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구시가 광장, 천년의 역사가 응축되어 있는..

2013. 7. 15. 02:11여행/여행기

 

 



체코 중서부 블타바강(몰다우강) 연변,
라베강(엘베강)과의 합류점 가까운 곳에 중세의 모습을 고이 간직한 채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 백탑의 도시, 북쪽의 로마,

유럽의 음악학원 등 수 많은 애칭만으로도 프라하가 유럽 문화의 중심지이자

유럽인의 사랑을 듬뿍 받아 온 아름다운 도시임을 짐작케 한다.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로 10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고도답게

중세의 기풍이 곳곳에 서려 있다.1968년 1월의 '프라하의 봄'으로

잘 알려진 프라하는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어 체코의 수도가 되었다.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제 모습을 뽐내고 있다. 이 때문에 1989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해마다 1억명의 관광객이 프라하를 찾고

있다고 한다. 세계 6대 관광도시에 이름을 올린 프라하는

2004년 체코의 EU가입을 계기로 더욱 발전하고 있다.







오시비엥침에서 프라하 오는 길

무거운 마음을 씻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계속 비가
내리는데 보헤미안의 고향으로 들어오면서 집시의 출현에서부터
현재까지 그 유래와 그들의 문화, 생활과 애환에 대해서까지
일목요연한 설명을 듣고 사라사테의 '찌고이네르 바이젠'을
감상하니 끊어질듯 이어지는 바이올린 선율같은 그들의
애환과 슬픔이 느껴지는듯 하다.






프라하 시가지에 들어섰는데도 아직도 비가 내린다.
첫날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관광 중엔 비를 만난적 없었는데
프라하에서 기록이 깨지려나.. 볼 것 많은 프라하인데..










거짓말 같이.. 이번에도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비가 그쳤다.
비 그친 프라하의 기후는 초겨울 날씨같이 쌀쌀했다.














바츨라프 광장 가는 길





거리에는 화가들도 보이고..











체코 민주화의 성지 '바츨라프 광장'

광장이라기보다는 대로 같은 느낌이 강하며
상점 은행 카페 호텔 등이 즐비한 프라하 제일의 번화가이자 쇼핑가.
중세에는 말시장이 서던 곳이며 현재의 건물은 대부분 20세기에
지은 것이다. 이 광장은 체코 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성지이기도 하다.
1963년에 시작된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은 1968년 소련을
포함한 바르샤바 동맹군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에 대항해 시민궐기가
일어났고, 1969년 프라하 대학 철학부의 얀 팔라흐가 바츨라프 동상 앞에서
분신자살하면서 시위는 더욱 결렬해졌다. 이후에도 2명의 학생이
분신자살을 해 시위는 최고조에 이르렀지만 결국 소련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바로 '프라하의 봄'이다.
1989년의 '벨벳 혁명'때도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민주화를 쟁취했다.
이후 성 바츨라프 기마상 앞에는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으며 지금도 그들을 추모하는 헌화가 끊이지 않는다.
















바츨라프 광장 풍경들





도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낙서, 영역표시라군요





희준아 찬우야 너들이 함께하여 더 즐거웠단다.











천의 얼굴을 가진 골목을 지나 구시가 광장으로 가는 길





차도보다 넓은 인도









건축박물관으로 불리는 구시가 광장의 건물들..
위로부터 구시청사, 성 미쿨라쉬 성당, 틴 성당













광장에는 연주와 각종 퍼포먼스가 펼쳐지고..





종교개혁가 얀 후스 동상

얀 후스(1372~1415)는 최코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으로
15세기 종교걔혁가 마틴 루터보다 1세기나 앞서 종교개혁을 주장한
인물로 유명하다. 15세기 그는 신학자로서 카를 대학 총장과 성직자를
역임하면서 특정 계층만이해할 수 있게 라틴어로 진행하던 예배를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체코어로 설교했고, 체코어 철자법 개정과 체코어
찬송가 보급에도 힘썼다. 뿐만 아니라 당시 부패한 가톨릭 교황과 성직자,
교회의 권 등을 부정하고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도 맹렬히 비난했다.
이로 인해 1411년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후 1415년, 독일의 콘스탄츠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자 그의 죽음은 체코 전역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이때부터 신교(후스파)와 구교(가톨릭 세력과 합스부르크 가)간의 오랜
종교전쟁이 시작된다. 전쟁 결과 300여 년에 걸친 합스부르크가의 오랜
식민통치를 받게 되는데, 종교.정치.문화 등의 자유를 박탈당했을뿐
아니라 심지어 모국어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어둠의 시대로 불릴 만큼 암울했던 식민통치시대에 후스의 사상과 정신은
체코인의 종교뿐만 아니라 독립을 향한 민족의 핵심 사상이 되기도 했다.
구시가 광장의 얀 휴스 동상은 1903년에 라다슬라프 샬로운이 제작,
얀 후스 서거 500주년이 되던 1915년에 완성해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중앙에 얀 후스가 서 있고 한쪽에는 그를추종하는 후스파들과 식민지배
시대에 추방당한 신교도, 체코 부활을 상징하는 어머니와 아이상으로
이루어진 이 동상은 아르누보 양식의 역동적인 모습이다.
동상에는 '진리는 승리한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구시청사와 구시청사 벽면에 걸려 있는
'얀 젤리프스키(Jan Zelivsky)' 흉상 부조

구시가 광장은 낮과 밤을 가릴 것 없이 계속되는 활기찬 분위기와
프라하 역사에 길이 남을 주요사건들의 발생지로써 더욱 잘 알려져 있다.
1422년에 행해진 성직자 '얀 젤리프스키(Jan Zelivsky)'의 처형 장소이자
1458년에는 시민들이 포제플라티의 이지(Izie)왕을 뽑았으며, 1621년에는
비라호라 전투에서 패전한 보헤미아의 신교도군 지도자와 합스부르크
제국을 반대하는 귀족 27명이 공개처형 되었다. 1918년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 등을 벌인 애환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성 미쿨라쉬 성당

합스부르크 왕가가 프라하를 지배하던 1735년에 완성된
바로크 양식 성당.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프라하의 유격대가
사용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후스파 교회로 이용되었다.
내부는 성 미쿠라쉬(산타클로스로 알려진 성 니콜라스)의
일생을 묘사한 천장화와 프레스코화가 볼만하다.






Synagoga를 가르키는 이정표..
유대인 지역에도 가 보고 싶지만 부족한 것은 시간










구시청사와 '오를로이' 천문시계

프라하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자 구시가 광장의 명물.
구시청사에는 디자인이 독특한 천문시계가 설치되어 있어
광장을 찾은 관광객들이 넋을 잃고 바라보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최초 건물은 1338년에 완공되었으나, 수 세기를 걸쳐 주변 건물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증개축한 여러 건물로 이루어진 복합단지다.
규모.색.디자인 등이 다른 건물들이 붙어 있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구시청사인지 구분하기가 쉽지않다.
70m 높이의 탑이 있는 서쪽 5개 건물이 구시청사이며,
북쪽 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이후
지금까지 공터로 남아 있다. 전쟁의 참상을 보여줌으로써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해 전화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현재 기념품 등을 파는 노천시장이 열리고 있다.








구시가 광장 노을의 노을









시가지 풍경들







시간날 때마다 소매치기 조심하라고 하더니
여기 한 건 터졌나 보다. 무장한 경찰이 출동했다.






다음날 다시 찾은 구시가 광장, 12시 정각에 펼치는
천문시계 퍼포먼스를 보러 모인 사람들








예배당에서 예식을 마친 신혼부부도..

구시청사 안에 있는 예배당은 현지인들의
결혼식장으로 인기가 매우 높다고 한다.










정교하게 제작된 '오를로이' 천문시계는 장인의
혼이 담긴 예술작품으로 체코를 대표하는 유물 중 하나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 벽시계는 매시 정각이면 퍼포먼스를
펼치는데 이를 구경하기 위해 수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와 기다리고 서 있다는 것이 참 재미있는 일이다.

이 아름다운 천문시계는 1490년에 하누슈라는
시계공이 만들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천문시계가 완성되자
프라하 시민들은 하누슈가 다른 곳에 이와 같은 시계를 다시는
설치할 수 없도록 그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이에 분노한
하누슈는 자신을 손을 넣어 시계의 작동을 멈추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 16세기 얀 타보르스키가 완성할 때까지 시계는 100년 동안
멈춰 있었다고 한다. 천문시계는 천동설에 기초한 2개의 원판이
위쪽은 시간과 천체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아래의 원판은
12개월을 나타내는 그림과 365일로 나누어져 있다.






드디어 열두시 정각!
종소리가 울리면서 창문이 열리고 나팔소리가 나면서
해골 모양의 인형(죽음을 상징)이 밧줄을 잡아 당겨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시계 위쪽 2개의 창문이 열리면서
예수와 12사도가 차례 차례 지나가면서 창문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해골 옆에 있는 터번을 두른 터키인(두려움의 상징),
거울을 든 허영인(허무의 상징)이 각자의 몸짓을 한다.
마지막으로 황금색 수탉이 홰를 치며 울면 끝이 난다.
30초도 안되는 아주 짧은 퍼포먼스라 큰 기대를 하고 보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퍼포먼스가 전하는 메세지는 중요하다.
부의 축적과 향락을 추구하는 인형들이 함께 움직이며
"인간의 부나 허영 모두 죽음 앞에서는 부질없다"는 것과
"너희에게도 언젠가는 죽음의 시간이 닥칠 것이다"라는
암시를 하는데 인형들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설마 내게 그런 시간이 올까?"라는 의구심을
나타내는 의미라고 하니 의미심장하다.








광장 주변에는 기념품을 파는 조그만 상점들이 많다







골츠킨스키 궁전

프라하를 대표하는 로코코 양식의 화사한 건물로
분홍빛 조각 장식 등이 유난히 눈에 띈다. 우아한 이 건물은
18세기 초 골츠 백작에 의해 지어졌고 체코의 문호 카프카와도
인연이 깊은 건물이라고.. 이곳 발코니는 1948년 2월 코트발트가
체코 민주공화국의 해체와 사회주의 국가의 탄생을 선언한 곳.
지금은 건물 2.3층을 국립미술관으로 개방하고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만큼 신비하고 우아하며
전설이 살아있는 건축물들.. 프라하의 건축물들을 증개축할 때
외부 모습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부만 변경을 한다고 한다.
몽땅 밀어버리는 우리하고는 많이 다르다.






늦었다. 늦은 것이 아닐 것이다.
여행을 떠났다. 새로운 세계를 배우고 싶어서..









틴 성당

 








우리는 바쁘게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고 다녔지만
프라하를 제대로 볼려면 적어도 석달정도는 눌러앉아
찬찬히 돌아봐야할 것 같다










국립박물관과 댄싱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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