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견문록 / 인생은 짧고, 역사는 유구하다.
2014. 7. 4. 15:21ㆍ여행/여행기
서유럽 견문록
(인생은 짧고, 역사는 유구하다)
○ 2014. 5. 8 ~ 19 날씨 / 초반에는 비, 비 온 후 맑음
○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헤르만 헤세의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라는 말에 공감할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자신을 들여다 보는데서 출발하고,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집이고,
여행의 최종 목표는 출발점으로 무사히 돌아 오는데 있지만,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이미 여행을 떠나기 전의 나와는 완전히 다른 내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마치, 나비 꿈을 꾸고 난 장자가 꿈을 꾸기 전의 장자가 아닌 것처럼..
나를 옭아 매었던 큰 속박에서 풀려나면서 이제부터 시간을 제대로 쓸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현실은 생각같이 녹녹치 않다. 인생은 갈림길의 연속이고
항상 그 갈림길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
중요한 하나를 가지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이고,
진정한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
그렇게 살아 보고 싶다. 여행도 그 중 하나.
이번 여정은 서유럽 6국을 거친다. 첫날 영국 런던으로 들어가
프랑크푸르트로 나오는데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을 들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탈리아는 서유럽이 아니라 남유럽에 해당된다.
서유럽은 정치와 역사, 문화적으로 동유럽 남유럽과 구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개념으로 서유럽은 냉전시절 동유럽에 대비해 시장경제체제의 서구 진영의
의미로 쓰였다. 일반적으로 서유럽에 포함되는 나라는 프랑스와 영국 아일랜드
베네룩스 3국을 가리키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는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중요한 지역이다.
여행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탈리아는.. 지중해에 돌출한
이베리아 반도, 발칸 반도와 함께 남부유럽에 속하지만 편의적으로
동유럽에 대응해 서유럽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네델란드 상공..)
인천공항을 이륙한지 10시간 넘게 날아 온 것 같다.
구름이 열린 틈으로 보이는 바다와 섬들..
(이용객 기준 세계 4위의 히드로 공항(UHR))
2010년 이용객(6,588만 명) 숫자 기준으로
애틀랜타국제공항, 베이징서우두국제공항, 시카고오헤어국제공항에 이어
세계 4위라는데 이용객 숫자에 비해 시설이 낙후하고 이용료가 비싼 편이어서
설문조사에서 이용객들이 가장 싫어하는 공항으로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린 곳,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공기업 민영화를 강력하게 추진할 때
스페인 건설회사인 페로비알(Ferrovial)이 영국공항공단의 최대주주에 오른
바람에 2011년 현재 런던히드로공항은 영국을 대표하는 공항임에도 불구하고
소유 주체를 기준으로 할 때는 스페인 기업으로 분류된다고..
(영국의 집들과 버스의 독도 광고)
숙소 가는 길은 공항 주변이어서 그런지 많이 자동차들
정체가 심하다. 전통적인 영국의 주택가.. 듬성듬성 집들이
들어서 있어 주차는 크게 문제되지 않을 것 같다.
외국버스에 독도가 한국령이라는 광고하고 있는 것을 보니
뿌듯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서글픈 생각이 교차.
영국 런던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버킹검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
오전 11시 30분부터 실시하는 근위병 교대식을 보러..
4월말 ~ 7월까지는 매일 있으며 그 외 기간에는 격일로 실시한다.
교대식 시간에 맞춰 버킹검 궁전에 도착하니 교대식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 마침 정문 건너 공원 담장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으니 전망이 좋다. 그런데 웬걸 바람이 불면서 갑자기 비를 쏟아
붓는 것 아닌가? 그래도 우산까지 쓰고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교대식
사진을 찍기는 찍었으나.. 기대와는 달리 10여 분 행진하는 것으로
싱겁게 끝났다. 근위병 교대식은 말 그대로 안보면 허전하고
보고나면 실망한다더니 그 말이 맞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영국 날씨는 아무도 모른다더니 그말도 맞았다.
(켄싱턴 궁전의 정원으로 건설되었던 켄싱턴 파크)
근위병 교대식을 보고 알버트 기념탑이 있는 켄싱턴 파크로...
알버트 기념탑(Albert Memorial)은 1861년 세상을 떠난 남편 알버트 공을
기리기 위해 1872년 빅토리아 여왕이 세운 고딕양식의 탑. 전체 높이는
약 54m 이며, 가운데 위치한 알버트 공의 금동상은 4m 정도 된다.
알버트 공 동상 아래 부분에 187명의 화가, 음악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사인을 새겨 넣어 알버트 공의 예술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탑 꼭대기에는 또 금으로 도금한 천사상이 있다. 켄싱턴 파크는
영국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하이드 파크에 이웃해 있다.
(런던의 명물 2층 버스(Double Decker)와 블랙 캡)
런던을 상징하는 빨간 2층 버스와 까만 택시(Black Cab)
런던을 상징하는 3가지 빨간색은 2층 버스, 공중전화기 부스, 우체통..
영국하면 떠 오르는 단어.. 제국주의, 박물관, 입헌군주국, 축구, 날씨..
그런 영국다움을 보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영국을 찾아 오는지..
영국박물관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영국의 첫 인상과 오버랩되는 두 그림..)
영국박물관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대영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는 영국박물관)
대영박물관이라 불리는 영국 박물관(The British Museum)은
영국의 런던 블룸즈베리에 위치해 있는 영국 최대의 국립 박물관이다.
이 박물관에 있는 1,300만 여점의 소장품 중에서는 제국주의 시대에 약탈한
문화재도 적지 않다. 1753년에 설립되었으나 처음에는 한스 슬론 경의
개인 수집품이 전시물의 대부분을 이뤘었고, 공공에 개방된 것은 1759.1.15.
2세기 반에 걸친 확장으로 인해 몇 개의 부속 기관이 새로 생겼는데
그 첫 번째가 1887년에 생긴 남킹스턴 영국 박물관(자연사)이라고 한다.
영국은 돈을 받고 영국의 역사를 보여 주지만 영국의 박물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영국박물관은 특별전람회 이외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이는 선심이 아니라 자국 물품이 일정 수가 되지 않으면 입장료를
다양하고 많은 역사적 유물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관람객 입장에서 보면 일면 장점이기도 하겠지만 전시품들이 강탈하고
도적질해 온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 영국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
문화유산들중 부당한 방법으로 입수한 것이 있다면 본래 위치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
가이드와 언쟁이 있었다. 유입경로가 어떻게 되었던 시설이 잘 된 곳에서
잘 보존 관리하고 있으면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면 자기 집
금고에 있는 돈과 귀중품도 도둑이 훔쳐가 잘 쓰면 된다는 말인가?
자기가 도둑맞은 물건을 돌려 달라고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런 논리라면 우리가 일본에 도둑맞고 프랑스에 강탈당한
귀중한 문화유산들도 반환을 요구할 수도 없단 말 아닌가?
(유로스타 런던 판크라스 역)
영국박물관 관람후 저녁을 먹고 파리로 넘어가기 위해
유로스타 판크라스역으로 이동하여 간단한 출국심사를 마쳤다.
런던 판크라스역에서 프랑스 파리 노드역까지는 약 2시간 30분 소요.
영국구간 약 30분, 해저터널 구간도 30분 정도 걸렸고,
프랑스 구간은 1시간 반 정도 걸렸는데 해저터널을 지나
파리까지 가는 동안은 끝없는 푸른 초지가 이어졌다.
(파리의 밤과 아침)
파리의 첫인상은 파리 노드역의 오줌 지린내..
역사 밖으로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지린내가 진동한다.
프랑스 파리에 대한 고상하고 로맨틱한 상상이 여지없이 무너졌고
충격적이었다. 오래전 일본의 한 청년이 파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다가
그만 자살하고 말았다는 가이드의 소설같은 이야기가 한편으론
그러나 아침에 개선문을 보러 가기 위해 외곽에서
시내로 들어가면서 보는 푸른 초원은 어제의 실망스런
첫인상을 조금은 만회시켜 주었다.
파리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에펠탑에서 본 파리 시내 모습)
교외를 포함한 '파리 데파르트망(Department)'은
면적 2,844㎢, 인구 1,041만 명(2009). 오랫동안 센 데파르트망의
수도였는데 1964년부터 파리만으로 독립하여 데파르트망이 되었다.
프랑스의 정치·경제·교통·학술·문화의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화 중심지로, '꽃의 도시'라고 불리며 프랑스 사람들은
스스로 '빛의 도시'라고 부른다.
센강이 남동쪽에서 시가지로 들어와
생루이섬과 시테섬을 감싸면서 북쪽으로 크게 만곡을 이룬 다음
남서쪽을 거쳐 시외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동쪽으로는 뱅센 숲,
서쪽으로는 불로뉴 삼림공원이 이어진다. 센강의 남쪽을 '좌안(리브고슈)',
북쪽의 보다 넓은 지역을 '우안(리브드루아트)'이라고 부르며, 시 주변에는
로마의 '일곱 언덕'이 연상되는 언덕이 줄지어 솟아 있다.
(프랑스인들이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거리라는 샹젤리제 거리)
센강의 북안을 따라 전개된 콩코르드 광장에서
북서쪽으로 향해 뻗어 있다. 개선문으로 유명한 드골 광장에 이르는 길은
1,880m의 직선도로로서, 도로의 양쪽에는 마로니에, 플라타너스 등의
가로수가 울창하다. 동쪽은 너비 300~400m, 길이 700m의 산책용 공원이 있으며,
서쪽은 제2제정시대에 개발된 부분으로 원래는 귀족의 저택이 많았으나,
현재는 파리풍(風)의 호텔 레스토랑 카페 극장 영화관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는 엘리제궁(宮)을 비롯하여 항공 해운회사
자동차 전시장 고급 의상실 등의 건물이 많다.
개선문 바로가기 ☞ 사진 클릭
개선문은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나게 컸다. 이탈리아 로마의
개선문을 본따서 만들었다는데 원본보다 더 유명한 것이 아이러니.
개선문은 그 이름대로, 프랑스군의 승리와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건립되었다. 공사는 1806년에 시작했지만
나폴레옹 1세의 실각, 왕정 복고와 7월 혁명 등 격동의 시내를 거치느라
1836년이 되어서야 완성했다. 나폴레옹 1세는 1821년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숨을 거둬 완성된 개선문을 보지 못했지만, 유해는 1840년에 개선문 아래를
지나 파리로 귀환해 앵발리드에 매장되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사한 무명용사의 시신을 개선문 아래에 매장하기도 했다.
(콩코드 광장, 비 맞고 걷는 파리지앵)
유럽 날씨는 흐린 날도 많고 비도 자주 내리는 것 같다.
유럽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비가 왔으니 말이다. 큰 비가 아니어서
그런지 파리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걷는데 그것도 멋있어 보인다.
파리지앵(Parisien)은 파리남자, 파리지엔느(Parisienne)는
파리여자를 뜻한다고.. 현재 살고 있는 경우만 그런게 아니라
파리에서 출생한 사람들에게도 같은 표현을 쓴다고 한다.
그런데 프랑스의 지방사람들에겐 파리지앵하면 파리에 사는 사람
또는 파리출신을 일컫기는 하되 좀 거만하고 젠체하는..
그래서 살가운 인간미가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경멸적인 느낌이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비맞고 가는 모습이 멋있어
파리지앵이냐?고 했는데 말을 잘못한 것인가?
루브르 박물관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루브르 박물관의 밀로의 비너스 상)
루브르 박물관은
영국의 영국박물관, 바티칸의 바티칸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중 하나. 1190년 지어졌을 당시는 요새에 불과했지만
16세기 중반 왕궁으로 재건축되면서 그 규모가 커졌다. 1793년 궁전 일부가
중앙 미술관으로 사용되면서 루브르는 궁전의 틀을 벗고 박물관으로 탈바꿈.
이후 5세기 동안 유럽 외 다양한 지역에서 수집한 회화, 조각 등
수집한 예술품은 30만 점. 그 중 3만 8천점 가량만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전체를 다 돌아보려면 며칠은 걸리므로 관심있는 작품이 있으면
그 위치를 파악해 미리 동선을 짜서 관람하는 것이 좋겠다.
1층에는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 미술품도 전시되어 있고,
루브르 박물관의 보물인 밀로의 '비너스'도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2층에는 이탈리아·에스파냐·영국의 회화 및 19세기 프랑스 회화가
전시되어 있는데 앵그르, 다비드, 들라크루아와 같은 거장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헬레니즘 조각의 걸작인 사모트라케의 '니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2층에 전시되어 있다.
노트르담 대 성당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 배경이 되었던 노트르담 대 성당)
노트르담은 '우리들의 귀부인'이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위해 지은 성당. 성당 중앙에 '최후의 심판 문'을
배치하고 좌우에 성모마리아의 문과 안나의 상을 배치하고 '최후의 심판'
문 위 원형 창 앞에 예수를 배치하였다. 1163년 파리의 주교에 의하여 착공,
시청과 마주한 종교 권력과 정치권력의 중심지. 파리의 지리적 기점이기도 한
건축학적 의미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의미있는 장소.
몽마르트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는 예술가들의 아지트 몽마르뜨)
몽마르트르는 자유분방함을 즐기는 예술가들의 아지트.
'몽'(Mont)은 '언덕'이라는 뜻이고 '마르트르'(martre)는 '순교자'라는 뜻.
해발 129m의 야트막한 언덕이지만 평지로 이루어진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높은
한 눈에 들어오는 꼭대기에 이른다. 언덕 꼭대기에서는 예술가들이 사랑했던
파리 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으나 약간은 실망.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지금의 몽마르트르는 예전의 보헤미안적인 느낌을 잃고 상업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래도 수많은 예술작품이 탄생한 본거지로서의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어
근처에는 고흐와 동생 테오와 함께 살았던 '반 고흐의 집', 다다이즘의 대표 시인
차라가 살았던 '트리스탄 차라의 집', 작곡가 비제가 살았던 '조르주 비제의 집'
등이 있다. 몽마르트르 주변의 사크레 쾨르 성당, 몽마르트르 묘지 등도 관광명소.
사크레 쾨르 성당은 1870년 프랑스가 혼란을 겪을 때 가톨릭교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지어진 곳이며, 몽마르트르 묘지는 스탕달, 드가, 모로,
졸라의 묘지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기 위해 방문한다고..
(몽마르뜨에서 내려다 본 파리시내 모습)
에펠탑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파리의 상징이자 프랑스의 상징이 된 높이 325m의 에펠탑)
센강 서쪽 강변에 위치한 드넓은 샹 드 마르스 공원
탑을 세운 프랑스의 교량기술자 구스타브 에펠의 이름에서 따온 에펠탑은
당시에 큰 화제를 낳기도 했으나 많은 지식인들이 우아한 파리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오늘날 프랑스의 랜드마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에펠탑은 약 617조원의 가치가 있어 프랑스 국내총생산(GDP)의 5분의 1에 달하며
매년 800만명의 관광객이 찾으며 누적기준 총 방문객은 2억명.
에펠탑은 세계 톱클래스에 속하는 우량기업.
에펠탑은 걸어서 올라 가고 싶은데 일정상..
엘리베이터는 눈 깜짝할 사이에 2층 전망대까지 올랐다
3층 전망대는 환상적일 것 같은데.. 단체는 NO
(에펠탑 조망)
위는 쟈크 뤼에프 광장(Jacques Rueff),
샹 드 마르스 공원(Champ de Mars), 공원 끝쪽은 사관학교
(Ecole Militaire), 뒤에 우뚝 서 있는 초고층 빌딩은 몽파르나스타워
(Tour Montparnasse). 파리는 모든 것이 대칭된다더니 마르스 광장을
사이에 두고 대칭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르스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곳이 군사 훈련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
아래 사진 바로 앞에 보이는 건물이 케 브랑리 미술관
(Musee du quai Branly), 파리시내를 유유히 흐르는 센강 위쪽으로
보이는 건물은 파리 시립 근대미술관(Musee d'Art Moderne de la Ville)
우측 멀리 몽마르뜨 언덕까지 아스라히 조망된다.
(쌍무개가 뜬 에펠탑)
에펠탑에 올라 파리 시내를 조망하고 이번에는 반대로
에펠탑이 제일 잘 보이는 샤요궁전으로 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우산을 쓰고 에펠탑을 몇 컷 찍고 샤요궁전을 막 떠나려는데 에펠탑 뒤로
쌍무개가 뜨는 것 아닌가! 이런 행운이.. 조금 전 갑작스럽게 내린 비는
센강 유람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바토무슈를 타고 센 강 야경 유람)
에펠탑 조망을 마치고 향한 곳은 센 강 유람선 바토무슈.
센 강 야경을 보기 위해 오후 8시에 유람선을 탔는데 낮에 비가 와서
그런지 갑판 의자가 젖어있고 강바람이 많이 차다. 유람선에는 한국 사람들도
많이 탔는데 세월호 참사 후유증인듯 유람선에 대해 경계하는 모습들도 보인다.
1시간 40분 정도 센 강을 유람하는 동안 유명 포인트들을 지날 때마다
한국어로도 안내방송을 해 주었는데 뭔말인지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코 프라하와 함께 세계 3대 야경으로 꼽히는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센 강 야경은 좀 실망스러웠다.
태양왕 루이 14세의 베르사이유 궁전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베르사이유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젊은 국왕 루이 14세는 새로운 궁을 필요로 했다.
프롱드난으로 어려움을 겪은 루이 14세가 반란의 여지가 없도록
귀족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견제하며 관리할 필요성을 통감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 또 하나의 다른 이유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누리던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를 위해 지어진 '성 보 르비콩'트가
베르사이유 궁전 디자인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스위스(인터라켄)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프랑스 파리에서 T.I.R 열차를 타고 가는 도중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고 Belfort에서 내려 다시 이탈리아에서 온 전용버스를 타고
스위스 인터라켄으로 이동하는데.. 프랑스 국경을 넘어 스위스에 들어서자
마자 버스는 수많은 터널을 통과하느라 마치 지하철을 타고 가는듯하다.
인터라켄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굵어졌다. 내일 융프라우흐에 올라
가는데.. 알프스 연봉들을 볼 수 있으려나.. 내심 신경이 쓰인다.
스위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알프스산맥은
중·남부 지역에 걸쳐있다. 스위스는 알프스 산맥을 필두로
전 국토의 60%가 산악지대로 해발 4,000m 이상의 고봉이 100개가 넘는다.
이 때문에 세계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관광지가 발달되었으며 세계 최고의
관광산업국가로 평가받는다. 전통적으로 시계, 공구 등 정밀기계 산업이
발달되었으며 낙농업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2012년 현재 인구는 793만명,
EU 비가입국. 1인당 명목 GDP는 77,840$로 유럽에서 2번째,
세계 4번째로 소득이 높은 나라이다.
(인터라켄 동역, 초고속열차 독일 이체도 도착해 있다)
인터라켄은 베른 남동쪽 26km 지점 툰호와 브리엔츠호 사이에
위치한 '호수의 사이'라는 지명의 뜻을 가진 조용하고 아름다운 도시.
베른알프스산맥의 연봉을 바라보는 경승지로 1128년경 건설된 이래 세계적인
피서지이자 등산기지이며 섬유 고무 시계 리큐어 공업이 발달되어 있다.
베른알프스의 융프라우 산괴의 북쪽 기슭에 있으나, 3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마한데, 이 작은 도시에 여행객들이 붐비는 이유는
바로 알프스 때문. 인터라켄에서 산악철도로 그린델발트(1,000m),
융프라우요흐(3,474m), 쉴트호른 등을 오를 수 있게 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 알프스 등산과 레포츠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등산기지로서 인기가 높다.
융플라우요흐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융플라우요흐 오르는 어느 중간역에서..)
인터라켄 오스트역에서
구름위 섬처럼 파노라마로 펼쳐 보일 알프스 연봉들을 기대했지만
융프라우요흐를 올라 보는 것은 여행자의 로망.
빼어난 고봉들이 즐비한 알프스 산군 가운데서도 융프라우요흐가
2001년 알프스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융프라우요흐와 더불어 산줄기 사이로 뻗은 알레치 빙하도 세계자연유산.
흥미로운 것은 이 변화무쌍한 날씨도 등재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빼어난 산세,
빙하와 함께 끊임없이 변하는 날씨도 자연유산 등재 목록에 포함되었다는 것.
산 위의 날씨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을 융프라우의 매력으로 본 것 같다.
오늘 알프스 연봉들을 만나면 담으려고 가져온 500mm 망원렌즈. 구름에 가려
제대로 사용도 못한 아쉬움이야 말할 수 없지만 '신이 빚어낸 알프스의 보석'이라는
찬사를 받는 것과 같이 스위스 융프라우요흐는 유럽여행 중 꼭 한 번 들려
보아야 할 만한 명소. 4,158m의 융프라우요흐는 아이거, 묀히와 더불어
융프라우 3대 봉우리 중 큰 형님뻘이지만 이름의 뜻은 '젊은 처녀'라고..
그래서 수줍은 처녀처럼 그 아름다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은듯..
인터라켄에는 날씨가 화창하더라도 융프라우요흐는
하얀 만년설로 덮인 알몸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고..
(스위스를 떠나면서..)
유럽의 집들은 전망좋은 높은 곳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산꼭대기에 길이 있을까 싶은 곳에도 집들이 들어 서 있다.
밀라노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3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이탈리아 밀라노.
늦은시간이었지만 곧바로 유럽 최고의 고딕양식 두오모 성당을 찾았다.
사방이 조각으로 채워진 대성당 두오모는 웅장하면서도 우아했다.
1890년에 준공되기까지 500년의 세월이 걸렸고 수많은 건축가의 손을 거쳤다.
패션의 도시 한 가운데 위치했지만 우아함과 정교함만이 밀라노를 빛내고 있다.
콧대높은 도시 밀라노의 도도함은 두오모 덕분에 더욱 도드라진다고 한다.
밀라노는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로 이곳에서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신앙의
도심 곳곳에서 '명품 도시' 밀라노가 아끼는 보석과 같은 존재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흔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콧대 높은 패션과 예술의 도시 밀라노!
1805년 나폴레옹 시대에는 이탈리아의 수도였고
19세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거점 도시였고,
현재 이탈리아 공업 중심지가 되어 가장 부유한 도시.
(스칼라 극장과 극장 앞 광장 한켠에서는..)
베르디와 푸치니가 오페라를 초연했던 스칼라 극장
(Teatro alla Scala, La Scala)은 1778년 8월 3일에 비스콘티가의
비 스칼라의 이름을 따서 만든 오페라 극 살리에리의 오페라 '레우로파
리코노시우타(L'Europa riconosciuta)' 공연과 함께 개장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두 번째로 지어진 극장. 화재로 인해 원래있던 밀라노의
궁정극장인 '두칼레 극장'은 사육제 이후, 1776. 2월 25일에 소실되자
그 후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명령으로
'산타 마리아 델 스칼라'의 교회 자리에 세워졌다.
(E80번 도로로 까라라 인근을 지나니 대리석 가공공장들이..)
밀라노에서 피사 가는 길..
A1도로에서 E80번 도로로 갈아타고 얼마쯤 달렸을까
도로변에 대리석이 마당 가득한 석공장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러고 보니 마치 대리석 채석장이 만년설 같이 하얗게 빛나는
이탈리아 최대 대리석 산지인 까라라 지역을 지나고 있는 것이었다.
까라라는 아푸안 알프스(The Alpi Apuane) 산맥의 끝부분에 위치한
대리석의 생산과 가공 그리고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
피사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피사에서 유명한 것은 피사대성당 동쪽에 있는 피사의 사탑.
앞에서 부터 차례로 세례당, 두오모, 피사의 사탑으로 로마네스크 양식.
사탑은 흰 대리석으로 된 둥근 원통형 8층 탑으로 최대 높이는 58.36m이며
무게는 14,453t으로 추정. 2008년 현재 기울기의 각도는 중심축으로부터 약 5.5˚.
1173년 착공되어 1372년까지 3차례에 걸쳐 약 200년 동안 진행되었으나
1173년 ~ 1178년 사이에 진행된 1차 공사 이후 지반 토질의 불균형으로 인해
다시 건설하였으나 기우는 현상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2001년 6월 일반에 다시 공개하였으나 보존을 위해
실내 입장객의 수를 제한하고 있다고 한다.
(코끼리 열차(?)가 지나가지만.. 뙤약볕을 걸어서..)
버스 주차장에서 피사의 사탑까지는 제법 멀었다.
일행중 걷기 불편한 분이 있었지만 이래저래 저 교통수단을
이용하는데는 문제가 있는듯.. 뙤약볕을 20분 정도 걸었다.
(나폴리 인근의 모습)
폼페이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때는 AD 79년 8월 24일 정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조치를
로마 황제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그렇게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끔찍한 사건이지만
한편으로 이 비극적인 사건이 고대 로마 전성기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 2000년 전 고대 로마 사람들은 세련되고
아름다운 주택과 높은 문화수준과 벽화, 경기장 같은 유적지를 비롯하여
일부 귀족들이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생활 모습과 환락가(아래 사진) 등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의 흔적을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폼페이는 매년 500만 명이 방문하고 있다.
(산타루치아 항구 코 앞까지 왔으니.. 식당에서 산타루치아)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소렌토)
'돌아오라 소렌토로'의 현장 소렌토.
폼페이에서 기차를 타고 소렌토 이동했다. 소렌토도 둘러보고
비토리오 베네토 가에 있는 호텔 '임페리얼 트라몬타노' 로비에
걸려 있다는 소렌토를 소개한 유명한 명판도 보고 싶지만,
소렌토는 카프리 섬을 가기 위해 잠깐 경유한다.
카프리 섬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황제들이 좋아했던 섬 카프리)
나폴리만 입구, 소렌토 반도 앞바다에 있는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티베리우스 황제의 별장이 있을 정도로
아름다운 섬. 에메랄드빛 바다와 코발트 블루의 새파란 하늘이 환상적.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있으며 로마 시대에 있었던
등대의 터도 남아 있다. 특히 로마 시대부터 알려진 '푸른 동굴'은
햇빛이 바닷물을 통해서 동굴 안을 푸른 빛으로 채운다.
15세기에 해적을 피하여 고지에 형성된 취락이 현재 섬에 있는
카프리와 아나카프리 2개 도시의 기원. 나폴레옹 전쟁 때 영국 해군에게
점령된 것 외에는 나폴리 왕국 또는 양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였다.
서쪽은 600m를 넘는 고지를 이루고 섬 전체는 용암으로 뒤덮여 있다.
북안의 마리나그란데에서 카프리까지는 케이블카로 오른다.
(나폴리만을 배경으로..)
(움베르토 1세 광장)
카프리섬에서 제일 번화한 곳.
난장이 열리고 취주악대가 행진을 하고 있다.
움베르트 1세 광장에서 잠시 자유시간을 가진 후
이번에는 Ferry를 타고 나폴리 항으로..
(나폴리의 누오보 성(Castel Nuovo))
카프리섬에서 나폴리 산타루치아 항구까지는 페리로
약 1시간 정도 걸렸다. 호주 '시드니'와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와
함께 세계 3대 미항중의 하나로 알고있던 나폴리항의 모습은 아니었다.
나폴리는 첫인상부터 도시의 분위기가 지저분하고, 칙칙해 보였다.
실업율도 높고 각 지에서 모여든 집시, 빈민, 소매치기, 강도, 절도 등
배에서 내리면 보이는 누오보 성(Castel Nuovo).
나폴리의 상징적인 존재로 "새로운 성" 이란 뜻을 가진
프랑스풍의 성으로 1282년에 세워졌는데 4개의 탑을 가지고 있다.
15세기에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이 침략하여 이 성을 개축하면서
오른쪽의 두 탑 사이에 개선문을 만들었다고 한다.
바티칸 바로가기 ☞ 사진 클릭
이탈리아의 로마 북서부에 있는 가톨릭 교황국.
바티칸시(Vatican city)라고도 불리며,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성베드로 대성당,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있는 교황궁(Pontifical Palace)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세계 가톨릭교회를 통괄하는 가톨릭 교회 최고통치기관인 교황청 소재지.
하나의 국가이지만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고 소수의 스위스 근위병이
라틴어 '몬스 바티카누스(Mons Vaticanus)'에서 유래한다.
19세기 이탈리아가 근대 통일국가로 바뀌면서 교황청 직속의
교황령을 상실하게 되자, 1929년 라테란(Laterano)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지역에 대한 주권을 이양받아 안도라,
산마리노와 함께 세계 최소의 독립국이 되었다.
(바티칸 시국 성벽을 따라..)
교황이 다스리는 나라, 가장 작지만 영향력이 막강한 나라.
바티칸. 그 나라를 보기 위해 1시간 반동안 담벼락 밑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고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보통 2시간은 줄을 서야 한다나..
(아라찌의 회랑, 카펫에 그린 벽화와 화려한 천장화)
무려 120m 길이의 끝도 보이지 않는 길고 긴 복도의
양쪽 벽에는 사람 키의 2배가 넘은 엄청난 크기의 대형 카페트에
그린 그림과 이탈리아 지도가 전시되어 있고, 천장은 온통 황금빛으로
빛나는 천장화의 화려함과 경이로움에 압도 당한다. 멈춰서서
보려고 해도 관람객이 얼마나 많은지 그냥 떠밀려 갈 정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 놀라운 사실
이곳의 부조같이 보이는 모습들은 모두가 조각이 아닌
입체 그림이라는 것.. 눈이 뚫어져라 쳐다봐도 정말 믿기지 않았다.
바티칸 건물 내에는 이렇게 부조처럼 착시현상을 보일 정도로
정교한 입체화 작품들이 많다고 한다.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스타와 베르니니의 기둥과 제대)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있는 '피에타'
미켈란젤로(1498~1499년)의 작품으로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조각상.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가
로마에 머물던 시절인 25세 때 프랑스인 추기경의 주문으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대리석 높이 175cm.
1642년에 베르니니가 바로크 스타일로 만든
거대하면서도 우아한 나선형 기둥. 청동에 금을 입힌 화려한 기둥은
뒤쪽에 있는 교황의 제단을 더욱 부각시켜 주고 있다.
로마의 길 한모퉁이에서..
여행을 꿈 꾸는 사람은 많지만
여행은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가까이 가든 멀리 가든 여행은 마음이 생길 때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생 교훈인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힘이 될 때가 많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코스메딘 산타마리아 교회, 진실의 입)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헤라클레스 신전터 위에
6세기 때 세워진 것으로 종탑은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이 교회의 현관 왼쪽에는 강의 신 플루비우스의 얼굴을 부조한
둥근 돌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행객들의 눈길을 끄는 진실의 입이다.
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거짓진술을 하면 강의 신이 손을 삼켜 버린다는
로마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한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로마 가톨릭의 중심지,
그 역사 덕분에 전 세계 문명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
(Caput mundi)', '영원한 도시(la Citta Eterna)'라고 부른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2007년 현재의 인구는 약 270만명.
로마 시내에는 교황이 거주하는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외국이지만
역사·종교·문화적으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의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트레비 분수 가는 길의 풍경)
로마는 전 세계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관광명소로 향하는 골목길은 거의 떠밀려 가다시피 한다.
2013년 로마를 찾은 여행객이 670만(소스 : 비자카드).
세계 13위, 생각보다는 적은 것 같다.
('로마의 휴일'로 잘 알려져 있는 트레비 분수)
트레비 분수에 가면 전 세계 동전을 모두 볼 수 있다.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인데 어쨋거나 트레비 분수는 가만히 앉아서
하루 평균 3천 유로(500만원), 다행인 것은 분수에 던져진 동전은 교황청
산하의 국제기구에서에이즈 환자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사용한다고 한다.
트레비 분수는 영화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 모습이 떠오르는
장소로도 유명한데 사진 한 장 제대로 찍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여행객들이 붐비는 로마의 명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트리톤, 해마 등의 조각이 배치돼 있다.
분수의 조각상은 밤에 조명이 들어온다고 한다.
(스페인 계단에도 앉아 보고..)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헵번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배경이 스페인 광장. 바로 앞에 유명 쇼핑가인 콘도티 거리가 있고
코르소 거리 주변으로는 박물관 등이 있어 많은 이들이 이 광장을 거쳐 간다.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는 17세기 교황청의 스페인 대사관이
이곳 주변에 있었기 때문. 137개로 이뤄진 광장 계단에는 늘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여행자들에게는 약속 장소로 애용되는 곳.
(줄을 맞춰 다니는 학생들..)
(자유를 위해 싸웠던 콜로세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에 의해 72년에 착공되어
8년 동안의 기적적인 역사를 거쳐 티투스 황제 때인 80년에 준공된
콜로세움은 로마시대에 건립된 최대의 건축물. 콜로세움은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과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구경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해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콜로세움은 높이 48m, 둘레 500m 등
경기장 내부의 길이 87m와 폭 55m라니 어마어마한 규모.
(아우렐리아누스 성벽(aurelian wall))
아우렐리아누스 성벽(무라 아우렐리아나)은
3세기에 들면서, 팍스 로마나도 위태롭기 시작하여,
갈리에누스 황제 때에도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었으며 고트족을
물리친 클라우디우스 2세에 이어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때는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성벽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이에 273년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쌓게 된다. 카시우스 이래로 자유롭게
바깥쪽으로 퍼져 나갔던 로마시의 거주구역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해
안과 밖으로 나뉘게 되었다. 농민들조차 시내에 살면서 아침에 시내 밖으로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때 돌아오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팍스 로마나'가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던 로마제국 전역에서는 교외 인구가 줄어들고 도시가
과밀화하는 현상이 계속 진행되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대제 때부터,
로마는 제국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밀라노와 라벤나로 이탈리아반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이 옮겨갔다. 현재 로마는, 테베레강 왼쪽 연안에
베네치아광장을 중심으로 많은 도로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 구시가지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바깥쪽의 넓은 신시가지로 되어 있다.
바르베리니 광장에서 베네토 거리를 따라 올라가면 아우렐리우스
성벽의 문인 핀치아나 문이 남아 있다. 문 안은 보르게세 공원이다.
이 성벽은 길이 46km에 이르며, 현재 그 대부분이 남아 있어
당시 번영했던 고대 로마제국 도읍지의 크기를 말해준다.
(피렌체 인근호텔에서 본 석양과 아침 거리 모습)
호텔에 일찍 투숙하는 바람에 주변을 돌아 볼 수 있었는데
도심 외곽이기도 했지만 주변을 돌아보나 참 쾌적하다는 느낌이었다
나무도 많고, 분리수거도 철저하고 전기도 아끼고, 소형차 이용 등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것은 전 지구적 숙제다.
르네상스의 발상지 피렌체 바로가기 ☞ 사진 클릭
'꽃'의 도시,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 피렌체는
중세의 유적과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대리석 위에 꽃피워 놓았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간직한 아름다움은 어느 한 곳 눈길을 붙들지
않는 곳이 없다. 두오모 대성당, 우피치 미술관,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산 로렌초 성당, 베키오 다리, 피렌체 역사지구를 단아하게 채색하는 유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역사지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이 있었고, 단테,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카치오,
미켈란젤로, 카를로 콜로디 등 열거하기에도 벅찰정도로 많은
사상가와 예술가의 고향이거나 흔적을 남긴 도시 아닌가!
(시뇨리아 광장의 '다비드 상')
수세기 동안 피렌체의 정치·사회적 중심지인
'사빈 여인의 강간'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 모조품들이 있다.
다비드상 바로 뒷편에 있는 베키오궁전은 16세기까지 피렌체공화국의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던 곳이며 궁전의 종루는 시민들을
공공집회에 불러 모을 때 사용한다고 한다.
(개양귀비, 문화를 꽃 피운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정박중인 크루즈선과 산타마리아델라살루트교회)
이탈리아 베네토주 베네치아. 대운하 어귀에 위치한
바로크 양식의 교회로 1630년에 유행한 페스트로부터
도시를 구원한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지어졌다고.
베네치아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베네치아, 영어로는 베니스(Venice).
베네치아만 안쪽의 석호(潟湖:라군) 위에 흩어져 있는
118개의 섬들이 약 400개의 다리로 이어져 있다.
섬과 섬 사이의 수로가 중요한 교통로가 되어 독특한 시가지를 이루며,
흔히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교통수단은 전부 배로 이용되고
베네치아 섬에는 자동차가 1대도 없다고 한다.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을 피해 이주해 온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 기슭 갯벌에 수 백만개의 말뚝과 돌을 부어
10C 말에는 동부지중해 지역과의 무역으로 얻은 경제적 번영으로
이탈리아의 자유도시들 중에서 가장 부강한 도시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십자군 원정에 힘 입어 동방무역을 확대하고, 나아가 현재 그리스의
여러 섬들을 비롯한 동부지중해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14세기 ~ 15세기 초에 해상무역공화국으로서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 무렵 인구는 약 20만으로 추정. 공화국의 정치 중심이었던
두칼레 궁전이 완성된 것도 15세기였다고 한다.
(곤돌라와 수상택시를 타고..)
인스부르크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황금지붕이 있는 인스부르크)
오스트리아 티롤 주의 주도인 인스브루크,
도심에 들어서기도 전에 병풍처럼 쳐진 알프스 산맥의 비경이
넋을 잃게 만든다. 인스브루크는 인(Inn)강과 다리(Bruck)라는
뜻의 독일어를 합친 말로, '인강 위에 있는 다리'라는 뜻이다.
1500년에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지은 '황금의 지붕'(Goldenes Dachl)은
시의 상징. 구시가지 바로크 양식 건물들 사이에서 유난히 빛을 발하는
건축물은 로코코 양식의 '핼블링 하우스(Helblinghaus)'다.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에는 또 하나의 명소인 개선문이 있다.
인스브루크는 동계올림픽을 두 번(1964,1976년) 개최한
겨울 스포츠로 유명한 알프스 산맥의 도시로서 뿐만아니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매력있는 도시다.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독일로..)
유럽 연합(EU / European Union),
고속도로변에 자주 보이는 유럽연합 상징기(The European Emblem)에는
(EU 회원국은 지난해 7월 1일부로 크로아티아가 마지막으로
가입하여 EU연합 전체 회원국은 현재 28개국이다)
(국경을 넘어 서자 독일은 또 다른 모습으로..)
오스트리아와 인접해 있지만 마을의 구성 형태가 다르고
특히, 농가의 지붕위에 태양발전용 집적판이 많이 보였다.
하이델베르크 바로가기 ☞ 사진 클릭
(학문의 도시 하이델베르크)
하이델베르크(Heidelberg)는
독일 라인 강의 지류, 네카르 강변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로
1386년에 설립된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있어 학문의 도시로 유명하며
1952년 이후로 유럽 주둔 미군 총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다.
16세기와 17세기 초에 건설되었다가 17세기 말 프랑스군에 의해 파괴된
하이델베르크 성은 여전히 인기 있는 유적으로 남아 있으며, 높이 8m의
세계에서 가장 큰 술통으로 210,000ℓ의 포도주를 담을 수 있는
'그로페스 파스'가 있는 관광 명소. 인구는 약 14만 5천(2007).
(5일간 안전하게 여행지로 이동시켜준 쥬세페와..)
쥬세페 이 친구땜에 멋있는 이탈리아 남자들 이미지 구겼다.
어찌된 것인지 기회만 있으면 트집을 잡고 돈을 요구한다. 15년동안
트럭운전을 하다 2년전 장거리 버스(LDC/Long Distance Coach)로 전환했다는데
인솔자는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별 것 아닌 것도 새끼꼬듯 꼬았으니..
쥬세페, 앞으로 그러지 마! 이태리 이미지 먹칠하는 거야.
(고속도로가 공사중.. 시간은 지체되고..)
중간중간 버스기사가 장난 치면서 시간 소비하고,
하이델베르크에서 물건 산다고 시간을 또 까먹어
고속도로까지 공사중이어서 예정된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인솔자는 사방팔방으로 비상상황에 대처하느라 정신없다.
(보딩 1시간 전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
공항에 도착해 짐을 다 부렸는데 내 캐리어가 보이지 않는다.
아뿔싸! 캐리어를 호텔로비에 두고 놓고 그냥 몸만 온 것이다.
이번 여행은 오래 전부터 준비를 했는데 여행사가 무성의하게 처리하여
여행을 떠나지도 못할뻔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가게 되었는데.. KTX로 울산에서
세상에.. 캐리어를 호텔에 그냥 두고 오다니..
카메라 가방을 두고 오지 않은게 천만다행!!
말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여곡절의 여행이었지만
일행분들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어 감사하다.
특히, 산청이장 춘자씨와 경희씨, 같은 학생(?)으로서 길동무가 되어
모델과 전속 사진사가 되어준 이쁜 기원이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캐리어는 여러분들의 염려 덕분으로 나보다 5일 늦게 무사히 도착했다.
이래저래 잊을 수 없는 여행이 된 것 같다.
(여정)
여행을 계획할 때마다 배낭여행과 패키지 여행을 두고
고민을 하지만.. 결론은 일정이 긴 여행은 배낭여행이 좋을 것 같고
10일 이내의 짧은 일정의 여행은 가이드가 있고 잘 짜여진 스케쥴대로
많은 곳을 들리는 패키지 여행이 유리한 것 같다. 이번에도 패키지로 다녀왔다.
패키지 여행의 경우, 여행의 절반은 가이드가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파리와 베네치아 가이드도 좋았다. 그러나 영국박물관에서 문화사대주의적이고
문화제국주의를 옹호하는듯한 설명을 하는 가이드는 문제가 있었다.
영국박물관의 귀중한 문화유산들 중 약탈하거나 강탈해 온
문화유산들은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주는 것이 마땅하다.
기말시험을 앞두고 2주 가까운 시간을 떼내어 강행한
여행이었기에 여행기는 방학 때 정리하기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행 당시 그 감동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나마 사진 찍을 때 나름대로
생각을 담았고, 메모를 해 놓은 것이 있어 바둑 복기하듯 생각을
꺼집어 내니 표백되고, 박제된 모습으로나마 조금씩 되살아 난다.
지금 생각해 봐도 적어도 10일간은 행복했다. 흥분되고 들떴던 기분이
Fanny Burney가 "여행이 모든 기쁨을 망쳐버렸다! 이탈리아를 본
뒤로 어떤 건물도 눈에 들어 오지 않는다."라고 한 말이 공감된다.
이탈리아를 제일 나중에 갈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히말라야를 갔다 오고나면 히말라야만 갈 것 같아서
히말라야를 나중에 가려고 참고 있는 중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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