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불법상속’의 진화 과정

2011. 4. 14. 22:11이래서야/더불어살기위하여

 

‘재벌 불법상속’의 진화 과정
한성대 교수 | 경제개혁연대소장
수정 : 2011-04-12 20:33:22

 

 

 

 

 

진화론은 암묵적 가치판단을 내포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고, 따라서 살아남은 자는 우월한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인생지사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자가 살아남아 환경을 오염시키기도 하고, 그 결과 환경 자체가 진화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우리나라 상속증여세법의 진화 과정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재벌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대부분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에서 비롯된다.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부의 상속보다는 경영권 승계 문제다. 경영권은 주식 소유에서 연유하는 것이니, 핵심 계열사 주식을 헐값에 2세에게 넘기는 방법을 찾는 재벌과 이를 막는 세법 사이에 치열한 게임이 전개된다. 물론 ‘열 순사 한 도둑 못 잡는다’고 세법의 발전은 더디기만 하다.

 

재벌들의 불법상속 방법은 3단계 진화 과정을 거쳤다. 1단계는 무식할 정도로 단순하다. 그냥 싸게 넘기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삼성그룹은 공익재단 출연에는 증여세가 면제된다는 점을 악용했다. 한국 재벌에 대한 전문가인 일본 경제학자 핫토리 다미오(服部民夫)에 따르면, 1977년 3남 이건희씨를 후계자로 선정한 이후 이병철 회장은 공익재단에 주식을 출연하고 공익재단이 다시 이건희씨에게 되파는 방법으로 세금 없이 경영권을 이전했다.

 

 

갖가지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

 

한편 구(舊) 현대그룹은 ‘물타기 증자’ 방법을 주로 이용했다. 비상장 계열사가 증자를 실시하면서 액면가로 2세에게 주식을 배정하고, 상장을 통해 시세차익을 거두게 하는 방법이다. 이후 세법상으로 공익재단 출연 및 물타기 증자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졌으나, 버스 떠난 뒤 손 흔들기였다.

 

2단계는 전환사채(CB) 및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을 이용하는 방법이다. 주식을 바로 넘기는 것은 금방 눈에 띄니,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회사채로 한 바퀴 쿠션을 돌리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동안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삼성그룹 이재용씨 사건이 고전적인 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하여튼 이재용 사장은 우리나라 상속증여세법이 완전포괄주의로 진화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2단계는 많은 변종을 낳았다. 예컨대 CB나 BW를 발행할 때, 주가가 하락하면 주식인수 가격도 떨어지지만, 나중에 주가가 다시 상승하더라도 주식인수 가격은 따라 올라가지 않는 기묘한 옵션을 붙이는 것이다(이른바 리픽싱옵션부채권). 2003년 경제개혁연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45개 상장사가 56건의 이런 기묘한 채권을 발행했다. 걔중에는 채권은 놔두고 옵션만 넘긴 황당한 경우도 있었고, 해외발행 신고를 하고선 국내에서 전부 소화한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었다. 경제개혁연대의 문제제기 이후 많은 기업들이 자진 소각했고, 감독당국도 제재를 가했다.

 

3단계는 최근 한창 논란이 되는 ‘일감 몰아주기’ 방법이다. 수익 전망이 좋은 사업기회를 기초로 새로 회사를 설립하면서 그 주식을 2세들에게 넘기고, 이후 계열사들이 일감을 몰아주어 매출과 수익을 올리게 하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정의선 부회장의 글로비스 사례가 대표적이지만, 이에 해당하는 사례는 널렸다.

할인판매의 불을 댕겼던 신세계그룹의 이마트 피자는 조선호텔베이커리가 공급하는데, 이 회사는 조선호텔의 제빵사업부를 분사한 것으로, 그 과정에서 2세 딸이 주식의 40%를 인수했다. 이 외에도 거의 모든 그룹이 전산관리, 건설, 물류 등 그룹 내 물량만으로도 충분한 매출을 올릴 수 있는 분야에서 총수 일가가 지분을 보유한 회사를 새로 만들었다. 가히 새로운 트렌드라 할 만하다.

 

 

더 늦기전 과세방안 서둘러야

일감 몰아주기는 2007년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부당지원행위의 한 유형으로 규정되었고, 작년에는 실무 가이드라인도 제정되었다. 그리고 최근 상법 개정을 통해 총수 일가가 회사의 사업기회를 빼앗아가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도 만들어졌다. 따라서 일감 몰아주기는 편법이 아니라 불법이다.

 

최근 정부는 공정사회 구현을 위해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공정거래법·상법 등 실체법이 금지하고 있는 행위로 부당이득을 얻으면, 과세당국이 세금을 매기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공정사회 등의 거창한 구호를 내세울 것도 없다. 또다시 버스 떠난 뒤 손 흔드는 우를 범하지 말고, 서둘러야 한다. 이미 많이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