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31. 00:04ㆍ山情無限/山
등산 / 고은
64년 전 고향 할미산에 올라갔다 나는 열심이었다
도마뱀도 놀라고
나도 놀랐다 내 머리빡 흉터도 번쩍 놀랐다
멀리 비행장에서
쌍엽비행기가 떴다
그 비행장 너머로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그뒤로 고향 떠나
무등산
월출산
대둔산
백운산
소백산 비로봉
내장산
가야산
오대산
팔공산
영축산
금정산을 올라갔다
북한산 도봉을 올라갔다
44년 전 강화 마니산에 올라가
하룻밤 덜덜 떨며
두 길 중
한 길을 시작했다
종교냐
문학이냐
35년 전 한라산에 올라갔다
온통 바다였다
24년 전 한라산에 올라갔다
30년 전 설악산 대청봉
20년 전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갔다
백무동으로 내려왔다
15년 전
중앙 히말리야
카일라스산 6천 3백 미터쯤 올라갔다 나는 반송장이었다
체중 11킬로그램이 빠져버렸다
원고지 백장이
원고지 열장으로 팍 줄어들었다
10년 전 장백산에 올라갔다
7년 전 백두산에 올라갔다
7년 전 백두산 장군봉에 올라갔다
2년 전 또 백두산에 올라갔다
뜨는 해 지는 달이
하늘에 함께 있었다
내려오며
북의 작가 몰래 울었다
내가 오른 산꼭대기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텅 비어 있었다
단 한마디도 없었다
괜히 나만
무엇무엇무엇을 잔뜩 가지려 하고 있었다
나의 탐욕이 아니라면
나 또한 텅 비어 있을 것이다
부끄럽구나
우리집에 걸려 있는 내 옷들의 텅 빈 주머니들이
아니 백화점 오층
양복들의 텅 빈 주머니들이
나의 내일일 것인가 아닐 것인가
-시집『허공』(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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