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 (3/3)

2010. 8. 20. 20:46여행/여행기


백두산과 고구려 유적지를 찾아 (3/3)




○ 위  치 : 중국 요녕성 단동, 길림성 집안, 백두산    

○ 일  정 : 2010. 7. 30(금) ~ 8. 4(수)

7. 30(금)~31(토)   울산 ~ 인천 ~ 단동

31(토)          단동 ~ 집안 ~ 통화

8. 01(일)          통화 ~ 백산 ~ 백두산 ~ 통화

02(월)          통화 ~ 집안 ~ 단동

03(화)~04(수)   단동 ~ 인천


 

 

단동, 압록강 풍경들..
( 날씨 : 맑음, 박무 )


8.02(월) 19:30 ~ 20:15   저녁 / 평양고려식당

20:30           숙소투숙(단동호텔)

21:15 ~ 22:15   압록강 야경

8.03(화) 05:30 ~ 07:00   압록강변

~ 08:40   식사후, 단동호텔 출발

09:10 ~ 11:00   박작성(호산장성), 일보과

11:25 ~ 12:00   압록강 단교

12:20 ~ 14:10   점심, 쇼핑

14:20 ~ 15:00   이동(버스) 시내 ~ 단동항, 출국수속

15:00 ~         이동(단동페리) / 단동 ~ 인천

8.04(수)       ~ 09:00     " (이후 한국시간)

09:30 ~ 10:15   하선, 입국수속




 

저녁은 (단동) 평양고려식당에서





(저녁 먹으러 들린 평양고려식당)





(깔끔하고 정갈하다. 여행기간중 제일 맛있게 먹은 음식)

제일 먼저 순대가 나오고, 몇 가지 요리가 차례대로 나왔는데
음식이 정갈하고 맛도 담백하다. 특히 가운데 보이는 떡 같기도 하고
빵 같기도 한 음식은 처음 먹어 보는데 쫄깃하고 달콤하다.







(반갑습니다. 식사후 공연도 보며..)

다른 북한식당과 마찬가지로 이 식당에서도 식사중에 공연을
하는데 악기도 잘 다루고 노래도 잘한다. 꽃다발을 나눠주기는 했지만
요즘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남쪽 가요는 부르지 않았다.









(짧은 공연이었지만 즐겁고 흥겨운 시간..)





(고려식당 맞은 편 건물)




압록강 철교 야경








(압록강 중조우의교 야경)

이번 여행 내내 동북공정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고,
호텔이 잠자리를 불편하게 했다. 이틀 밤을 보낸 통화의 만통호텔은
냉장고가 없었고, 오늘 묵을 단동호텔은 화장실이 좁은데다
샤워기를 틀면 물이 화장실 변기 윗쪽으로 바로 떨어져
화장실 전체가 물바다가 되어 샤워도 제대로 할 수 없다.
중국여행중 이런 호텔은 첨이다. 방에 있으려니 답답하여
강바람이나 쐬며 야경을 보러 카메라를 챙겨 압록강변으로 갔다.





(단동역 앞 풍경, 毛주석 동상, 앞에 보이는 호텔이 단동호텔)

야경을 보고 돌아오니 역광장 毛주석 동상아래에 가이드 정애씨와
박형 부부도 나와 있었는데.. 박형 방도 샤워기를 틀면 방으로 물이
들어 온다고 한다. 젠장! 가이드에게 방 좀 바꿔달라 했더니.. 한참 후.
(조선족) 가이드가 다른 방이 없다며 가이드 방과 바꾸자하지만 그 방을
쓰는 누군가는 불편을 겪어야 할 터.. 그냥 사용하기로..





이른 아침 압록강변 모습들..





(이른 아침 거리 풍경, 세발 자전거에 부인을 태우고..)





(강변 문화광장의 조형물)





(강변 문화광장 풍경, 광장바닥에 글씨를 쓰는 두 사람)







(이른 아침부터 노상에서 물건을 판다. 위는 북한돈..)







(곳곳에서 제기차기와 체조, 운동을 하거나..)





(노인들은 햇살아래 담소하며 아침을 맞는다)





(압록강변 문화광장에 딸린 공원)







(압록강 철교(중조우의교), 강 건너 신의주)







(압록강 철교(중조우의교와 단교))

1910년 첫 대교가, 1943년 두번째 대교가 건설되었으나
첫번째는 한국전쟁때인 1951년 2월 폭파돼 아직까지 끊긴채
남아있고, 철로와 도로 겸용인 2번째 대교는 1950년 8월
역시 폭파 되었으나 나중에 복구돼 "중조우의교"로 불리며
북한과 중국간의 중요한 통로역할을 하고 있다.





(자료 / 위화도 위성사진)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수 십 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던
용맹한 장군 이성계의 무패의 신화도 이 위화도 회군으로 빛을 잃었고
결과적으로 왕조 교체로까지 이어져 조선왕조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비록 큰 나라이긴 했지만 나라를 세운지 20년 밖에 되지 않은 요동벌의
명나라로 진군하여 고구려 옛 땅을 회복하였더라면, 오히려 큰 나라가
되지않았을까? 그랬으면 지금같이 뗏놈들이 우리 고대역사를 침탈하려는
엄두도 못낼텐데..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거스르는 일이 옳지 않다"며
회군의 명분을 삼더니 결국 조선왕조 500년은 큰 나라를 너무나 잘 섬기는
사대주의자만 양산한 바람에 지금도 간 빼고 쓸개 빼고 미국 중국에
빌붙어 주체성도 정체성도 모호한 윗분들이 설쳐대는 것 아닌가?
'위화도 회군'을 어찌 한마디로 정의하겠냐만 중국땅에서
위화도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심란하기만 하다.







(단동시가지 모습들..)

단동(丹東)은 요녕성 동남부인 압록강 하구부의 신의주 맞은편에
위치한 면전 1만 4918㎢, 인구 239만명인 중국 최대의 접경도시로
조선족이 1만 5천여명, 북한사람 3,000여 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자 당나라에서
'안동도호부' 를 설치하여 요동을 보호하기 위한 요충지로 삼았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는 단동은 여전히
한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삶의 접경지대로 대련이나 심양을
경유하거나 페리를 타고 가면 약 16시간 이상이 소요되지만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 단동은 동북3성의 전초기지로서 고구려 유적지는 물론
한민족의 역사와 애환이 서린 곳으로 백두산으로 이동하기에도 편리하다.
옛 이름은 안동(安東)이었으나 1965년 도시이름을 '아침 해가 뜨는
붉은 도시'라는 뜻의 단동으로 바꿨다고 한다.





(단동에서 북경가는 침대버스)

소요시간 10시간, 요금 180元
기름값은 우리보다 비싼데 버스요금은 많이 싼듯..





(단동호텔 식당 메뉴, 아침을 먹고..)





연개소문이 태종의 고구려 침략에 맞서 싸웠던 박작성으로..







(고구려 박작성을 중국이 호산장성 문루로 둔갑시켜 놓았다)

오늘은 시간이 느긋하다. 압록강물이 불어 압록강 유람도
취소된 터여서 아침도 여유롭게 먹고 느긋한 마음으로 호텔을
나서 단동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호산장성으로 향한다.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호산장성은
고구려 연개소문이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을 막기 위해 쌓은 박작성으로
고구려 천리장성이다. 아직까지 박작성 성벽이 남아 있고
고구려 때 팠던 옛 고구려 우물터도 남아 있다.
 
천리장성 :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곧 당에 의하여
618년에 망하였다. 그 후 626년 당나라 태종이 즉위한 후 당과 고구려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당 태종은 국내의 세력을 완전 장악하고 세계제국
건설의 야심을 가지고 동돌궐을 침략하는 등 주변 국가에 위협이 되었다.
영류왕 13년(631)에 당나라 사신 장손사(長孫師)는 고구려에 와서, 과거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이란 기념물을 헐어버리자 당이
주변국을 침략한다는 정보가 알려지고 있던 터라 이에 고구려는 당에 대하여
매우 위협을 느끼게 되어 즉시 서쪽의 경계를 방어하기 위하여 천리장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북쪽으로는 만주 중부지역인 부여성(지금의 눙안農安)에서 시작하여
남쪽 끝은 발해만에 있는 비사성(지금의 다롄 大連)에 이르는 천리가 되는 장성이었다.
장성은 곳곳에 있는 토성들을 연결하면서 쌓은 토축성으로 너비가 약 6m이며
높이는 2~3미터의 고르지 않은 성벽이다. 석축성에 있는 성문이나 누각, 돈대 등이
없는 단조로운 성으로 영구성보다는 임시방편으로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천리장성을 축조하는 데는 무려 16년이 걸려 647년에 완성하였으나
당나라는 645년부터 648년까지 3차에 걸려 고구려를 침입하였다. 장성은
어느정도 저지력은 있었으나 당나라 대군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성의 축조는 영류왕의 명령으로 축조되었다는 설과 연개소문의 건의에 의해
구축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쨌든 연개소문의 지휘하에 구축된 것은 사실이다.
연개소문은 성을 축조하는 동안 642년 10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침공하여
영류왕과 자신을 반대하는 파를 모조리 제거하고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무단독재정치를 실시하였다.(네이버 백과사전 중) 








(고구려 성벽 중국의 성벽, 그리고 중국도 인정한 고구려 우물과 고구려 유적)

중국이 호산장성으로 둔갑시킨 이 성터에서 고구려 산성의 전형적인
유물이 발견돼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으로 보고 있으나,
1990년대 중국이 성을 복원하면서 호산장성으로 둔갑했다. 2006년 5월
박작성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마구 훼손하고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가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둔갑시켜 완공을 하였다고 한다.
급조한 만리장성 주변에는 고대 성곽의 잔해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만리장성 바로 옆에 남아 있는 옛 성벽은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술인
품자쌓기 형태가 선명하다. 호산장성은 고구려가 압록강을
방어하기 위해 전략 거점으로 쌓았던 박작성이라고 한다.







(압록강 하구 모습, 바로 개울만 건너면 북한 땅)





(많이 당겨지지는 않지만.. 의주지역도 한 번 당겨보고..)





(우리가 돌아온 후 큰 비가 내려 신의주 지역이 침수되었다는데..)





(바로 저기가..)





(박작성(호산장성), 오른쪽 개울이 일보과)





(만리장성의 시작점이라고 알리는 저 상징물)

동북공정의 역사왜곡은 고구려사는 물론 자신들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라 자랑하는 만리장성에까지 미치고 있다.

호산장성은 고구려가 당나라로부터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압록강 방어용 전략 거점으로 쌓았던 '박작성'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이 압록강변에서 만리장성의 흔적을 찾았는데
오히려 박작성과 함께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자 이를 서둘러 은폐하고,
그 자리에 명나라 때 건축한 것이라며 가짜 만리장성을 쌓아놓고
호랑이가 누운 형태라며 '호산장성'으로 둔갑시켜 부르고 있다.





(제기럴! 이러다가 만리장성이 부산 금정산성까지 내려 오겠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으로 되어있는 일반적인 만리장성 지도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이 아니고 단동의 호산장성이라는 지도와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도 호산장성도 아닌 평양이며, 진시황 때
이미 평양까지 만리장성을 쌓았다니 그 음흉한 속셈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은 최근 북한 경제난과 국제적 고립을 도와주는척 하면서
북한을 통째로 삼키려는 흑심을 품고 있으며,  더 나아가 북한을 아예 동북3성
(길림성,요녕성,흑룡강성)에 포함시켜  동북4성으로 만들어 갈 구상을 하고
있다는 끔찍한 경고도 나오고 있다. 참 갈수록 태산이다.





(압록강 물에 발도 한번 담가보고..)







(咫尺(지척), 물리적인 거리는 지척이지만..)

호산장성으로 둔갑한 박작성에 들렸다가 마음만 상했다.
고구려의 역사가 하나 둘 중국의 역사로 왜곡되고 둔갑되어
가는 것이 그랬고.., 또 하나는 지척의 북한 땅을 바라보면서
하루빨리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의 목을 죄어오는 외세에 힘을 모아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인데.. 현실은 통일로 나아 갈 길이
멀기만 한데 양쪽 위정자들은 모두 반통일적 행보를 하고 있으니
세상에 둘도 없는 기막힌 현실이 정말 한심하다는 생각이다.





(압록강 처녀 뱃사공)





(일보과(一步跨), 한발만 건너면 북한 땅..)

'한 걸음이면 넘을 수 있다'는 뜻으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접경지역인 이곳은 강물이 줄어들면 조그만 실개천이 된다고 한다.
압록강 하구에는 크고 작은 섬이 수 없이 많은데 그 중 중국 것은
단 하나 뿐이고 모두가 북한 것이어서 지척인 이 섬도 북한땅인
것이다. 북한쪽은 철조망이 쳐져있고 중국 쪽은 철조망도 없다.





한국전쟁 그 역사의 현장, 압록강 단교로







(압록강 단교)

박작성에 올랐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압록강 단교로 이동했다.
원래는 압록강 유람선을 타고 북한 접경까지도 가 보고,
위화도를 둘러오는 코스가 있었는데 압록강물이 불어 유람선이
뜨지 못하는 바람에 대신 압록강 단교를 돌아 보기로 한 것이다.
압록강 단교는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한국전쟁 당시 끊어진 이 다리는 좋은 관광상품이 되었다.





(편도 자동차도와 기찻길이 나 있는 왼쪽 중조우의교와 압록강단교)







('다크 투어리즘', 한국전쟁의 현장, 미군 폭격으로 잘린 부분)

재난이 일어났거나 역사적 비극이 벌어졌던 곳을 찾아가 교훈을
얻는 여행을 말하는 '다크 투어리즘'은 1966년에 처음 등장했는데
2000년 영국 글래스고 칼레도니언대학의 교수 멜컴 폴리와 존 레논이
함께 지은 책의 제목으로 쓰이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911테러가 발생했던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가 있던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히로시마의 평화박물관,
난징대학살의 역사를 담은 중국 난징박물관,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 이곳도 그런 곳이라 할 수 있겠다.

 




(잘린 철교 끝단에 있는 압록강 표석, 북한쪽은 교각만 서 있다)





(영도다리와는 달리 철교가 수평으로 회전하여 뱃길을 열었다고 한다)





(중조우의교 밑을 지나 위화도쪽으로 가는 배)





(중국쪽 초소, 초병이 경계중이다, 통행량은 많지 않은듯..)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운명은 강대국 손에 달린듯..)

10월 19일. 彭德杯를 앞세운 중국군이 압록강을 넘었다.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결정으로 UN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자
위협을 느낀 중국은 한국전 참전을 결정한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뒤이은 소련 공군의 비밀스런 참전.
중국군은 UN군이 이제껏 싸워왔던 적과는 전혀 다른 군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은 결국
원폭투하라는 극단적 처방을 심각하게 고려한다.

이제 더 이상 한국전쟁은 한반도 남북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동족상잔의 국내 전쟁에서 동서 진영의 여러 국가가 참전한 국제전으로
완벽하게 변모해 갔다. 수많은 나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다.

1951년 4월, 중국군의 춘계 대공세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며
전선은 고착화되었다. 중국군의 병력과 UN군의 대규모 화력전은
어느 쪽도 상대를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다. 더 이상 군사적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은 어느 일방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이다.

과연 이 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극소수 몇 명의 결정으로 수십, 수백만 명이 죽어 나가고,
머나먼 외국에 파병을 나와서 죽어간 수 많은 외국인들..
그들이 죽어간 이유가 자유민주주의 수호나
공산주의의 승리를 위해서 싸운 것인지,
그저 해야만했고, 우리 자신이 죽지않기 위해서
상대를 죽여야만 했던 것은 아닌지..







(압록강 하류, 왼쪽은 신의주시 오른쪽은 단동시)





(압록강 하구를 다시 한 번..)




돌아오는 길 동방명주호선상에서..
( 날씨 : 육상 맑음, 해상 짙은 안개 )


8.03(화) 14:20 ~ 15:00   이동(버스) 시내 ~ 단동항, 출국수속

15:00 ~         이동(단동페리) / 단동 ~ 인천

8.04(수)       ~ 09:00     " (이후 한국시간)

09:30 ~ 10:15   하선, 입국수속






(출발할 적에는 멋진 일몰을 기대했는데..)





(이번 여행 오고가는 배에서 몇 사람을 만났다)

올 때 갈 때 만난 분들..
한 분은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셨다는데 이 분들은
우리가 중국에 있는 동안 한 번 더 인천을 갔다 왔다고 했다.
그리고 또, 갈 때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 중국 선교를 하시는
청주 사신다는 분, 이렇게 배에서 만난 3분은 모두 자주 중국을
왕래하여 중국에 풍부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으로 중국의 지리와 생활,
백두산, 단동, 고구려, 동북공정에 대한 이야기, 조선족에 관한
이야기,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 등 접하기 쉽지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특히 청주 사시는 집사님은 **대학교에 유학온
중국 한족출신 학생들과 중국내 인적 네트웍이 형성되어 있어서 틈만나면
중국 각 지역을 여행하며 좁은 땅덩어리를 벗어나 대륙으로 향할 꿈을 갖고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하는 감명깊은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배타고 여행하면 시간은 많이 걸려도 한층 낭만적이고
또 좋은 길동무를 만나면 상당히 유익한 시간으로
즐겁게 보낼 수 있어 좋다. 만난 분들은 그 뿐만 아니다.
올 때는 배낭여행하는 스페인 부부도 만났다.







(CARLES COMALADA & MARTA COSTA)

이 분들은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온 분들로
3주간에 걸쳐 중국 - 한국 - 일본을 배낭여행하는 길인데
서울로 가는 길이라 하여 나중에 서울 비원호텔까지 안내를
해주게 된다. 또 특별한 인연이 되어 울산투어도 시켜주고
집에 초대하여 저녁도 함께 먹기도 했다.

음악을 하는 분들로 Mr. CARLES는 바로셀로나 악단 지휘자고,
Mrs. MARTA는 Music Editor라고 한다.





(일출을 찍으러 일찍 일어났는데 한 시간을 기다려도)

안개가 걷히기는 커녕 비까지 뿌린다.
어제 저녁 아주머니 한 분이 카메라를 들고와서 일몰을 어떻게
찍냐고 물어보시길래 상황별 자동모드 설정하는 방법 가르쳐 드렸더니
아침에 일출도 찍어봐야겠다고 벼르시던 아주머니도 보였는데..
그런 것 아랑곳않고 배는 인천을 향해 달린다.









(갈매기가 나타났다. 육지가 가까운 모양이다.)





(드디어 지난번 떠날 때 갔던 인천대교 아래로 돌아왔다)





(선실에서는 긴 여행을 끝낼 준비를 다 해놓고..)







(인천항이 점점 다가온다)





(드디어 출발했던 곳 인천제1국제터미널. 내릴 준비를 해야겠다)





(인천서 서울가는 길, 전철안에서..)

울산으로 가는 일행들과는 입국하면서 바로 작별을 하고,
급하게 휴가일정에 맞춰 추진된 양평에서의 가족모임 가는 길에
Mr. CARLES 부부를 비원까지 안내해 주기로 한 터여서 동행하기로 했다.
마침 CASH가 필요하다며 ATM기에서 현금을 인출하려는데 CITI BANK
카드인데도 인출이 안된다. 문의를 하니 EU에서 만들어서 안된다나..
무슨 그런 이유가.. 함께 택시를 타고 동인천역으로 가서 다른 ATM기에
넣어도 안된다. 마침 인근에 있는 CITI 은행에서 겨우 인출 성공.

전철을 타고 안국역까지 가서 인근에서 제법
근사한 식당을 찾아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는데
Mrs. MARTA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Good!을 연발한다.
한국음식으로 비빔밥과 불고기, 삼계탕을 소개해 줬는데
한국음식 한 가지는 맛을 보여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날씨는 무덥지만 걸어서 비원호텔까지 안내해 주고
토요일이나 일요일쯤 울산에 올 수 있으면 E-mail로
연락하라며.. See you again.하니 좋아라 한다.





(비원호텔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비원 옆에는 비원 호텔이..)

또, 우리는 가족들이 함께 휴가를 보내기로 한
양평으로 가기위해 양평서 이용할 큰 차를 빌리러
처외삼촌댁으로 향한다. 어휴~ 진땀나네~
*   *   *

6년전 백두산 트래킹하면서 연길쪽을 둘러 볼 때는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연구) 중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까
우려되었는데 지금은 그 연구 결과를 일사천리로 적용시키고 있어서
그 때보다 훨씬 더 심각성을 느끼겠건만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하며 어떻게 대응하고 있었는지?

만주벌판이 옛 고구려의 땅이었고 그 윗쪽 광활한 곳에
발해 왕국이 자리했었다고 이불 속에서 만세 부른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 아니니 정말 우리의 찬란한 역사, 민족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도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연구하여 전 세계를 상대로 제대로 홍보하고
알려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한이 힘을 모아야 하는데 고구려사에
연구성과가 높은 북한과 전문적이고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대응할
연구기관 설립도 필요할 것 같다. 독도문제에서도 경험했듯이..
무대응이 상책이라며 말도 안되는 논리로 수수방관하고 있을 때 일본은
전세계 지도에 독도와 동해를 죽도와 일본해로 도배해 놓지 않았던가?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제고시키는 것이 국수주의자를 만들자는 것은
아닐터.. 어디 조상없는 자손이 있고 뿌리없는 민족이 있겠는가?
한 가족의 족보도 중요하거늘 그 보다 덜 중요하다 못할 
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우선 학교에서도 푸대접하고 있는
한국사를 필수과목에 넣고 대입에도 한국사 비중을 높혔으면 한다.
어차피 학교에서는 점수되는 과목만 가르치고 공부시킬테니..
지엽적으로는 역사체험단 같이 전문적으로 고구려 역사와 유적을 탐방하는
경우야 바람직한 일이지만 일반 여행상품으로 유적지를 답사할 때는 치밀하게
왜곡되고 계산된 동북공정 논리에 잘못 쇄뇌될 수 있으니 중국에서 현지
조선족 가이드들에게 철저하게 중국역사로 무장시키듯 우리나라
가이드들도 제대로 고구려 역사를 교육 시켜서 보냈으면 한다.
가만히 있는데 누가 역사를 바로 잡아 주는것 아니다.

백두산에 올라 눈이 시리도록 파란 천지를 바라보며
긴 여행의 힘듦과 피곤함도 잊고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오고 가는 길 좋은 길동무를 만나 멋진 추억을 만들기도 하며
여행의 즐거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가슴 벅찬 감격으로
맞이 했어야 할 고구려 유적 앞에서는 가슴이 답답하였고
죄인된 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 여행은 준비없이
가볍게 떠났다가 감당하기 힘든 큰 숙제를 안고 온 것 같다.
지금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