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교동 최부자 고택을 찾아서

2011. 3. 1. 00:10여행/여행기

 
 
 

 
경주 교동 최부자 고택을 찾아서 

(가진 자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한국의 명문가)

2010. 12. 30





지난해 년말 벼르고 있던 경주 최부자 고택을 찾을 기회가 있었다.
근래 한국사회에서 부자들의 특권에 따른 의무가 점차 강조되고 있는데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프,Noblesse oblige)'의 전형으로 경주 최부자집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12대에 걸쳐 400년을 쌓아온 부와 명성에 걸맞게
그들 가문이 사회에 베푼 선행은 가진 자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그들 가문의 공존 공생의 철학은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부자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주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석꾼 부잣집 솟을대문 치고는 상당히 소박한 대문)

400년 동안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집안으로
보통 경주 최부자집 또는 경주 최진사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재 가옥이 위치한 곳은 신라시대 요석공주가 살았던 요석궁 터라고
전해진다. 경주 최씨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하여 약 200년을 이어져 내려왔다.

이전까지는 최부자집의 파시조(派始祖)인 최진립(崔震立)부터
약 200년 동안 경주시 내남면 게무덤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교동으로
이전한 것이다. 경주 내남면 게무덤에서 7대를 내려오면서 살았고
교동에서 5대를 만석꾼으로 유지하며 살았다고 한다.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를 들어서면)

2006년에 복원되었다는 사랑채와 마주한다.
불탄 별당채 일부는 빈터로 남아있다.







(사랑채)

최부자집은 당시 부지 2천 여평, 1만 여평의 후원까지 있는
89칸으로 노비만도 1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960년대 초에는
47칸으로 줄었고, 1970년에는 화재로 사랑채도 불 타서
주춧돌만 남아 있던 것을 2006년에 복원했다고 한다.





(솟을대문이 있는 행랑채)







(경주 최부자집은 관광의 명소가 되어 끊임없이 관광객이 찾고 있다)







(경주 최부자 집의 가훈)

가거십훈(家居十訓)

1. 인륜을 밝힌다.(明人倫)
2.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를 다한다.(事親孝)
3. 임금을 사랑함에충성을 다한다.(愛君忠)
4. 가정을 잘 다스린다.(宜室家)
5. 형제 사이에는 우애가 있다.(友兄弟)
6. 친구 사이에는 신의가 있다.(信朋友)
7. 여색을 멀리한다.(遠女色)
8. 술에 취함을 경계한다.(戒醉酒)
9. 농업과 잠업에 힘쓴다.(課農桑)
10. 경학을 익힌다.(講經學)

가문의 육훈(제가의 가훈)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당쟁에 얽히지 말라)
2.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욕심을 부리지 말고 사회에 환원하라)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인정을 베풀어 적을 만들지 말라)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가진 자로서 없는 자를 착취하지 말라)
5. 시집 온 후 3년동안 무명옷을 입어라.(검소, 절약하라)
6. 사방 백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상부상조하라)

가문의 육연(수신의 가훈)

1.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2. 처인애연(處人靄然) :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3.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4. 유사참연(有事斬然) : 일을 당해서는 용감하게 대처하며
5. 득의담연(得意澹然) :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6.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
※ 육연(六然) : 중국학자 최선(崔銑)이 밝힌 여섯가지 교훈







(무려 800석의 곡식이 들어가는 최부자집의 커다란 곡간)

이런 곡간이 여러 채 있었지만 현재는 1채만 남아있다.
최부자집에서 수확한 쌀은 1/3은 사용하고, 1/3은 과객에게 베풀고
나머지 1/3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최부자집은 만석꾼 집안이었지만 은수저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하여 백동 숟가락의 태극 무늬부분에만 은을 박아 썼다고 한다.
과객 대접에는 누구보다 후했지만 집안 살림에는 매우 검소하였다.
삼베옷을 누덕누덕 너무 많이 기워서 물에 옷을 집어 넣으면
옷이 불어나서 솥단지가 꽉찼다는 일화는 최부자집 며느리들의
절약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솟을대문과 연결된 행랑채)





(중행랑채에 있는 중문으로 사람들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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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을 열고 들어서면 나타나는 안채)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이 있는 중행랑채와 안채가 튼 '□'자 형태의 살림채를 이룬다.
안채의 평면구성은 부엌이 동쪽에 있고, 부엌과 안방, 대청, 건너방이 일렬로 연결된다.
건너방 앞에는 작은 대청이 있어 마치 두 개의 대청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당채 툇마루, 정면이 대청마루)

큰 대청도 안마당의 중심에 있지않고 한쪽에 치우쳐
작은 대청과 위계가 분명치 않다. 사당채와 별당 사이에
깊숙히 배치되어 공간적 깊이가 느껴진다. 18세기 후반기의 주택으로
동선연결을 위한 툇마루가 발달하고, 결집구성을 하는 등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는 집이다.(중요민속자료 제27호)





(최부자집 안채)

꼿꼿한 차림의 문중의 종부가 나올만도한데 종부는 오간데 없고
이 고택을 관리하는 할머니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 힘드신듯..
마지막 부자 최준은 이 집을 포함하여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여 현재
이곳 경주 최부자 집은 관리인들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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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 출입문)





(행랑채.. 솟을대문..)





(중요민속자료 27호로 지정된 경주교동 최씨고택)

최진립(1568~1636)의 본관은 경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서생포에 침입한 왜적을 무찌르고
도산 싸움터에서 전공을 세웠다.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를
구하기 위하여 69세의 노구를 이끌고 출병하여 장렬히 순국하였다.
노비들도 주인을 따라 나라를 구하고 주인을 위하는 일에 몸을 바치자
최부자 후손들은 이 때부터 그 노비의 제사도 시조 정무공 최진립의
제사와 함께 지내준다고 한다. 이후 경주 최부자집은 최진립의
공신 토지를 기반으로 만석의 재산을 일궈 내었다고 한다.











(편액 / 용암고택, 대우헌, 둔차)

사랑채 편액 중에 최부자집의 가훈과 상통하는 것이
둘 있는데 곧 '대우헌(大愚軒)'과 '둔차(鈍次)'가 그것으로
이 집주인들의 아호에서 연유된 것이라 한다.

'대우헌'에서 '대우(大愚)'란
마지막 최부자인 '문파 최준'선생의 증조부 '최세린'공의 아호로
즉, "크게 어리석어라. 스스로 어리석음을 자처함으로써
상대방의 경계심을 없애라"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둔차(鈍次)'는 선친 '최현식'공의 아호였다고 한다.
글자 뜻 그대로 "어리석은듯 드러나지 않고 버금감'이란 뜻이다.
남보다 잘났다고 맨 앞에 나서다가는 자칫 잘못하면 온갖 시기나
모함을 받아 졸지에 자신을 망치고 나아가 집안까지 망치는
패가망신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로 중용지도(中庸之道)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사진/ 경주 최부자집의 마지막 최부자 최준(오른쪽)과 그의 동생 최윤)

구한말에는 신돌석 장군이 이 집으로 피신하였고
최익현 선생이 여러 날을 머물러 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최준(崔浚 1884~1970)의 호인 문파(汶坡)는 의친왕 이강(李堈)이
여샛동안 사랑채에서 머물 때 지어 주었다고 한다.

최준은 집안의 마지막 부자였는데 백산 안희제(安熙濟)와 함께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하여 막대한 독립투사들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백산상회는
결국 부도를 맞아 3만석에 해당하는 빚을 지게 되었다.
이로인해 일제 식산은행(殖産銀行)과 경상합동은행에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는데 식산은행 아리가(有賀光豊) 총재가 최준과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빚의 절반을 탕감하여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해방후 최준은 김구를 만난 자리에서 안희제에게 전달한 독립운동
자금이 한 푼도 빠지지 않고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고 백산 안희제의
무덤에서 그를 기리며 통곡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문닫을 시간이 되어 아쉽게도 쫓겨나듯..)

최부자집의 시조는 최진립(1568~1636)으로
그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이 되어 삼남지방에서 왜군과 싸웠다.
1671년 삼남에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사람이 허다하자 그의 후손인
3대 부자인 최국선은 "많은 사람들의 굶주림이 이 지경인데 재물을 아껴
죽어가는 것을 볼 수가 있는가!"라고 한탄하며 자신의 곡간을 헐어
경주 인근과 경상도 일대의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만석군 가문 최부자집은 3대 최국선(1631~1682)으로 부터
12대인 최준(1884~1970)에 이르며 12대 400년간의 만석을 누린 시기로
마지막 만석군 최준은 교육과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영남대(구 대구대)를
설립하는데 전 재산을 기부하였다. 최씨 가문의 400년 동안 쌓아온
부와 명성을 아끼지 않고 고스란히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이 골목으로 몇 발짝 가면.. )

경주 교동법주와 독립유공자 최완선생의 생가가 나온다.





(경주 교동법주)











(최부자의 후손들이 경영하는 경주 교동법주)

경주시 교동에 있는 최부자 집에서 대대로 빚어 온 전통주로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관직에 있던
최국선이, 고향으로 내려와 최초로 빚은 것으로 궁중에서 유래된 술이라 한다.
법주를 만들 때에는 최씨 집안 마당의 우물물을 쓰는데, 물의 양과 온도가
사계절 내내 거의 일정하며, 옛부터 물맛이 좋기로 이름이 난 우물이라고..
현재는 기능 보유자 최경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고 한다.

이 술을 처음 빚은 최국선은 내남면 이조리 게무덤 일대를 개간하여
농토를 넓힌 사람으로, 당시는 지주와 소작인이 7:3의 비율로 나누던 것을
최국선은 5:5로 나눔으로써 소작인들의 열렬한 지지와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개간 사업에도 소작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최부자집의 부를 급격하게 일으킨 장본인이라고 한다.







(독립유공자 최완선생 생가)

경주 교동 법주 바로 옆에 독립운동가이자 12대 마지막 부자인
최준의 아우 최완선생의 생가가 있다. 최완선생은 이곳 경주 교촌에서
태어났으며 마지막 부자인 최준선생의 아우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38세의 나이로 요절을 하였다 한다.
만석꾼 집안에 무엇이 아쉬워 목숨을 건 독립운동을 했을까!
숙연한 마음이 든다.





(눈 쌓인 기와모자를 쓴 담장, 담벽은 담쟁이들이 캔바스인냥,,)





(정겨운 골목에는 눈까지 내려,,)







(최부자집 뒤에 있는 노거수)





(요석궁 담장을 따라..)





(요석궁(宮))











(요석궁 대문에는 청사초롱 밝히고..)

요석궁은 현재 경주 최부자집 후손들이 한정식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예전에 신라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가 기거하던 요석궁이 자리했던 곳으로
원효와 과부였던 요석공주의 애틋한 사랑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마지막 최부자집 최준의 동생 최윤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담장 너머로 안을 보려니 잘 가꿔진 정원이 살짝 보이기는 하다만
식사라도 한번 하러와야 안 풍경을 제대로 살펴 볼 수 있을듯..







(교동 주변 풍경들.. 한옥들이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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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자집 주변에 들어서고 있는 한옥들)





(최부자집 앞 주차장)





(최부자집의 영화와 오고가는 과객을 지켜봤을 느티나무)

이 시대 우리사회 부자는 많지만
이처럼 멋있는 부자는 찾기 힘든 것 같다.

학문을 숭상하여 벼슬은 하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금지했고,
재산은 모으되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고 했으며, 또한
흉년에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못하게 했고, 찾아오는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며느리로 들어오면 3년동안 무명옷을 입게 하면서도
사방 100리 안에 굶어서 죽는 사람이 없게하라고 하였으며
소작인들에게 소작료를 감면해 주고 어려운 사람을 구제하는 등
공존 공생의 도로 인심을 얻어 숱한 변란 속에서도 동서고금에
유례없는 400년간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名家!

그리고는
마지막 부자 최준이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희사함으로써
경주 최부자집의 만석지기의 부는 아름답게 끝맺음을 한다.
최준은 일제치하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을 제공하였으며
교육사업에 뜻을 두고 있다가 해방이 된 후에는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길러야 한다며 살던 집을 비롯한 전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 주고 빈털털이로 홀연히 서울로 향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버려 우리의 가슴에 영원한 부자로 남는
그런 길을 택했던 것이다.

명가 거목들의 한 단면을 보며
숙연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3.1절 92주년을 맞으며
밀렸던 글을 정리하여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