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 임시정부청사 / 호도협과 옥룡설산 트래킹 (4/5)

2011. 8. 15. 23:50여행/여행기

 

중경 임시정부청사 / 호도협과 옥룡설산 트래킹 (4/5)






○ 위  치 : 중국 운남성 여강, 호도협, 옥룡설산    

                 중경직할시 중경 임시정부청사    

○ 일  정 : 2011. 7. 31(일) ~ 8. 5(금)

7. 31(일)          울산 ~ 인천 ~ 중경

8. 01(월)          중경 ~ 여강 ~ 호도협(차마객잔)

02(화)          호도협(차마객잔 ~ 중도협 ~ 선착장) ~ 여강

03(수)          옥룡설산 등반

04(목)          여강 ~ 중경

05(금)          중경 ~ 인천 ~ 울산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방문

( 날씨 : 여강 / 흐림, 중경 / 비 )



8.04(목) 07:45 ~ 08:15   아침식사 (심이호텔식당)

08:30 ~ 08:50   이동(버스) / 호텔 ~ 여강고성

08:50 ~ 10:20   여강고성 투어

10:20 ~ 10:50   이동(버스) / 여강고성 ~ 여강공항

12:50 ~ 12:25   여강공항 탑승수속, 대기

12:35 ~ 13:55   이동(항공기) / 여강공항 ~ 중경공항

14:15 ~ 15:00   이동(버스) 중경 ~ 삼협박물관

15:00 ~ 16:15   삼협박물관 관람

16:15 ~ 16:25   이동(버스) / 삼협박물관 ~ 중경임시정부 청사

16:25 ~ 17:10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방문 

17:10 ~ 17:20   이동(버스) 중경임시정부청사 ~ ?식당

17:20 ~ 20:00   식사 / ?식당

20:00 ~ 20:40   이동(버스) 중경 ~ 중경공항

20:40 ~ 00:10   중경공항 탑승수속, 대기

8.05(금) 00:30 ~ 04:45   이동(항공기) / 중경공항 ~ 인천공항

08:50 ~ 10:20   인천국제공항 대기

07:40 ~ 13:15   이동(버스) / 인천국제공항 ~ 울산




 

여강에서 중경으로 넘어왔지만 중경은
이번 여정의 경유지인데도 항공편 연결이 잘 안되어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서 불편하고, 시간이 아깝다 생각했는데 그나마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하였으니 위안을 삼아야 할 것 같다.
여행 일정표에는 중경임시정부 청사 방문계획이 없어서 의아했다.
가이드를 만나면 가자고 조르던지.. 안되면 혼자라도 중경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꼭 가 보려 했는데 다행히 삼협박물관을 갔다가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들린다고 한다. 정말 잘 되었다.

처음에는 산행기겸 여행기를 세 꼭지 정도로 하여 간단하게
일정별로 나열해 보려 했으나, 66주년 광복절을 맞는 이 시점에도
노골적인 침략야욕을 드러내고 있는 일본, 시기가 시기인지라 그
제국주의자들이 강탈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되새기고 넋을 기리고자.. 비록 1시간도 안되게 머물렀지만
중경 임시정부 청사 방문기를 따로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보다는 덜 알려져 찾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만,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는 상해임시정부 이후 일본의 탄압으로
수 없이 옮겨다니다 해방을 맞은 우리나라 임시정부 청사중 마지막 청사로.
광복군을 조직하는 등 독립전쟁을 치루기 위해 실질적 준비를 했던 곳.
날씨가 무덥고 습도가 높지만 중국에서 인구가 제일 많다는 중경.
고층빌딩들이 줄지어 선 뒷골목에 초라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착찹한 마음으로 찾았다.





(중경시 투중구 번화가 도로변에 있는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안내판)





(높은 건물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대한민국림시정부라 쓰인 벽에 좁은 샛문이 있고..)

주소는 중경시 투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
일단은 상해임시정부 청사보다는 여유가 있어 좋았다





('중경시문물보단위'라는 동판이 붙어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구지')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구지(舊地)
이곳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45년 1월부터 11월까지 사용한
마지막 청사이다.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공원
(현 노신공원) 의거를 계기로 일본군의 압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해서
항주, 가흥, 진강, 장사,광주,유주,기강 등지를 거쳐 1940년 중경에
도착하였다. 중경 임시정부는 양류가, 석판가, 오사야항 등으로 옮겨
다니다 마지막에 이곳 유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에 정착하였다.
이 연화지 청사에서 임시정부는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 청사는 대한민국 독립기념관과 중경시의 협의하에
1995년 8월 11일 복원하였고 200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아 훼손된 부분을 보수하고 전시실을 확장해
역사에 길이 남을 유적지로 단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람관'에 들어서면)





(바로 김구 선생님 흉상과 태극기가 맞는다)





(임정요인들 사진)

중앙의 김구 선생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척하신데..
임시정부 시절이 얼마나 어려운 시기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어
숙연한 마음까지 든다. 그 당시 김구 선생님은 주먹밥 1개로
하루를 때우시며 지도자의 참 모습을 보여주셨다고 한다.

안중근 의사를 안중근씨라 하고, 독립투사와 김구 선생을
테러분자라 규정하는 X들이 준동하고 있는데 아직도
항복한 것이 아니라 정전중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이
우리를 우습게 보지 않으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하지..
 
뉴라이트는 소위 대안교과서에서
일제 강점기를 "그 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근대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라고까지 하니
앞으로 얼마나 더 무책임한 막말과 행동을 할지 심히 걱정되고
우려스럽지않다. 목숨까지 바치며 조국광복을 위해
희생하신 분들 앞에 고개들기가 부끄러웠다.











(전시자료들)





(임시정부, 상해에서부터 무려 아홉도시를 거쳐 중경이
10번째 도시인데 중경에서만도 네번째로 옮긴 곳이라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약사)

1910년 8월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경술국치'를 강요하고 식민지화하였다. 이후 한국 국민은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항하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되찾기 위한 불굴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일제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거족적인 3.1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서울.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들 3개처의 임시정부는 통합회의를 진행하여
마침내 1919년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민족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로 수립되어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항일독립운동의중추기구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국민을 대표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임시헌법'과 기타법규를 제정하고, 정치.군사.외교.교육.문화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일본의 침략수뇌를처단하기 위한 의열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중국 군관학교에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간부를 양성하였으며, 중국
동삼성에서 활약하던 독립군들도 임시정부의 기치아래 무장투쟁 펼쳤다.

1932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이봉창.윤봉길 의사 등
한인애국단의 의거 이후 일제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상해를 떠나
항저우.진장.난징.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처 1940년 충칭에 도착할 때까지
8년여 간 중국대륙을 이동하며 활동하였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임시정부는 일제의 중일전쟁 도발 이후 중국 인민이 전면적인 항일투쟁에
나서게 되자, 중국정부의 지원 속에 이곳 충칭에 정착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충칭에 정착하면서 독립운동 정당의 통일을 이루어
정부의 기반을 확대, 강화하고 '임시헌장'을 제정하는 한편,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반포하였다. 이와 함께 국제사회의 승인을 얻기 위하여 외교적 노력도 계속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여 이를 기반으로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쟁에 참전하였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한 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중국 정부와 인민들의
협조를 받으며 환국하였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노력하였다.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법통으로 한다'고 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계승하였음을 밝혔다.









(선전성명서)







(중국 외국인 신분증과 여권)







(중경임시정부 청사는 저 빌딩속 뒷골목에..)

장강과 가름강이 만든 마천류가 우뚝우뚝한 도심 뒷골목에
초라한 모습으로 위치해 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도 마찬가지지만..
언제 중국이 개발한다고 허물어 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된다.

장강(좌)과 가름강(우)이 만나는 조천문 부두.
장강의 흙탕물과 가릉강의 맑은 물은 수온차 때문에
잘 섞이지 않고 한동안 이렇게 흘러간다고 한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구성표와 각료명단)





(2층에 있는 군사활동 전시실)





(복도를 따라 빼곡하게 전시된 자료들)





(부서장관과 각 부 활동내용들)







(이봉창 열사와 선언서)









(중국내 군사활동)





(국기에 혈서로 맹세하며.. 조국광복의 그 날까지)





(35)





(36)





(후기군사활동)

임시정부 초기에는 군대를 수립할 만한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에 각 지역을 중심으로
특성에 맞는 다양한 군사정책을 택하였다.

그러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거후,
임시정부는 중국측과 협의하여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의 한인특별반을 설치,운영하면서 무장항일투쟁을
주도적으로 전개해 나갈 인재로 육성하였다.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구한말의 의병과 중국 동삼성에서 활동한 독립군의
전통을 이어 받아 임시정부의 직할무장부대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42년 조선의용대를 편입하여
3개 지대와 특파단. 공작대 등을 편성하고 조국이
광복하는 그날까지 항일투쟁을 주도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것을
밝히고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까지 공작대를 파견하였다.
그들은 정보수집. 선전활동 등에 주력하며 중국군, 영국군,
미군 등과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1944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와 합작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였다.

1945년 일제의 패망으로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은
이국에서의 기나긴 투쟁을 마치고 환국하였다.

<이상 '중경임시정부 안내문' 인용>





(광복군 창설)

중경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을 포함한 모든 독립운동을
받아들여 통합적으로 국민들의 독립운동을 통제하였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광복군을 창설하여 국내로 진격해
독립전쟁을 벌이려 했던 중경임시정부 청사. 하지만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한 일본은 항복을 선언하며,
우리 광복군이 준비한 독립전쟁은 무산됐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미국의 O.S.S 책임자와 한·미간의 공동작전을
협의하고,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내용은 시안과 푸양에서 O.S.S 훈련을 받은 광복군에게 각종 비밀무기로
무장시켜, 산뚱(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이들로 하여금 국내의 요소를 파괴하거나 혹은 점령하게 한 후에
미군용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한다는 계획이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다음 해인
1941년 11월에 대한민국 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발표하여
"자력(自力)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전복한다"라는 자주 독립노선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조국 광복 실천의 3단계를 제시하였다.
1기 대적혈전기(對敵血戰期), 2기 국토의 일부를 회복하여
임시정부가 국내로 이전한 시기, 3기 국토를 완전 탈환하여
복국(復國)을 완성하는 시기가 그것이다.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이 실현되어야만 했던 것인데,
1945년 8월 16일 국내로 투입예정이었으나 국내진공작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기 직전에 취소되어 계획이
무산되고, 특수훈련을 받은 O.S.S 요원들은 미국에 의해
용도폐기되고, 이후 미군정 당국이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아
광복군에게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다.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으며,
광복군은 1946년 6월 해체되는 운명을 맞는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영원한 광복군 김준엽/중,장준하/우
일제 맞선 광복군, 독재 맞선 참스승)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 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을 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한 무기를 주어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 보내어서 국내의 요소를
혹은 파괴하고 혹은 점령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도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었던 것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진실로 전공(前功)이 가석(可惜)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장래에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백범 일지 中>





(한국정진대 편성표와 광복군 배치도)





(마당에 서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복원 기념비)

본 청사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을 맞이한 마지막 청사로
1992년 중경시 정부의 승인을 받아 시급 문물보호단위 65-38호로
지정되었고, 광복 50주년이 되는 1995년에 복원되었다.
당시 복원공사는 중국 충칭시 인민정부외관공실과 문화국의
협조로 한국독립기념관에서 추진하였으며 현대중공업, LG그룹,
고합그룹, 대림산업, 대한항공 등의 기업에서 협찬하였다.
충칭의 고온 다습한 기후로 인하여 부분적으로 훼손된
청사를 2000년 개.보수하여 1호 2층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활동전시실'을 신설하고 같은해 9월 17일 광복군 창설
60주년을 맞이하여 재개관식을 가졌다. 본 청사는
망국의 설움을 딛고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애국선열들의 넋을 기리고 한중 우호희 새로운
이정표로 자리매김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중경대한민국임시청사 안내문'중
<청사복원의 의미>







(46)







(김구주석 공관실)







(국무위원 회의실)





(52)







(외빈접대실)







(내무부(신익희 장관), 법무부(최동오 장관) 집무실)





(57)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도, 27년간 이전한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과 이동

3.1운동 이후 보다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해 블라디보스톡, 상해, 서울 등지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한 민족지도자들은 단일정부로 통합되기를 바라는 민족적
열망에 따라 1919년 9월 상해에 통합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구로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내정,군사,재정 등 각 방면에 걸쳐 다양한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윤봉길 등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임시정부는 결국
상해를 떠나 항저우,자싱,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 등
중국 관내 지역을 이전하며 재기를 모색하였다. 그리고
1940년 중경에 정착하면서 본격적으로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고 항일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중경시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0년 9월 중경에 정착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 한편 전쟁수행과 광복 이후
조국의 재건에 대비하기 위한 체제정비에 착수하였다.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28일 삼균주의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제정, 공포하고 1942년 10월의 제 34차
임시 의정원 의회에서 각 정당 단체를 망라한 통합의회를
구성하고 전 민족적인 전시대책과 헌법 개정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1944년 제 36차 임시 의정원 의회에서 각 정당을 망라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조국독립에 대비한 헌법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곧 광복이후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되었다.

한편, 임시정부는 태평양 전쟁 발발이후 종래의
청원외교의 방식을 참전외교의 방식으로 바꾸어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국제적인 승인을 받기 위한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카이로 회담과 포츠담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45. 11. 3. 환국 20일전 중경청사 앞에서, 임시정부 요인들)

(한국 사정에 백지상태인 존 레디 하지 장군은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그의 부대 제24군단이 현실적으로
가장 빨리 한국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위치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남한지역 미군정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한국의 민심이 중경의
임시정부를 가장 신뢰하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다른 사항 두가지와
함께 상관인 맥아더를 통해 미국 정부에 건의하였다.

"점령기간과 총선거를 실시할 때까지 '상징적 간판인물들'로서의
역할을 맡기기 위하여 중국에 있는 임정 요인들을 귀국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 정책 수립자들은 이를 받아들지 않았다.
전후 한국의 비극은 이로부터 촉발되었다.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요인)가
설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이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국의 느닷없는
정부 실체 불인정,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는 조처에 큰 충격에 빠졌다.
요인 중에는 걸어서 만주를 거쳐서라도 임시정부의 간판을 들러 메고
귀국하자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삼웅 저 '김상덕 평전'中>

김구 주석은 미국의 입국 저지로 11월 23일 환국한다.





(방명록 서명)

님들이 목숨까지 바치며 이루려하셨던 조국광복
해방은 되었지만 둘로 나누어져 버린 조국
중경에서 좌우합작을 이루어 내셨듯
하루빨리 남북통일을 이룩해야겠습니다.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님들의
숭고한 희생에 고개숙여 감사드리며..

2011. 8. 5 





(청사사진, 중경'대한민국임시정부청사 안내문')

비가 내리는데다 관람시간이 오후 5시까지여서
바쁘게 돌아 다니느라 자세히 보지 못해 아쉽지만 늘,
임시정부 청사에 들리거나 독립투사에 관한 내용을 접하면
고맙고 감사하다는 마음에 앞서 숙연해지고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매국노, 친일한 후손들이 더 활개치며 사는 반면 
독립군의 후예들이 어렵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주춧돌을 잘못 놓고, 일제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탓이다.
시간이 걸려도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잘못된 역사가 반복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무거운 마음으로 임시정부청사를 나서면서..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약 우리 임시정부가 계획했던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였더라면..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들이
전과를 올리고 해방을 맞았더라면..
그래도 임시정부 실체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임시정부가 실체를 인정받았더라면..
그랬으면 역사가 어떻게 바꼈을까!
답답한 마음에..
 

중경시 투중구 칠성강 연화지 38호
관람시간은 09:00~17:00
관람요금은 20원(RMB)

크라잉넛|  서문탁
압록강행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