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서 더 가슴 저미는 북한산과의 만남

2011. 1. 26. 20:35山情無限/산행기(일반)

 
 

아름다워서 더 가슴 저미는 북한산과의 만남
(북한산성 입구에서 대호아파트까지)




2011년 1월 22일 아침에 눈이 내리다 오후에 개여
산행하기 적당했던 날 혼자 경기도 고양시와 서울특별시
강북구, 성북구, 종로구, 은평구에 걸쳐 있는 북한산성 입구에서
북한산대피소-대동/대남문-문수봉-비봉-향로봉-족두리봉-
대호통제소로 이어지는 코스를 오전 8시 50분부터
오후 5시 20분까지 7시간 반 동안 눈길을 걷다.
도상거리는 약 13.5km.


 




장모님 생신과 와이프 생일이 같은 날이어서 올해도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이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기로 하여 서울가는 길에
북한산을 올랐다 오기로 하고 배낭을 챙겨 출근을 했다.

처가가 북한산 자락으로 이사를 했지만 북한산과는 인연이 잘 닿지
않은 것 같다. 대간 시작할 때쯤 한창 북한산에 관심을 갖고 불수사도북
종주계획까지 세웠으나 무산되고.. 바로 대간에 발을 들였고 이어 정맥길까지
가느라 5년동안 다른 산에 눈돌릴 틈이 없었다. 그러다 지난 해 9월 1+9를
마무리하는 한북정맥 길에서 드디어 도봉산-우이령-상장능선을 걸으며
신고를 하긴 했다. 그렇게 만나지 않았으면 오늘이 첫 대면이 될 뻔했다.

전날부터 북한산 산악기상을 확인하니 영하 17도까지 내려가고
날씨는 맑겠다고 예보하더니만 아침에 일어나니 밤에 눈이 5cm 가량
내렸고 하늘에는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눈 오는 날은 춥지 않아
다행이지만 암릉길이 미끄럽지는 않으려나.. 조망이 트여야 할텐데..
설경은 멋있을려나.. 꼭 연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기대감에
가슴이 설렌다. 시외버스 터미널 앞에서 송추가는 버스를 탔는데
자동차는 엉금엉금 기어가고.. 차창가로 눈빨이 비친다.





(북한산성 입구, 뾰족한 첨봉들이..)

어제 늦게 도착했는데.. 또 아침 일찍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려니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하긴 지난 추석휴가 때는 한북정맥 길을 이어가느라
3일동안 연달아 아침 일찍 집을 나선 적이 있기도 하다만. 그나마 와이프와
같이 나서면 모양새가 좀 나을 것 같은데.. 음식 준비하느라 오늘 장모님과
함께 시장간다고 나 혼자 산행준비를 해 온 터여서 어쩔 수 없다.





(일단 산행채비를 하고.. 생각보다 많은 산객들이 준비를 하고 있고.)





(백운대를 향하여 계곡길을 따라..)





(계곡길과 시멘트 포장도로가 만나는 쉼터)





(청솔은 눈으로 분칠하고.. 소나무와 눈은 잘 어울리는 것 같다)





(괴나리 봇짐 하나 지고.. 여유롭게 걸으시는 분)





(계곡으로 오르는 바람에 첫번째로 만난 성문.. 중성문)

입구쪽에 있는 대서문은 계곡을 따라 오르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고, 첫번째로 만난 성문.. 중성문.
중성 전면의 성곽은 북한산성 축성 다음 해인 숙종38년(1712년)에
산성수비 보완대책의 일환으로 축조하였다 한다. 지형이 평탄하여 방어가
취약한 대서문 쪽이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은 이 일대 계곡을 차단하여
행궁. 유영. 창고 등 성내 시설물과 인명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중성문에서 바라보는 노적봉 방향.. 짙은 구름에 덮혀 있는 노적봉)





(비석거리.. )

북한승도절목(北漢僧徒節目)과 선정비군(善政碑群)산영루지(山映樓址)
북한산성을 관리하던 총융사의 재임시 선정과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들로 암벽에 새겨진 것을 포함하여 21기로 추정되며, 북한산성 축성즈음
건립되었다가 소멸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영루라는 정자가 있넌 터..





(일단은 좌측 북한산대피소 방향으로..)

직진하면 대남문.. 일단 북한산대피소 방향으로 잡고 오른다.
날이 개이면 백운대로 가서 우이능선을 타고 육모정고개를 거쳐
육모정통제소로 내려가고.. 계속 구름이 걷히지 않으면 산성주능선을
따르다가 기상상태를 봐가며 대남문에서 내려서든지.. 아니면
비봉에서 구기터널쪽으로 내려 서기로 대략적인 계획을 세워본다.
잘 모르는 산인데다 눈길에 조망도 없으니 욕심은 최대한
줄이고 그 때 그 때 상황을 봐가면서 진행하기로 한다.





(눈 내려 고요한 숲에는 적막만이..)





(북한산대피소, 직진하면 백운대.. 1.7km 30분 거리)

눈 덮힌 계곡을 한참 치고 오르니 북한산대피소가 나타났다.
이 곳 북한산 대피소에는 북한산에서 몇 안되는 약수터가 있다는데
확인은 못했다. 북한산대피소는 북한산성 입구에서 바로 이곳으로
올라오는 산행객과 주능선 산행객이 만나는 만남의 장소다.

딸랑 지도 한 장들고 오른 터여서 등로의 난이도가 궁금하여
대피소에서 만난 내공이 있어 보이는 산꾼에게 등로에 대하여 조언을
구하니 대남문까지는 길이 험하지 않고.. 문수봉 이후도 아이젠이 있으면
큰 어려움이 없지만 비봉이후 향로봉에서 족두리봉으로 이어지는
등로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다고 하며 대남문에서 내려서던지..
향로봉 직전에서 내려서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생각보다는 길이 험하지 않다고 하니 다행이다.





(산성주능선을 따라 대동문을 향하여..)

북한산대피소에서 대동문 가는 길은 완전히 산책길 수준이다.
산에 들어야 산 너머 산이 보이고.. 길이 없을듯한 곳에서도
길이 열린다. 암봉과 암릉 사이에 이런 순한 길이 있다니..







(꼭 장독대 위에 내린 것 같이 산성에 소담스럽게 내린 눈)





(눈까지 내려 더 고요한 숲)





(사통팔달을 가르키는 대동문 이정표)







(대동문, 왼쪽 길로 내려서면 진달래능선으로 이어진다)

대동문은 북한산성 12성문중 동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우이동 진달래능선이 끝나는 해발 54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의 문은 1993년에 문루를 갖추며 복원되었다고 한다.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 해발 567m에 위치한 보국문은
본래 동암문이었는데 그 아래에 보국사가 있었다고 하여
지금은 보국문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대동문 성문밖에서..)





(북한산성, 성벽)

사적 162호, 삼국시대의 성벽으로 경기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과
서울 은평구, 성북구, 강북구, 종로구, 은평구에 걸쳐 있는 성벽으로
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로왕 5년(132)에 세워진 것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 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 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 지었다.

성의 규모는 대서문, 동서문, 북문 등 13개의 성문과 불을 피우던 곳으로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가 있었다. 성안에는 99개의 우물, 26개의 작은 저수지,
그리고 8개의 창고가 있었다. 현재 북한산성에는 삼국시대의 토성이 약간
남아 있기는 하나 대개 조선 숙종 때 쌓은 것으로 여장은 허물어 졌고,
대서문과 장대지·우물터·건물터로 생각되는 방어시설 일부가 남아 있다.
이 지역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차지하기 위해 쟁탈전을 벌였던
곳으로, 조선시대 도성을 지키는 중요한 곳이었다.





(성벽을 따라 보국문으로..)





(구름이 엷어지자 좌측으로 칼바위능선이..)





(조망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조망 안내판으로 해소될리 없지만..)





(조그만 봉우리 너머 안부에 빼꼼이 보이는 대성문)







(대성문)

보현봉 동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성 능선 해발 625m 지점에 위치한
성문으로 북한산성 성문 가운데서 가장 큰 문. 원래 처음에는 소동문으로
불리던 작은 암문이었으나 성문 위치가 문 북쪽 기슭 행궁이 있는 곳에서
이곳을 통과하여 형제봉과 보토현(현재 북악터널 위쪽)을 경유하여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편리한 코스에 위치하고 있어서 임금이 이 문을
출입하게 됨으로써 뒤에 성문을 더욱 성대하게 개축하여
임금이 출입하는 성문으로 위용을 갖추고 이름도
대성문으로 바꾼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대성문을 향해 오르고 있는 산객들.. 전면에 형제봉이 있다)





(구름이 엷어지자 보현봉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종로구와 성북구 고양시 경계점)





(대남문쪽에서 비탈을 올라오는 산객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대남문)

북한산성 성문 중 남쪽을 대표하고 있는 성문으로
처음 축조 당시는 문수봉암문 으로 불리웠던 성문으로
해발 715m의 보현봉과 727m 의 문수봉을 잇는
해발 663m 능선 한가운데 안부에 위치해 있다.

북한산성은 산성 및 유적들이 오랜 세월 방치된데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거나 허물어져 있던 것을
서울시가 1991년~1999년까지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동장대와
보국문(동암문) 등 5개의 암문과 무너진 성곽 등을 보수하여
북한산성의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대남문으로 내려서자.. 지리산 천왕봉에서 북한산으로 자리를 옮겨
"국립공원 케이블카 설치반대" 산상시위를 하고 있는 전 연하천대피소장 김병관님이..)

작년 년초 지리산 천왕봉에서 칼바람 맞으며
"지리산 케이블카 설치반대 산상시위"를 하고 있을 때 응원하러 간다고
천왕봉 가는 산악회를 따라 나섰는데.. 운전기사의 실수로 중산리가 아닌
노고단으로 가는 바람에 계획에도 없던 만복대를 다녀오게 되어 김병관님을
만나지 못해 내심 미안하고 아쉽기까지 했는데.. 오늘은 별 생각없이
북한산에 올랐는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 뵙다니.. 반갑기야 하지만..
1000날을 저렇게 고생을 하며 싸우시겠다니 숙연한 마음까지 들고,
평소 그렇게 무심했던 것들이 부끄럽기까지 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처사는 정당하지 않았다)

발걸음이 떨어지지도 않았지만 1시간 넘게 그 곳에 머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공단직원인듯한 분이 나타나 현수막 설치가 불법이라며
현수막을 눌러 놓은 돌을 치우며 김병관님에게 무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주위 분들과 합세하여 제지시키고 항의를 했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김병관님이 신분을 밝히라 해도
끝내 신분을 밝히지도 않았다. 또 "현수막 하나를 보이지 않는데
당신이 가져갔느냐?"고 물으니 "가져가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 분이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한 김병관님이 "왜 가져갔느냐?"며
항의를 하자 "쓰레기라서 주워 갔다"는 것 아닌가!

정말, 북한산에 케이블카 설치하는 것이 환경을 보호하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것이며, 후손들에게 물려줄 자랑스런 업적이 되고,
김병관님의 "북한산 케이블카 설치반대 시위"가 불법이라면
공단측의 말처럼 법으로 하면 될 것이지.. 왜 무력을 행사하는가!
어떤 이유로도 무력이나 폭력은 정당화 될 수 없다.

그 광경을 지켜 본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응원하고,
"국립공원 케이블카 설치반대" 서명지에 서명을 하는 것을 보면서
공단이 민심에 반한 억지를 부리며 정말 잘못하고 있다는 것과
북한산 케이블카 설치를 막아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보태져야 할 것 같다.





(보현봉.. 저 꼭대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고층건물을 짓겠다는 발상은..)

대남문 방향에서 바라 본 보현봉.
광화문 쪽에서 북악산 뒤로 바라다 보이는 봉우리로
세종의 명으로 그의 아들 수양대군이 자주 올랐던 봉우리라고 한다.
절경인 보현봉은 아직까지도 안식년제로 묶여있는 줄로 아는데 저기에
케이블카를 설치하고 고층건물을 지어 음식까지 팔겠다는 발상..
과연 삽질로 대표되는 MB정권의 발상답다.





(공단에서는 생태계보전을 위해 국립공원내 유기견이나 잘 관리하지..)

들개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느라 계속 주위를 서성거린다.
들개, 들고양이가 생태계를 교란하기 때문에 국립공원에서 서식하고
번식하지 못하도록 관리해야 할텐데 공단은 이런 본연의 일은 하지않고
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해 몸바쳐 희생하는 노력을 방해하고 막는 것은
기본적인 존재목적에도 반하는 자기모순아닌가!.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어찌 당신들의 호구지책을 위한 직장일 수만 있겠는가?





(김병관님과.. 더 함께하고 싶었지만 갈 길이 멀어..)

1시간 넘게 머문 것 같다. 친구분들도 곧 도착할 것이라는데
초행길인데다 갈 길이 바빠 작별을 고하려니.. 산객들이 주고 간 것이라며
미안스럽게도 사과 하나를 쪼개어서 반을 막무가내로 손에 쥐어 주신다.
걸음이 무겁지만 오늘 가야할 길이 있기에 문수봉으로 향한다.

오늘이 벌써 305일째! 현수막도 몸 벽보도 매일 매일 날짜를
고쳐달기 힘들다는데.. 그렇겠지요. 어디 만사 재껴두고 그렇게
고행스러운 싸움에 여념이 있겠습니까! 후손들에게 빌려쓰고 있는 이 지구..
자연환경.. 제대로 잘 보존하여 온전하게 돌려줘야 할텐데.. 눈앞의
이익 몇 푼을 위해 잘 흐르는 강을 난도질하고, 잘 보존된 자연경관을
마구 훼파하는 개발지상주의자들.. 혹, 그들은 어느 별에서
아름다운 지구별을 멸망시키려 온 첩자들이 아닐런지..







(문수봉에 올라.. 가야할 방향을 조망하고..)

전방으로 사모바위, 향로봉 너머 족두리봉까지 보인다.
과연 오늘 어디까지 가다 내려서야할지 머리가 복잡하다.
옆에 있는 분에게 능선으로 사모바위쪽으로 갈 수 있냐고 물었더니
눈이 내려 위험하다며 청수동암문쪽으로 둘러서 가라고 한다.





(문수봉 조망.. 백운대 방향)





(청수동암문 이정표.. 비봉방향으로..)

문수봉 암봉을 바로 내려서기 위험하다 하여 청수동암문쪽으로 우회하기로..





(청수동암문)

문수봉과 나한봉 사이 해발 694m 에 위치한 청수동암문은
산성주능선과 의상능선 그리고 비봉능선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있다.
청수동암문은 1999년에 해체 된 후 보수 되었습니다고 한다.
청수동암문을 통과하여 계곡을 타고 내려선다.





(내려온 계곡 너덜길을 뒤돌아 보니..)





(46)





(뒤돌아 본 문수봉.. 위용이 대단하다)





(48)





(눈 쌓인 암릉을 오르고





(통천문을 지나니..)





(지나온 문수봉이 한 눈에 들어 온다)





(오른쪽이 승가봉, 정면으로 보이는 봉우리가 비봉)





(마치.. 히말라야 설산에라도 오른듯..)





(55)





(의상능선 뒤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만경대, 백운봉, 인수봉..)





(왼쪽의 문수봉과 보현봉의 골격미)

자신의 존재를 까칠하면서도 강하게 드러내는 보현봉에 비해
문수봉은 수줍어 한 발 뒤로 물러선 모습이라고나 할까..





(진행방향.. 사모바위와 비봉, 향로봉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다시 진행방향을 당겨보니.. 저 끝이 족두리봉..)







(남산, 북악산쪽 시내 조망)





(직진하면 비봉, 오른쪽은 응봉능선)





(일명 김신조 바위라고도 하는 사모바위)

지난 68년 1.21사태 때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의 공작원들이 청와대
침투를 기도하면서 1차 목표지점으로 삼았던 곳이 사모바위였다고 하여
김신조 바위라고도 하고, 사각의 바위가 얹어져 있어 지어진 이름이기도 하고,
또 전쟁터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사라져 버린 사랑하는 연인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바위가 되었다는 슬픈 전설에서 사모바위라고도 하고.
양쪽 어깨에 견장을 단 모습같기도 하여 장군바위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모바위에서 북서쪽으로 응봉(매봉)능선이 갈래친다.





(의상능선 뒤로 계속 따라오는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을 배경으로..)





(손에 잡힐듯이 가까워진 비봉)

비봉은 조선시대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것에 연유하는 이름이라고..





(비봉, 향로봉.. 이어갈 능선..)





(사모바위에서 바라보는 백운대-문수봉 방향 안내판)





(바로 앞에 다가선 비봉)





(비봉에 올라가보고 싶은 충동을 강하게 느꼈지만..)





(호랑이 입으로 들어갈 뻔 했는데 천만다행.. 50만원 벌었다!)





(정상에 서 있다는 비가 궁금하여 당겨보았더니..)





(자료 / 북한산 진흥왕순수비(巡狩碑))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는 조선시대 초의 조선의 개국과 한양천도와
관련 있는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조선후기의 유명한 금석학자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순조 16년(1816)과 그 이듬해 비봉에 올라
비문을 판독함으로써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이 밝혀졌다. 세운지
실로 1200여 년이 지나서야 비의 주인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비석은 직육면체의 화강암으로 높이 1.5m에 폭 69cm, 두께 16cm로
이 비는 광개토대왕비처럼 4면에 글자를 새긴 것이 아니라 신라 비석의
특징대로 1면에만 새겼다. 비봉 정상에 홀로 서 있으면서 6.25전쟁 때에
뒷면에 20여 발의 총탄 세례를 받기도 해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상단에는
덮개돌을 끼우는 부분이 있으나 덮개돌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1962년 국보3호로 지정한 후 1972년 8월 25일 비의 보존을 위해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옮겼다가,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비문은 모두 11줄로 각 줄에 22자 정도 새겨져 있으나 표면이 심하게
마멸되어 반 이상이 판독되지 않으나, 대략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고
이지역을 순수한 사실과 당시 지명과 관직명 등이 새겨져 있다.

건립 연대는 비문에 연호나 간지가 보이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삼국사기'에 진흥왕 16년(555) 왕이 북한산에 왔다갔다는 기록이 있으나,
비의 건립은 그 이후로 보인다. 순수비는 함경북도 함초령과 마운령에도 있었고
척경비는 경남 창녕, 단양 적성 두 곳에 남아있는데 북한 땅에 있었던
함초령비(586년)는 임진왜란때 왜병이 파괴한 것을 광복 후 마운령비와 함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전하고 있고 남한에 있는
북한산비와 창녕비(561년), 단양적성비는 잘 보존되고 있다.
현재 비봉에 있는 비는 지난 2006년 10월 자료를 토대로
강화도 산 화강암으로 복제한 것이라고 한다.





(전방에 나타난 향로봉)





(입구엔 출입통제 간판.. 그래도 조망이 좋을 것 같아서..)





(백운대쪽을 다시 한 번 돌아보니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 머리만 빼꼼히 보인다)





(향로봉 우측 기자촌방향으로 내려서는 능선에 몇 사람이..)





(76)





(멀리 한강도 보인다..)







(은평구 시가지와 은평뉴타운 방향..)

조그만 봉우리에만 올라와도 집이 하나의 점으로 보이고
사람은 아예 보이지도 않건만.. 저 가운데서 티끌만한 일도
세상 짐을 혼자 지고가듯 고민하고 번민하고 좌절하여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이 하늘의 하나님에게는 어떻게 보일까?

용혜원님의 "가끔은 높은 곳에 올라"라는 시가 생각난다.

가끔은 높은 곳에 올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바라보아야 한다.

거창하고, 대단하고, 복잡하고, 분주하고,
그럴듯한 것들이
얼마나 작게 보이는가
바라보아야 한다.

큰소리치고, 고민하고
번민하던 곳이
얼마나 작은 왕국인가를 알아야 한다.

가끔은 높은 곳에 올라
거대한 산위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며
우리의 욕심을 다 버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가슴이 왜 따듯함과
사랑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알아야 한다.





(전방 오른쪽에 마지막 봉우리 족두리봉이..)

상황을 봐가면서 하산지점을 정하기로 했는데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등로 상태가 안좋으면 보국문이나 대남문 쯤에서 내려서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길이 험하지 않아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 날머리를 결정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현재 시각 3시 35분.. 5시까지는 집에 들어가기로 한 터. 독바위쪽으로
내려서도 그렇고 구기터널쪽으로 내려서도 다시 이동을 해야 하니 시간이
조금 부족할 것 같아 그 중 어느 쪽이 나을까 하고 향로봉 정상에서 조망을
즐기고 있는 분에게 물었더니 최종 목표지점이 어디냐고 하여 불광역이라
하였더니 족두리봉을 넘어서 대호아파트쪽으로 가라는 것 아닌가!

지도를 봐도 그 길로 가면 바로 처가집 근처로 내려서는데.. 여태 만났던
사람들 모두 족두리봉은 위험하니 가지 말라고 한터여서 그 길을 제외하고
다른 길을 찾고 있었는데 의아하여 그 길을 지나 갈 수 있느냐 했더니..
폼새가 그 정도면 충분히 넘어 갈 수 있다는 것 아닌가! 하여 웬 떡인가
싶기는 하지만 내심 저 앞에 보이는 암벽 눈길이 얼마나 위험할까
다시 물었더니 조심해서 가면 충분히 갈 수 있다고 하여..
족두리봉을 넘어 대호아파트쪽으로 최종 루트를 잡는다.





(향로봉 우회길에서 보는 비봉과 보현봉)





(향로봉과 족두리봉, 탕춘대와 불광통제소를 가르키는 사거리 이정표)







(마지막 관문.. 족두리봉이 버티고 있다)





(족두리봉의 위용)





(족두리봉 정상에 올라..)











(족두리봉 정상에서의 조망)





(바로 아래가 구기터널)





(이제 대호아파트쪽으로 내려서기만 하면 된다)





(다 왔다. 저 아래 낯익은 아파트들이 보인다)







(날머리 직전에 북한산 둘레길도 만나고..)





(대호아파트쪽으로 내려서면서 오늘 산행이 끝났다)





(오늘의 산행경로)

처음에는 백운대쪽으로 방향을 잡았다가 짙은 구름 때문에
산성주능선을 따르다가 중간쯤에서 내려설까도 했는데 산행중에 
차츰 날이 개이면서 조망도 트이고.. 위험하다는 비봉에서 향로봉
족두리봉을 거치며 주능선을 끝까지 걸을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북한산과의 진한 만남에 가슴 설레기도 했지만
마냥 그 아름다움에 도취할 수만 없는 것은 자신의 일인냥 북풍한설을
맞으며 "국립공원 케이블카 설치반대" 시위중인 김병관님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 곳이 저려오기 때문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이 원래의 존재목적에
충실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만이 느끼는 감상은 아니겠지..

오늘 산행 도중에 위험한 곳도 있었지만 무사히 산행을 마칠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는 서울 가는 길에는
꼭 배낭을 챙겨 가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