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르담 대성당 / '노트르담의 꼽추' 배경이 되기도 했던..

2014. 7. 26. 12:24여행/여행기


노트르담 대 성당, 노트르담의 꼽추의 배경이기도 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고딕 성당, 노트르담 대성당)



○ 2014. 5. 10(토)    날씨 : 비
○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 성당






과거에는 시테 섬에 다채로운 유적지들이 많았지만
19세기 오스망 남작이 파리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으나
시테 섬을 대표하는 노트르담 대 성당은 센 강을  의연하게 굽어보며 자리를 지킨다.
이 성당은 1159년 36세의 나이로 파리 대교구장이 된 모리스 드 쉴리에 의해 1160년에
착공된 후 185년이 지난 1345년에 완공되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유럽의 고딕양식을
대표하는 건축물로 하늘을 향하여 우뚝 솟은 첨탑, 출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
오래된 책과 유물을 보관해 놓은 보물관 등 노트르담 대성당에는 흥미로운 볼거리가 많다.
특히 서쪽 출입구인 성모 마리아 문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상과동쪽 벽면의 독특한 건축
양식인 플라잉 버트레스(반아치 모양의 기둥으로 건물의 벽면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장미 문양의 스테인드글라스,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본당의 칸막이 등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파리의 발상지인
시테 섬에 있는 파리 대교구 주교좌성당으로, 노트르담이란
'우리의 어머니'란 뜻으로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역사를 통해 종교적, 정치적 대사건의 무대였다.
1302년 필립 4세는 최초의 전국 삼부회를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개최하였고, 그 이후
1430년 영국 왕 헨리 6세의 대관식, 1455년 잔 다르크의 명예 회복을 위한 재판 개최,
1572년 앙리 4세의 결혼식, 1804년 나폴레옹의 대관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1970년 샤를 드골 대통령과 미테랑 대통령 등 유명인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프랑스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프랑스 군대가 전쟁에 나갈 때면 대성당 앞에서 열병식이나
환영행사를 하는 등 국가의 주요 행사는 빠짐없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프랑스 역사를 이어온 현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현재도 파리 대주교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는 성당 내부에는 프랑스 최대의
파이프 오르간이 있으며, 중앙에 장미의 창이라고 불리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보물 및 실내장식이 많은 관광객들에게는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파리의 상징적인 곳이다.





(노트르담 대성당)

1163년부터 시작하여 185여년에 걸친 공사끝에 완성한 성당이라고 한다.
700여 년동안 프랑스의 중요한 역사를 지켜 보았으며,
'노트르담의 꼽추'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던
아름답고 역사적인 건축물이다.





(광장에는.. 비가 오는데도.. )

우산을 들고 늘어 선 줄이 길다. 얼마나 기다려야 될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노트르담 대성당, 정면에서 본 모습)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건축물인
노트르담 주교좌 성당의 정면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중앙의 문이 '최후의 심판 문'이고, 오른쪽에 있는 문이 '성 안나 문',
왼쪽이 성모 마리아 문'이다. 양편 두 개의 문은 1210년에 완성되었다.
중앙에 있는 최후의 심판 문은 예수님의 수난에 이용된 도구들을 잡고 있는
천사들과 무릎을 꿇고 인류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성모 마리아와 성 요한에
둘러싸인 채 슬픈 모습을 하고 하고 있는 그리스도상이 좌정하고 있다.
그 위로는 유대왕 28명의 석상이 도열해 있다.





(우측 문, 입장하는 성 안나 문)

노트르담 대성당 내부 관람은 오른쪽의 성 안나 문으로 입장해서
왼쪽의 성모 마리아 문으로 나오게 된다.





(정면 중앙 문인 최후의 심판 문)

노트르담 대성당 입구의 섬세하고 정교한한 조각품들..
목각도 아닌데 보면 볼 수록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한마디로 경이로움 그 자체!







(중앙문 양쪽에 도열해 있는 인물들은?)





(다행히.. )

플래쉬를 터트리지 않으면 실내 카메라 촬영 가능

성당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기다리는 줄이 길어서
시간이 오래 걸릴줄 알았는데 오래 기다리지 않아 성당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성당 오른쪽 문으로 들어서면 성당의 오른쪽 복도를
따라가다 성당 끝부분에서 왼쪽 문쪽으로 돌아 나온다.
성당 내부 관람은 무료.





(나무로 된 문의 장식, 예술이다.)









(성당 내부 모습, 중앙 제대가 있는 부분)

고딕양식의 성당답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드높은 천장,
엄숙한 분위기, 창 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영롱한 빛,
참배객들의 성스러운 분위기.





(뒷쪽으로 '장미의 창'과 대 오르간이 보인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매주 일요예배 참석자 수는 20~30명 수준.
종교의식의 공동화는 유럽 전역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프랑스의 경우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대 성당은 유명한 도미니코회 신학자 장 바티스트 앙리 라코르데르가
1840년에 연 사순절 설교로 유명하다. 그러나 최근에는 주요한 유명인이나
국가에 고용된 학자들이 설교를 한다. 하지만 청중들의 상당수는
외국인들이며, 이들만으로 관습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대 오르간)

최초의 오르간은 당시 유명한 오르간 설치 전문가였던
프랑수아 앙리 클리코에 의해 1700년대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클리코가 만든 파이프 기구는 오늘날까지 오르간에서 소리를 낸다.
오르간은 19세기에 아리스티드 카베이에콜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다시 만들어지고, 크기도 커졌다고 한다.

노트르담의 오르간 연주자는 카바이에콜이 만든
가장 큰 오르간이 있는 생쉴피스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와 함께
프랑스에서 가장 명성있는 오르간 연주자로 인정받는다고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루이 비에른(Louis Vierne 1870-1937)이라고 한다. 1900년, 500명의 당시의
재능있는 오르간 연주자들이 참석하여 치열한 콩쿠르 끝에 루이 비에른이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비에른은 노트르담에서
열린 그의 마지막 연주회가 거의 끝나갈 때에 그의 평생의 소원대로
1937년 6월 2일 노트르담 대성당의 오르간 앞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매주 일요일 오후 4시 30분부터
파이프 오르간 연주회가 열린다고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인 노트르담 대성당.
성당으로 들어가면 장미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장미의 창'
스테인드 글라스들이 현란한 모습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6,500여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이 성당은 규모가 길이 130m, 높이 35m, 폭 48m나 된다.
또 내부에는 서쪽, 북쪽, 남쪽에 3개의 장미창이 있는데,
북쪽 장미창은 1252년경, 남쪽 장미창은 1258년경에 만들어졌다.
서쪽 장미창(파이프 오르간 윗부분)의 중심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그 주위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에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악,
즉 우상숭배, 분노, 실망, 망은, 불화, 폭동, 비열 등을 나타내고 있다.
제대 좌측의 북쪽 장미창은 정 중앙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를 중심으로
첫 번째 원에는 예언자들, 두 번째 원에는 이스라엘 판관들과
초기 왕들이 있으며 13세기 이래 거의 파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왔다.
새롭게 복원된 남쪽 장미창은 묵시록의 모든 상징,
즉 일곱 개의 봉인이 된 책, 양, 일곱 개의 등잔 등과 함께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모습)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 1세와 그의 아내 조제핀의 대관식이
교황 비오 7세의 사회로 행해졌다. (다비드 작)





(성당 내부의 모습..)











(기도실에서 잠깐 기도드리고..)

성당내부에는 창문이 많았는데
모두 스테인드글라스로 시공되어 있었다.
아름답고 영롱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멋있다.





(십자가의 예수,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





(노트르담 대성당 모형)







(철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는.. 대성당)

노트르담 대 성당도 위기에 처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한다.
1548년 위그노(개신교 신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대성당의
성상들을 우상숭배라고 여겨 대성당의 외관을 파괴하기도 했다.
첫 번째 위기는 루이 15세가 성당 안이 어둡다는 이유로 채색된
스테인드 글라스를 투명한 유리로 바꿔 끼우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중세 때 만들어진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는 상당부분
 없어져 새롭게 복원하였다. 다행히 북쪽과 남쪽의 장미창은 파괴되지 않았다고..
또 루이 15세는 자신의 마차가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출입문을 넓히도록
하여 성당의 모습이 달라지자 시민들은 노트르담 대성당을 외면하기에 이른다.
두 번째 위기가 찾아온 것은 1793년.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혁명 당원들이 왕가의 종교 건축물인 노트르담 대성당을 공격하여
일부를 파괴하여 1795년부터 1802년까지는 폐쇄되었다고..

이후 미사는 열렸지만 파리 시민들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갖는
애정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는데,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꼽추'가 인기를 끌면서 노트르담 대성당은
다시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Emmanuel Suhard 추기경의 명패)





(마치 도시의 골목길을 걷는 기분..)

사람들이 많이 입장을 했는데도 워낙 성당의 규모가 커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하긴, 1층뿐만 아니라 2층, 3층,
옥상까지 올라가 분산되어서 그런 것 같다.





(30)









(성당 내부 육중한 기둥의 모습)

노트르담 대성당을 1638년 루이 13세가
프랑스를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한 이래, 프랑스 내에서는 노트르담이라
명명된 성당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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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성모 마리아 문을 통해 나왔다)

방문한 도시를 빨리 파악하는 위해서는
박물관에 가서 역사를 보고, 다음은 전망대에 올라가서
도시 전체를 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노트르담 대성당에 와서도
시간이 없어 옥상에 올라가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성모 마리아 문설주와 주변 장식)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인
노트르담 대성당의 좌측문 모습. 정말 경이롭기만 하다.
이 조각들이 목각도 아닌 대리석을 조학한 것인데 그 정교함이
보면 볼 수록 놀라움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다시 외관.. 서쪽 중앙 문(최후의 심판 문)의 모습)

서쪽 중앙문 위에는 최후의 심판 조각이 있고,
그 위에는 장미의 창 바깥 부분에 성모 마리아 상이 있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인
노트르담 대성당의 중앙문(최후의 심판문) 모습.
대성당 앞에는 넓은 광장이 있다.







(서쪽 장미의 창을 바깥쪽 조각)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인
노트르담 대성당의 중앙문 위 서쪽 장미창 외부 조각 모습.
천사들의 호위를 받는 성모자상이 조각되어 있다.

서쪽 장미의 창(파이프 오르간 윗부분)의 중심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그 주위로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원에는 거의 모든 종류의 악, 즉 우상숭배, 분노, 실망, 망은,
불화, 폭동, 비열 등을 나타내고 있다.

제대 좌측의 북쪽 장미창은 정 중앙에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를 중심으로 첫 번째 원에는 예언자들,
두 번째 원에는 이스라엘 판관들과 초기 왕들이 있으며
13세기 이래 거의 파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왔다고 한다.





(종지기 '콰지모도'가 있었을 종탑을 상상해 본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노트르담드 파리'
(노트르담의 꼽추)의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와 노트르담 드 성당의 종지기 콰지모도.
흉측한 외모를 가졌지만 가장 아름다운 내면을 가진 꼽추, 추악한 얼굴에 꼽추,
귀머거리,
애꾸눈에 절름발이이지만 이 세상 누구보다맑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인물 콰지모도.
어린 시절 버려진 그를 프롤로주교가 거두고 키웠기에 그에게 본능적으로 복종하지만,
모두가 외면할 때 손을 내민 에스메랄다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던 콰지모도. 에스메랄다에 대한 사랑과 프롤로 주교에 대한 복종사이에서
갈등을 겪던 콰지모도. 교수형 당하는 에스메랄다를 보며 프롤로의 추악한
배신감을 못이겨 결국 프롤로를 계단 밑으로 밀어 버린 콰지모도.
싸늘해진 에스메랄다의 주검을 부둥켜 안고 절규하는 콰지모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드 파리(노트르담의 꼽추)'는
짝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슬프고, 잔혹할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는 작품.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드 파리(Notre-Dame de Paris)가 원작으로
아름다운 집시 에스메랄다와 노트르담 대 성당의 종치기인 곱추
콰지모토의 비극적 사랑의 모습이 아련히 떠 오른다.









(측면 모습, 수많은 가고일)

노트르담 대 성당의 측면 모습.
기기묘묘한 이무기석상과 수많은 가고일이 있는
이 중세고딕식 사원은 여행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1905년에 프랑스에서 제정된 정교분리법에 따라 프랑스 왕국이 세운
다른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노트르담도 정부에 귀속되었으나,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당으로 사용하는 것은 승인되었다. 파리에서 시작하는 고속도로에서 거리를 나타내는
참고점인 프랑스의 도로원표(Point zero)가 노트르담 대성당 앞에 있는 광장에 있다.
19세기 초에 대성당은 황폐한 상태였으며, 도시계획가들은 노트르담의 철거까지
고려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는 이 대성당의 찬미자로
대성당의 전통을 일깨우기 위해 '노트르람드 파리'를 썼는데,
이 소설은 대성당의 운명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호하기 위한 기금을 모으는 운동이 이어졌고,
결국 1845년에 복원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고 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신비로운 전설이나 역사적인 사실에 이끌리지
않더라도, 영롱한 빛으로 아름답게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볼 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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