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폴란드 최대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2013. 7. 12. 01:34여행/여행기

 

 

 

 

 


크라쿠프에서 60km 쯤 떨어진 '오시비엥침(Oswiecim)'은
지금은 '아우슈비츠(Auschwitz) 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뀐
인간도살장이라 불리는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곳이다.

인종 차별, 학살, 가스실, 잿빛 화장터, 인체실험 등으로
상징되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인류 최초로 산업적인 수단을 이용한
인종 학살이 이루어졌던 곳으로 인간의 잔혹성과 야만성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 주는 곳. 나치스와 히틀러는 유대인을 비롯하여 나치스에
반대했던 정치인과 지식인, 예술인은 물론이고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까지
강제로 이곳에 수용하였다. 수용된 사람 중 일부는 살아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대접도 받지 못하고 강제 노동 중에 세상을 떠나거나
총살되거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다. 30여 개 나라에서 강제로 끌려온 수 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곳.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는 광기어린
'전제주의'가 얼마나 집단적으로 잔인해지고 흉악해 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곳으로 온 인류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부끄러운 역사의 현장이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입구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나치스와 히틀러는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정치인과 지식인, 예술인 등을 수용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던 1940.5.20일 폴란드 크라쿠프 외곽
아우슈비츠에 수용소를 지어 1940.6.14일 폴란드 정치범들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들을 강제수용시키기 시작했다.

아우슈비츠는 원래 옛 폴란드의 병영이 있던 자리로
유럽의 중심에 위치한데다 철도까지 있어 유럽의 각지로부터 대규모의
수송과 이동에도 편리한 곳이어서 1940년 독일은 늘어나는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한다는 명목으로 감옥을 짓고 이름도 아우슈비츠로 바꿨다.
그 후 나치의 세력이 확산되자 수용소도 제2, 제3, 제4 등 계속 늘어나
1944년까지 존재했던 수용소는 모두 4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수용소는 대부분 광산이나 제철소 등 대규모의 공장 가까이에
위치하여 수용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데 이용하였고,

나치의 유대인 말살정책에 따라 이 곳에 수용된 사람들은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이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폴란드, 체코,
유고슬라비아, 소련의 전쟁 포로,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 각지에서
끌려 온 공산주의자들, 사상범들, 그리고 집시들도 상당수여서
나치 권력의 눈 밖에 난 인종적 정치적 소수자들의 전시장과 같았다.
이들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분류되어 수감되었는데,
노동력이 없다고 생각되는 환자나 어린이, 노인, 임산부,부녀자 등
70퍼센트 이상은 분류나 기록의 대상조차 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해 정확한 희생자를 헤아리기 어렵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관문인 2층 건물.
과거 나치스의 군대가 사용했던 이 건물은 현재 안내소를 비롯하여
그들의 만행을 보여 주는 자료 영화와 서적을 판매하는 서점,
자그마한 카페로 이루어져 있다. 가이드의 설명을 수신할 수 있는
수신기와 헤드폰 한 세트를 챙겨 안내소 건물을 빠져나와
100m쯤 이동하면 강제 수용소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입구에서 부터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수용소 입구에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라는 뜻이 담긴
'ARBEIT MACHT FREI'라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는데 문구를 유심히 살펴보면
'ARBEIT'라는 단어의 B자의 위와 아래가 바뀌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강제 수용소 당했던 사람들이 독일의 나치스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의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이 안에서는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간다'라는 의미라고..
'ARBEIT MACHT FREI'를 보며 오케스트라 연주에 맞춰 행진하며
이 문을 통하여 매일 강제 노동에 동원된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중노동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고압이 흐르는 이중 철조망
 
고압 전류가 흐르는 이중 철조망, 출입자를 확인했던 검문소,
수 많은 수용자를 실어 나른 검은 화물 열차가 달렸던 선로,
탈출자를 막고 수용된 사람들을 감시했던 기관총이 설치된 초소 등
입구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은 수용소가 폐쇄된 지 6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는 이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박물관 입구를 통과하면 나타나는 모양과 크기가 비슷한
28동의 건물은 한 눈에 보기에도 강제 노동이나 살육을 목적으로
만든 시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바둑판이 연상될 정도로
규칙적인 건물은 도로를 따라 세 줄로 서 있는데 건물과 작업장이
잘 보이는 곳에는 감시초소가 있고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다.

처음에 세운 제1 박물관은, 제2 박물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유대인 학살을 담당했던 나치 본부와 이용된 모든 시설이 집약적으로
남아 있는 곳으로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면 흡사 버려진 영화 세트장
같이 을씨년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저마다 아픈 사연이 담겨 있는 전시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무참히 학살하였던 수용소 지역 전체는 현재, '아우슈비츠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고 있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의 전시장과 자료관에는
저마다 애절한 사연과 잔혹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의 점령하에 있던 유대인,
오스트라이인, 폴란드인, 로마인, 공산주의자, 반나치활동가,
동성애자 등이 체포되어 각지에 설치된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어떤 사람은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죽고, 가스실에서 떼죽음을 당하고, 총살 당했다고 한다.
살인공장이라고도 불리는 이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28 민족으로 그 수가 무려 15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0년 폴란드 정치범을
수용할 목적으로 설립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치는 전 유럽인들
특히 유럽 각 국에서 국적을 얻은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들을
이곳에 보내오기 시작했다.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체코인, 슬로바키아인, 프랑스인, 오스트리아인, 유고슬라비아인,
그리고 독일의 장애인도 있었다고 한다.










박물관 자료실에는 사진과 필름, 육성 녹음, 편지
그리고 수용소 관련 각종 서류 등 당시를 증언하는 증거들뿐만 아니라
루돌프 회스 등 수용소 책임자에 관한 재판 기록으로부터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물에 이르기까지 이 곳 아카이브의 자료는 엄청난데 자료들은
1989년부터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컴퓨터로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 밖에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한 6천여 점의 회화, 조각품들이 있다.






















유럽 각 지역에서 가는 곳도 모른채 강제적으로
수용소로 끌려 온 사람들.. 남여노소 불문하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 갔는지..
집단적 광기, 참혹한 학살의 현장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기록 사진들..











전시품들.. 2번째 사진은,
사이클론 B 용기와 기화 가스가 함유된 규조토 알갱이.








국적 불문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오는 '아우슈비츠 박물관'

















수용자들이 남긴 소지품을 보면
그저 막연하게 불쌍한 유대인이었던 그들이 보다
현실감 있는 실체로 다가온다. 추상화된 유대민족의
비극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평범한 삶을 살았던
개개인의 아픔이 구체적인 드러나는 것이다.

소지품들은 품목별로 분류되어 전시되고 있다.
학살의 방, 진혼의 방 등으로 이름 붙여진 전시실에는
희생자들의 사진, 안경, 신발, 면도날, 단추, 옷으로부터
금니와 의치, 의족,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스러져 간
주인들의 절절한 사연을 대변하고 있다. 이 증거들은
전시실의 선택된 유물로서보다는 일종의 총체적
증거로서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6블록 전시실, 비슷한 건물 전시물은 천차만별







수용자들의 면면을 찍은 사진과 푸른 줄무늬
죄수복 차림으로 번호표를 달고 있는 사진은
수용소에 들어오면서 신상 파악을 위해 찍은 것으로
겁에 질리고 당혹한 표정이 역력하다.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감금과 굶주림, 중노동과 의학실험,
생체실험, 사형집행 등의 방법에 의해 학살당했다.










수감자 분류표, 줄무의 죄수복에는 분류표가 붙혀진다







이런 생체실험, 의학실험을 통해
그 바람에 독일이 의약, 의학강국이 되었다니..
악명 높던 일본의 마루타 731 생체실험도 떠오른다.














수용소 생활을 형상화한 작품들





무엇인지도 모르고 먹은 식사









중앙광장, 여기서 매일 살벌한 집합, 점호를 했다고 한다





집합, 점호하고 있는 모습









고압이 흐르는 2중 철조망
이 수용소에 들어오면 탈출은 꿈도 못꾸고..
연기로 밖에 나갈 수 없었다고..






이 처참한 학살의 현장을 둘러 본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인간말종의 수용소의 책임자를
처형했다는 저 교수대가 희생자와 가족에게 무슨 위로가 될까?
인간이 얼마만큼 잔인해 질 수 있을까?






인체 실험실 옆 서쪽 벽에서는 교수형과 총살을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둘러본 곳은 샤워실로 불리던
가스실과 화장터. 수용소에 끌려 온 사람들이 샤워를
시켜준다는 말을 듣고 이 방에 들어가면 IG-파르벤사에서 만든
치클론-B라는 가스를 불어 넣어 죽였다고 하는데 이 가스를 마신
사람은 20여 분 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갔다고 한다.

흙이 덮여 있는 지붕 위에 굴뚝이 솟아 있고,
벽돌로 쌓은 벽과 무게가 느껴지는 출입문으로 이루어진 건물.
얼핏 보면 가스실이라기보다는 무기를 보관해 놓은 무기고나
군인들이 생활하는 진지처럼 보이지만..
















가스실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가면,
검은색 콘크리트로 만들어 놓은 두 개의 공간이 나온다.
오른쪽에 있는 넓은 곳이 노동력 없는 어린아이와 임산부,
노인 등 나약한 사람들로 분류된 사람들이 들어와 독가스를
마시고 죽어 갔다고 한다. 가스실 바로 옆에는 시체를 소각하던
소각로가 놓여 있었는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검은 그을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소각로가 모자라 심지어는 야외에 시체를 쌓아놓고
태우기까지 했다니 그들이 인간일까 싶다.

실날 같은 희망을 필사적으로 부여잡고 있던 그들의
종착지는 대부분 죽음이었다. 굶주림으로, 병으로, 고문으로,
때로는 중노동을 견디지 못해, 때로는 의학적 생체 실험대상이
되어, 때로는 무모하게 탈출하다 탈출 실패로 죽임을 당했다.
죽음의 벽 앞에서 공개 총살되는가 하면, 독가스 치클론 B에 의해
가스실에서 대량 살상된 후 소각되어 한 줌의 재로 사라져 갔던
것이다. 시체 소각로와 폐기장에는 아직도 꺼지지 않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하고, 주로 정치범을 총살했다는 '죽음의 벽'
앞에는 그 날의 총성들이 아직도 울리는 듯했다. 전기 철조망이
높이 둘러쳐진, 감시탑이 굽어보는 수용소 안 구석구석에는
그 참상과 절망이 서려있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우울한 경험이었지만..,





아우슈비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제1 수용소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는 있는
제2 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수용소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인원은 평균 1만 8000명인데 비해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36만 명이나 수용했으니까.








역사상 수 많은 전쟁이 있었지만 이토록 많은
사람을 강제 수용소에 몰아넣고 인간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적이 또 있었을까?
그러나, 불탄 황무지에도 생이 움트고 싹이 돋듯
'아우슈비츠 박물관'에서 희망을 발견했으니..

방문객 중에 독일에서 온 많은 사람들,
그 중에서도 젊은이 들은 나치스의 만행에 대해 눈여겨
보고 듣고 가슴에 메모하며 죄없이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서도 희망을 보았다.
이 뿐아니다. 독일 수상이 몇 번이나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지금도 나치 정권에 가담했던 자들을 땅끝까지 가서 찾아내어
처단하고, 전쟁 피해자들에게 올해도 독일정부는 나치정권치하에서
고아에 되어 현재까지 생존한 유대인에 대해서 피해보상 10억달러
(1조1천300억원)을 하기로 하며 죄값을 씻으려 하는 모습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 '아우슈비츠 박물관'도 독일에서
막대한 후원금을 지원하여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아우슈비츠에서 일본이 오버랩 되어 보일까?
전범국으로서의 반성과 피해국들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피해보상은
고사하고 일급 전범들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해 놓고 한 나라를 대표한다는
수상과 내각과 중/참의원들이 참배하며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부정하고
역사의 진실을 부정하며, 또다시 욱일승천기를 흔들면서 군비를 증강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하여 군국주의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저 일본..
세계시민이기를 포기한 국수주의.. 후안무치한 일본을 보며 절망한다.
그 악명높은 마루타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말 아베 그만 몰랐을까!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아베 그만 몰랐을까?
엄지 손가락 치켜 세우며 득의양양한 저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731이 쓰여진 훈련기에 탑승한 사진이
국제적 비난을 사고 있는 것은 당연지사. 위 사진에 실린 CNN의 멘트.
"'731'은 인류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전쟁범죄를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우연의 일치'라는 주장은 억지 변명으로 들릴 수밖에 없죠.
사진을 본 '일본국민'들이 왜 분노하지 않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각설하고..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이 후안무치한 모습을 보이는데 우리 정부의 책임은 없을까!
먼저, 교육부는 한국사 교육을
제대로 하라. 식민사관을 바로 잡고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한국사를 제대로 가르치고
대학교 예비고사와 입학시험에 한국사를 필수과목으로 배정하라.
부모없는 자식이 어디 있고, 뿌리없는 민족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고 김구 선생,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는 그런 식의 쓸개빠진
말같잖은 국사는 말고 제발 제대로된 한국사를 확실하게 가르쳐라. 





전쟁은 없어야 한다.
전쟁만큼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참혹한 것은 없다.
전쟁없이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한다.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함과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마음이었지만
한편으론 한 줄기 희망을 보며' 아우슈비츠 박물관'을
나설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린다.

나의 인도 아래 독일은 이라크 침략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다.
우정은 친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종속일 뿐이며 올바른 행위가 아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전 독일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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