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박물관, 입장료를 받을 수 없는 이유가..

2014. 7. 14. 13:55여행/여행기

 

 


영국박물관, 존재 가치를 다시 모색해야 할
(문화재, 소유하는 것인가 공유하는 것인가)



○ 2014. 5. 8 ~ 19    날씨 : 비, 흐림
○ 영국, 런던 The British Museum





 

이제 짧은 영국 일정중 마지막 코스인
영국박물관 관람. 여러가지 이유로 꼭 관람해 보고 싶었던 곳이다.
공식명칭인 'The British Museum'을 대영박물관으로 부르는 것은
대영제국을
롤 모델로 삼은 일본의 영향도 있는 서구중심적이고 사대주의적인 표현이다.
영국이 'The British Museum'이라 하고 있는데 굳이 대영박물관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는가? 공식명칭인 제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옳다.

'영국박물관'은 런던 블룸즈베리에 있는 영국 최대의 국립 박물관.
파리 루브르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박물관의 하나이며,
파리 루브르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
영국박물관 1,300만 여점의 소장품들은 영국이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갖고 있던
제국주의 시대에 약탈한 전리품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정작 자국의 유물보다는
다른 나라 유물이 훨씬 많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1753년에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한스 슬론 경(Sir Hans Sloane)의 개인수집품이 전시물의 대부분을 이뤘고
공공에 개방된 것은 1759년 1월 15일이었다. 박물관 건물은 블룸스베리의 몬태규 후작의
저택을 사용하였으나 세계 각지 식민지에서 약탈한 수집품이 늘어나자 이에 건물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2세기 반에 걸쳐 확장과 신축을 거듭하면서 남킹스턴박물관을
비롯한 몇 개의 부속 기관도 새로 생겼다. 개관초기에는 관람객을 엄격히 심사,
선정하여 하루에 10명 만 관람시켰으나, 현재는 하루 15,000명이 관람하고 있다.
영국은 돈을 받고 영국의 역사를 보여 주지만 영국의 박물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영국박물관'은 특별전람회 이외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이는 자국 물품이 일정 수 이상 전시되지 않으면 입장료를
받을 수 없다는 국제박물관 헌장 때문이다. 위키백과 참조)









(영국박물관 정문, 전경, 스카이 뷰)

유니언잭이 휘날리고 있는 영국 박물관
박물관 외관도 심지어 파르테논 신전 모양이다.
1850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할 때 44개의 이오니아식 기둥을 만들어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할 수 있도록 건축되었다.





(박물관 안내도)

총 9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 영국박물관은
며칠은 둘러보아야 할 정도로 규묘가 크다. 잠깐 여행온 여행자라면
미리 보고 싶은 전시관을 정해 놓고 찾아야 효율적인 관람이 될 것 같다.
우리는 아시리아, 그리스, 이집트, 미이라관, 한국관 만..
그것도 2시간 만 관람하기로..

입장료 : 무료, 특별전일 경우 유료
운영 시간 : 10:00~17:30, 금요일 10:00~20:30, 1. 1, 12.24~ 26까지 휴무
주소 : Great Russell Street, London WC1B 3DG, United Kingdom
홈페이지 : www.britishmuseum.org





(풍경..)





(Great Court에 들어서면..)











(라마수가 지키고 있는 아시리아 전시관)

외국에서 사신들이 오면 이집트의 우월함을 자랑하기 위해
입구부터 그들이 다니는 길에 해 놓은 장식들.. 입구부터 기를 죽인다.
메소포타미아 관 입구를 지키고있는 라마수. 석상이 잘 떼어지지않아
부숴서 가져왔다고한다. 그래서 날개부분엔 금이간 흔적이..





(성문을 떼어다가 여기에..)











(벽면은 온통 아시리아에서 떼어 온 부조로..)













(메소포타미아 문명 아시리아인의 용맹, 왕의 사자 사냥)

기원전 640년경, 아시리아제국에서 위대한 왕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대왕의 사자 사냥'이라는 부조가 관람객들을 압도한다. 아슈르바니팔은 인류
최초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제국인 앗시리아의 후기 황제로 유물은 두번째 수도
니느베(현재 이라크 모술)왕궁터에서 궁전 복도를 장식했던 부조를 떼어 온 것.
왕은 대체 왜 이런 사냥 모습을 왕궁 복도에 길고 상세히 묘사해 놓은 것일까?
역사책에서 배경을 찾아 보면, 대제국 아시리아의 영토중 아슈르바니팔은 집권을 한 후
이집트와 바빌론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진압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맹수의 왕으로
묘사된 사자의 목을 오히려 한 손으로 움켜쥐고 잡았던 모습을 통해 무소불위의
자신의 권력을 세상에 알리고 또 길이 남기고 싶었던 것 아니겠는가?

사냥감 사자들을 아프리카에서 잡아 옮겨와서
사냥터에 풀어 놓고 사냥을 했다고..







(The Black Obelisk of Shalmaneser III)

Assyria 왕 샬마네세르 3세(859-824 ? B.C.)의 오벨리스크는
BC 827 고대 아시리아인들이 세운 것. 흑색 결이 보이는 석회암으로
크기가 6.5 피트에 설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상단의 그림은 이스라엘 왕
예후가 아시리아 왕에게 공손하게 절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그 당시 샬마네세르 3세는 사자 사냥을 그림을 남기는 등
용맹을 떨친 왕으로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







(Khorsabad, Palace of Sargon)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아시리아 제국에서는 니네베(Nineveh),
아수르(Assur), 코르사바드(Khorsabad), 님루드(Nimroud) 등에 궁전을 건설하여,
그 유적을 오늘날까지 남기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코르사바드 궁전.
고대명은 두르 샤르루킨(Dur Sharrukin).
이라크 북부, 모술의 북동 20km에 있는 신아시리아 시대의 유적이다.
사르곤 2세(재위 BC 721~BC 705)가 세운 궁전으로 높이 16m의 높은 축대 위에 세워졌다.
이 궁전에서 갖가지 장면의 부조가 있는 오르토스타트,거대한 라마스상 등이 발굴되고,
K궁전에서는 동물과 기하학문양을 그린 벽화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유물들은
뜯겨져 루브르 박물관과 이곳 영국박물관으로 옮겨와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조사단 발굴품의 대부분은 운반 도중에 티그리스강에 침몰..





(부끄러워하는.. 릴리의 미의 여신 비너스(아프로디테))





(현재 파르테논 신전의 전경 / 빌려온 사진)

이것을 보고 울지 않는 자, 어리석어라.
너의 벽은 마멸되고, 허물어진 신전은 앗아져버렸다.
이 유적을 보호해야 할 영국인들 손에.
다시는 회복될 수 없으리라.
그것이 고향에서 강탈당했던 그 시간은 저주 받으라.
또다시 너의 불행한 가슴은 상처 나고
너의 쓰러진 신들은 북쪽의 증오스런 나라로 끌려갔도다.

- 바이런 -
차일드 해럴드의 순례(Childe Harold's Pilgrimage)

이 시는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유물의 영국 이전에
크게 반대했던 시인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이
폐허가 된 신전을 방문한 후 남긴 것이다. 그는 그리스의 민족 유산을 파괴하고
탈취한 엘긴 경의 비도덕성과 역사적 무책임함을 비판하면서 파르테논 신전 부속물들의
영국 반입을 반대했다. 그리고 1824년, 그의 나이 38세 때 바이런은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아테네에 도착했지만 열병에 걸려 곧 사망하고 만다.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영국 낭만주의 시인의 죽음은 오스만트루크 제국(지금의 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그리스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그 혼란을 틈타
그리스인의 상징과 같은 파르테논 신전을 훼손하고
약탈한 영국 정부의 모습과 대비된다.





(파르테논 신전, 파르테논 마블스가 엘긴 마블스가 되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리스에 있어 민족적 정세성이
구체화되고 그 정신을 담고 있는 시각적인 상징물이었다.
특히 유럽 문화의 원류 중 하나인 고대 그리스 문화의 상징으로
유네스코의 로고이며 유네스코가 선정한 첫 번째 세계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 전쟁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아테네는 전란 중 파괴된 아크로폴리스를
재건하면서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기리기 위한 이 신전을 가장 먼저 세웠다고 한다.
15년의 공사 끝에 기원전 432년에 완성된 이 신전의 건축에는 수많은 유명한 인물들이 참여했는데,
헤로도토스, 프로타고라스, 소포클레스 등 당대 최고의 문화인들이 자문을 했고,
그리스 최고 건축가인 익티노스와 칼리크라테스가 설계를, 페이디아스와 같은
최고의 조각가들이 대리석 조각과 부조(지금의 엘긴 마블스)를 담당했다.
파르테논 신전은 그야말로 당대의 드림팀으로 구성된 최고의 건축물로서,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리스의 중심 도시로 부상하기 시작한 아테네의
자신감과 문화력이 응축된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13세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의 교회로, 15세기 중엽에는 이슬람교 사원으로 사용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오스만튀르크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베니스 함대의 포격으로
주요 조각품들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파르테논 신전은 제자리를 지키며 본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짜 비극은 19세기 초 영국의 엘긴(Thomas Bruce, 1766~1841)경이
신전의 남은 조각들과 부조들을 파내갔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자신의 대저택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꾸미고자
파르테논 신전의 일부를 뜯어 영국으로 가져온 엘긴 경.
결국 그의 제안으로 영국 정부는 마블들을 매입했고, 여기에 '엘긴 마블스'
(Elgin Marbles)라는 이름이 붙었다. 1799년 터키 주재 영국 대사로 발령받은 엘긴은
그 무렵 그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자신의 대저택을 당시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신고전주의 양식
(neo-classicism)으로 꾸미고 싶어서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을 본뜨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1801년 그는 본을 뜨느니 차라리 신전의 일부를 뜯어서 자신의 집을 장식하기로 결심한다.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문화 전쟁의 서막이 한 귀족의 집을 꾸미기 위한 탐욕에서 시작됐다니
그리스인들에게는 통탄할 일이었다. 영국 대사라는 신분과 특권을 이용해 허가증을 발부받은
엘긴 경은 10년 동안 무려 253점(남아 있는 조각품들 중 90%에 달하는 양)을 영국으로 실어
날랐지만 운반비용이 당시 7만 5천 파운드나 드는 바람에 집을 꾸미다가 파산한다.
엘긴은 결국 빚을 갚기 위해 영국 정부에 파르테논에서 가져온 마블들을 팔겠다고 제안.
영국 정부는 1816년 마블의 구입 문제를 심의하기 위한 청문회를 연 후,
찬성 82표, 반대 30표로 파르테논 마블의 구입을 결정했고,
그것의 정식 명칭을 '엘긴 마블스(Elgin marbles)'로 할 것과
영국박물관에서 소장한다는 법을 통과시켰다.











(파르테논 신전 페디먼트(박공))

영국 박물관에서 가장 유명한 파르테논 갤러리
파르테논은 2500년 전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세워진 신전으로
페르시아와의 해전의 승리는 아테나의 덕분이라 생각하고 16년에 걸쳐
완성한 신전이다. 이곳에서 전시되고 있는 긴 마블은 파르테논 신전 내부
4면의 천장 아래 테두리 부분을 장식하던 프리즈. 전체 프리즈 중
50%만 남겨져 있는데 그 중의 30%를 이곳 영국 박물관에서
나머지 20%를 아테네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중앙에 제우스와 아테나 여신이 있었으나
부서져 찾을 수가 없지만 아테네의 탄생을 본 충격으로 인한
신들의 심리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데 중심에서 왼쪽부터 보면 날개 달린
공기의 여신 이리스로 놀라서 일어나 비행하려고 도망가는 모습이고,
그 옆에는 한 손을 들고 놀라는 모습의 데메테르와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
그녀들의 왼쪽으로는 술의 신 디오니스소스인데 조각상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이유가 술의 신의 상징이 오른손 술잔이었기 때문에
침략자들이 다른 신들은 얼굴은 부술 때 디오니소스는 손을 잘랐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옆으로는 태양의 신 헬리우스가 4마리의 말이 끄는
태양의 전차를 끌고 올라오는 모습을 하고 있다.

중앙 오른쪽에 앉아 있는 여신은 화덕의 신 헤스티아로
무릎 아래 옷의 팽팽함이 그녀의 심리와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그 옆 몸매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옷을 입고 디오네의 다리에 기대어 누워 있는
여신은 바로 아프로디테.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옷감과 옷주름의 미묘한 세부 묘사,
그리고 자연스러운 포즈와 견고한 신체를 통해 아름다운 여성의 육체를 표현.
그녀는 반대편의 디오니소스가 취한 자세와 비슷..
서로 중심이 아닌 반대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것이 바로
술에 취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랑에 빠진 모습을 상징하는듯..
그 옆에는 달의 전차를 이끌던 아르테미스의 조각이 있었으나
모두 사라지고 오직 말 머리만이 남아 있다.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파르테논 부조(조각))

그리스 정부의 지속적인 반환 요청에도
영국 측은 반환 불가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스는 1832년 오스만튀르크로부터 독립하여 오랜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독립국으로서 국가의 재건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파르테논 신전의 복구와 엘긴 마블스의 반환 운동이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 이후 본격적인 반환 운동을 시작했는데,
영국의 입장은 오로지 '반환 불가'였다. 1983년 그리스 정부가
외교 창구를 통해 영국 정부에 반환을 공식 요청했으나 영국 측은
반환 불가라는 공식 입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다면 일견 당연히 돌려받아야 마땅할
엘긴 마블스를 그리스는 왜 돌려받지 못하고 있으며,
영국은 어떤 근거로 반환을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실제로 영국의 몇몇 방송사에서 여론 조사를 실시했을 때,
국민의 절반을 훌쩍 넘는 수가 반환에 찬성했다. 하지만 1998년 노동당 출신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영국 정부는 영국박물관이 보관 중인 엘긴 마블스를
그리스에 반환할 생각이 없다"며 국민의 뜻과 관계없이 국가의 입장을 고수했으며,
2001년에도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엘긴 마블스는 영국박물관의 소유다. 단 하나의 소장품도 원래 있던
나라에 되돌려줄 계획이 없다. 매년 박물관을 찾는 600만 명의 관람객이
아름다운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을 감상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 문명의
위대한 업적을 알게 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2004년 노동당 출신의 전 외상 로빈 쿡은 자신은 개인적으로 엘긴 마블스의
반환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면서, 과거에는 정부의 공식 입장과 반대였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영국은 왜 국민의 찬성과 세계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엘긴 마블스를 그리스에 반환하지 않는 것일까?
영국 정부의 주장은 이렇다.

1. 엘긴 마블스는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영국에 유입되어 국회의
동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박물관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에 '반환'의 대상이 아니다.
2. 엘긴 마블스는 지금까지 영국박물관의 최신 시설과 과학적 관리를 통해
보관되어 왔으며, 최상의 상태로 연구·전시되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가 그만한
시설과 관리력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단지 원소재지로 돌려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문화재의 보호와 보존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야 한다.
3. 엘긴 마블스는 그리스의 과거 역사로부터 남겨진 문화유산이지만,
이제 민족의 유산만이 아닌 역사적 가치를 지닌 세계 인류의 보편 유산이
되었다. 따라서 마블스는 그리스의 소유가 아닌 인류 모두의 것이다.
4. 엘긴 마블스는 백년 넘게 영국에 보관되어 오면서 영국인들에게도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적 배경이 되었다. 엘긴 마블스는 이제 영국의
역사ㆍ문화적 맥락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기마행렬 부조)

그렇다면 영국의 논리가 설득력이 있는가?
실제로 이 근거들은 매우 허점이 많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약해지고 있다. 근거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우선 영국이 주장하는 유물 취득의 합법성은 오로지
영국이 만든 법에 의한 영국 측의 주장일 뿐, 납득할만한 증거는 없다.
당시 엘긴 경은 오스만 정부로부터 파르테논 신전의 본을 뜨기 위한 허가증은 받았지만,
신전 장식물들을 뜯어가기 위한 허가증을 받았는지는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엘긴 경은 그 허가증의 실물을 제시하지 못했고,
영어로 된 번역본만을 의회에 제출했다. 따라서 영국이 주장하는
 '합법'의 근거는 사실 너무나 일방적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영국은 그리스의 미비한 시설과 부족한 관리능력,
아테네 시의 좋지 못한 환경 등을 제기하지만, 그리스는 신 아크로폴리스
박물관(the New Acropolis Museum)을 개관하면서 최신 시설을 갖추었다.
영국의 주장은 도의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설사 그리스가 기술력을 갖추지못했더라도
문화 협력의 일환으로 박물관의 상호 협조체제를 통해 유물 관리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문제.
영국의 입장을 더욱 당황스럽게 한 것은 1998년 역사가 윌리엄 세인트 클레어에 의해 폭로된
영국박물관의 관리 부실 사건이었다. 1936년 박물관 측은 조각들을 깨끗이닦으려고
쇠 수세미를 사용하였고, 뒤늦게 밝혀진 이 사건을 쉬쉬하기 위해 손상 부분에
갈색 왁스를 발랐다는 것. 이 사실이 알려지고 그리스가 즉각 강경한 반환 요청을 하면서
엘긴 마블스의 반환 문제는 다시금 격렬하게 불붙자 영국 정부는 이 보도가 과장되었으며
마블스가 영국에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다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반환 불가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자 그리스의 베니젤로스 장관은
"그렇다면 모든 문화재는 세계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베이징
한복판에 갖다놔야 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영국 측 주장은 그 두 개가 서로 모순된다.
인류의 공동 재산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이제는 영국의 문화적 맥락에서
빼 놓을 수 없다니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인류의 문화유산이어도
그것이 왜 영국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오히려 원래 있던 장소에 장소인
파르테논 신전에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고 역사·문화적으로도 옳은 것이 아닐까.
그리스 측도 이 부분을 강력히 주장한다. 학계에서는 이렇게 원래 있던 곳에서 떨어져
약탈되거나 보관중인 것을 '탈맥락화된(decontextulaized)' 유물이라고 설명하는데,
원래대로 돌아가 지리적·역사적문화적 제자리를 찾는 맥락화의 과정은
유물의 가치를 되살리고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김경민 / '뜻밖의 세계사', '엘긴 마블스를 둘러싼 문화전쟁') 참조











(조각, 부조, 달의 여신 셀레나의 말 머리..
이 많은 조각들은 파르테논 신전에서 떼어 왔다는 유적들
참 많이도 가져다 놓았다. 그러니 정작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
가면 남은게 없고 황량한 골조만 초라하게 서 있지..)


이렇듯 반환의 근거가 훨씬 더 설득력 있지만
반환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문화재 반환 문제를 민족주의적인 감정과
단순히 빼앗긴 것은 돌려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로 보고 있지만,
국가간 갈등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이 문제는 사실 많은 현실적인 논의들을 포함하고 있다.
1970년 유네스코는 "문화재 불법 반출입 및 소유권 양도 금지에 관한 협약"이라는
국제법상의 협약을 발표했다. 하지만 국제법은 국가 간의 합의가 필요하고, 비준국들
사이의 문제이기 때문에 이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국가에게 강제할 수 없는 데다가,
국제법 자체가 강제력이 약해서 반환을 강제하기 힘든데다 결정적으로
1970년 유네스코 협약은 소급되지 않기 때문에
1970년 이전의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큰 약점이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법의 문제는 문화재 반환 문제에 있어 2차적인 것.
중요한 것은 반환하고자 하는 의지와 요청국의 문화에 대한 존중이다.
하지만 영국을 비롯한 많은 과거 열강들은 제국의 전리품인 식민지의 문화재들을
제국주의적 논리로 돌려주지 않고 있다. 여러 현실적이고 법적인 이유를 내세우지만,
그 근저에는 제국의 흔적인 인류의 유산을 돌려주지 않으려는 욕심과 문화재가 가진
상징적인 문화 권력을 내어주고 싶지 않은 권력욕이 흐르고 있다.
마치 19세기에 서유럽 열강들이앞다투어 아테네에 고고학 연구소를 세워
위대한 고대 문명의 후계자가 되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문화가 힘이다'라고
하는 것은 이 문화재 반환 문제를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영국과 그리스가 서로 갖고자 하는 것은 대리석 조각이 아닌
그것이 가진 역사와 문화의 힘인 것이다.







(네레이드 제전, 통째로 옮겨다 놓았다)

산토스에서 출토된 그리스 바다의 여신 네레이드 제전.
기원전 390년경 지금 터키 남서부인 키산토스의 리키아 군주였던
아르비나스 왕을 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이오니아 양식의 최초의 신전 묘.
1840년, 영국 여행가 찰스 펠로스가 발굴해 영국 박물관으로 옮겨 왔다고..
네레이드 신전은 그리스풍의 조형물로 기원전 4백년 경 페르시아
지배 시절 리시아에서 만들어진 신전형식의 무덤으로 기둥 사이의
여신들의 자태가 무척 황홀하다.











(네레이드 제전의 부조와 세 여신)

그리스 신화에서, 네레이드는 님프 도리스(Doris)와
네레우스(Nereus)의 딸인 바다의 님프. 그들의 수는 50명(때때로100명).
가끔씩 물위에서 장난치는 모습이 발견되는 네레이드('젖은 사람'이라는 뜻)는
그들의 아버지의 수중 궁전에서 산다. 이 처녀들의 머리카락은 금이며,
각각 아버지의 궁전에 금으로 된 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실을 뽑고, 옷감을 짜며 때때로 돌고래를 타고 다닌다.
세 명의 조각상은 바다의 신 Nereus의 세 딸들이다.







(람세스 2세의 흉상)

기원전 1270년경에 제작된 이집트 제 19왕조의 주인공이었던
람세스 2세의 석상. 이집트관에 있는 가장 큰 석상으로 테베에 있는
람세스 2세 신전에서 출토하여 1817년 이곳으로 반출해 왔다.
람세스란 이름은 라에 의해 태어났다는 의미를 가진 그리스어
'라 메스 시스'의 음. 15살부터 아버지를 따라 전쟁에 참여하며
BC 1279년 6월, 25살 나이에 19왕조 3대 파라오로 즉위해
67년을 집권하며 태평성대를 만든 왕이다.

석상은 정면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집트 조각상의
정면법 원칙을 깨고 약간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이유가
람세스 2세는 자신을 신으로 생각했기 때문. 람세스 2세의 석상은
하나의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지만 두가지 색이 나타난다.
얼굴 부분은 붉은색, 아래는 검은색입으로 그 이유는 바로
후광효과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오른쪽 가슴의 구멍은
영국으로 운반하기 위해 뚫은 것이라고 한다.









(이집트관의 석상들..)

위는 또 다른 람세스 2세의 석상.
아래 석상들의 코가 파손된 것은 로마인들이 이집트를
침략했을 때 왕의 상징을 부수고 조각에 담겨진 영혼은 코를 통해
부활한다고 해서 부활하지 못하게 파손을 했다고 한다.





(상형문자가 새겨진 기둥.. 그리고 진열된 석관, 석상)





(석관(sarcophagus)) 

표면에는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빼곡한 돌확,
파라오들의 미라를 담았던 석관이라고 한다. 





(돌로 만든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검은 배)







(이집트 관 가장 중앙에 있는 로제타석(Rosetta Stone)) )

영국박물관에서 유물중의 유물인 로제타 스톤.
모조품(위)은 이집트 박물관에 있고 진품(아래)은 영국박물관에..
로제타스톤은 세계 최초로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읽고 해석하는데
기원이 된 비석으로 높이 1.2m, 너비 75cm, 두께 28cm로 앞면은 3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상단 14행은 이집트의 상형문자인 신성문자(히에로글리프), 중단은 32행의 고대 이집트의
일상 언어이자 신성 문자의 필기체인 민중 문자(데모틱), 하단의 54행은 고대 그리스
알파벳으로 쓰여있다. 로제타스톤에 새겨진 내용은 기원전 196년, 푸톨레마이오스 5세의
즉위식 기념일에 발표된 그의 독실한 신앙과 덕행을 칭송한 사제들의 선언문이다.
푸톨레마이우스는 알렉산더가 이집트를 점령한 이후 세워진 왕조의
왕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어를 사용해 비석에 조각되었던 것이다.

1798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당시 인도를 식민지로 둔 영국과 대적하기 위해 고고학자, 화가,
역사가, 과학자 등으로 구성된 150여명의 탐사팀을 대동하고 이집트를 침략.
1799년 이집트 북북의 항구도시인 로제타에서 벽을 허무는 작업을 하던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대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1801년 프랑스가 영국군에 패하면서
1802년 영국으로 넘긴 이래 영국박물관의 대표 전시물이 되었다.

그러나 비석의 해석은 1808년 비석의 사본을 입수한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에 의해 풀리게 되는데 샹폴리옹은
17살에 그로노블 대학 고대 역사학 교수가 되면서 13개 국어를 하던 천재.
샹폴리옹은 1810년 로제타석에 관한 첫 논문을 발표하고 14년 동안 글자의 의미를 찾다가
1822년, 9월 14일 정오, 로제타 스톤 마지막 문단 글자. 그리스 단어와 상형문자의 형상을
일일이 대조하다가 54행의 마지막 2줄에 상형문자와 민용문자가 모두 같은 의미라고
쓰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486개의 그리스어 단어가 1,419개의 상형문자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게되면서 하나의 연결고리를 찾으면서 실마리가 풀어지게 된다.
바로 왕의 이름, 푸톨레마이우스. 그래서 상형문자의 중앙과 왼쪽 끝부분에 새겨진
타원형에 테두리, 카르투시를 발견. 당시 필레섬에서 발견된 오벨리스크의 새겨진
 그리스어 명문에서 클레오파트라 카르투시를 발견하면서 두 단어에 나오는
공통 발음기호 P, O, L을 추리해 일주일만에 신성문자의 98%를 해석해 내었다.
그렇게 25명의 파라오 이름과 상형문자는 한글이나 알파벳처럼
소리 문자이며 그림 모양 하나당 알파벳 하나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미라실에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는 벽화)





(사자의 서(Book of the Dead))

'사자의 서'는 고대 이집트에서 죽은 사람의 관 속에
미라와 함께 넣어두는 문서로, 사후세계의 안내서로 쓰였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은 후에도 또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라는 내세관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내는 것이 '오시리스'의 신화다.
'사자의 서'가 보여 주는 또 다른 특징은 내세의 구원 여부를 생전의
도덕적 행위 여부로 판단했다는 점이다.(네이버 백과 참조)

그림에는 죽은 자를 심판하는 재판관 이시리스.
검사인 호루스 신, 서기관 토트 신, 안내자이자 저울을 다는
아누비스 신, 벌을 주는 아뮤트 신이 그려져 있다.

















(미이라 관)

미라를 만드는 방법을 그려놓은 파피루스, 미라를 만들 때
몸에서 꺼낸 4개의 장기 간, 장, 위, 폐를 담아 목관과 함께 석관에 담던
카노푸스 단지, 죽음 세계에 대한 안내서였던 파피루스로 만든 일종의
가이드북 사자의 서, 다양한 목관과 황금 마스크, 실제 미라까지..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은 부활이라는 자연적인 재생, 즉 순환의 한 부분으로 보고
부활하기 위해 몸과 영혼이 다시 합쳐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체의
보존은 중요했고 그래서 미라를 만들었다. 부활을 꿈꾸며 미라가 된 육체들..
그들의 믿음대로 부활도 못하고 자연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곳 이역만리
영국박물관에 누워 온 세상 사람들의 눈요기가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한편으로 연민의 정이 느껴진다.





(Limestone false door of Ptahshepses)

'Ptahshepses의 죽음의 문'이라고 하는 붉은 돌문은
4500년전,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형상화하여 만든 가짜 돌문.
당시 이집트 인들은 죽음의 문의 중앙부 움푹 들어간 문이 열리면서
혼이 빠져 나오고 다시 들어간다고 믿었다고 한다.











(2000년도에 설치되었다는 Korea관)

전통한옥 한영당이 옛 방식 그대로 전시실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빗살무늬토기와 신라 금관, 분청사기, 김홍도의 풍속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다행히 우리나라 관은 뺏어오거나 약탈한 유물이 아닌
기증과 국립 중앙 박물관 및 경주 박물관과의 순환 전시로 유물이
전시된다고 하는데 빈약하여 한국을 알리는데는 미흡해 보였다.
그런데 어찌 한국관에 한글이 한 자도 없지..





(The towering Haida totem pole at the British Museum)





(로마 3대 황제 칼리쿨라의 왕자시절 기마상인듯..)

Prince on horseback, possibly Caligula, Rome, 1 - 50 AD
http://www.britishmuseum.org/explore/highlights/highlight_image.aspx?image=ps351288.jpg&retpage=18201





(영국박물관을 나서는 마음.. 착잡하다)

짧은 시간 관람하였지만 과연 영국박물관은 놀라웠다.
우선 규모가 크고 소장품이 많다는데 놀랐고, 다음은 그 전시된 유물들이
대부분 제국주의 시대 약탈하거나 훔쳐온 문화유산들이라는데 더 크게 놀랐다.
메소포타미아 사라곤 궁전 부조, '로제타석'을 비롯하여 이집트보다 더 많은 미이라,
파르테논 신전 기둥뿌리를 뽑아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로
파르테논 마블스를 도적질 해 도배해 놓은 영국박물관.. 그 귀중한 문화유산들을 보러
세계의 관광객들이 그리스, 이집트, 이라크가 아닌 영국박물관으로 몰려들고 있다.

그리스와 이집트의 지속적인 반환요청에도
불구하고 반환불가 입장을 고수하는 영국.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에 따라 이후의 반환 문제들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민 지배를 겪은 우리나라 또한 일본이나 프랑스와 같은 과거의 열강들을 상대로
문화재 반환 요구를 하고 있다. 최근 프랑스로부터 '장기 대여'의 형태로 반환받은
외규장각 도서 또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동안 그것 없이도
잘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국가간 긴장 상태를 만들어가면서까지 과거의 유물을
반환받으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유물이 단순히 재화적 가치나 학문적 연구 대상이 아닌,
민족의 정신과 정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시간, 과거의 기억, 그리고 지식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과 생활 방식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그것은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집단적 개체의 기억과 무의식 속에서 일종의
동질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과거의 유물, 즉 문화재는 그러한 국가나
민족적 정체성이 구체화되고 그 정신을 담고 있는 시각적인 상징물로서
집단의 구심체가 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래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지리적·역사적·문화적 제자리를 찾을 때 
그 유물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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