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박물관 /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가 있는..

2014. 4. 6. 20:01여행/여행기

 

 

 


이집트 박물관(고고학 박물관)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가 있는..)



○ 2014. 2. 10    날씨 : 여행하기 좋은 날씨
○ (이집트,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세상의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카이로는
친근하고, 안전하며, 편안한 도시이자 고대 문화를 꽃 피운 곳
그런 환경들로 과거로의 여행에 가장 적합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최근, 정국 불안으로 여행객의 발길이 줄어 들어 안타깝지만..
카이로 여행의 백미는 인류 역사의 불가사이인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이집트 박물관의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인데 피라미드는 내일 만나고
오늘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를 만나니 성지순례중 별미다.

투탕카멘의 마스크가 전시된 곳으로 더 잘 알려진
'이집트 박물관(Egyptian Museum)'은 이집트 고미술품이 무단으로 해외에
반출되는 것을 우려한 프랑스 고고학자 A.마리에트에 의해 1858년 카이로
교외 불라크에  지어져 있던 것을 190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집트 박물관은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선사시대부터 그레코로만시대 초기에 이르는 유물 약 18만 점을 소장,전시하고 있다.
대부분 이집트 각지의 신전이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로서 건축의 일부,
각종 조상(彫像)과 부조, 벽화 공예품 등 당시 생활용품 전반에 걸쳐 있다.
그 중에서도 제18왕조 말 투탕카멘 묘 부장품인 황금 마스크와
황금의 관을 비롯하여 호화롭던 파라오의 궁정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카푸레 왕 멘카우레 왕 람세스 왕 등의 조상도 유명한데 역사 자료가
많아 찬찬히 둘러보면 하루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입장시 카메라는 소지할 수 없다.

마음은 급한데.. 도로에는 오고 가는 차들이 뒤엉켜
꼼짝할 생각도 않는다. 이제 박물관 문닫을 시간이 20분도 채
남기지 않은 것 같은데 아직 10월 6일교도 건너지 못하고 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 해도 조바심이 생기기면서 그냥 내려서 달려갈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집트 카이로까지 와서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보지
못하고 가면 말이 되겠는가! 아직도 1km가 더 남았다. 애간장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데 거짓말같이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속도를 낸다.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박물관 문 닫기 직전 마지막 입장객이 되었다.
입구에서 엄격한 소지품 검사를 받고 박물관 입장을 하자마자
곧바로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가 있는 2층으로 직행했다.





(이집트 박물관 /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Egyptian Museum)은 고대 이집트의 미술과
고고학적 유물수집으로는 양과 질 모두 세계최고수준이라고 한다.
박물관 정면에 2개의 작은 스핑크스가 자리잡고 있고 정원에는
파피루스와 연꽃이 심어져 있다. 연꽃은 고대 상이집트의 상징으로,
파피루스는 하이집트의 상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집트의 고대역사는 BC 5000년 경부터 나일 강 유역에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최초의 고대 문명을 탄생시켰다.
30여 개의 파라오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였다. 파라오 왕조는
고왕조, 중왕조, 신왕조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고왕조 시기(BC 2635년∼BC 2140년)
제1왕조의 메네스 왕은 최초의 파라오로서 상·하 이집트를 통합했고,
제3왕조의 조세르 왕은 사카라 지역에 최초의 피라미드(계단식)를,
제4왕조의 쿠푸 왕, 카프라 왕, 멘카우라 왕은 기자에 피라미드를 건축했다.
제5왕조의 우세르카프 왕은 사카라 조세르 단지 북동쪽 너머에 피라미드 건축했다.
고전적 개화기를 맞은 제3왕조에 들어서면서, 불가사의라 일컬어지는
피라미드의 건설은 이들 문명의 대표적 표상이 되었다.

중왕조 시기(BC 2022년∼BC 1650년)
중왕조 제1기(제7∼10왕조, BC 2200∼BC 2052년)는
여러 지방 군주들의 반란과 폭동으로 인한 혼란기였으나,
제2기(제11∼13왕조, BC 2052∼BC 1790년)에는
제11왕조의 멘투호텝 2세가 상·하 이집트를 재통합하고,
제12왕조의 세누세트 3세는 지방 족벌들을 평정해 강력한
중앙 집권을 확립했다. 테베를 중심으로 그 문명의 자리가 바뀌었다.
제3기(제14∼17왕조, BC 1710∼1570년)에 들어서는 아시아로부터 온
힉소스의 침략으로 이집트의 통치권이 그들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이집트 내부에는 많은 구조적 변화를 맞았다.







(이집트 박물관 포스터와 입장권)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는 '이집트 박물관'을 대표하는 상징.

이집트 왕조의 꽃이라 일컬어지는 신왕조(제18∼24왕조,BC 1570∼BC 1085년)
및 후기왕조 시기(BC 1085년∼BC 332년)는 아흐모스, 투트모스, 아메노피스,
투탕카멘, 람세스, 세티, 메르넵타 왕으로 이어져 내려 오면서 화려하게 꽃 피웠다.
하트셉수트 여왕이 테베(지금의 룩소르) 지역에 최초의 신전을 건축하고,
이후 제19왕조의 세티 1세는 아시아 지역을 정벌, 세티 1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아부 심벨 신전 등을 건축하였다.





(2층에서 내려다 본 1층 1호실 중앙 갤러리 모습)

1층 1호실(중앙의 갤러리)는 고왕국 시대의 유물을 진열해 놓았다.
1층 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아멘호테프 3세와 왕비 티(Amenhotep III and
Queen Tiy)의 거대한 석상이 위용을 과시하며 맞이한다.

이집트 박물관은 2층 구조로 107개의 전시실이 있다.
1층은 고 왕국 시대(BC 3100~2000), 중왕국(BC 200~1570),
신왕국(BC1570~1057) 유물로 2층은 1922년 11월 4일 룩소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된 '투탕카멘의 저주'로 알려진 파라오 투탕카멘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유물은 자그만치 상상을 초월하는 18만점으로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는 유물은 몇 만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얼굴이 된 투탕카멘 황금마스크)

The Gold Mask of Tutankhamun
이집트 박물관의 가장 인기있는 전시실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이다.
투탕카멘의 발굴은 20세기 세계 고고학의 백미로 손꼽히는 일대 사건이다.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틈틈히 독학으로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터득하였다. 그는 영국 귀족 '카너번'의 후원을 받아 7년 동안 파라오의
무덤을 발굴하는 것에 지쳐갈 무렵, 지금까지 파 보지 않았던 인부들이 머무는
숙소 밑에서 암반을 뚫어 만든 계단을 발견했다. 투탕카멘의 묘로 들어 가는
입구였던 것이다. 발굴허가 기한을 몇일 앞둔 1922년 11월 4일.
룩소르 왕들이 계곡에서 일어난 것이다.

"결정적 순간이 왔다. 떨리는 두 손으로 위쪽의 구석을 파
구멍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눈이
빛에 익숙해지면서 방안에 있는 물건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하게 생긴 동물들, 조각상, 사방에서 번쩍이는 황금들..,
나는 경이에 사로잡혀 말문을 잃고 말았다."











(투탕카멘 황금마스크과 투탕카멘의 황금의자)

1922년 11월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넋을 잃었다. 뒤에서 기다리던 발굴의 조력자
'커나번'경이 "뭐가 보입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가 간신히 대답했다.
"예, 정말 멋진 것들(Yes, wonderful things)."
33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이집트 파라오 투탕카멘의 무덤 전실이
열리던 순간이었다. 무덤에서는 왕의 얼굴을 덮었던 황금 마스크와 함께
전차, 무기, 의류, 등 진귀한 보물 2000여 점이 쏟아져 나왔다.

투탕카멘은 이집트 제18왕조의 제 12대 왕(재위기간 BC 1361~1352).
불과 아홉살에 왕위를 물려 받았고 18세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18세에 숨진 투탕카멘의 얼굴을 컴퓨터로 재현하는 작업은 세계적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는데 그의 얼굴은
티없이 순진한 미소년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는 박물관 2층의 별실 한가운데 있는
높이 1m 정도의 유리상자 속에 들어있다. 황금빛의 화려함과 조금의 오차도
없을 것 같은 정교함과 구도, 그 살아있는 듯한 모습에서 전율이 느껴진다.
3300년 전에 어떻게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경이로울 뿐이다.
이 유리상자 주위의 진열관에는 투탕카멘의 무덤에서 발견된
화려한 많은 유물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와 투탕카멘의 황금 미이라)

투탕카멘의 무덤은 모두 네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맨 안쪽의 매장실에는 네겹의 금박을 입힌 나무상자안에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관이 있었고, 석관 안에는 세 겹의 관이 들어 있었다.
특히, 맨 안쪽의 관은 110kg의 순금으로 제작되었고 색유리, 라피스 라줄리,
터키옥, 홍보석 등으로 상감처리한 정교한 조각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 관 안에서 미이라가 발견되었고, 머리부분에는 무게 11kg의
황금가면이 씌여져 있었다.







(Golden Mask of Psusennes | & Amenemope)

고대 이집트 제21왕조의 왕(B.C.1050년경)으로,
타니스에 도읍하여 하이집트를 지배했으나 당시 상이집트에서는
테베의 아몬신의 신관장(神官長)이 왕호를 칭하고 있었다.
1940년 프랑스의 몬테(Pierre Montet, 1885~1966)가 타니스에서 프수센네스 1세,
오소르콘 2세(제22왕조), 셰숑크 3세(Sheshong Ⅲ, 제22왕조) 등의 거의 도굴되지
않은 묘를 발견, 유채와 금 은 귀석제의 호화로운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프수세네스(Psusennes) 1세: BC 1039-991
아메네모페(Amenemope): BC 993-984







(금장의 이집트 태양신/ Sun GodHorus)

'호로스(Horos)'는 고대 이집트의 독수리의 모양을 한 신으로,
죽음과 부활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그의 아내이자 최고의 여성신인
'이시스(Isis)'의 아들이며, 사랑의 여신 하토르(Hathor)의 남편이다.
이시스가 오시리스를 부활시켜 주문의 힘으로 잉태해 태어났다.
유년시대에는 '유아(幼兒) 호루스'라 하여 땋은 머리 외에는
머리카락이 거의 없는 갓난아기 모습 또는 이시스의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빠는 모습 등으로 표현된다.

원래는 매우 허약하였으나, 이시스의 마법으로
각종 위험이나 병을 물리칠 수 있었고, 성장해서는 오시리스로부터
병법을 전수받아 결국 아버지의 동생이자 원수인 세트를 죽이고
통일 이집트의 왕이 되었다. 이후 곳곳에 신전을 세우고, 통일 이집트를
평화적으로 다스리면서 이집트 왕들의 화신으로서 영원히 이집트에 머물렀다.
때문에 이집트의 모든 국왕들은 누구나 '살아 있는 호루스'로 불렸다.

오시리스·이시스와 함께 이집트에서 최고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왕자 또는 신의 아들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저승에서 오시리스 앞으로
사자(死者)들을 이끌어 영혼의 무게를 재는 일을 감독하는 감독관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보통은 태양·하늘의 화신으로서,
매(鷹)의 머리를 가진 신으로 표현된다.





(넓은 깃(collar))

목에 걸어 앞으로 내린 넓은 깃은
고대 이집트인의 인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신구.
이집트에서 생산된 주석 유약 도기를 재료로 제작되었으며,
칼라의 폭은 30cm정도 되었다고 한다.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와 함께 별실에 전시되어 있는 또 다른 의자)

박물관에 전시된 많은 유물을 보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금, 은, 동 및 보석의 가공에 아주 훌륭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특히 반지, 목걸이 등 장신구를 만드는
예술은 제4,7,18,20 왕조에서 전성기를 맞아 훌륭한 걸작을 많이 남겼다.
박물관 2층에서는 투탕카멘 왕의 소장품이 단연 인기를 끈다.
아홉살에 왕위에 올랐다가 열여덟살에 죽은 투탕카멘은
이집트의 전설적인 여왕 네페르티티의 의붓아들로 BC 1361년경
왕이 됐다. 투탕카멘의 묘는 왕묘로서는 가장 작은 규모였으나 다른 왕묘들이
철저하게 도굴된 것과는 달리 거의 원형 그대로 발굴돼 고고학상 불후의 가치를
지니게 됐다. 2,000여 점 유물 대부분이 이곳 박물관으로 옮겨져 왔다.

작은 왕의 무덤 하나에서 나온 출토품이 고고학박물관 2층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람세스 2세 같은 위대했던
파라오 무덤의 출토품이 그대로 발굴되어 이집트에 남아 있다면..
이집트 유물이 세계 박물관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형국이다.





(투탕카멘의 작은 조각품들(Statuettes of King Tut))





(투탕카멘과 왕비 안케세나멘(Tutankhamen with His Queen Ankhesenamun))

투탕카멘의 묘에 합장된 생활용품에 그려져 있는
어린왕 투탕카멘에 향유를 발라주는 왕비 안케세나멘의 다정한 모습.
그러나 이들의 사랑도 20세가 되기도 전에 끝이 나고 만다.

투탕카멘은 왕권이 약화되었을 때 어린 나이(9세)에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선왕 아케나텐(아버지가 아멘호테프 3세라는 설도
있다)이 사망한 후 아케나텐의 부인인 왕비 네페르티티에 의해 왕위에 옹립되었다.
왕위에 올랐으나 어렸기 때문에 후견인인 재상 아이(Ay)와 호렙헤브 장군이 실권을
행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투탕카멘이 즉위하자 선왕 아케나톤에 의해
국교였던 '아텐 신앙'이 무너지고 '아멘 라 신앙'이 다시 국교로 부활한다.
투탕카멘도 이에 따라 '투트 앙크 아텐'(아텐 신의 살아있는 닮은 꼴)에서
'투트 앙크 아멘'(아멘 신의 살아있는 닮은 꼴)로 개명이 된다.
'투탕카멘'은 이것을 줄여서 부르는 것이다.

왕비도 '안케세파텐'에서 '안케세나멘'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투탕카멘은 19세 경에 사망하고 왕위계승권자가 된
안케세나멘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 후견인 재상이자
외할아버지인 늙은 아이(Ay)와 재혼하여 아이가 국왕에 즉위하나
재위는 4년만에 끝나고 안케세나멘은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고대 이집트 벽화들)





(태양신 숭배)

이집트의 파라오인 아케나톤이
그의 부인 네페르티티와 자식들과 함께
태양신에게 기도하는 모습.





(조세르 왕(King Djoser)

죠세르(Djoser)는 고대 이집트 제3왕조의 파라오이다.
그의 이름은 여러가지로 쓰였는데 Zoser, Dzoser, Zozer, Dsr,Djeser,
Horus-Netjierkhet 그리고 Horus-Netjierichet등 다양하다. 그의 이름은 훗날의
기록에만 나오는데 이것은 그의 출생명으로 추정한다. 그는 호루스(Horus) 이름인
네체리케트(Netjierichet)로도 알려졌는데, 이 이름은 사카라(Saqqara)의 계단 피라미드
단지를 포함하여 그의 기념물 전체에 새겨져 있다. 네체리케트라는 이름의 의미는
"신의 몸" 이라는 뜻. 그의 무덤은 계단식 피라미드인 마스타바(Mastaba)이며
이후 이집트 고왕국(Old Kingdom) 시대의 표준 무덤 형식이 되었다.
오늘날 죠세르의 피라미드와 그것을 둘러싼 무덤 단지는 세계 최초의
석조 건물로 인정되고 있는데 이전의 무덤에도 돌이 부분적으로
쓰이기는 했지만, 오로지 돌로만 지은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죠세르를 위하여 이 엄청난 기념물을 제작한 천재는
그의 재상 임호텝(Imhotep)으로 그는 재상 외에도 여러 가지 역할을 수행하고
궁정에서 높은 지위에 있었다. 죠세르의 회암 석상은 1924~1925년에 발굴되어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데 가장 오래된 실물 크기 이집트 석상으로 알려져 있다.

죠세르의 통치는 BC 2691년~BC 2625년의 어느 시점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남쪽으로 훗날 이집트의 남쪽 경계가 되는 제1폭포 아스완까지 통치 범위를
확대한 것 같다. 마네토(Manetho)는 죠세르가 이집트를 29년 동안 다스렸다고 하는데
투린 왕 명단(Turin King List)에는 1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카라에 많은 건축 공사의 유적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거의 30년 가까이 통치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Predecessor (Sanakhte) Successor (Sekhmekhet)
Father (Khasekhemwy) Mother (Nimaethap)
Monuments (Pyramid of Djoser)





(라호테프 왕자와 그의 비 네페르트(Rahotep & Nefert))

이집트 고왕국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부부상의 하나.
석회암에 칠식(漆?)을 하고, 그 위에 채색한 것으로 선명한
색채를 완전히 남기고 있음은 유례가 없다. 두 상이 따로따로
조각되었으나 나란히 두는 것을 전제로 제작한 것이 확실해 보인다.
부부 모두 높은 등받이가 있는 의자에 앉아 오른손을 굽혀 가슴에
대고 있다. 남편 라호테프는 왼손을 무릎 위에 얹고, 처 네페르트는
왼손을 오른쪽 팔꿈치 밑에 둔 자세다. 라호테프는 왕족의 한 사람으로서
헬리오폴리스의 태양신전 사제(司祭), 장군, 기타 요직에 있었다.
1871년 메이둠의 라호테프 마스타바에서 출토.
높이는 라호테프가 120cm, 네페르트는 118cm.
제4왕조 초기(B.C.2600경)의 작품.





(케프렌 왕(Khafra / Chephren, 2558-2532 bc))

케프렌 왕(Chepheren, 카푸레 왕).
BC 2723년에 시작된 고왕국 시대 제4왕조는 기자에
3개의 유명한 피라미드를 남겼다. 제4왕조의 2대왕 케옵스의 대 피라미드와
그의 아들 케프렌의 피라미드 그리고 후기의 멘카우라의 피라미드가 그것이다.
임호텝에 의해 창시된 계단식 피라미드는 제3왕조 시대와 함께 끝나고
이들은 200만개 이상의 석회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진짜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건축기술은 물론 당시 파라오의 막강한 권력과
인적 물적 자원의 국가 동원체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케프렌 왕은 이 피라미드 외에 최초로 스핑크스(Sphinx)를
만든 것으로 더 유명하다. 가로 누운 사자의 형상에 사람의 얼굴을 한
이 스핑크스는 케프렌 왕의 얼굴을 본뜬 것으로 알려지는데 높이 20m,
길이 73m로 스핑크스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하이집트를 상징하는 왕관을 쓴 멘카우레 왕과..)

좌우에 두 여신을 조각한 석상. 재료는 경사암. 높이 96cm.
전시된 이들 석상에서 4500년이라는 긴 시간의 흐름은 믿기지 않는다.
얼굴과 몸체는 섬세하고도 사실적인 조각기술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파라오들은 근육질의 균형잡힌 몸매와 표정에는 위엄이
서려있고 왕비나 여신 또한 군살없는 매력적인 몸매다. 남녀을 막론하고
4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미의 기준은 별 차이가 없었던 모양.





(아멘호텝 3세와 왕비 티(Amenhotep III and Queen Tiy))

신왕국시대에는 거상(巨像)의 제작이 많아졌는데,
아멘호테프 3세와 왕비 티의 좌상(카이로 이집트박물관 소장)은 그 선구적인 작품.
아멘호테프 4세 무렵에는 투철한 사실주의가 풍미하여 왕의 추한 신체적 특징을
표현한 작품이 나타날 정도였으나, 왕이 이크나톤이라 개명(改名)하고
텔 엘 아마르나에 천도한 후부터 크게 누그러져서 왕비 네페르티티 흉상
(베를린국립미술관 소장)과 같이 세련된 작품이 나타났다.





(King Amenhotep IV (Akhenaten))

파라오의 석상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얼굴마다 각 자의
특징이 있지만, 공통점은 모두 젊고 잘 생기고 휜칠하다는 점.
파라오의 얼굴은 항상 실제보다 잘 생기고 젊게 묘사되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 '아멘호텝 4세'는 좀 이상한 파라오였다고 한다.
화려한 신전을 짓지도 않았고, 묘지도 검소하게 만들었으며,
이웃나라를 정벌하지도 않고, 또 원군을 신청하는 동맹국에 전쟁이 나도
군대를 보내지도 않고, 또 그동안 파라오의 아버지 격인 아문신 대신 태양신
아텐을 유일신으로 섬기도록 지시했으며, 수도도 옮기고, 자신의 이미지
(조각상 또는 그림 등)를 실제 그대로 묘사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아텐신을 섬기는 자란 의미의 '아크나텐'으로 개명했다.
덕분에 고고학자들은 '아크나텐'의 조각상은 실제 이집트의 파라오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전시실 작은 section 하나에 '아크나텐과 그의 아내 네페르티티와 관련된
유물들을 전시해 놓았다. 아크나텐은 정말 못생긴 파라오로 표현되어 있다.
얼굴은 말처럼 길고, 입술은 토인보다 더 두툼하고, 눈은 위로 찢어져 있고,
엉덩이는 축 쳐져 있고,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안 맞는 어색한 모습이다.
어떤 책에는 아마도 근친 결혼의 열성 유전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못생긴 아크나텐의 왕비가 이집트 최고 미녀 네페르티티.

아크나텐은 그의 정책에 반대하는 신관과 관료들에 의해
결국 파라오 자리에서 밀려났고, 네페르티티도 신전에 유폐되어
여생을 불행하게 보냈다고 한다. 아크나텐과 네페르티티 사이에 태어난
세 공주 중 막내공주인 안케나문이 투탕카멘의 왕비가 된다.





(네페르티티 왕비의 미완성 두상)

1912년 이집트 아마르나에서 발굴된 네페르티티 왕비의 흉상
(베를린 알테스 박물관 소장)은 사실의 화려함을 잘 나타낸 당대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 받으며, 미완성 두상(이집트 박물관 소장)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고
있다. 네파르 티티 흉상은 1912년 독일 고고학자 르트비히가 이집트 나일강변의 아마르나
유적지에서 발굴한 것으로, 화려하게 채색된 높이 50cm의 석회암 조각이다.
보르하르트는 1913년 흉상에 석고를 발라 이집트 관리들에게 이 흉상이
석고로 만들어진 하찮은 것이라고 속여 독일로 빼돌렸다고 한다.
뒤늦게 국보를 도둑맞은 걸 알아차린 이집트 정부는
독일측에 흉상 반환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투탕카멘 마네킹)







(Alabaster canopic jars of Tutankhamun)







(람세스 2세(Ramses II))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한 시기에 이집트를 통치하였던 파라오이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와 대결하였던 인물인데.. 아래 흉상은
안타깝게도 영국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다.

BC 1297년 람세스 1세가 제19왕조를 열고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세티1세는 그동안 균형을 잃었던
이집트의 세력을 회복하는데 앞장섰다. 세티 1세는 제18왕조 투트모스 3세
이후에 서부아시아에서 세력이 더욱 커진 히타이트족(인도유럽계가
지배계층을 이룬 혼합민족)과 맞서 시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다.
세티 1세의 아들로 24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람세스 2세는
오랜 적대관계에 있던 히타이트족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이집트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 서로의 세력권에 대한 세밀한 규정을 명시한 우호조약을
맺은 것은 물론 히타이트 왕녀와 결혼함으로써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람세스 2세는 이후 66년간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는 테베와 카르낙, 아부 심벨 등
이집트 전역에 수 많은 건축물들을 세우는데 열중했는데 지금
이집트에 남아있는 많은 사원들이 그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





(우세르카프 왕 두상(The head of Userkaf))

우세르카프 왕은 이집트 제5왕조(BC 2465~ BC 2323)의 첫 파라오이다.
그의 이름은 '그의 정신은 강력하다'로 쿠푸왕의 단명한 후계자인 데제프레왕의
손자로 조세르 스텝 피라미드가 있는 사카라에 자신의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우세르카프 왕 두상은 편암으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고왕국 파라오의 인물상으로
아부 시르 근처의 태양신전에서 발견되었다. 이집트의 붉은 왕관을 쓰고 있다.
45 센티미터 높이에 회색 돌로 조각된 이 두상은 하 이집트(Lower Egypt)의
데슈레트(Deshret,붉은 왕관)를 쓴 군주임을 나타내는
아주 희귀한 조각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미이라 석관들..)

27구의 고대 이집트 왕가의 미이라를 전시하고 있는 곳.
습도와 빛을 조절하며 특별히 관리한다고 한다.





(Palette of Narmer(Aha/Menes))

나르메르(아하/메네스) 왕의 팔레트.
돌에 부조로 조각을 한 고대 이집트의 화장접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자 기록의 하나. 고대 이집트 제1왕조(BC 3100경)의
봉납용 대형팔레트. 1898년 상이집트의 히에라콘폴리스에서 출토되었다.
표면에 나르메르 왕이 하이집트를 정복한 주제로 왼쪽의 부조는
나르메르 왕이 철퇴로 하이집트 적의 머리를 내리치고 있는 모습이다.
이집트 부조예술 최초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며 단일주권에 의한
전 국토 통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자료로도 중요한 유물.
점판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64cm.







(신과 왕의 석상들.. )

뭐랄까 거대한 창고같다고나 할까?
어떤 미술관은 작품에 근접도 못하게 하는데..
이집트 박물관은 유물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돌덩이들이서 그런지
대충 펼쳐 놓을테니 알아서 보고 가라는 그런 인상은 나만 느끼는 걸까
하긴 18만 점이 넘은 유물들을 제대로 정리해 놓으면 몇 일을 죽치면서
봐야할 것 아닌가. 어쨋거나 유물을 아직 펼쳐 보지도 못하고
쌓아 놓은 것이 많다고 하니 현재의 박물관이 협소하기는 한 것 같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기자 피라미드 인근에 5억 5천만 달러
(한화 약 7,000억원)을 들여 "그랜드 이집트 박물관"이라는
이름의 최신식 박물관을 짓고 있다니 이집트에 또 하나의 명물이
생기는 것 같다. '이집트 박물관'에서 포장도 풀지 못한 채
먼지만 쌓여가던 유물들도 빛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로제타석(Rosetta Stone))

모조품은 이집트에 있고 진품(아래)은 영국박물관에 있다.
BC 196년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을 찬양하는 내용 등이 담긴
'로제타석'은 가로 72cm, 세로 114cm, 두께 28cm인 현무암 비석이다.
1799년 이집트 북북의 항구도시인 로제타에서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하던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대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1801년 프랑스가 영국군에
패하면서 1802년 영국으로 넘긴 이래 영국박물관의 대표 전시물이 되었다.
돌에는 이집트 고대 상형문자와 일반 백성들이 쓰던 민중문자, 
그리스어 등 세종류의 문자가 새겨져 있다. '로제타석'의 비밀은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레옹이 해독함으로 고고학계뿐 아니라 
이집트 고대역사의 비밀을 프랑스가 풀어 준 셈이다.

이집트는 '로제타석' 외에 '스핑크스의 수염' 등 많은
이집트 문화재를 소장한 영국에 반환을 요구하지만 늘 거부당하고 있다고 한다.
독일의 '네페르티티 흉상'도 사정은 마찬가지.. 유네스코가 제정한 국제협약에
"1971년 이후 강제로 빼앗긴 유물들에 한해 돌려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다니
도둑이 자신이 훔쳐간 유물에 합법성을 부여한 꼴 아닌가!





(2층에서 정문쪽으로 내려다 본 모습)

이집트 박물관 관람은 전율을 느낄 정도의 감동이었다.
이집트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라면,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바로 '이집트 박물관'이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면 그 나라의 박물관을 가보라는 말이 있다.
이집트에서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이집트 고고학 박물관의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만 보고 와도 이집트 여행의 반 이상은 이룬 것이라지만
오늘 이집트 박물관에서의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고대의 정교하고 생생한
유물들과 미이라는 당장이라도 벌떡 일어나 뚜벅 뚜벅 걸어 올 것만 같았다.
한편으론, 18만점(어떤 자료는 28만점)이 넘는 유물들이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창고에 방치된 듯한 인상이 들어 안타까웠다.

세계 최고 수준의 소장품을 자랑하는 고고학 박물관답게
경이롭고 흥미로운 소장품들이 장소가 부족할 정도로 가득 쌓여(?) 있었다.
1층은 이집트 왕조의 연대에 따라 전시되어 있고, 2층은 '투탕카멘'의 묘에서
출토된 귀중하고 소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한 시간도 안되는 시간에
그 많은 유물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입장을 하자마자 2층 전시실로 올라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부터 보고 다른 유물들은 주마간산식으로 눈 도장을 찍었다.
제대로 감상할 수 없어 아쉽고 그대로 지나치려니 유물들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비록 스치듯 헤집고 다닌 1시간도 안되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박물관 방문기를
정리하면서.. 극히 일부분이지만 이집트 역사에 대해 공부하면서 아쉬움을 달래며
위안으로 삼는다.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마주하면서 느낀 흥분과 전율,
3000년도 더 지난 유물들이 마치 살아서 말을 걸어 오는듯한 모습은
잊지 못할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