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지었으나..

2014. 7. 17. 22:47여행/여행기



개선문, 나폴레옹이 자신을 위해 지었으나..
(프랑스 전쟁의 역사를 아로새긴 국립묘지)



○ 2014. 5. 10     날씨 : 비
○ 프랑스, 파리, 개선문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의 중앙에 있는 개선문은
오스트랄리찌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이 1806년 승리를 기념하여
건축가 쟝 프랑스와 샤글랭에게 건축을 명령. 30년 만인 1836년 루이 필립왕 시대에
완성되었다. 높이 49.54m에 넓은 폭 44.82m, 좁은 폭 22.21m의 크기를 자랑한다.
4면에 설치된 부조는 주로 수많은 전쟁을 모티브로 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샹젤리제 거리와 마주해 오른쪽에 새겨진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 또는
의용군의 출발이라 부르는 부조다.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의용군의 출정을 나타낸 부조로, 프랑수아 루드의 작품이다.
건설을 명한 나폴레옹은 1821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1840년 유해는 개선문 아래를 지나 파리로 귀환, 앵발리드 지하에 안치되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전사한 무명용사의 시신이 1921년 개선문 아래에 매장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점령에서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이 개선문을 지나 행진했다.
이처럼 개선문은 건립이후 프랑스 역사와 항상 함께 하게된다.
광장에서 뻗어 있는 12개의 거리는 건설 당시에는 5개의 도로가 있었지만
1850년 이후 나폴레옹 3세의 명령을 받은 오스만제국에 의해서 7개가 추가되면서
파리 도시계획의 중심부로서 루브르-콩코드-개선문을 잇는 도로가 되었다.
길 이름들은 샹젤리제와 빅토르 위고를 제외하면,
모두 전쟁터와 장군들의 이름이고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유해도
이 문 밑에서 하룻밤을 지샜다고 한다.





(전방에 개선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파리 개선문은 '에투알(Etoile) 개선문'이라고도 부른다.
'에투알'은 프랑스어로 '별'을 뜻하는 단어.





(여기가 아니고..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가 봐야 하는데..)





(일단, 제일 잘보이는 여기서 한 컷 찍고)

파리의 개선문(Triumphal Arch)은 형태와 멋진 부조물,
그 장중한 규모까지.. 파리의 랜드마크가 되기에 충분했다.
파리는 계획도시로 개선문을 중심으로 큰 도로들이 방사형을 이루고 있다.
어디에서든지 방사형태의 도로를 통해 시내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면
개선문으로 이어진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12방향으로 퍼져 나가는
길들이 마치 '별'이 빛나는 듯한 모습이다.





(지하통로로 개선문이 있는 서클 안쪽으로 간다)

곧바로 지하통로를 통해 개선문으로 돌진(?).
개선문 옥상까지 올라 갈 수 있으려나..





(서클안에 들어가서 보니.. 카메라에 다 잡히지 않는다)

가까이 가니 개선문의 규모에 압도 당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육중하면서도 장대했다.
서클 안에서는 개선문이 파인드에 다 들어가지 않을 정도..
파리 개선문은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모델로 하였다고
하는데 규모가 티투스 개선문의 2배나 된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나폴레옹의 지시로
개선문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전하고,
실각하여 감옥에 갇히는 굴욕을 당하고.. 심지어는 그가 죽었는데도
나폴레옹의 치적을 기념하는 개선문이 계속 지어지고 있었다니..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1892년 의용병들의 출정')

프랑수아 루드의 작품인 일명 '라 마르세예즈'.
전생의 여신 벨로나가 이끄는 알몸의 애국자들이 프랑스의
적들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폴레옹의 승리, 1810')

장-피에르 코르토의 작품인 '나폴레옹의 승리, 1810'은
오스트리아와의 빈 강화조약을 축하하기 위한 것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을 무릎 꿇린 채
승리의 여신으로 부터 월계관을 받고 있는
나폴레옹을 새기고 있다.

유럽대륙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민족주의가 급격히
고양되어 급기야는 건축물에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도의 중앙 광장이나 대로 한가운데에 거대한 개선문이 세워졌다.
민족주의에서 발전한 국가주의의 예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파리의 개선문이다.







(한 바퀴 돌아가면서 부조를 다 담아 봐야겠다)





(측면 아치 위에도 부조가..)

샹젤리제 방향만 빼고 3면을 모두 보수하는듯
작업용 철골 구조물를 설치해 놓았다. 사진찍기에는 여~엉





('저항')

앙투안 에텍스의 작품으로 말을 탄 인물과 자신의 가족을 지키려 하는
벌거벗은 병사, 그리고 그를 보호하고 있는 미래의 영혼을 묘사한 '저항'.





('평화')

앙투안 에텍스의 또 다른 작품으로 로마 신화의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보호를 받는 전사가 농부들에게
둘러싸여 칼을 칼집에 꽂는 장면을 표현한 평화.







(개선문 네 기둥 크기가 정말 어마어마하다) 









(프랑스 국기가 휘날리는 개선문의 내부 모습)

개선문에는 총 10개의 부조가 있는데 모두
나폴레옹의 승리와 공적을 모티브로 만들었다고 한다.
내부 벽면 가득 프랑스 공화정 시대와 나폴레옹 치하에서 벌어졌던
128건의 전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다락은 서른 개의 방패로
장식되어 있으며, 각각의 방패에는 전투의 승리가, 그리고
안쪽 벽에는 이 전투에서 전사한 용사들과 558명의
프랑스 장군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무명용사의 묘, 샹젤리제 방향)

개선문 아래 광장에는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무명용사들이
매장되어 있어 지금도 헌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군 점령에서 파리를 해방시킨 드골 장군이 개선문을 지나 개선행진을
한 곳으로 프랑스 국민들에게 과거의 영광으로부터 자긍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조국을 위해 죽음을 불사한다는 희생정신을 요구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은 프랑스의 진정한 국립묘지이며 프랑스
전쟁의 역사를 아로새긴 기념비적인 건축물이다.

안 쪽면으로는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희생당한 프랑스군
장교들의 이름이 세겨져 있으며 개선문 아래 샹젤리제 방향으로는
일 년 내내 꺼지지 않는 가스불이 타오르고 있다. 지금도 크고 작은
국가행사나 국빈방문의 시작이 이 곳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현충원과 비슷한 기능을 하고 있는듯..









(한 바퀴 돌아 다시 '라 마르세예즈'..)

옥상에 올라 가 보고 싶었지만..
이미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어 버렸다.





(증명사진 한 장 남기고..)





(샹젤리제 방향에서 본 개선문)

지금 개선문은 보수 공사중.. 사진이 깨끗하지 못하다.





(파리 개선문의 모델이 된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Arch of Titus)')

에투알(Etoile)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로마 티투스 황제의
개선문을 본따 만들었다고 한다. 로마제국의 개선문은 제국이 멸망된 이후
대부분은 폐허가 되었고, 오랫동안 권력가 저택의 망루 정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 이것은 새롭게 조명된다. 세계 각국에서
로마의 개선문을 흉내낸 개선문이 나타났다.
이것은 근대 민족주의의 출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정도는 찍어 줘야.. 깨끗한 사진 한 장을 빌려서..)

에펠탑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건축물이 된 개선문.
1806년에 건립되었으니, 1889년 세워진 에펠탑보다 83세가 많은 형님격.
개선문을 말할 때 빼놓을 없는 인물 프랑스 제1통령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1804년 스스로를 '나폴레옹 1세'라 칭하며 노트르담 성당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 공화정이었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재위와 함께
다시 왕정(통령 정부)으로 돌아갔다."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고 외쳤던
나폴레옹이었지만 재위 14년 만인 1815년 워털루전쟁에서 패하며 실각한다.
그리고 그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고 그기서 생을 마감했다.
개선문은 짧은 기간 동안 천하를 다 가졌다가 다 잃었던
나폴레옹에 의해 지어졌으나, 자신은 죽어서 지나간
나폴레옹 자신의 군대 승리를 기념하는 상징적 건축물.

파리 개선문은 많은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의 대부분 나라에선
민족주의의 열풍이 불었고 집단에 의한 개인의 희생이 요구되었다.
거기에서 민족적 긍지를 심어주는 한편 전체주의의 확산을 위해
이런 류의 개선문이 많은 나라에서 세워졌다. 프랑스 민족주의의
산물인 파리 개선문은 하나의 롤 모델이 되었다.

개선문은 지형적으로도 몽마르뜨 언덕을 제외하면
파리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은 곳에 속하는 곳. 284계단을 올라
개선문 옥상에 이르면 방사형으로 뻗어있는 거리와 파리 시가지가
한 눈에 조망된다는데 그런 조망의 즐거움도 못누리고..
사진 몇 장을 빌려와 마음을 달랜다.
옥상 입장료 성인 8유로, 학생 5유로.









(개선문 옥상에서 파리 시내를 조망한 모습)

윗 사진은 샹젤리제 반대편으로 신개선문이 보이고,
중간 사진은 에텔탑도 보이고 왼쪽으로는 엥발리드호텔 돔도 보인다.
아래 사진은 17세기 귀족들이 마차 산책로로 생겼을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파리의 중심이 되어온 샹젤리제 거리.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과 연결된 도로들.. )

샹젤리제 거리 인도에는 가로수가 탐스럽다.
샤를 드골 에투알 광장에 서 있는 개선문에서 시작하여
콩코드 광장에 이르는 넓고 탁 트인 큰 길로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을 전후해서 이 거리는 파리 시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초만원을 이룬다고 한다. 계획도시답게 개선문을 중심으로
12방향으로 펼쳐진 도로도 멋있지만 도로변 인도는 도심답지않게
산책하기에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파리는 길도 예술이다.
샹젤리제를 통해 이제 루브르 박물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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