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박물관, 세계3대 박물관, 파리의 랜드마크

2014. 7. 23. 22:48여행/여행기



루브르박물관 / 파리의 랜드마크
(38만 점의 소장품, 그 중 3만 5천 점을 전시하고 있는..)



○ 2014. 5. 10(토)      날씨 : 비
○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궁전을 미술관 건물로 사용하고 있으며,
전시품이 3만 5천 점이나 되고 2010년 기준 한 해동안 850만명이 관람한
세계 최대 규모. 원래 루브르궁에는 역대 프랑스 국왕들, 특히 프랑수아 1세,
루이 13세, 태양 왕으로 불리던 루이 14세가 구입한 4,000여 점에 달하는 그림과
유물이 밑바탕이 되어, 현재 38만 점이라는 방대한 양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다.
예전에는 왕족과 힘 있는 일부 권력자만 궁전에 드나들 수 있었는데
미술관으로 변신한 것은 프랑스 혁명 후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것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미술관으로 정식 발족하고 그 뒤로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되어 오늘날의 대미술관이 이루어졌다.

개관 이래 프랑스 미술의 중심적 구실을 하면서 전세계의
미술가나 미술 연구가 및 애호가들이 수없이 찾아들어 파리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가 되어 있다. 특히 젊은 화가나 조각가에게 거장들의 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 소장품은 13세기부터 1848년까지의
작품들로 약 6,000점 이상이며 소장품의 전시를 총괄하는 12명에 이르는 큐레이터에 의해
관리된다. 이중 약 2/3는 프랑스 작가들의 작품이고 약 1,200점 이상이 북유럽 작품이다.
이탈리아 회화는 대부분 프랑수아 1세와 루이 14세의 유품으로 남겨진 소장품들로 구성되었고
몇몇은 나폴레옹시대의 전리품으로 들여왔다가 그대로 남은 것들이며 몇몇은 사들인 것들이다.
소장품의 수집은 프랑수아 시대에 시작되었는데 그는 라파엘이나 미켈란젤로와 같은
이탈리아의 거장들로부터 작품을 들여왔으며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그의 궁정으로
데려오기도 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왕실의 수집품은 루브르의 핵심을 이루었다.
수집된 미술품은 고대에서 19C까지의 오리엔트 및 유럽 미술의 전 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1986년 오르세(d'Orsay) 기차역이 오르세 미술관(Musee d'Orsay)으로 개장되자
루브르의 소장품을 1848년 혁명이전과 이후의 작품으로 나누어 1848년 이후에
완성된 작품들은 새로운 미술관으로 옮겼다.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중 많은 유물들은 나폴레옹 1세 시기
여러 나라를 침략하여 야만적인 방법으로 엄청나게 많은 유물을 약탈하여
파리로 가져온 떳떳하지 못한 유물들이다. 영국박물관과 마찬가지로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소장품 중 부당한 방법으로 수집해 온
유물들은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주어야 할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의 직원은 약 2,000명이며 총 책임자는 프랑스의
문화통신부 장관. 프랑스 전국의 공사립 미술관 운영을 총괄하는
프랑스 미술관 행정의 총본산이기도 하다..





(루브르 박물관 입구)







(루브르 박물관 앞 광장쪽 모습과 이정표)





(An 2000 la meridienne vert squared circle)















(루브르 박물관 관람 안내도)

전시관은 반하지층부터 3층까지 배치되어 있다.
지역과 시대에 따라 세밀하게 구분되어 있는데,
반지하층(Entresol)에는 고대 오리엔트·이슬람 미술작품과 이탈리아
스페인 북유럽 조각품이 전시돼 있다. 프랑스 조각품은 리슐리외(Richelieu)관의
반지하층과 1층에 전시돼 있다. 1층에서는밀로의 비너스와 사랑의 신의 키스로
소생된 프시케를 만날 수 있다.유리로 이뤄진 천장에서 들어오는 자연광으로
더욱 입체감 있는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다. 2층에서는 모나리자를 만날 수 있으며
가나의 결혼식, 나폴레옹 1세 대관식 등 회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3층(2 eme etage)은 프랑스 회화를 시대별로 전시해 놓았다.
2층과 함께 관람객에게 인기가 있는 곳으로, 네덜란드, 플랑드르,
독일의 회화도 전시되어 있다. 렘브란트, 루벤스,
반 다이크 등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반지하층까지 내려가서 1층으로 올라왔다)





(SORTIE / 출구)

복잡한 루브르 박물만.. SORTIE만 따라가면 가장 빠른 출구





(곳곳에는 도난(소매치기) 예방을 위한 권고문이..)





(조각품(Sculptures) 홀)

밀로의 비너스상을 보러 가는 길

1시간 20분 동안 뭘 얼마나 볼 수 있겠냐 싶다.
그래도 루브르 박물관에 왔으니 밀로의 아프로디테(비너스)상과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보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잠자고 있는 헤르마프로디데(Sleeping Hemaphrodite))

헤르메스와 아프로디테의 사랑으로 태어났다는
이 조각상은 상반신은 여성, 하반신은 남성의 몸을 하고 있는
양성구유. 이 작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다.









(Salle des Caryatides - Room 17)

Department of Greek, Etruscan, and Roman Antiquities







(밀로의 비너스라고 불리는 아프로디테)

밀로의 비너스상(Aphrodite dite Vénus de Milo)은
2.04m 높이의 대리석 조각으로, BC 15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
1820년 에게 해의 밀로스 섬에서 파손된 채 발견되어,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이 조각상의 전체적인 구성은 4세기
코린트식이며, 기품 있는 여성미의 전형으로 평가. 그 자태가 고전미의 걸작으로,
현존하는 비너스 상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세련되게 주름잡혀 늘어진 옷자락은
 매우 우아하게 보인다. 이 비너스 상은 헬레니즘 조각 전통의
고유한 특징들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잘려 나간 비너스 상의 두 팔을 복원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하였으나, 어떤 모양의 팔을 가져다가 붙여봐도
비너스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선의 율동을 살리지 못해
결국은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 밀로의 '비너스'상은
다빈치의 '모나리자', '사모트라스의 니케'와 함께
루브르의 3대 대표작으로 꼽힌다.





(?? 왠 부조가..)





(세계의 명화들이 전시되어 있는 회랑)





(75호실, 신고전주의 →)





(Portrait of the Marquise d'Orvilliers)

오르비유 후작부인의 초상, 1790년, 131cm x 91cm
프랑스의 화가 자크 다비드(Jacques Louis David)의 작품





(Madame Recamier (1800), van David,)

18세기 프랑스 사교계는 남성 중심이었는데 뛰어난 미모와
감탄할 만한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 나타났으니 곧 '줄리엣 레카미에'이다.
열 다섯 젊은 나이에 파리의 한 은행가에게 시집을 가 신분이 수직상승,
부르주아 계급의 상징적인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사저에는 당시 유명인들의
출입이 잦았고, 그 당시 유명한 화가들도 그 곳에서 모임을 가지곤 했다.
화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레카미에 부인은 화가들에게 초상화를
부탁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레카미에 부인의 초상화'라고 한다.







(Jacques-Louis David의 초상화, 자화상)

자크 루이 다비드의 작품이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그의 명성은 19세기 초 프랑스 미술의 발전과 함께 널리 퍼져 나갔다.
그의 작품은 기존 프랑스의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진보와 함께 절정에 달했으며, 미술의 방향에 명확한 변화를
주도했으나, 그의 작품은 그가 사망한 후에 인기를 잃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받았다.
1775년에 로마로 여행을 떠나 5년간 머물며 고전주의적인 작품들과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구이도 레니, 안니발레 카라치, 니콜라스 푸생의
작품들을 연구했다. 로마에서 보냈던 이 기간은 다비드의 회화 양식의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 그는 회화에서 단순한 형태와 어두운 색조,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우아한 결합을 창조해내며, 고전주의와 옛 거장들의 전례를 완벽하게 결합했다.
1780년에 파리로 돌아와 그의 첫 전성기 작품인 '자비를 기원하는 벨리사리우스'(1781),
다비드는 호라티우스가의 삼형제가 아버지 앞에서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엄숙한 순간을 묘사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1784)를 제작했다.
균형 잡힌 구성과 지적인 주제의 이 작품은 신고전주의 원리의 전형이었다.
그 밖에 다비드가 1780년대에 그린 초상화들과 신화적인 주제의 그림들은 역사화에
필적할 만큼 뛰어난 작품들이었지만, 역사화보다는 덜 유명했다. 이 작품들은
선명한 윤곽선과 형태를 유지하면서, 더 가벼워진 붓질과 한층 밝아진 색조,
그리고 더 확실해진 감정 표현 등 접근법에 있어서 변화를 보였다.

강경한 혁명당원이자 공화주의자였던 다비드는
1790년대에 점차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 중 한 명인 로베스피에르에게 협력했다. 1794년에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하자, 다비드도 체포되어 잠시 투옥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그는
복잡한 인물 구성이 특징적인 '사비니 여인들'(1799)을 그렸다.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지지했고, 정치 선전물인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1801)을 그렸다. 영웅적이고 감동적인
이 초상화는 고전주의적인 섬세한 선적 묘사를 보여준다.
1815년에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자 그는 브뤼셀로 망명했다.
말년에 다비드의 작품은 화려하고 선명한 색채의 사용이 증가했고,
신화적인 주제와 초상화로 회귀했다.















(나폴레옹1세, 황제의 대관식 / 다비드)

The Coronation of the Emperor Napoleon I
and the Crowning of the Empress Joséphine in Notre-Dame Cathedral
on December 2, 1804

다비드가 나폴레옹을 존경하게 되자 그를 찬미하는
대작을 몇 점 남겼는데 그중 이 작품은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작품속의 내용은 스스로 대관 후
황후가 되는 조세핀에게 황후관을 씌워주는 광경으로 교황 비오7세가
못마땅하게 지켜보며 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을 만난 이후 열열한 팬이된 다비드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는 많은 밑그림이 필요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이러한 구성으로 그리려 했던 그림이 아니나 나폴레옹의 권력이
타인에 의해 양위되는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구성을 하였다 한다. 그림 속에 웅장함과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데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대작인데도 불구하고 정말 대단한 디테일이다.





(33)











(그랑드 오달리스크(La Grande Odalisque), 1819 / Dominique Ingres)

오달리스크는 터키어 오달릭(odalik)에서 유래한 말로,
다비드의 뒤를 이어 신고전주의 리더가 된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Auguste-Dominique Ingres)의 작품으로 여성미를 강조하려고
허리를 길게 묘사한 것이 특징인 작품.
캔버스에 유채로, 크기는 91 x 162cm

'그랑드 오달리스크'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를 이어
신고전주의의 리더가 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1814년 작품이다.
오달리스크는 터키어 오달릭(odalik)에서 유래한 말로, 터키 황제의 시중을 드는
이스람 술탄의 궁녀. 오달리스크는 당시 서구 사회에서 널리 유행하던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을 주제로 한 작품. 19세기 서양미술에 자주 등장했다. 이 작품은
1814년 나폴레옹의 여동생 캐롤린 뮈라(Caroline Murat)의 의뢰를 받아 제작되었는데
다비드의 '레카미에 부인(Madame Recamier)'(1800)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왼쪽 팔로 상체의 무게를 지탱하면서 비스듬하게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오달리스크의 모습은
레카미에 부인의 포즈와 매우 닮아있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The oath of Horatii 1784))

신고전주의 회화를 알리는 Horatii는
로마의 전설을 바탕으로 그렸다 BC 7C세기 로마건국 초기
로마와 알바롱가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이 계속되었다 두 가족은 결혼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이 작품은 훗날 혁명파의 일원이었던 다비드가 처형에 찬성한
루이16세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작품으로서 "미술은 대중을 교육시키는데
공헌해야 한다"는 다비드의 신념이 들어간 작품이다.

패권을 다투던 도시국가 로마와 알바롱가는 접전 끝에
전면전 대신 세 사람의 대표 전사를 뽑아 결투하고 그 결과에
승복하기로 한다. 로마의 대표로 호라티우스 일가의 삼형제가 선출되어
알바롱가의 대표로 뽑힌 쿠리 아티우스 가의 세아들과 대결하게 되었다.
결투초반 알바롱가 쪽이 우세하였으나 마지막까지 남은 호라티우스 삼형제 중
한사람이 이들을 모두 베어 버렸다. 그런데 호라티우스 가의 여동생
카밀라가 쿠리아티우스 가의 아들과 약혼한 사이였다.

로마식 아치가 있는 배경을 뒤로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아버지에게 맹세하는 삼형제의 모습과는 달리
우편의 세 여인은 번민하고 있다. 두 아이를 안고 있는 큰 며느리와
가운데의 둘째 며느리, 그리고 좌절에 빠진 누이 카멜라의 모습..
쿠리아티우스가의 삼형제를 죽이고 개선한 오빠를 향해 누이는 조국
로마를 저주하였고 이에 격분한 오빠는 카밀라 마저 죽이게 되었다.
엄격했던 당시의 로마법은 조국을 구한 용사를 친족살인죄를
적용해 국외로 추방되었다는 비극적 가족사를 담고 있다.




(명화를 이렇게 무더기로 본다.)

한 작품 한 작품 찬찬히 뜯어 보아야 하는데
벽면에 가득한 만화를 보는 것 같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모나리자(Mona Lisa) 또는 라 조콘다(La Gioconda La Joconde) / 레오나르도 다빈치)

루브르박물관 대표 소장품답게 모나리자 앞에는
인의 장벽이 두텁다. 키가 크니 이럴 때는 좋다.
다른 팀 설명까지 듣고 가까이 가지않고 사람들 머리 위로
한 컷 담았다. 모나리자는 다른 이름 "라 조콘'.
우리 말로 "조콘도의 부인" 이라 하면 되겠다. 희미하게 미소짓고 있는
여인을 그린 초상화로 스푸마토(sfumato) 기법을 사용하여 엷은 안개가
덮인 듯한 효과를 주고있다. 코와 눈썹의 길이와 턱과 코의 길이의 비율.
인증과 입술의 길이와 입술과 턱의 길이의 비율 얼굴의 가로 세로의 비율 등
황금비율이 많이 들어가 균형잡힌 느낌을 준다. 윤곽선을 뚜렷이 그리지 않고
빛과 그늘로 흐릿하게 선을 그리는 기법에 의하여 모나리자는 천의 얼굴을 가진
신비의 여인이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502년에 모나리자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조르지오 바사리 의 말에 의하면 미완성작으로 남겨둔지
4년이 지난 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







(회랑)

定答, 우리는 正答도 아닌
정해진 답 定答을 강요받고 살아 온 것 같다.
프랑스는 초중고에 미술과 음악 교과서가 없다고 한다.
음악과 미술수업은 박물관, 음악회를 관람하고
체육은 사회체육시설을 이용한다고 한다.
예술과 문학작품에 대하여 정답을 가르치는
코메디를 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아직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지?















(The Wedding Feast at Cana, 1563 / 칼리아리 파울로 베로네세)

벽면을 가득 채운 넓은 회랑,
어마어마하게 큰 그림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높이 6m를 훌적 넘고 넓이는 약10m에 이르는 이 대형 작품은
색채 감각이 출중한 베네치아 출신 화가의 그림답게
산뜻하고 생생한 색의 향연 그 자체이다.

예수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기적을 행하여 술통을 다시 가득채운 일을 그린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 축하연은 널찍한 식탁 중앙에 예수님과
그 어머니 마리아가 있고 그들 주변에는 초대받은 사람들과 시중드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다. 화가는 이 작품에서 성서의 본래 의미도
담았지만 화려한 잔칫상과 베네치아의 웅장한 건축물, 떠들썩한
축제분위기를 그렸다. 대단한 디테일로 묘사하고 있다.





(나폴레옹)







(메두사 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 테오도르 제리코)

낭만주의 화가 데오토르 제리코는
33세에 낙마사고로 사망한 바람에 세 작품만 남겼다고 한다.
이 그림의 주제는 실화로, 19세기 세네갈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떠다던 메두사 호가 좌초한 사건을 그린 그림으로, 당시 프랑스에서
항해 경험도 없는 위그디호와 라쇼말 이라는 두 사람이 정부에 돈을 주고
산 함장자격으로 항해하다 배가 좌초하는 바람에 승선인원 400명 중
선장과 선원들, 그리고 일부 사람들만 구명보트로 대피하고 나머지
149명은 뗏목을 탄다. 선장과 선원들이 탄 구명보트들이 뗏목을 이끌기로
했지만, 구명보트에 탄 사람들이 뗏목과 연결된 줄을 끊고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뗏목에 타고있던 149명은 13일동안 굶주림과 질병 광기 폭동,
기아와 탈수같은 생지옥을 속에서 15명만 살아 남은 모습을 그린 작품.
실제 사람의 크기로 그림에 묘사했으며, 작가는 사실적 묘사를 위해
실제 생존자를 만나 당시의 내용을 듣기도 하고 실제로 죽어가는 사람과
사체의 색감을 확인하기 위해 연구했다고 한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흑인이 주인공인 그림은 이 그림이 유일할듯..

15일 동안 표류하다 구조된 생존자 15명은
구조되자 마자 5명이 즉사하고 나머지 10여명도 광기어린
표류과정에서 모두 미처버렸다는 끔직한 사고를 소재로 한..
자기들만 살겠다고 배에서 먼저 내려 보트타고 도망친
세월호가 연상되는 작품.





(The 28th July:Liberty Leading the People, 1830 /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유지니 들라클르와
(Eugene Delacroix, 1798-1863). 부제는 '1830년 7월 28일'이며
, 왕정복고에 반대하여 봉기한 시민들이 3일간의 시가전 끝에 결국
부르봉왕가를 무너뜨리고 루이필리프를 국왕으로 맞이한 7월혁명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프랑스에서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공화국을 염원하였던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루이 필립 왕에 의해
의회 군주제를 낳게 하였는데, 이 그림은 1830년 7월 혁명의 생생한
장면을 화가의 상상력으로 그렸다. 가슴을 드러낸 채 민중을 이끄는
짧은 머리의 여인은 공화국의 상징으로 표현. 억압에 대한
민중들의 자유에의 의지를 열정적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사르다나팔로스의 죽음(Mort de Sardanapale) / 드라크루아)

패전한 왕은 궁녀들을 모두 죽여야 했다.
낭만주의 위대한 에술가 들라크루아가 발표한 작품으로, 기원전 9세기
앗시리아왕 사르다나 팔로스는 적군의 침공으로 몰락이 피할수 없음을 알자
부하들로 하여금 애마와 애첩을 죽이게 하고, 자신은 독배를 마시며
자신이 사랑한 모든 것들과 함께 화염속으로 사라졌다는 전설을 소재로 한 작품.
바이런이 1821년 이 전설을 희곡으로 써서 발표한 것을
들라크르와가 읽고 작품화 하기로 결심한 것이라 한다.





(샤를 7세 대관식의 잔 다르크 / 도미니크 앵그르)

잔 다르크는(Jeanne d'Arc 1412.1.6~1431.5.30.) 또는
성녀 요한나 아르크(Sancta Joanna de Arc)는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자 로마카토릭 교회의 성인. 오클레앙의 성처녀라고도 불린다.
왕위 계승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켜 낸 영웅으로 샤롤7세의 대관식 광경을 그린 것이지만
대관식을 주제로 삼지 않고 잔다르크의 영웅적인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다. 이는 샤롤7세가 왕위에 오르는 데에 그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열일곱 나이에 그녀는 군사 임무에 관여한다.
그녀는 적군에 포로로 떨어질 때까지 그녀의 용기와 전투술은 전장에서
여러번 증명되었다. 배신자의 농간으로 영국군에 체포되어 종교 재판에
회부되고 유죄평결을 받고, 고문과 협박 성폭행 등 마녀로 변질시키는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받다가 1431.5.30일 화형에 처해졌다.
그로부터 25년 후 교황 갈리스토 3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재판소는
잔다르크에 대한 심사를 재개하여 그녀에게 내린 혐의 모두를 무혐의이며
따라서 무죄라고 최종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순교자로 선언한다.
잔다르크는 1909년 복자로 시복되었으며 1920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잔다르크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성왕루이.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 등과 함께
프랑스의 공동 수호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851-1854)는
다비드의 뒤를 이은 신고전주의 미술을 이끈 지도자이다.
6세 때 들어간 학교가 프랑스 혁명으로 문을 닫는 바람에 학교 교육은 4년 밖에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평생동안 배움에 대한 열정을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타고난 재능이 어우러져 신고전주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는 특히 초상화에 뛰어 났으며,그의 그림들은 대부분 선과 윤곽이 뚜렷하고
균형이 잘 잡혀있다. 여성 누드를 즐겨 그렸는데 그림을 보면 사람인지 조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매끈하고 완벽하게 그렸다. 앵그르는 역사화에서 니콜라 푸생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전통을 따랐으나 말년의 초상화는 위대한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18년간 로마에서 옛그림을 연구하였으며 특히 라파엘로에 심취.
그후 귀국하여 고전파의 대가로 환영을 받았으며
르누아르 드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1층에서 2층으로 통하는 계단)





(67)







(반항하는 노예와 죽어가는 노예 / 미켈란젤로)

좌 / 반항하는 노예 상(Rebellious Slave)
1513-1516년, 대리석, 215㎝

우 / 죽어가는 노예 상(Dying Slave)
1513-1516년, 대리석, 229㎝
죽어가는 노예 상과 반항하는 노예 상은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위한 것으로 잠자는 듯한 느낌을 주어
잠자는 노예 상이라고도 한다.

작품을 해석하기가 난해하지만
죽어가는 노예에 대해 이렇게 설명을 해 놓았군요.

이 작품은 도대체 죽어가는 노예의 표정이나 몸짓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선정적이다. 곰브리치는 이 작품이 죽음의 지배를 받는
육체의 순간 즉, 삶의 투쟁과 긴장으로부터 해방되는 마지막 순간을 조형한
것이고 피로와 체념의 몸짓속에 지극한 아름다움이 보인다고 극찬했다.
요컨데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결합됐다는 것이다.

위로 말아올린 상의 사이로 젖가슴이 양감을 자랑하며
폭발하듯 긴장한다. 풍부한 가슴아래 매끈하게 빠진 각선미를 보라.
다리를 꼬고 있는 하체는 드러내며 감추는 포즈로 자주 채택되지만 여기서는
하의가 완전히 노출된 상태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상당히 육욕적이다.
한손으로 자신의 젖가슴을, 또 한손으로 머리를 향하는 'S' 포즈탓에
노예의 몸은 가장 선정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 조용훈 저, 에로스와 타나토스 中 -







(77)





(81)







(Psyche revived by Cupid's kiss, 1793년경 / 안토니오 카노바)

사랑의 신 큐피드에게 키스를 받는 프시케.
미의 여신 비너스(헤라, 아프로디테)는 인간 세상의 아름다운
프시케를 질투하여 아들인 큐피드(에로스)를 시켜서 가장 못생긴 남자와
프시케가 사랑에 빠지도록 시킨다. 그런데 프시케를 처음 본 큐피드는
그만 그녀의 아름다움에 놀라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화살에
심장을 찔리고 만다. 그때부터 큐피드는 프시케와 첫사랑의
키스를 나누게 되고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원래 비너스가 프시케를 질투하고 미워했지만
결국 자신의 아들이 사랑에 빠져버리게 되고
결국 신인 남편의 배경으로 신으로 신분이 상승되면서
비너스의 며느리가 되어 버린다. 절묘하다.
신화나 현실이나 운명은 돌고 도는 것.







(93)



조금의 자유시간만 줬더라도 이 두 곳은 가봤을 것..
'함무라비 법전 석비''사모트라케의 니케'
빌려 온 자료로 올리며 아쉬움을 달랜다.





(함무라비 법전 석비(Stèle du Code de lois de Hammurabi)

함무라비는 바빌론의 여섯 번째 왕으로
BC 1792부터 BC 1750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다. 이웃 국가들과의 전투에서
여러 번 승리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바빌론의 영역을 확대하여 그가 죽을 때
쯤에는 바빌론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함무라비 이후 시기에
바빌론 왕국은 히타이트(Hittites, BC 2000년 무렵부터 BC 1190년에 걸쳐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한 인도유럽어족)의 군사적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바빌론
왕국을 지배하게 된 것은 카시트(Kassites, 동북방의 산악지대로부터 메소포타미아로
침입한 인도 ∙ 유럽계 민족)였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를 400년간 지배했고
함무라비 법전을 포함한 바빌론의 문화를 수용했다.

함무라비는 바빌론을 근동 지역의 교육적, 문화적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의 뛰어난 업적 중에 하나는 그의 백성들의 권리와 의무, 잘못을 저질렀을 때의
형벌 등을 체계화하여 법전으로 만든 것이다. 이는 역사 기록 중 최초의 법전이며
돌판(석비)에 새겨져 있다. 이 법전은 전설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예술작품이자
재판에 관한 신과 인간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역사적 문서이기도 하다.
법전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공공장소에 놓여졌다. 함무라비 법전은 이후
이란의 엘람왕국에 의해 약탈당해 엘람왕국의 수도였던 수사로 옮겨졌다.
1901년 발굴되어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함무라비 법전은
282개의 법률 조항이 바빌론의 일상용어인 아카드 말로 쓰여 있었기
때문에 교육 받은 자라면 누구든 석비의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

사모트라케의 니케(La Victoire de Samothrace)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으로, 기원전 220년에서 19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승리를 관장하는 여신인 니케를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길이는 328cm이며, 머리와 양팔이 잘려진 채로 남아있다.
사모트라케의 니케는 기원전 190년 로도스 섬의 주민들이 에게 해에서 일어난
해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모트라키 섬에 세운 조각상으로 추정.
이 조각상은 하늘에서 내려와 뱃머리에 서 있는 날개 달린 니케(승리의 여신)을
표현한 것으로 1863년 프랑스의 영사 겸 고고학자인 샤를 샴푸아소가 발견.
1884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루브르의 상징 유리 피라밋)

루브르 궁전의 중앙 정원인 나폴레옹 광장에 서 있는
유리 '피라미드'는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 밍 페이(Ieoh Ming Pei)가
설계했는데, 1983년에 착공해서 프랑스 혁명 2백주년을 기념한 1989년
완공됐다. 이 피라미드는 높이 21미터, 바닥 길이 35미터로
이집트의 '기자(Chiza)'피라미드가 모델이다.









(정원 분수대)





(정문의 기둥 조각)

10시 25분에 도착하여 11시 42분에 나왔으니 1시간 17분.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루브르 박물관을 1시간 반도 채 안 걸려
관람을 마쳤다.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것도 아니고 하여간 대단하다.
개인 시간을 15분만 줘도 꼭 보고 싶은 곳 한 곳은 더 찾아갔다 올텐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마간산식 관람이었지만 종군기자 취재하듯
사진을 찍어 온 덕분에 하나 하나 꺼내보며 정리할 수 있어 좋다.
다행히 박물관 사이트에서 놓친 부분과 디테일한 부분까지 챙겨 보며
되새김하니 조금은 아쉬움을 달랠 수 있어 좋다.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 최고의 미술관답게 수집된 유물들이
38만 점을 넘는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 해야할
제국주의 산물 아닌가! 세계 3대 박물관이라고 자랑하기에 앞서 정말 문화를
사랑하는 문화선진국 국민들이라면 다른 나라에서 야만적인 방법, 부당한 방법으로
약탈하거나 훔쳐온 유물들은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주는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역사유물들은 단순히 유물로서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이자 역사이고
정체성이 담겨있는 상징이다. 역사적 시간, 과거의 기억, 그리고 지식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과 생활방식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으며, 그것은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집단적 개체의 기억과 무의식 속에서 일종의 동질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과거의 유물, 즉 문화재는 그러한 국가나 민족적 정체성이 구체화되고
그 정신을 담고 있는 시각적인 상징물로서 집단의 구심체가 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래의 있던 자리로 돌아가 지리적·역사적·문화적
제자리를 찾을 때 그 유물의 진정한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다.

약탈해 온 유물을 감상하기 위하여 일년에 850만 명의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루브르 미술관을 찾고 있다.
한 곳에서 정리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것이 한편으로
편리할 수도 있지만, 박물관을 나서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왜 일까!



Robert Schumann
Cello Concerto in A minor, Op. 129




서유럽 여행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