을 신축함과 동시에
충민공비를 매몰하고 이 충무공비를 건립하였다.
1973년에 남해 충렬사가 사적지 제 233호로 지정되어 재정비 사업중
매몰된 충민공비가 발견된 것을 다시 세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진왜란중 노량해전에
참전 1598년 11월 19일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하였다. 공의 유구는
최초로 관음포에 올려졌고 이곳 남해 충렬사에 안치되었다가
고금도를 거쳐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로 운구되기전의 가묘이다.
혜숙씨는 공손하게 충무공 영정을 향해 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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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꼬부부의 다정한 모습, 다정하면 모습도 닮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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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에 전시되어 있는 충렬사 팔사품)
팔사품은 중국 명나라의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 온
8종류의 물품이다.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 수군도독 진인이
충무공의 뛰어난 전략과 빛나는 전공을 보고하자 강동한 신종이
충무공에게 지휘관을 상징하는 8종류의 물품을 특별히 보내 주었다.
팔사품은 임금이 내린 8종류의 물품이란 뜻으로 통제영에 보관되어
오다 1795년에 충렬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사품은 도독인(都督印) 1개, 호두령패(虎頭令牌) 2개, 귀도(鬼刀) 2자루,
참도(斬刀) 2자루, 독전기(督戰旗) 2폭, 홍소령기(紅小令旗) 2폭,
남소령기(藍小令旗) 2기, 곡나팔(曲喇叭) 2개로 8종류 15개이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꼼꼼히 보며...)
(전시관을 둘러보고 이제 세병관을 향하여...)
(충렬사 담벽에 붙어 핀 꽃, 이름이 뭐지?)
인근에 있는 세병관을 갔다 오려는데 재일씨는 하루종일 운전하느라
피곤한 것 같다. 3명은 충렬사 주차장에서 쉬고 5명은 세병관으로 갔다.
16. 갈 길이 바빠도 인근에 있는 세병관까지...
(세병관으로...)
(세병관에 들어서면 처음 나오는 망일루)
망일루(望日樓)는 광해군 3년(1611년) 제10대 우치적(禹致績) 통제사가
세운 통제영의 종루로서 화재로 다시 복원하였으나 훼파되어 2000년 10월
다시 복원하였다고 한다. 편액은 제12대 장태소 통제사가 직접 써 걸었다
세병관 앞에 자리한 웅장한 규모의 2층 누각으로 이 아래를 통과하여
세병관으로 드나들수 있어 일명 세병문이라고 부른다.
(세병관에 들어서려는데 안에서 영화촬영한다고 2시간 후에 오란다)
세병관을 들어서려는데 젊은 여자가 막무가내로 제지를 한다.
낯선 사람이 자기집 안방에 들어가려는 것을 막듯이... 안에서 영화
촬영중이라며 무조건 들어갈 수 없다며 2시간 후에 오라고 한다.
젠장! 5시가 다 되어가는데 2시간 후라면 7시에 오란말인가?
세병관을 전세 내었나? 오늘 여기서 촬영있다는 이야기도 들은적 없고
입구에 흔한 안내판 하나도 세워놓지 않고... 양해라도 구할 것이지...
촬영중이면 카메라 피해 세병관만 보고 오겠다며 실랑이를 벌리다
겨우 문을 들어섰는데 촬영을 벌써 끝내었더만..
(세병관)
세병관은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통제영을 이 고장 두룡포에
옮겨온 이듬해인 선조 38년(1605) 그해 7월 14일에 준공한 통제영의
객사이다. 세병관은 정면 9칸, 측면 5칸의 단층팔작 지붕으로 된
웅장한 건물로 모든 칸에는 창호나 벽체를 만들지 않고 통칸으로
개방하였다. 우물마루로 된 평면바닥의 중앙 일부를 한단 올려 놓았는데
여기에 전패를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장대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워 기둥 윗몸은 창방으로 결구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식이지만,
익공식 수법과 다포식 수법이 많이 보인다.
기둥 사이에는 창방 위에 직접 화반을 놓아 주심도리 장여를
받치고 있다. 가구는 십일량가로서 대들보를 양쪽 내고 주위에
걸고 이 위에 동자주를 세워 중보를 걸고, 다시 동자주를 세우고
종보를 걸었다. 종보 위에는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내고주와 전면 평주 사이에는 퇴보를 걸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용마루, 합각마루,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였다.
(영화촬영하느라 제대로 사진도 못찍었다)
통제를 뚫고 세병관에 들어가기는 겨우 들어가 마치 큰 잘못이나
한 것같이 조용조용 관람을 하는데 영화사측에서 한 명이 오더니
배우들은 찍지 말라고 한다. 알만한 얼굴을 한 사람도 없더만...
에구 세병관이 이런 코믹영화나 찍는 장소가 되다니..
(통제영 복원 계획도)
통제영(統制營)이란 충청 전라 경상도의 삼도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을 말하는 것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당시 직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리고 장군으로 하여금 삼도수군을 통할하게
한다.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다 새로이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으나 이 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이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를 따라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고 전란이 끝난 후에도 거제도 오아포, 고성현 춘원포 등지로
옮겨 다니며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선조 37년(1604) 9월 9일
윤허를 받은 이경준 제6대 통제사가 이 고장 두룡표(頭龍浦:통영의 옛이름)에
통제영을 이설하면서부터 통영의 역사가 열리게 된다.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이곳에 터를 닦고 2년 뒤인 선조 38년(1605)에
세병관(보물 제293호),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곳은 고종 32년(1895)
폐영될 때까지 292년간 208명의 통제사의 지휘를 받으며 존속되다가 일제시대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사라졌다.
당시 건물중에 남아있는 것은 세병관 뿐이며, 1987년 복원된 수항루 1동과
최근에 복원된 망일루(2000)와 운주당(2003)이 있다. 그밖에 통제영지
대부분의 지역은 관공서와 주택들이 들어 서 있다.
(수항루)
수항루는 임진왜란의 승첩을 기념하기 위해 숙종 3년(1677)에 세운
누각이나 일제 때 훼철되었다. 본래 이 건물은 한일은행 근처에 있었으나
이 일대는 번화가여서 부득이 통제영의 본관인 세병관 경내로
1987년 이전 복원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저녁먹고 울산으로... 통영이여 안녕!
(점심겸 저녁을 먹고... )
여행에선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지...
그것이 그 지방 고유의 특별한 음식이라면 더 좋고...
즐거웠던 순간들은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 아름다운 추억으로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로 하고... 이제 마무리 하며
다시 만나기 위해 이별 할 시간...
(1박2일 짧았지만 긴 여운을 남기며..., 통영을 떠나 집으로...)
하룻밤 이틀낮 여행으로 너무 길게 쓰는 것 아닌가?
그렇다. 시간이 있으면 좀 정리라도 했을텐데 그냥 나열하다 보니
애초 예상했던 것 보다 너무 늘어져 버렸다.
휴~ 이제 밀린 숙제 다한 기분.
나녀온지 한달만에.. 그때 그때 메모한 것과 기분을 되살려 써 보려했지만
마치 표백된 종잇장같이 무미건조 한 내용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감동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기억에 남는 멋진 여행이었다는 것이겠지?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꼴이 된 것 같아 아쉽고 주절거리다 보니
군더더기만 늘었다. 처음엔 3번 정도로 나누어 쓰려 했는데 시간이 없어
축약하지 못하고 5번이나 쓰게 되는 바람에 더 시간을 잡아먹고...
지금까지 정리를 하면서 느끼는 느낌은.. 한마디로 좋았다.
역사와 예술이 살아숨쉬는 통영을...
오랫만에 정든 옛 이웃들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좋았고,
좋은 때 멋진 여행의 기회를 만들어 줘서 고맙고,
준비하고, 안내하고, 운전하고, 진행하느라
수고한 손길들이 고맙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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