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11. 17:28ㆍ여행/여행기
제주에서 가장 제주다운 곳 제주민속촌
(가장 제주다운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 2011. 11. 13 / 흐렸다 갬
○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외
늘 바쁘게 쫓기듯 생활하다 유유자적해 보려해도
그게 쉽지않다. 원래는 오늘 새벽 성산일출 담으러 갈
겨획이었는데 날씨가 좋지않을 거라고 하여 포기하고는
오히려 잘됐다 싶어 아침에 늦잠을 자려했는데도 습관은
어디가지 않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에 잠이 깼다.
하늘에는 별도 없이 짙은 구름이 잔뜩 내려앉아 있다.
오늘같은 날은 좀 늦게 일어나도 되련만 이런 날
오히려 더 일찍 일어난다니까.
늑장을 부리다 늦은 아침을 먹고
민속박물관에 들렸다.
(제주도에서 가장 제주다운 곳, 제주민속박물관)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 40-1에 위치한
제주민속촌은 157,100㎡(57,522평)의 넓은 면적에
1890년대 쯤의 제주도 옛 문화와 역사를 원형 그대로
되살려 놓은 제주에서 가장 제주다운 공간으로 100여 채에
달하는 전통가옥은 실제로 제주도민들이 생활하던 집과 돌,
기둥 등을 그대로 옮겨와서 제주도의 산촌, 중간산촌,
어촌을 비롯하여 무속신앙촌, 제주 관아 등을
재현에 놓은 것이라고 한다.
(정문을 들어서자 제일 먼저 만난 '태우')
제주의 뗏목배인 태우는
한라산에서 자라는 구상나무 10여 개를 나란이 엮어 만든
원시적인 고깃배. 태우가 원시적인 배인데도 최근까지
많이 사용되어 온 것은 장점이 많기 때문..
통나무를 나란히 엮어 놓기만 하면 되므로
우선 만들기가 쉽고,
선체가 수면에 밀착되어 풍파에도 뒤집히지 않아 안전하고,
해초를 건져내어 싣는데도 편리한데다
부서질 우려가 거의 없다고..
(벌써 잎들을 다 떨쳐버리고 겨울채비에 들어간 느티나무)
(산촌마을)
한라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연 마을이 557개에 이르는데,
해안을 따라 밀집하여 한라산 쪽으로 오를수록 그 규모가 작아진다.
이들 마을들은 한라산의 고도를 기준으로 해서 크게 산촌, 중산간촌,
어촌으로 구분되는데 산촌은 해발 300m이상의 준평원 지대에
형성되었던 마을로 생업은 목축이었고 겨울엔 사냥을 했다고 한다.
마을길에서 집 마당에 이르는 골목길을 '올레'라고 하는데
올레는 큰 길에서 집안이 훤이 들여다 보이지않도록 해주고
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는 것을 막아주는 기능을 한다고 한다.
초가집들이 거의 비슷비슷한 모습이지만
산촌, 농촌, 어촌에 따라서 구조나 집안에 비치해 놓은
생활용품들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옛날 제주의 대문인 정주석과 정낭)
집 입구의 양쪽에 구멍을 뚫은 정주석을 세우고
정낭이라는 나무를 걸쳐 놓아 소나 말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정낭 3개가 걸쳐져 있으면 주인이 멀리 출타하고 없음을 나타내고,
다 내려져 있으면 집에 사람이 있으니 들어와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1개는 가까운 곳에 2개는 조금 더 먼 곳에 나갔다는 것을 표시로
정낭은 제주가 서로 믿고 사는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제주의 재래식 화장실 통시와 재래흑돼지)
(평화로운 산촌마을)
문에 붙어있는 입춘첩(立春帖)
立春大吉 (建陽多慶)
父母千年壽 (子孫萬代榮)
봄이 시작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합니다.)
부모는 천년을 장수하시고
(자식은 만대까지 번영하라.)
(돌하르방이 지키고 있는 마을풍경)
제주도 특유의 석상인 돌하르방은
현무암을 깎아서 만들었는데 크기는 가장 큰 것이 266cm,
가장 작은 것이 103cm 였다고.. 돌하르방의 얼굴은 싱긋 웃는 입과
동공이 없이 불룩 튀어나온 눈, 크고 넓적한 코, 미세하게 웃는 모습,
그리고 손은 배 위에 얹어져 있고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는
벙거지(전모) 형태다. 1971년 8월 25일에
지방민속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한다.
돌하르방은 제주도 방언으로
돌로 만들어진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20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단어.
이 이름 외에도 벅수머리, 무성목(武石木), 우성목(偶石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탐라 역사서에 따르면 옹중석(翁仲石)이라고
하는데, 현재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대장간에는 칼, 낫, 엿장수 가위.. 곰방대까지..)
제주 민속촌내에는 목공예방, 서각공예방, 서당,
대장간, 낙화혁필, 화가의 집 공예방 등이 있다.
장인들이 직접 옛 모습을 재현하고 있어 제주도의
역사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순박하고 밝은 모습)
(서각.. 멋진 작품도 보고..)
(민속놀이 '고누')
(창호지문과 마루바닥, 맷돌이 정겹다)
(숯을 굽던 숯가마 '숫굴')
(헛간)
(부잣집? 일반적인 집과는 다른 대문 달린 집)
벽에 걸린 덕석(멍석)이 필름을 먼 과거 추억의 세계로 이끈다.
(마당 한 켠 메마른 땅에도 꽃은 피고..)
(방문(榜文))
오늘 혼사가 있는듯 청사초롱달린 잔치집 담벽에
소도둑(?) 같은 범인 방문(榜文)도 붙고..
(계절은 늦가을인데 담 너머 남새밭은 봄같이)
(민속놀이)
제주민속촌에서는 씨름, 투호, 널뛰기, 팽이치기, 제기차기, 줄넘기,
그네타기, 굴렁쇠, 고누 등 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다.
(말총공예방)
(유배소, 위리안치유배소)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된 사람들이
대략 200명 내외로 추정되는데 유배된 왕족이나
정치관료가 많아 제주의 학문과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조선 후기 서화가인 추사 김정호를 들 수 있다.
그는 제주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시켰다고 한다.
제주에 유배된 죄인들은 대개 민가에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이 집은 민가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유배소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보통 민가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는 그 집 주인이 죄인을 보살피고
그들의 신상에 대해 책임을 졌는데 그 집 주인을 보수주라고 했다.
보수주는 주로 관노나 하리, 관기가 맡았다고 한다.
유배된 죄인들 중 일부는 집 주위에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갇혀 지내는 '위리안치'라는
가혹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43)
(향수에 젖게하는 정겨운 모습들..)
(중간산촌)
해발 100m에서 300m 사이에 분포되어 있는
구릉 평야지역으로 농업위주의 생활을 하던 마을.
옛날 대정현(지금의 모슬포)과 정의현(지금의 성읍리)
현청이 세워졌던 곳도 이런 마을이었으며
오늘날 어업과 관광이 주산업이 되기 이전에는
문화 행정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아들이 태어난듯.. 사라지고 있는 풍습들이다)
(어촌마을, 어구전시관)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자연 용출수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해발 100m 이하의 해변을 중심으로 형성된
어촌 주민의 주생업은 어업이나 반농반어에 가까운 편.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배가 드나들던 관문이었던
제주, 화북 조천 등지로 정치 경제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어부의 집, 해녀의 집과 제주유일의 어구류의 흐름을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어구전시관이 꾸며져 있었다.
(골목길에 핀 가을꽃들..)
(장터, 주막)
(들어가서 살펴보고 싶었던 제주관아.. )
조선시대 제주목의 관아를 "제주영문"이라 한다.
제주영문의 본청(연희각)은 목사의 집무처로 제주목사는
여기서 모든 정무를 처리하였다. 본청 옆에는 옥이,
본청 앞 외대문과 내대문 사이에는 향청과 영리청이 있다.
향청은 민간에서 임명된 사람들이 근무하면서
목사의 자문에 응하며 관리와 백성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하였다.
본청 오른쪽의 영리청에서는 육방관속이 호적관리, 조세징수,
환곡과 진상품 관리 등의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고려 이전까지만 해도 탐라는 고대해양국가로서
중국, 일본 등 주변국가와 활발한 무역을 하던 독립된 국가였다.
그러나 탐라는 고려 숙종 10년 1105년에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고려의 지방조직의 하나가 되어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삼별초 난이 발생하자 탐라는 강화도, 진도에 이어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가 몽고에 대항하여 싸운 최후의 항쟁지였다.
그 후 탐라는 약 100년 동안 몽고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몽고는 제주도 곳곳에 목마장을 설치하고 일본정벌을 위한
해양진출의 전초기지로 삼았고, 1295년에는 탐라를
제주로 고쳐 목사와 판관을 두었다. 변방으로 취급받던
태종 16년 1416년부터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의
제주는 조선시대 1목 2현의 삼읍체제로 통치되었다 하는데..
호텔 체크아웃 시간이 다 되어 가는 바람에
아쉽지만 통과.
(옥)
(추사전시관)
제주도로 유배당한 추사 김정희는
이 곳 유배지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전시관에는 추사 김정희의 작품
영인봉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유배란 중죄인들을 멀리 보내
쉽게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말한다.
즉, 즉결 추방인 셈이다.
제주도는 본토와는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지리적 여건과 교통이 또한 불편함으로 인해 유배지로는
최적지였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대정(大靜)으로 유배되었는데,
대정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험한 지역이기 때문에 포구인
모슬포를 일컬어 '못살(사람이 살지 못할)포'라고 비하했던 것처럼
조선시대 원악(遠惡)의 유배지로서 가장 각광(?)을 받던 곳이었다.
조정의 정치권력 유지를 위해 배척해야 할 당사자들 가운데
중죄인이라는 이름으로 멀리 추방 및 격리시키기 위한
최적지로 제주도 대정이 이용되었던 경우가 많았다고.
안동김씨에 의한 세도정치 때문에 무고를 당하여
6차례에 걸친 혹독한 고문 끝에 36대의 곤장을 맞고서
만신창이 몸으로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위리 혹은
가극(加棘)안치는 중죄인에게 적용되었는데 집 주위에
울타리를 치거나(圍籬), 가시덤불을 쌓고(加棘) 그 안에
유배인을 유폐시킴으로써 죄인의 중연금 상태를
내외에 상징하는 조치)의 명을 받은 추사 김정희는
강도순의 집에서 위리안치 유배생활을 하면서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하는 등 자신의 학문과
예술 모두를 승화시켰다. 추사 김정희는 9년
(8년 3개월)만에 해배되어 돌아갔다 한다.
역설적이게도, 조선시대 행형제도에서
유배형이 갖는 미덕은 결과적으로 학자들이
책을 읽을 수 있고 자신의 예술에 전념할 수 있는
'강제적인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은 18년 유배생활이 낳은 결과였고
원교 이광사의 글씨도 22년 유배의 산물이었듯이,
추사의 제주도 유배생활 9년간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여 심화시킬 수 있었으니..
(국향 가득한 좋은 계절에..)
(볼거리는 많고 시간은 없다)
이번 여행은 오랫만에 시간에 구애받지않고
유유자적해 보려 했건만.. 아침 먹고 체크아웃하기 전에
민속촌에 들리는 바람에 그만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늑장부리다 아침을 늦게 먹은데다 민속촌이 예상했던
것보다 넓고 볼거리가 많아 차질이 생겼다. 오늘
겉모습이기는 하나 가장 제주도다운 민속박물관에서
문화와 풍습을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어 감사하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그 때는 좀더 시간갖고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돌문화전시장 너머로 보이는 빨간 지붕의 해비치리조트)
첫날 제주환영 선물인듯 양쪽 발바닥에 물집이
물집이 생겼는데 설상가상으로 어제 한라산 등반하느라
물집이 터지고 짓이겨져 걷기도 힘들었지만 고군분투했으나
결국은 시간에 쫓겨 몇 곳은 들리지 못하거나
주마간산.. 시간맞춰 호텔로 돌아와
시간맞춰 체크아웃 하고 에코랜드에 가려고
민속박물관 주차장으로 나갔더니 거의 1시간에 1대꼴인
교래리 거쳐 제주 가는 버스가 조금 전에 떠난 모양.
조금 전에는 시간에 쫓겼으나 갑자기 지겹도록 많은
시간이 생겨 주변을 돌아보며 시간을 보내 보지만
주차장에서 1시간은 너무 길었는데..
이게 왠일..
택시기사님이 "어디 가십니까?" 하기에
별 생각없이 "에코랜드" 했더니..
"제주 나가는 길인데 10,000원에 가시지 않겠냐?"고 한다.
버스를 기다린 시간이 아깝지만 그에 비할 바가 아니다.
버스를 타고 가려하지만 표선에서 에코랜드 가는 길은
대중교통 연결이 쉽지않다. 97번 도로를 타고가다
남조로검문소에서 내려 다시 1118번 도로 교래자연휴양림에
내린 후 다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하고..
택시로 가기에는 부담되는 거리여서 여기서는 버스로
나가고 교래에서 택시를 타고 갈 참이었는데..
시간적으로나 차비로나 완전 횡재수준이다.
여행다니면서는 버스를 타야할 경우도 있지만
택시를 타면 그 지방 정보를 접할 수 있어 좋다.
1대간9정맥 길에서도 일부러 택시를 타기도 했는데
택시가 편리하기도 하고 또 택기사만큼 그 지방
지리나 소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기사님, 제주도가 세계7대 자연경관에 선정되어
좋으시겠습니다. 축하합니다." 했더니..
"좋은 점도 있지만 문제도 많다"면서 꺼내시는 말씀..
"우선, 제주도 들어오는 교통편이 현재 포화상태여서
공항부터 새로 지어야 하고.., 숙박시설, 음식점도
늘려야 하고, 시민들이 가이드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외국어를 해야 하는데.." 하며 말을 흐리시더니..
"그렇다고 우리 제주시민들 생활이 얼마나 나아지겠어요?"
하면서.. 관광객들이 제주에서 쓴 돈 거의 전부가 서울의
부자들한테로 다 빠져 나가고 실제 제주시민들한테는
별 도움될 것이 없을 것이라 한다. 당장.. 지금 가려는
에코랜드를 비롯하여 제주도에 대규모로 투자된 회사,
시설들은 모두 돈 많은 서울사람들 것이라 한다.
그리고 중요한 한 마디..
"이제부터 대규모 위락시설 짓는다고
제주도 아름다운 곳이 남아 날 수 있을지.."
공감되고 공감되는 말씀이다.
마지막에 들린 에코랜드
(에코랜드 정문, 메인역)
흥정을 한 금액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택시비 10,000원은 정당한 가격이 아닌 것 같아
내릴 때 2,000원을 더 드렸더니 기사님도 기분 좋아하시면서
트렁크에서 감 2개를 꺼내시더니 선물로 주시고는
매표소까지 친절하게 안내해 주신다.
서로가 기분좋은 일. 감사합니다.
한림공원에 가려다 제주시로 나가는 길이어서
에코랜드로 오긴 왔는데.. 울창한 숲 속의 꽉찬 주차장
입장료도 비싼데 인산인해를 이룬 모습이 심상찮다.
첫 인상.. 솔직히 이건 아니다 싶었다.
(명절날 기차역같이 복잡한 메인역)
(호수를 가로지르는 에코브리지 위에서)
2번째역 에코브리지역에서는 내려
3번째역 레이크사이드역까지는 에코브리지를 따라 도보로 걸어서 간다.
이국적인 모습을 더하려 역 이름도 영어로 지었는지..
(굉음이 지축을 울리는 허브크랩트(수륙양용차))
아니나 다를까
대규모 위락시설이 울창한 숲속에 있는 것이
신경 쓰였는데 갑자기 굉음이 울려 깜짝놀라 왠 소린가 했더니
저쪽 수륙양용차에서 나오는 귀를 찢는듯한 소음 아닌가!
말도 아니다. 울창한 곶자왈 숲을 걷어내고 대규모 위락시설이
들어서 있는 것만 해도 자연훼손이 큰데 이 숲속에서
굉음을 울리는 수륙양용차까지 운행하고 있다니..
완전 입체적으로 곶자왈을 망치고 있구나 싶다.
(억새밭)
(풍차, 에코랜드 시설물중 제주적인 모습은 없었다)
(운동장 같은 여기도 울창한 곶자왈 아니었을까?)
아마존 밀림을 벌목하듯..
제주의 허파 곶자왈을 소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걷어내어 운동장을 만들었다면..
(4번째역, 피크닉가든역)
그래 그렇다.
피라밋을 쌓느라 얼마나 많은 노예들이 죽었는지는 생각지 않고,
만리장성을 쌓느라 차출되어간 노동자 8할이 돌아오지 못한 것은
생각 못하고 그 결과 이루어진 위용에만 감탄하는 우리들..
이렇게 곶자왈 밀림 속에 철길이 놓이고
인간의 허파같은 밀림을 걷어내고 운동장을 만들어 놓고,
번듯한 건물이 들어서니 보기 좋다고 환호성을 지르지만..
이전의 모습도 보며 눈앞의 모습에 너무 마음 뺏기지 말았으면..
곶자왈 울창한 숲 걷어내고 철길 깔고, 이런 집 짓는 일은
잠깐이면 되지만 이 곶자왈이 형성되는데는
도대체 얼마만한 세월이 필요했을까.
인간이 자연을 훼파하는데는 순간이지만
이 자연이 이뤄진 과정에는 인간의 지식과 셈법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신의 섭리가 있었던 것을.
(곶자왈.. 생태계의 보고, 제주의 허파)
곶자왈'이란, 숲이라는 의미의 '곶'과 암석들과
가시덤불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뜻하는 '자왈'의 제주도 방언
곶자왈지대는 세계에서 유일한 열대 북방한계 식물과 남방한계
식물이 공존하는 제주도의 독특한 숲 또는 지형을 일컫는다.
화산분출 시 점성이 높은 용암이 크고 작은 암괴로 쪼개지면서
분출되어 요철지형을 이루며 쌓여있어 지하수 함양은 물론
보온 보습효과를 일으켜 난대 및 온대에 이르는 다양한
식생이 형성되어 있는 생태계의 보고다.
(4.5km나 철길이 깔려 있다)
분명 이색적인 모습이고 가족끼리 나들이 장소로도 괜찮겠고,
연인이나 친구들과 와도 괜찮을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는
위락시설 같으나 넓게 펼쳐진 잔디밭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굉음을
울리며 지축을 흔드는 허버크랩트가 숲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철길을 까느라 얼마나 많은 숲이 훼손되었는지를 생각하며
무조건 찬사만 보내지 말았으면 좋겠다.
(5번째역 그린티&로즈가든역은 그냥 통과.. 억새밭을 지나)
돌담(잣성)과 분화구도 지난다.
(영원히 평행선일 것 같은 철길도 만나듯..)
(한 바퀴 돌아 다시 메인역, 기념품 판매점)
(꽃과 그림자)
에코랜드는
30만 평의 곶자왈 원시림에 기차여행을 할 수 있도록
만든 놀이공원으로 홍보물에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대명제를 향하여 멈추지 않고 달려가겠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한 마디로 이런 식은 곤란하다 싶었다.
'자연과의 공존'은 돈에 눈먼 인간의 입장이고
자연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일방적으로 훼손당하고 있는
자연의 무덤, 돈벌이 현장에 지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찾고 돈벌이가 되니 앞으로도
곶자왈을 밀어서라도 더 큰 돈을 벌겠다는 욕심.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찾는데..
돈이 이렇게 굴러 들어오는데..
포화상태인 주차장도 늘리고 시설도 늘리면
더 큰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욕심.. 욕심!
이미 자제력을 상실했는데 브레이크 장치마저 없다면
이 탐욕을 어떻게 주체할 것인가!
노동으로 축적된 자본이 노동을 몰아내듯
자연을 이용하여 번 돈으로 자연을
더 훼파시키는데 사용할 것 아닌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돈이 주인되는 세상(資本主義)이 되다보니
돈이 된다면 물불가릴 것이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는데
더 이상은 안된다. 이제 정말 모두 욕심을 줄여야 한다.
특히 가진 자들은 탐욕을 줄이고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속이지 않고, 자연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는 것
더 나아가 자연은 나의 것도 지자체의 것도 아닌
후손으로 빌려 사용하다 잘 보존하여
돌려주어야 할 유산이자 부채인 것을.
제주도에 바램이 있다면,
제주도가 N7W의 세계7대경관에 선정되는 바람에
제주도의 자연이 더 훼파되고 역설적이게도
제주도의 본 모습을 잃는 우는 범하지 않기를..
가장 제주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일테니..
(교래휴양림 주차장)
10분 정도 걸어 나오니 1118번 도로가 나오고
교래휴양림 버스정류장이 있었다. 에코랜드에서
여기까지 걸어나오는 사람도 없더니.. 정류장에도 우리뿐.
버스가 몇 분만에 있는지 스마트폰으로 확인을 하려해도
인터넷 연결이 잘 안되어 길가에 주저앉아
버스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려 본다.
(제주시외터미널 교통안내도)
사진을 클릭하시면 지명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확대됩니다.
(길 위에서 길을 잃다)
(시외터미널 옆에 서 있는 ? )
시외터미널에서 공항가는 버스편도 쉽지않아
택시를 타고는 택시기사님에게 말을 건네보지만..
"제주가 세계7대경관에 선정되어 좋겠습니다."
"우리한테 좋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돈은 서울사람들이 다 가져가는데.."
"관광객이 많이 오면 승객이 늘어날 것 아닙니까"
"그래봐야 우리는 최저임금 수준입니다."
"관광객들이 제주도민들에게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소비방법으로는 뭐가 있겠습니까?"
"음식점이나 밀감 사주는 것 정도.."하며 말을 흐린다.
민간단체 N7W가 선정한 세계7대경관이 신빙성에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얼마나 파급효과가 있을지..
대통령까지 나서 전 국민을 상대로 홍보를 한 탓인지
매스컴에서는 대단한 경사가 난듯 완전 축제분위기지만
실제 제주도의 바닥 민심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함께 누릴 수 있는 축제와 기쁨은 없는 것일까!
(제주공항, 그리고 김해공항)
제주도에서의 2박3일..
알토란같은 휴가를 잘 보낼 수 있어 감사하다.
문장에도 쉼표가 있고, 악보에도 쉼표에 쉬어야
박자를 맞추며 아름다운 음악이 되듯,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쉼표를 찍으며
박자를 맞추어 갈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번 제주도에서의 2박3일이 생활의 활력소가 되겠지.
한달 전에 다녀온 여행을 끝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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