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에 등재된 양동마을

2010. 9. 13. 00:52여행/여행기

 

 


유네스코에 등재된 양동마을을 찾아 
경북 경주시 강동면 소재 / 10. 9. 1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경주 양동마을을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긴 했지만 사실 양동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아보지않은 상태였지만 느닷없이 기회가 찾아왔다.
금요일 출장을 갔는데 출장지에서 10분 거리에 있다는 것 아닌가!
좋은 기회이긴 한데 일을 마치고 나니 이미 6시가 다되었지만
잠깐 들렸다 가보기로 하고 늦은시간 양동마을을 찾았다.

500년 전통 "양동(良洞)마을"은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 마을로, 1984년 12월 20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브라질 브라질리아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34차 회의에서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고 한다.

양동마을은 한국 최대 규모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월성 손(孫)씨, 여강 이(李)씨 양가문에 의해
형성된 마을로, 손소와 손중돈, 이언적을 비롯하여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서로 협동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일궈온 양동마을은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양반가옥과 초가 등 160호가 집중되어 있는데
국보 1점,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재 7점 등
도합 24점의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6개소의 국가 지정 전통마을이 있으나
마을의 역사와 규모 및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뛰어난
건축양식과 조경학,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한국에서 가장 우수한 가치를 지닌 마을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연꽃 연못쪽에서 본 양동마을 모습)

양동마을은 경주시에서 동북방으로 20km쯤 떨어져 있으며,
마을의 뒷배경이자 주산인 설창산의 문장봉에서 산등성이가 뻗어내려
네줄기로 갈라진 등선과 골짜기가 물(勿)자형의 지세를 이루고 있다.
내곡, 물봉골, 거림, 하촌의 4골짜기와 물봉 동산과 수졸당 뒷동산의
두 산등성이, 그리고 물봉골을 넘어 갈구덕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고, 고가들도 접근해야만 볼 수 있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자연환경과 집들이 잘 조화를 이루어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오고, 숲속의 산새소리에 젖어드는
안온한 분위기가 양동마을의 큰 특징이다.







(마을 가운데로 흐로는 시내를 경계로 하여..)

여느 마을들과 마찬가지로 산자락 완만한 경사지에
집들이 띄엄띄엄 퍼져 있다. 양반이 살던 전통 기왓집 주변에 노비들이
살던 초가집들이 여러 채 있는 것이 특징이다. 마을 안에서도 둔덕같은
야산 경사지에 앉혀진 집들의 모양새와 마을 길 곳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습들은 잘 기획된 하나의 정원 안에 들어선듯한 느낌이었다.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로는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의 영역으로 나뉜다고 한다.
또 높은 지대에는 양반가옥들이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고 한다.





(양동마을 안내 표지판)





(양동마을회관)

마을정보센터인 마을회관, 늦게가는 바람에 문을 닫았다.









(심수정 가는 길)





(심수정(心水亭) 중요민속자료 제81호)

마을로 들어서면 우측 성주봉 등성이 큰 고목들에 둘러싸여 있는데,
맞은편 북촌에 자리잡은 향단에 딸린 정자이다. 형을 위해 벼슬을 마다하고
노모 봉양에 정성을 다한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우 농재 이언괄(李彦适)공을
추모하여 1560년경에 건립한 정자이며, 큰 고목들이 건물을 감싸 안고 있다.













심수정은 정자와 관리사로 나뉘는데 정자는 ㄱ자형 평면을 이루었으며
ㄱ자로 겪인 모서리가 북촌을 향했으므로 대각남향(對角南向) 집이 되는 셈이다.
좌측에 담장을 따로 쌓고 건축하였는데 ㄱ자형 평면 양측으로 대청을 놓고 그 옆에
방을 두었다. 좌측으로의 대청에 붙은 방앞에는 후마루를 두어 양동마을 전체를
내다 볼 수 있게 하였다. 방앞에는 툇마루를 두었고 우측 대청옆에는 2칸의 온돌방을
두고 있다. 이 정자를 지키는 관리사로서 행랑채는 고격(古格)있는 작은채로서
굵은 각주(角柱)와 마루귀틀, 청판 등 건실하게 구성된 집이다.





(이렇게 조용한 마을에 관광객들이 몰려들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것이 마을 주민들에게는 긍지를 갖게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면 생활에는 많은 불편이 따르지 않을까?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뭐 지원되는 것이라도 있는지..?







(한편,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라 들어갈 수 없는 집도 많다)







(어릴적 시골 고향같은 모습)

아름다운 자연 환경 속에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돌담길 너머로
초가집들이 눈에 들어 온다. 전통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하얀백일홍)





(평화로운 마을 모습)

앞으로 관광지속의 주거지로서 500년 전통을 이어갈 수 있을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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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졸당에서 경산서당 가는 길)

수졸당에서 경산서당 가는 길, 무첨당의 뒤쪽에 위치한 동산에는
큰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부드러운 황톳길을 따라 진한 소나무 향을
맡으며 안락한 길을 조금 더 걸으면 넓은 안강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마당 한켠에 있는 능소화를 찍으려 들어서니 백구가 쫓아낸다)







(야트막한 담장너머..)





(빼꼼히 열린 대문 안쪽에 보이는 경산서당)





(경산서당(景山書堂))

경산서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맏손자 무첨당 이의윤(無?堂 李宜潤)공을
봉향하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물봉골과 안골사이의 능선 완만한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다. 헌종(憲宗)조인 1835년경 이웃 안계리에 건립되어 있었던 서당으로
회재 이언적 선생의 맏손자 무첨당 이의윤(無?堂 李宜潤)공을 봉향 하면서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1835년경에 이웃 안계리에 건립되어 있던 것을 댐 건설로
1970년 이곳으로 옮겼왔다. 이 마을엔 서당이 3개나 되는데 이씨 문중의
강학당과 경산서당 그리고 손씨 문중의 안락정(安樂亭)이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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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에는 박넝쿨이.. 박도 주렁주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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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벌 너머 안강)

안강벌, 안강벌 지주 대부분이 양동마을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전에 많이 보았던 정겨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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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첨당(無첨堂) 보물 제411호)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성균생원 이번(李蕃)공이 살던 집으로
1460년경에 지은 여강 이씨(驪江 李氏)의 종가로써, 별당의 기능을
중요시한 간결하고 세련된 솜씨의 주택이다. 무첨당(無?堂) 은
이언적 선생의다섯 손자 중 맏손자인 이의윤(李宜潤)공의 호이며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오른쪽 벽에는 대원군이 집권 전에
이곳을 방문해 썼다는 죽필(竹筆)인 좌해금서(左海琴書)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데 ‘영남(左海)의 풍류(琴)와 학문(書)’이라는 뜻이라 한다.





(? 오르는 돌계단)











(고색창연한 지붕)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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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이 시멘트 포장길이긴 하지만 초가가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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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담길, 농로를 따라..)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회재 이언적선생이 경상도관찰사로 재임할때 1543년에 지은집이라고 한다.
낮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興字型으로 지은 건물로 앞쪽에 세워진
향나무 한 그루가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견상으로 보아 무척이나
화려하고 과시적이다. 특히 마당을 앞에 둔 사랑채는 두 개의 나란한 지붕을
연결하여 풍판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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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가정 가는 길에..)





(초가집은 기왓집보다 낮은 위치에..)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마을 입구 좌측의 언덕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관과정은
청백리이자 조선 성종(1469-1494)으로부터 중종(1506-1544)조에 걸친
명신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선생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
특히 아래쪽에 배치된 하인들의 거처인 가립집(초가)4~5채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중앙에 중문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형으로 배치되었는데
사랑채가 좌우로 더 길게 튀어나온 형태이다. 중앙에 중문을 사이로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를 두었는데, 사랑채는 방 2칸에 대청 2칸으로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다.
누마루 부분에만 둥근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다른 부분과 차이를 두었고
마루 아랫부분의 기단을 낮추어 기둥을 세움으로써 정자의 효과를 거두었다.
사랑대청은 대들보 위와 천장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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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곳은 초가집들이..)





(다 돌아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날은 어두워지고..)

한번 와 보고는 싶었지만 갑자기 들리는 바람에 시간이
부족하여 주마간산식으로 훑어 볼 수밖에.. 더운 날씨에
금새
땀으로 범벅이 되어도 열심히 발품을 팔아 보지만 못들린 곳도 많고
들린 곳도 자세히 보지 못한 것 같아 많이 아쉽다.
다음에 한 번 더 와서 찬찬히 돌아봐야겠다.

'가장 한국적이기에 가장 세계적'이어서
현재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500년 역사의 전통마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켜
박물관 속의 박제된 모습이거나
사람없는 황량한 모습이 아니어서 좋긴한데 주민들 입장에서는 어떨지.. 
일반적으로 주거지와 관광지의 속성이 달라 조화가 어려울텐데
이 안온하고 정감어리 시골 마을이 세계적인 관광의 명소가 되었으니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테고, 필연적으로는 상업화가 될텐데..
그러면 이 마을에서 500년을 이어온 아름다운 전통이
그대로 잘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는 나만이 가지는 감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