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조 사회적 기업, 독일 ‘보르직’의 교훈

2011. 5. 5. 17:57이래서야/더불어살기위하여

원조 사회적 기업, 독일 ‘보르직’의 교훈
김윤태 | 고려대 교수·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2011-05-04

 

 

 

 

베를린은 역사적 도시다. 도심 거리와 주변 마을에서 언제나 숨겨진 과거의 현장과 만날 수 있다. 독일 기업인 안드레아스 엔데 박사의 소개로 베를린 서쪽의 보르직 농장을 찾았다. 19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등장한 베를린의 기업 가운데 보르직과 지멘스가 유명하다. 두 기업은 베를린의 경제성장을 주도하고 새로운 노동계급을 만들었다. 보르직은 노동자 출신 아우구스트 보르직이 자수성가로 세운 회사이다. 1837년 그는 증기기관차 회사를 창업했다. 영국보다 산업혁명이 늦었지만, 보르직의 기관차는 영국의 스티븐슨사와 경쟁해 10분 빠른 승리를 거두어 일약 유명해졌다. 보르직은 바르샤바와 빈을 연결하는 기관차를 제작하고, 유럽에서 가장 큰 기관차 회사가 됐다.

 

 

보르직은 엄격한 사람이었지만, 예술가와 노동자를 위해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 베를린대학의 알렉산더 훔볼트와 친분이 두터웠으며 기술대학에 거액을 기부했다. 노동자를 위해 건강보험, 질병기금, 장례기금, 저축은행을 설립했다. 노동자 가족을 위해 학교, 유치원, 식당, 목욕탕, 수영장도 건설했다. 모두 정부의 사회보험 법령이 제정되기 이전에 만들어졌다. 1880년대에야 세계 최초로 비스마르크 총리가 산재보험과 건강보험을 도입했다.

 

 

보르직의 아들 알베르트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던 기업은 1930년대 대공황으로 큰 어려움에 부딪혔다. 오랜 전쟁을 겪으면서 급격하게 쇠퇴했다. 나중에 밝혀진 이야기이지만 1944년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독일군 장교의 모의가 바로 보르직의 농장에서 이루어졌다. 보르직의 손자 에른스트는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에 참여했다. 종전 후 소련군에 체포된 에른스트는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보르직은 결국 다른 기업에 합병되었다. 보르직 가문의 비극은 히틀러에 적극 협력하고 전쟁물자를 지원했던 지멘스와는 대조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집권한 기독민주당은 중도보수정당으로 독일의 나치에 협력했던 사람들을 정부에서 축출하고 처벌했다. 독일은 나치 협력자를 처벌해야 과거사를 철저히 반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보르직 가문의 비극이 헛되지는 않았다. 다른 한편 나치와 공산당의 격렬한 계급갈등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독민주당은 온건한 중도노선으로 변화했다. 아데나워 정부는 ‘사회적 시장경제’를 내세우고 경제를 조정하는 정부의 역할과 사회복지를 강화했다. 사회민주당도 사회적 소유 강령을 포기하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지향했다. 그 후 독일의 양대 정당인 기민당과 사민당은 모든 국민에게 인간다운 삶을 제공하는 복지국가를 지지했다. 1970년대 독일 정부는 ‘공동결정법’을 제정해 노동자 대표가 기업 이사회와 감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변화는 독일의 사회평화와 노사협력의 오랜 전통을 만들었다.

 

 

보르직 농장에서 돌아오는 길의 넓은 평원에는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끝없이 나타났다. 풍력발전은 전력 공급의 14%를 차지한다. 일본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독일의 모든 정당은 원전 개발을 중지하기로 합의했다. 반대했던 기민당 메르켈 총리도 입장을 바꿨다. 당장 경제에 부담이 되어도 장기적으로 ‘원자력 에너지 없는 세계’를 지향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독일의 녹색운동이 주도하고 있다. 동시에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기업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총리 공관 앞에서 원전반대 시위를 벌이는 시민운동가들의 모습이 보르직의 역사와 겹쳐 보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