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 출애굽 성지순례
2014. 3. 17. 02:12ㆍ여행/여행기
출애굽 성지순례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Exodus하여 참자유인으로..)
○ 2014. 2. 9 ~ 19 날씨 : 여행하기 좋은 날씨
○ 이집트, 이스라엘, 요르단
그 2주간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첫번째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것이고,
둘째로는 동경하는 '킬리만자로 등정'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종교를 가지고 신앙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자기가 신앙하는
종교의 발상지나 종교적인 유적이 있는 성지를 답사하거나 순례하는
꿈을 꾸어 봤을 것이다. 사실 성지순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근무시간은 물론이고 24시간 내내 구속하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코스와 내용, 일정과 경비 등을 비교 검토해 보고 또 가이드와
평판도 좋은 여행사를 선정하여 다녀 오기로 했다.
여정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한 경로와
예수님의 행적,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구약성서와 관련된 주요 유적지를
답사하는 것으로, 이집트 카이로 나일강을 출발하여 홍해를 건너고,
수르광야를 거쳐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받았던 시내산에도 올라가 보고,
이집트 타바국경을 통과하여 이스라엘로 들어가 사해와 여리고, 예루살렘,
베들레헴, 나사렛, 갈릴리 등 성경 유적지를 답사하고, 요르단 암만과
세계유산 나바테인의 수도 페트라를 거치는 여정이다.
가자 이집트로.. ☞ 사진 클릭
(카타르 도하공항에서 transit하여 다시 카이로 공항으로..)
이집트, 이스라엘 여행의 적기는 2월~3월초니까
시기도 적절한 것 같고 주요 도시의 날씨와 기후를 2주일 후까지
예보해 주니 여행준비는 크게 문제될게 없었으나 여정중 시내산 오를 때의
옷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내산은 높이가
무려 2285m나 되니 일반적으로 고도에 의한 기온차만 15도 가량나니..
덕분에 생각지도 않던 패딩까지 하나 구입하여 준비했다.
카이로까지 이동시간만 18시간 이상 걸리는 일정이어서
인천공항부터 체력을 비축하려고 편한 쉼터를 찾아 충전하고,
transit한 도하공항에서도 쉼터를 찾아 쉬었지만.. 카이로는 멀었다.
여행은 여행지 못지않게 또 누구와 동행하는가도 중요한데..
이번에 이전에 같은 교회에 다녔던 박장로님 가족과 동행하게 되어
더 의미있는 여행이 될 것같아 기대가 된다.
(아랍인 좌석으로 바꿔 앉아)
아는 말이라고는 "케이프 할락(안녕하세요)"와
"앗쌀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가 깃들기를)" 뿐이었지만..
한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카이로 상공)
조금전 시나이 반도 상공을 지날 때 본 광야와
별로 다를 바없는 모습.. 아프리카의 첫인상(?)이랄까
(드디어 카이로 공항을 빠져 나왔다)
울산에서 출발한 지 28시간 30분,
비행시간 13시간 45분(+ transit 4시간 25분)
이래서 남부권에도 제대로 된 국제공항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 아닌가!
카이로 ☞ 사진 클릭
(969년에 건설된 카이로, 어원은 카히라(승리))
나일강 삼각주의 남단에서 약 25km 남쪽 나일강 우안에 있는
아랍권과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로 1월 평균기온 12.7℃,
8월 평균기온 27.7℃, 연평균강수량 25mm. 카이로라는
이름이 969년부터 불렸으니 도시의 역사가 길다.
고대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는 현재의 카이로 남쪽 교외로
나일강 좌안에 해당하며, 로마·비잔틴 시대에 형성되었다.
바빌론은 지금의 구카이로에 있었고, 아랍인이 이집트를 정복하였을 때
정복자 아므르 이븐 알아스가 바빌론의 동쪽 가까이에 새로운 도시
푸스타트(Fustat)를 건설하고, 9세기에 이집트가 바그다드에 종속되었을
때 나중에 이집트의 지배자가 된 아마드 이븐 툴룬이 푸스타트의
북동쪽 접경 지역에 새로이 카타이(Katai)를 건설한 후로
정치 군사 무역 학술 문화의 중심지로서 번영했다.
이집트는 아랍세계의 수도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크다.
아랍 연맹의 본부가 있으며, 아프리카와 아랍의 망명정당 사무소도
설치되어 있어 망명 정치가의 활동이 활발하다고 한다.
이집트를 본 첫인상은.. 카이로의 무질서한 교통과
준공이 안된 공동주택들이 특이했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건 풍경은
일반적으로 아파트 등 공동주택들인데, 집들이 짓다만 것 같은 미준공상태라
의아하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준공을 하면 세금을 내어야 하는데 세금이
비싸서 준공하고 사는 이들이 없다고 한다. 가끔씩 완공된 집들도 보이길래
저 건물들은 왜 준공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준공된 건물들은 거의가
공공건물 같은 것들이란다. 옛날의 그 찬란했던 역사는 어디가고
2012년 현재 1인당 GDP 6,614달러의 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는지..
참고로 중동과 북아프리카 중 카타르가 82,105달러로 제일 높고,
예멘이 2,448달러로 제일 낮았다(2012, 1인당 GDP/세계은행)
(모세기념교회 내부(위)와 아기예수 피난교회 입구(아래))
카이로에서 제일 먼저 구 시가지에 있는
모세기념교회와 아기예수 피난교회를 찾았다.
모세기념교회터는 6세기경 콥틱교회가 있었던 곳이라는데
모세가 물에서 건짐을 받은 곳이기도 하고 모세가 자기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출발하여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기 전 이곳에서
마지막 기도를 드린 곳이며 예레미야가 느브갓네살 왕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이곳에서 설교를 하였으며 그의 무덤이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훗날 유대인 랍비였던 벤 아즈라가 이집트에 왔을 때 모세가 기도를 올린
이 땅에 예배당을 지을 수 있도록 이 곳을 돌려 달라고 청하여
이곳에 예배당을 짓고 벤 아즈라 회당이라 불렀다. 현판에는
'벤 아즈라'회당으로 되어있는 유대인의 회당.
아기예수피난교회는 4세기 중반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데리고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난하던 중 100여일을 숨어서 지냈던 곳에
세운 교회로 천장을 노아의 방주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건축당시 교회는
303년 시리아에서 로마 황제 막시밀리안의 손에 순교당한 성자이자 군인인
세르지우스(Sergius)와 바쿠스(Bacchus)에게 바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 세르지우스 교회나 아부 세르가 교회로 불리는 아기예수 피난교회는
바실리카양식으로 지어져 외관은 비교적 평범한 편이나
이집트에서 가장 잘 알려진 콥틱교회이다.
이집트 박물관 ☞ 사진 클릭
(값을 가늠할 수 없다는 투탕카멘 마스크 / 이집트 국립박물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를 만나러 국립박물관 가는데 길이 막혀
차가 꼼짝을 않는다. 카이로까지 와서 투탕카멘의 황금 마스크를 보지 못하고
갈 수야 없지 않은가! 4시가 되면 입장을 못한다는데 현재시간 3시 40분.
아직도 1km가 더 남았다. 생각같아서는 차에서 내려 달려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일. 애가 타는데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속도를 내어
다행히 문닫기 직전 간신히 입장하여 먼저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가 있는
2층으로 직행했다. 제일 마지막으로 입장을 하고 보니 박물관을 전세낸 기분.
카메라는 들고 들어 가지 못했지만 폰으로 몰래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투탕카멘은 고대 이집트 제18왕조 제12대 왕(재위 BC 1361∼BC 1352).
BC 1361년 9세의 나이로 이집트의 파라오에 등극, 18세에 사망할 때까지
9년간 재위했으며 그의 무덤은 1922년 영국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에 의해
룩소르 부근 나일강 서안의 '왕들의 계곡'에서 발견됐는데 도굴되지 않은
유일한 이집트 왕릉. 발굴 당시 투탕카멘의 무덤에선 110kg짜리 황금 관과
황금마스크(11kg) 등 호화찬란한 금은보화와 합금되지 않은 철, 3천여 년동안
마르지 않은 향료 등 2천여 점의 귀중한 유물이 나왔다. 그러나 이 엄청난 발견
병이나 자살 등으로 세상을 뜨자 급기야 "파라오의 저주"라는 말이
생겼고 우연이라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의문은 가시지 않았고
결국 투탕카멘의 사인이 큰 관심사로 떠오르고..
(펠루카를 타고 석양을 보며 나일강 유람)
순전히 바람으로만 가는 이집트의 삼각돛을 단 소형범선 펠루카.
황포돗대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이전에는 나일강을 수 놓은 펠루카가
장관이었다고 하는데 요즘은 관광객이 줄어 한산한 편이란다.
나일강, 나일강은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부를 흐르는 총길이는 6,690km.
세계에서 제일 긴 강으로 아마존강과 어느 강이 더 긴지에 대해 논란이 있는
나일강은 빅토리아호와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흘러
카이로에 이르러 넓은 삼각주에 도달하여 지중해로 유입된다.
나일강 삼각주 지역과 나일강의 좁고 긴 녹색 띠 지역은
이집트 전체 면적의 3% 밖에 안 되지만 인구의 대부분이 거주하고
농업의 전체를 담당하고 있다. 한편, 나일강은 정기적으로 범람하는데
범람이 끝난 후 농지를 원래대로 복구하기 위해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는 측량과 기하학이 특히 발달했다고 한다.
1970년에 준공된 아스완하이 댐은 수단 국경지역까지
형성된 거대한 인공호수인 나세르 호를 만들었다. 댐 건설로
나일강 하류의 유량 변화는 상당히 안정되었다고 한다.
(드디어 숙소, 집을 나선지 35시간만에 여장을 풀었다)
전날 15:30분에 집을 나서 KTX와 공항철도로 인천공항까지
이동하는데 5시간. 공항에서 수속하고 이륙하는데 4시간, 도하공항까지
10시간 반, transit 하는데 4시간 반, 다시 카이로 공항까지 3시간 반,
27시간만에 카이로에 도착하여 이후 카이로 투어를 마치고 호텔에
도착하니 현지시각 19:25. 정말 긴 여정이다.
(불가사이한 피라미드와의 만남이었지만..)
차가 붐빌 것을 예상하여 호텔을 일찍 나섰는데
피라미드다! 예정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하니 입장시간을
기다렸다 입장했으니 우리가 제일 먼저 입장을 한 것 같다.
눈 앞에 펼쳐진 산같은 피라미드! 세 개가 세워져 있다.
피라미드는 고대 이집트 왕인 파라오의 무덤으로 고대 이집트는
애굽을 말하고 파라오는 바로, 성경의 그 바로를 말하는 것 아닌가!
입구쪽에 위치한 제일 큰 피라미드는 제4왕조의 2대왕인 쿠푸왕의
피라미드인데 카메라 화각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다.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전제 왕국이 형성된 이후
30개 왕조가 교체되었는데, 이를 통상적으로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등
3기로 나눈다. 그 중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피라미드가 건축된 것은
고왕국의 제3~제4 왕조(전 2585~2395경) 때라고 한다.
이집트의 파라미드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은 쿠푸왕의 것으로
높이가 146m이며, 밑변은 각각 한 변이 230m에 이르는 정방형이며,
각 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있다. 재료로 쓰인 돌은
누런색이 도는 석회암인데, 평균 1.5톤의 돌 230만 개를 쌓아 올렸다.
이 피라미드를 완성하는 데 10만 명의 백성이 해마다 3개월씩
동원되어 2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역사'에 기록하고 있다.
피라미드 ☞ 사진 클릭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불가사의 중의 불가사의!
스핑크스는 길이 72m, 높이 20m의 큰 석상으로,
피라미드를 수호하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수르광야 마라의 샘을 지나..)
우리가 탄 버스는
성경 출애굽기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처음으로
장막을 친 곳으로 여겨지는 마라의 샘. '마라'는 히브리어로 '쓰다'는 의미.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인들을 이끌고 수르 광야로 들어가 사흘간 방황하다
이곳에 이르렀을 때 샘의 물이 써서 마실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니 물이 달아졌다고 한다(출애굽기 15:22-25).
따라서 이 곳은 '모세의 샘'으로 불리기도 한다. 본래 12개의 샘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오늘날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샘은 2개 뿐이며,
이 중 남쪽 끝에 있는 직경 2m 가량의 샘이 모세의 샘으로 추정된다.
샘 주변에는 대추야자 군락이 약 1km 이상 펼쳐진 오아시스다.
광야를 지나 ☞ 사진 클릭
(끝없이 이어지는 사막, 광야)
이집트는 95%가 사막이고 녹지는 5%밖에 안된다고 한다.
광야 시나이 반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삼각형의 반도.
북부 내륙과 남부에는 베두인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으며,
중앙 남부의 무사산은 시나이산이라고도 하며,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나이의 어원은 BC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디아어로 달을 의미하는
신(sin)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고대로부터 전략적인 중요성 때문에
복잡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근세에는 시나이반도의 영유를 둘러싸고
터키와 이집트가 싸웠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 이집트령으로 인정되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시나이반도는 이따금 이스라엘에 점령당했고,
1967년 중동전쟁 이래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이 계속되다가 제4차 중동전쟁 후,
1974∼1975년 병력의 분리협정에 따라 연간 약 500만 t의 산유량을 내는
유전지대를 포함한 반도의 일부가 이집트령으로 되돌아갔다.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 땅이지만 이집트가 아니라는 곳,
이집트인, 이집션의 어원은' 나일강의 물을 마시며
사는 사람'이는 뜻이라고 한다.
(강행군이다. 새벽 2시 시나이산을 향한다)
말 그대로 순례의 길이다.
어제 7시 10분에 숙소를 출발하여 가자지구에 있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고 15시간 걸려 밤 10시가 넘어 시나이산 아래 숙소에 도착.
토막잠 3시간 자고 하늘의 별이 쏟아질듯 초롱초롱한 야심한 밤에
불을 밝히며 험준한 바위산 시나이산을 올랐다.
(장엄한 시나이(시내)산 일출)
새벽 2시에 숙소를 출발하여,
그랬다. 일출시간이 06:40이 아니고 06:20분이었던 것.
포인트마다 사람들이 다 자리잡고 있다.
조금 후에 햇귀가 돌기 시작하더니 장엄한 태양이 솟아 오른다.
시내산에서 벅찬 감동으로 찬란한 태양을 맞는다.
시내산 ☞ 사진 클릭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다고 하는 시나이(시내)산 정상)
울퉁불퉁한 암반. 정상에는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넓이 6만 1천㎢의 이 광활한 땅에서는 생명을 유지하기 조차 어려울 것 같다.
낮에는 작열하는 강한 햇빛이 내리 쬐고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하는데
4만여 명의 베두인족들만이 이 곳 각처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계곡이
거의 없어서 물을 구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이곳은 대추야자, 옥수수
등이 재배되고 있는 옥토 '파이란 오아시스'로 시나이 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땅. 이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베두인족들은 낙타, 양,
염소 등 가축들을 키우며 유목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시나이 반도는 이스라엘인들의 광야생활 40년의 무대로,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약속의 땅인 이곳 시내산(시나이산)은
시나이 반도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코란에서도
무함마드(마호메트)가 시나이산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 언급되어 있어
사실상 시나이 반도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공동 성지이자
베두인족들의 유목의 터전, 불타는듯 뜨거운 광야가 펼쳐지는 이곳
'위대한 광야'의 성산을 찾아 순례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육상 통로일 뿐 아니라
지중해 저편, 유럽 대륙이 시나이 반도를 거쳐서 홍해와 인도양
뱃길을 따라 동양으로 갈 수 있는 선박로이자 문화의 교량.
이러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예로부터 시나이 반도는 문화 교류와
교통의 요충지로 국제적 사건들이 계속 일어 나고 있다.
(시나이 산의 벅찬 감동을 안고..)
시나이산 정상에서의 새 날은 경이롭게 열렸다.
칠흑같은 어둠도 동이 트면서 코발트빛 파란 하늘이 되었다가
다시 황홀한 주황색으로 변색이 되고, 빨간색으로 물드는가 했는데
어느 순간 노란색으로 변하며 생명의 근원 장엄한 태양이 솟아 올랐다.
이 순간 삶에 지치고 고단했던 인간들은 새로운 희망과 다시 시작할
(이집트 타바 국경)
여기서 내려 바로 앞 이집트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러니까 우리가 2월 12일 이곳을 통과했는데
자살폭탄 테러로 4명이 사망하고 13명이 부상당하는 참화를 당했다.
이집트 경찰이 에스코트를 하고 있었지만 에스코트라는 것이 수에즈부터
시나이반도 남단인 샤름 엘셰이크까지만 따라 오고, 정작 위험하다는
샤름 엘셰이크~타바 구간은 돌아가 버렸으니.. 그것도 경찰이 에스코트를
해 주었다기 보다 오히려 경찰이 보호를 받으며 가는듯한 인상..
이번 관광객에 대한 폭탄테러로 인해
특히 수르광야를 거쳐 시내산에 오르는 시나이반도 성지순례는
우리 세대에는 다시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들을 하고 있다.
시내산을 막차 타고 오른 기분이어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이스라엘 ☞ 사진 클릭
(이스라엘에 들어서자 마자 눈에 들어 온 것은..)
이집트 출국은 그냥 프리패스..
그러나 이스라엘 입국은.. 과연 이스라엘 다웠다.
입국장에서 장장 2시간이나 줄을 서서 기다렸다.
국경을 넘자 마자 이집트의 그 칙칙한 모습은 사라지고 생기가 돌고
요소 요소에 사복차림의 젊은이들이 마치 장난감 가지고 놀듯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자유분방하게 경계중인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이스라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하니 눈에 들어온 것은
중무장한 미국의 항모와 그리고 부두에 가득한 자동차들..
모두 눈에 익은 디자인과 정감어린 로고들..
(이스라엘에서 첫 밤을 보낸 에일랏(에시온 게벨))
이스라엘 입국할 때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지만
저녁을 먹고 박장로님과 해변까지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저녁 8시.
이스라엘의 최남단 항구도시이자 관광지로 네게브 사막에 인접해 있는
에일랏은 구약성경에서 '엘바란' 혹은 '엘시온 게벨'로 언급되는 곳으로
출애굽 과정에서 이집트를 떠난 유대인들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언급되어 있다.
에일랏은 다윗시대에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점유하고 솔로몬 시대에 교역항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 왕의 배들이 에시온 게벨을 중심으로 오갔으며
솔로몬 시대 이후에도 유대왕국의 가장 중요한 항구이자 상업도시로
언급되었다(왕상 9:26, 왕하 8:17~18, 20:35:37).
로마와 비잔틴 로마시대에는 제국의 남부 국경도시로서 외부의 침입을
막는 병영도시이자 홍해로 나아가는 항구로 성장했고, 중세에는 북아프리카의
무슬림들이 아라비아 반도로 성지순례를 가는 길목 역할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인구는 46,000명이며 공항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홍해에 인접한
휴양지, 서쪽에는 상업 및 주거지역이 형성되어 있다.
(에일랏에서 90번 도로를 따라 오르니..)
사해가 나오고, 소돔과 고모라를 지나는데.. 산 중턱에
뒤돌아 보다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롯의 처(Lot's Wife)' 모습도 보고..
'롯의 처' 형상은 몇 개가 더 있는데 여기가 제일 그럴듯하다고..
마사다 ☞ 사진 클릭
(케이블카를 타고 이스라엘 최후의 항전지 마사다 요새에 올라보고..)
오늘날 유대인의 저항정신을 반영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과 단결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 마사다 유적은
A.D.70년대 초에 일어난 유대인들과 로마군의 전쟁때 로마군의 승리로
끝나지만 유대인들이 로마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항전한 곳으로
B.C.37년부터 B.C.31년 사이에 헤롯 왕이 반란에 대비하여 요새화한
마사다가 유대인과 로마의 전쟁 무대가 되기 시작한 것은 A.D.66년. 시카리,
혹은 열심당으로 불리는 유대인 저항 집단을 중심으로 로마군의 유대영토 주둔에
반발하는 무력투쟁이 발생했으며, 열심당원들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마사다 요새로 피난하여 그 곳을 저항의 근거지로 삼았다.
마사다 요새를 근거지로 한 유대 저항군의 로마 정착촌 급습이 빈번하자
로마 총독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는 로마 보병군단인 제 10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 요새 주변에 8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수차례나 공격했으나 방호벽 파괴에
실패하자 로마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약 6천명의 노예를 동원하여 서쪽 측벽에
공격용 누벽을 세웠다. 당시 요새 안에는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가 이끄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들은 풍부한 물과 곡식도 충분히 비축되어 있어
로마군의 공격에 대응하며 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는데 A.D.73년 누벽이 완성되고
약 3개월간의 공략 끝에 A.D.73년 4.16. 마사다 요새의 성벽이 무너지고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적의 노예나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할 것을 호소했으며, 이에 동의한 저항군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죽이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결국 마사다에 입성한 로마군은 36구의 시신만을 보게 되었다.
1965년~1963년까지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의 마사다 유적 발굴 결과
요새 내부에는 저항의 흔적과 참수된 유골 및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었다.
마사다 요새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쿰란공동체 유적도 둘러 보고..)
마사다 유적지에서 바라본 사해도 아름다웠지만
마사다 유적지는 북쪽사해 남단에 있고 쿰란공동체는 북쪽사해
북단에 있으니 쿰란 가는 길은 오른쪽으로 북쪽 사해를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를 1시간 정도 달리면서 차창밖으로 보는데 정말
물빛이 아름답다. 지금까지의 알고 있던 사해가 아니었다.
사해 서안의 쿰란 동굴에서 발견한
구약성서 사본 및 유대교 관련 문서를 사해 두루마리라고도 한다.
1947년 2월, 베두인의 한 소년이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예리코 남쪽
13.6 km의 사해 서안의 절벽 위에 있는 여러 동굴 안을 수색하게 되었다.
소년은 그 중 한 동굴 속에서 아마포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 있는
높이 64.8∼75 cm, 지름 25 cm 정도의 여러 개의 항아리를 발견하였다.
이들이 발견한 두루마리 중 5개는 시리아의 예루살렘 정교회의 대주교
마르아타나시우스 사무엘이 샀으며, 나머지 3개는 예루살렘의 헤브라이대
E.수케닉 교수가 샀다. 1954년 수케닉의 아들 Y.야딘이 25만 달러를
지불하고 사무엘 대주교로부터 5개의 두루마리도 사들여 현재는
이들 두루마리 전부가 이스라엘 국가의 소유로 되어 있다.
사해 ☞ 사진 클릭
(사해는 죽음의 바다가 아니라 자원의 보고, 휴양지였다)
서아시아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에 있는 염호.
면적 1,020, 동서 15km, 남북 80km. 호수는 길쭉한 모양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약 100km 내륙의 요르단 지구대 남부에 위치해 있다.
호수 수면은 해수면보다 396m나 낮은 지구상의 최저지점을 이루며,
최대수심은 399m, 평균수심은 146m. 요르단 강물이 흘러들지만
호수의 유출구는 없고, 건조기후로 유입수량과 거의 같은 양의
수분이 증발하기 때문에 염분함유율이 표면수는 20%(해수의 약 5배),
저층수는 30%나 된다고 한다. 사해라는 이름은 높은 염도로 생물이
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이름. 또한 염분농도가 높기 때문에
사람이 물에 들어가면 가라앉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호수의 염분에는 여러 유용한 광물질을 함유하고 있어
호수의 북단의 카리아, 남단의 소돔 등에 있는 채취공장에서,
칼륨·취소·소금 등을 가공 채취하고 있다. 이로 인해 호수의
수위가 낮아져 바닷물을 끌어와서 보충하려 하고 있다고..
사해의 연안지대는 고대문명이 발전한 곳으로 '구약성서'에도
사해는 '소금의 바다''아라바의 바다'등의 이름으로 등장하며,
성경에는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불로 심판한 사건이 나온다.
서안에는 '사해문서'가 발견된 쿰란 동굴과 로마군에 멸망된
유대인의 마지막 저항지 마사다 유적 등이 있다.
(정말 몸이 둥둥 떠드라니까..)
사해 부영체험.. 일행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제대로 즐겼다.
문제는 사해에서 부영체험하는 시간을 정해 주지 않은데 있었다.
일행중 대부분은 호기심도 발동한데다 날씨도 더워 수영채비를 하여
곧바로 사해로 달려 갔는데 일행중 몇 분은 아예 차에서 내리지 않았나 보다
우리는 정말 사해 짠 소금물과 찐하게 소통하며 즐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신선노름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듯 어느새 시간이 1시간 반이나 흘러 가버렸으니..
그러니 버스에서 기다린 분들은 얼마나 지겨웠으면 가이드에게 항의를 했겠나
싶기도 하다. 미안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갈 시간되면 누가 가자는 사인을 해
주겠지 하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신나게 즐기기만 했던 것. 박장로님과 사해체험
한 번 제대로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호사다마랄까 탈의장에
벗어 두었던 내 신발이 보이지 않았던 것. 덕분에 그 날 이후로는
예수님이 신고 다니던 유대인 신발을 한 켤레 사서 신고 다니는
색다른 경험까지 했으니 이래 저래 사해체험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 같다.
여리고 ☞ 사진 클릭
(삭개오가 올라간 돌무화과나무..)
예전 성경에는 뽕나무로 번역되었던 이 나무는
라틴어와 헬라어에서 파생한 이름인 '시카모어'라는 나무로
히브리어로 '시크마(shiqmah)'라는 나무. 무화과 나무와는 다른 종이지만
열매의 맛이 무화과와 비슷하다고 하여 '돌무화과나무'라고 한다.
원산지가 이집트라서 흔히 '이집트무화과'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나무는
서리가 내리지 않는 지역에서 자라며 유대 해안지역, 갈릴리 아래지역,
유대평야, 요르단 골짜기같은 낮은 지역에서 많이 재배되는 나무로
(왕상 10:27, 대하 1:15) 산악에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엘리사의 샘에 들렸다가 시험산 조망도 하고)
엘리사의 샘물은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져 약 2,800년이 지난
현재의 샘은 오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붕을 씌운 건물 안에 있다.
즉, 4,500리터나 되는 엄청난 물이 솟아나서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것.
현재도 이 물은 먹을 수 있고 식수차가 와서 물을 받아가며
'여리고 생수'라고 하는 물로 시판되고 있다고 한다.
엘리사의 샘에 들렸다가 간 곳은 시험산.
시험산은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간 기도하신
곳으로 산 중턱에 바위 절벽 중간에 그리스정교회 시험산 수도원이 보인다.
예수께서 40일을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주리셨을 때 마귀가
첫번째 시험으로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여 먹으라고 했고,
두번째 시험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고,
세번째 시험은 지극히 높은 산에 데려가서 천하만국과
영광을 보여주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주겠다고 했지만
모두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비아돌로로사 ☞ 사진 클릭
(아침 일찍 "십자가의 길(Via Dolorosa)"을 걸었다)
라틴어 '비아돌로로사(Via Dolorosa)'는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서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십자가 수난의 길을 말한다.
이 길은 본디오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신 곳으로부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걸으시던 약 800m의 길로
골고다에서의 십자가에 달리기까지의 전 과정을 말하고 있다.
이 길은 복음서에 근거한 역사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순례자들의 신앙적인 길로써 14세기 프란시스컨 수도사들에 의해
비로소 확정된 길로 오늘날 순례자들이 걷는 이 길에 마련된
14개 장소는 18세기에 와서야 확정된 것이며, 19세기 이후
고고학 발굴을 통하여 일부가 확정되기도 했다고..
꼭 걸어 보고 싶었던 길.. 새벽 일찍 나온 덕분에
우리만 조용히 묵상하며 걸을 수 있어 감사하다.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간다는 말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9:24)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무엇이 통과할 수 있는 가장 작은 것으로
여겨지던 바늘구멍으로 과장해 말씀하셨지만.. 바늘귀로 낙타가
들어가기는 불가능하니 부자는 천국에 아무도 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그 바늘구멍이 저 쪽문이었던 것이다. 낙타가 짐을 싣지 않았을 때는
빠져 나갈 수 있는 성벽의 작은 문을 바늘귀라 했던 것이었다.
일단은 부자도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보인다.
바늘귀 비유는 '나눔'을 강조한 예수님의 메시지다.
부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느니 정당하게 벌어 이웃과 잘 나누는
부자가 있다면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지 않겠나. 정직하게 벌어
세상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면 떳떳하고 재물에 집착도 없을 것이다.
이런 부자는 근본이 맑아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적은 것은,
사자는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지만
이 시대 많은 부자들은 그렇지 않다. 부자의 탐욕은 끝없고
포식하고 과식해도 배가 고파 마치 주린 배를 채우듯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하게라도 벌고 재물에 집착한다. 돈만 있으면
이곳이 바로 천국이니 부자는 천국 갈 필요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부자가 욕먹지 않는 사회가 될 수는 없을까!
감람산 ☞ 사진 클릭
(Mount of Olives(감람산, 800m) 정상의 승천당)
4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조그만 언덕.
중부 및 남부 팔레스타인을 남북으로 달리는 산맥의 일부로
기드론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예루살렘 동편에 위치해 있는데
감람산 동쪽으로 여리고와 요단골짜기로 비탈져 있다. 예루살렘보다
약 90m가 높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예루살렘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고
요르단 계곡, 사해의 북쪽 끝, 길르앗 ·모압의 산들을 바라 볼 수 있다.
산의 서쪽 기슭에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시작된 겟세마네 동산이 있다.
이곳에는 겟세마네의 바실리카를 비롯하여 많은 성당이 있으며,
올리브 산 정상에서 그리스도가 승천(행 1: )한 것을 기념하는
승천당과 주기도문교회, 겟세마네 동산교회 등이 있다.
이 산기슭에서 예루살렘 입성을 앞둔 그리스도가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고, 감람산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세상의 종말에
일어날 사태에 관해 경고한 곳으로 가짜 그리스도에 현혹되지 말고
전쟁, 지진, 기근에 놀라지 말라고 경고하며 장차 박해가 닥칠
것이라며, 항상 영적으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마 24: ~25: , 눅 21: )
(주기도문 교회(The Church of the Pater Noster)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신 곳에 세운 교회로
교회이름은 라틴어의 주기도문 시작부분을 따서 지어진 것으로
'PaterNoster'는 곧 '우리 아버지'를 의미한다.
종말에 나타나는 징조들에 관해서 설파하신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서기 4세기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뒤 예수의 말씀을
기리기 위해 이곳 감람산 위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교회의 구조는 이탈리아의 피사에 있는 수도원을 모태로 했다.
현재 벽면에 60개국 이상의 언어로 주기도문이 쓰여져 있는데
우리의 국어로 된 주기도문은 2개가 걸려 있다.
(겟세마네 동산교회와 예수의 고뇌를 목격했을지도 모르는 감람나무)
예수가 배반을 당하고 체포된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며칠 동안 그와 제자들은 올리브 산에서 밤을 지냈다. 붐비는 도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알맞은 장소였다. 예수가 고뇌에 빠진 장소를
겟세마네라고 말한 것은 두 복음서뿐이지만, 감람산은 네 복음서가
모두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는 올리브 산이 분명하다.
무성하던 올리브나무는 로마 황제 티투스가 유대 반란을 진압할 때 베어
버렸다는데 제일 오래된 올리브나무는 수령이 2000년 정도된다고 하니
예수의 고뇌의 순간을 목격한 묵묵한 증인일 수도..
통곡의 벽 ☞ 사진 클릭
(통곡의 벽)
구약성서에 의하면
솔로몬왕은 예루살렘에 장엄하고 아름다운 성전을 세웠다고 한다.
그 후 성전은 전쟁 등으로 파괴되었으나, 헤로데스 왕이 예수시대에 재건하였다.
이 벽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의 서쪽 일부라 여겨 '서쪽벽(Western Wall)'이라
불렸는데 '통곡의 벽(Wailing Wall)'이란 명칭도 자주 사용되었다.
통곡의 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유래가 전해진다.
하나는 예수가 죽은 뒤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많은 유대인을
죽였는데, 이같은 비극을 지켜 본 성벽이 밤이 되면 통탄의 눈물을
흘렸다는 설에서 유래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들이 성벽 앞에 모여
성전이 파괴된 것을 슬퍼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다.
'통곡의 벽(Wailing Wall)'은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사이의 오랜 분쟁거리.
유대인들에게 이 벽은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의 상징이지만,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바위 사원과 알 아크사 모스크에 속한
이슬람 성지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어 1929년에는
'통곡의 벽 사건'이라 불리는 폭력 및 대치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종교 분쟁은 1928년 9월 일부 유대교 신자들이 남녀가 따로 모여 앉아
예배를 올려야 한다는 유대교식 집회를 위해 벽에 막과 분리대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성지라 여기는 곳에 일방적으로
공사를 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분노를 느꼈고 돌을 던지며 이를
제재하려다 급기야 분쟁으로 발전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적 감정이 크게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예루살렘이 이스라엘과 요르단으로 분할되면서
이 성벽은 요르단에 속하였으나, 1967년 6월의 제 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를 점령하는 바람에 넘어왔다.
시온산 ☞ 사진 클릭
(시온산, 마가의 다락방, 베드로 통곡교회)
예루살렘 구시가를 둘러싼 성벽의 남쪽 시온문을 나서면
바로 펼쳐져 있는 765m의 시온산은 유대인들에게는 정신적인
고향이자 종교의 중심지이다. 정상에는 다윗왕의 묘를 비롯하여
최후의 만찬 방, 홀로코스트의 지하실 등이 있다.
다윗왕의 묘는 '마가의 다락방' 부근에 있는데 가묘이며
석실 안에 길이 2m, 폭 1m 정도의 석관을 안치해 놓았다.
오순절 때에는 참배객들이 많이 찾아온다. 시온문의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마리아영면교회가 있다. 다윗왕의 묘가 있는 건물 2층에 있는
마가의 다락방은 '최후의 만찬 방'이라고도 한다. 예수가
12제자와 함께 최후의 만찬을 벌인 방이 보존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십자군시대에 세운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지하실'은 다윗왕의 묘 동쪽 건물 지하에 있다.
나치의 만행으로 숨진 유대인을 기리는 유품과 사진을 전시하고
있는데, 사람의 지방으로 만든 비누도 있다. 방 전체가 그대로
나치에 대한 고발이며, 유대인의 처참한 시련의 역사이기도 하다.
시온산 주차장 반대쪽 언덕 중턱에는 성베드로통곡교회가 있다.
예수를 재판할 당시 제자 베드로가 예수를 부정하자 닭이
울었다는 성서의 이야기를 근거로 세운 교회이다.
(탄생교회, 들판교회)
12월의 베들레헴은 행복하다고 한다.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의 한 지방자치 도시로 여느 도시와
다름없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에 휩싸여 있지만
12월이 되면 베들레헴만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절로 활기가 넘쳐난다.
예루살렘에서 들을 수 없던 캐럴도 흘러 나온다고 한다.
24일 저녁 탄생교회 광장에 마련된 무대에서는
아주 다양한 공연이 시작되고, 베들레헴 앞 목자들의 들판교회에
마련된 여러 예배처에서는 각국의 순례객들의 촛불 성탄예배가 드려지고
자정에는 자리를 옮겨 베들레헴 탄생교회에서 성탄예배가 드려진다고 한다.
우리가 TV에서 보는 성탄 기념예배가 바로 여기서 드려지는 예배로
유대 땅의 한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주님 탄생의 기쁨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전해지는 것이다.
유대의 한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다윗 왕이 태어났고,
마침내 예수님이 탄생하셨다. 유대 명절 수전절을 맞아 온 가족이 참여하는
명절 식사에도 참석 못하고 집 밖 들판에서 외로이 양을 돌봐야 했던
소외된 목자들, 사무엘이 찾아왔을 때 형제들의 틈에 끼지 못한 채
양을 돌봐야 했던 목동 다윗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들이야말로
흠 없는 성전용 희생 제물을 준비하는 거룩한 목자들이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이들이 제일 먼저 들은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안식일이라서 우리는 좋다.)
어제 오후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무렵 시작하여 토요일 해질 때까지
운전도 안하니 Haifa 가는 이 왕복 10차선 도로도 텅텅비어 있다.
덕분에 우리는 가이샤라까지 거리낌없이 신나게 달렸다.
물론, 호텔 요리사와 운전기사는 유대인이 아니니까.
가이샤라 ☞ 사진 클릭
(지중해변 인공항구도시 가이샤라, 헤롯의 건축가적 기질이 원형경기장과 도수교를..)
평생 로마제국의 충실한 속왕으로 유대지방을 지배한 헤롯왕.
끊임없는 의심과 처형으로 얼룩진 그의 가정사나 아기 예수의 탄생을
두려워 해 베들레헴의 많은 유아를 살해한 사례를 볼 때 잔인하고 광기어린
왕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헤롯왕의 건축가적 기질은 현대에서 상상을 넘어선다.
그의 대표적 역작이 바로 가이샤라로 기원전 22~10년경 헤롯왕이 당시 최고의
상업도시이자 로마와 통할 수 있는 항구도시를 세우기 위해 전략적으로 건설한
곳으로 로마황제 이름을 따서 가이샤라라고 명명했을 만큼 로마에 충성심을 보였다.
지금까지 형태가 뚜렷이 남아있는 원형극장, 전차경기장, 공중목욕탕 등
몇 가지 시설만 봐도 전형적인 로마도시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후 비잔틴 시대, 아랍시대, 십자군 시대 등을 거쳐 번영과 쇠퇴를
반복했다. 가이샤라는 다른 건 몰라도 헤롯왕의 건축적 감각만큼은
인정하게 만드는 명백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래 물이 없던 불모지 가이샤라를 기적적으로 살려낸 것 또한
헤롯의 역할이 크다. 도시를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식수공급이 시급했는데 15km나 떨어진 갈멜산에서 물을 끌어와 문제를
해결했다. 도수교는 현재 900m정도 남아있다.
(가이샤라.. 지중해 해변을 거닐며..)
갈멜산 & 므깃도 ☞ 사진 클릭
(카르멜(갈멜)산 정상 엘리야 입상)
카르멜산은 이스라엘 해안도시 하이파에서 동남쪽으로
3km 거리에 위치한 산악지역 전체를 통칭한다. 카르멜산의 지명은
히브리어로 '포도밭'을 의미하는 '케렘'에서 유래한 것으로 '하나님의 포도원'을
의미한다. 카르멜산은 특별히 어느 산봉우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는
하이파만에서부터 남쪽으로는 샤론 평야에 이르는 산줄기 전체를 일컬으며,
가장 높은 산봉우리는 해발 546m. 전체 면적은 약 245㎢이며,
줄기의 폭은 동서로 10km, 길이는 남북으로 약 26km.
초기 기독교도들도 이 산을 신성하게 여겼으며 6세기부터
수행자들이 이 곳에 은둔하기 시작하며 카르멜 수도회로 발전하였고.
13세기 초기에 예루살렘의 초대 주교였던 성 알베르토(St.Albertus)에 의해
카르멜수도회의 첫 규칙서가 주여졌으며, 이는 1247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의해
탁발수도회로 인준되었다고 한다. 예언자 엘리야가 희생제물을 바친 장소로 알려진
무흐라카(Muhraqah)에 1883년 복원된 카르멜 수도원이 있다(왕상 18:21)
산비탈에는 아름다운 공원과 숲들이 곳곳에 있으며, 대부분
카르멜 자연보호구역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성경의 아가서는 여성의
아름다움을 묘사할 때 카르멜 산의 아름다움에 비유하고 있다(아 7:6, 35:2).
남서쪽 경사면에는 많은 동굴들이 있는데, 1930년부터 1932년 사이에 고고학자
도로시 게로드(Dorothy Garrod)가 그 중 4개의 동굴과 바위들을 조사했는데
게로드는 그곳에서 네안데르탈인의 유골과 초기 인류의 거주 흔적을 발굴했고
또한 B.C.4천년 경 신석기와 청동기의 과도기 시기의 팔레스타인
주거지와 항아리 무덤도 발굴했다고 한다.
(므깃도 요새)
므깃도는 예루살렘 북쪽 91km, 갈릴리호(湖)에서 남서쪽으로 19km,
가나에서 남쪽으로 13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375m의 고지로,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로 토질은 모래땅이다.
히브리어로 '므기토(Megiddo)의 언덕'이라는 뜻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약성서 '요한계시록'(16:16)에 한 번 나온다. 영어로는 아마겟돈(Armageddon).
므깃도는 팔레스타인 전역사에 걸쳐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격을 띠는 곳이므로
이 도시에서는 많은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므깃도는 전쟁의 상징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고.. 그러나 성서에 실린 그 밖의 언급들은
최후의 전장을 예루살렘으로 암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전략적 요충지인 므깃도가
서 있는 언덕 또는 그 뒤의 '산'이 앞으로 있을 종말의 시기에 선과 악의
최후의 결전장을 상징하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사렛 ☞ 사진 클릭
(나사렛, 수태고지교회)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로
주로 아랍인들이 살고 있고 주변의 산위에는 유대인들의 정착촌이 자리하고 있다.
나사렛은 지형적으로 볼 때,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375m의 높은 분지.
뒤로는 카르멜산이 한눈에 보이고, 서쪽으로는 다볼산이 큰 왕릉처럼 절경을 이루며
또한 남동쪽으로는 이스르엘 평야가 끝없이 펼쳐있어 장관을 이룬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이
탄생하리라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는 장소에는 수태고지교회가 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진 것은 주후 4세기 로마 콘스탄틴 황제 때 였고
이 때부터 나사렛에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먼저 교회를 들어서면 교회 벽면에 전세계에서 보내온 성화들로
가득 차있는데 그 중에 한복을 입은 마리아가 색동옷을 입은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 눈에 띈다. 각 나라의 전통의상에 따라 그려진 마리아와
예수님의 모습은 온 인류의 구주인 예수님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
청동문을 지나 교회안으로 들어서면 안쪽에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수태고지를 받은 곳에 제단이 있고 교회 바닥은 온통 모자이크로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제단 앞에서 천장을 올려다 2층 천장까지 올려다 볼 수 있는데
백합꽃을 거꾸러 세워 놓은 듯이 60m나 되는 원뿔 모양을 하고 있다.
원뿔모양의 천장에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잉태를 고지하듯이
밝은 빛이 제단까지 내리 비친다.
(결혼식하러 수태고지교회로 향하는 신부와 신랑)
(가나의 혼인잔치 교회 내부)
구약성서에는 나사렛에 대한 기록이 없으나
신약성서는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으로, 예수가 헤롯왕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에 갔다가 돌아와 30년 동안 살았던 곳이어서 예수를 '나사렛 예수'라
부른다. 백성들이 예수를 미워하여 벼랑에서 밀어냈다고 하는 높이 10m에
이르는 절벽이 있고,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수태를 알렸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워진 '수태고지 교회', 요셉이 목수일을 하던 집터 위에 세워진
'성 요셉교회'등 예수에 관한 많은 전설과 유적이 남아 있다.
주민 대부분은 아랍인. 성지순례자와 관광객을 상대하는
상인들이 전체인구의 60%. 대부분 아랍계 천주교인들이라고 한다.
도시 주변에는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아파트가 아랍인의 거주지구를
둘러싸듯이 세워져 있어서, 이스라엘 국내의 복잡한
아랍민족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갈릴리 선상예배 ☞ 사진 클릭
(갈릴리 호수 선상에서..)
(물결이 일렁이는 갈릴리 호수 선상에서 예배를 드리다)
나사렛과 가나를 거쳐 오후 늦게 도착한 갈릴리 바다는
구약 시대는 긴네롯 바다(수12:3) 긴네렛 호수라고도 불리어 졌다.
이는 그 모양이 긴노르(Kinnor)라는 악기와 비슷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갈릴리를 신약에 와서는 게네사렛으로(눅5:1), 때론 디베라(요6:1),
갈릴리 바다(마4:18,막1:16)라고 불리고 있는데 바다라 불리운 것은 불이
귀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이 많으면 바다라 불렀기 때문이라고..
갈릴리 바다는 남북의 길이가 20.8km, 동서의 길이가 12.8km
깊이는 50-60m로 주변을 한바퀴 자동차로 돌면 62-63km 정도. 북쪽으로는
해발 900m 이상으로 높은 갈릴리라고 하고 남쪽은 낮은 갈릴리라고 부르는데
북쪽에 산상수훈을 선포하신 팔복산(마5-7장)이 있고 서쪽에 디베랴와
서북쪽은 막달라로 유명한 곳이고 동북쪽 끝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뱃세다가 있다. 언제나 주님의 사역의 흔적을 살펴 볼 수 있는
갈릴리는 은혜와 축복이 가득한 귀한 성지라 하겠다.
(산상수훈중 팔복에 대해 설교한 터 위에 세운 팔복교회)
오늘은 주일, 새벽에 호텔에서 예배를 드리고
식사후 호텔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예수가 사람들에게 산상수훈 중에
팔복에 대해 설교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교회인 팔복교회로 이동했다.
산상수훈으로 불리는 예수의 설교는 성경 마 5-7장, 눅 6장에 기록되어 있다.
각 각의 기록에 등장하는 장소가 약간 차이는 있으나 갈릴리 호숫가의 언덕이라는
점은 일치한다. 오늘날 팔복산, 혹은 수훈산으로 믿어지는 장소는 갈릴리 호수
북서부 해안으로, 가버나움(Capernaum)과 게네사렛(Gennesaret) 사이에 위치하며,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타브가(Tabgha)에서 약 3km 거리.
(마 14;13-21, 막 6:30-44, 눅 9:10-17, 요 6:1-14).
4세기 경 비잔틴 제국에서 팔복을 설교한 장소를
오늘날의 팔복교회는 1939년 프란치스코 수녀회가 이탈리아 무솔리니
(Benito Mussolini, 1922-1943 재임)의 지원을 받아 팔복산 정상에 세운 것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바를루치(Antonio Barluzzi, 1884-1960)가
설계. 교회의 지붕은 여덟가지 복을 상징하여 팔각형 구조로 되어 있으며,
내부의 여덟개의 유리창에 라틴어로 팔복의 내용이 하나씩 기록되어 있다.
교회 앞뜰의 포석에는 믿음, 자비, 인내, 정의, 사려, 자제를 상징하는
6개 심볼이 새겨져 있다. 또한 이 교회에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방문할 때 걸쳤던 망토가 보관되어 있다.
(단 지파가 살았던 이스라엘 최북단에 있는 텔단(Tel Dan))
헬몬 산의 계곡물이 흐르는 곳이어서 그런지
이 곳은 마치 이스라엘지역이 아닌 것 같았다.
수량도 폭포가 떨어지듯 콸콸 물이 흘렀고 공원내가 물소리로
요란하여 별천지에 온 것 같았다. 단 지역은 전체가 하나의 자연 휴양림에
가깝다는 느낌을 준다. 단 지역의 유적지(Tell Dan)까지 가기 위해서는
헐몬 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요단 상류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단 유적지에는 북왕국의 초대 왕인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 제의터
(ritual site)가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에게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나무인 상수리나무가 상당히 많이 자라고 있다.
아랍인들은 이곳을 텔 엘쾨디 라고 부르는데 '심판의 언덕'이란 뜻.
심판의 언덕이란 이름은 요단강이 창조된 다음의 전설에 근거하고 있다.
요단강이 흐르기 전에 이곳에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흐르던 세줄기의
마침내 이들은 누가 더 큰지 하나님께 판단을 맡기기로 하였고 하나님은
이들 사이의 작은 언덕에 앉아 이들에게 셋 모두를 사랑한다고 말하셨다.
그래서 셋이 하나가 되어 가장 큰 강이 만들어 졌다 한다.
단에서 흐르는 물줄기는 요단강으로 흐르는 바니야스와 더불어 주요 수원
중의 하나. 요단강의 의미는 분명치 않으나 '단에서부터 흐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요레드 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단(Tell Dan) 유적지)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을 본
단 지파는 원래 아얄론 평야를 중심으로 한
쉐펠라와 지중해 연안 지역을 분배받았지만(수 19:40~46),
이미 그곳에 정착해 있던 블레셋 민족에 밀려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가나안의 전통적인 도시였던 라이스를 정복한 후,
도시 이름을 자신들의 지파 이름을 따서 단이라고 개명했다.
성서에 의하면 이곳은 남북 왕국이 분열된 후 여로보암에 의해
금송아지를 숭배하던 장소로 부각되었다. 또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 시대에는
시리아의 벤하닷 왕이 이 곳을 침공하여 파괴시키기도 하였다(왕상 15:20).
이 곳은 1966년 이래로 예루살렘의 히브리 유니온 대학의 A.비란 교수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굴되어 지금까지 축적된 발굴 결과를 통하여 단의 주거역사를
시대별로 보면 BC 2700년경을 기점으로 한 초기청동기시대부터 중기청동기시대,
후기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이스라엘시대, 고대 그리스시대와 로마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발굴된 단의 유적의 대부분은 여로보암 이후
이스라엘시대에 건설된 것들로 대표적인 것은 웅장한 규모의
성문과 성벽, 제의장소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곳에 폭포가 있다니..)
헬몬산 아래 텔단 지역은 이스라엘이 아닌듯
숲도 무성하고 시내는 물이 큰 소리를 내어 흐를 정도로 수량도 엄청나다.
이렇게 숨은 폭포도 굉음을 내며 떨어지고 있다.
가이샤라 빌립보 ☞ 사진 클릭
(판(Pan)신전이 있던 바니야스)
가이샤라 빌립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북쪽 헬몬산 기슭에 있는
성읍으로 텔 단에서 골란 고원 안쪽으로 4Km쯤 들어가면 헬몬산 남쪽 경사면
암벽 틈에서 수정같이 맑고 깨끗한 물이 솟구치는데 이 물줄기는 단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함께 요단강의 중요한 수원이 되고 있다.
이곳은 헬몬산의 눈이 녹아 땅에 스며들었다가 샘으로 다시 솟아
오르는 요단강의 원류중 하나로 구약시대에는 바알 갓이라고 불렀다(수 11:17).
로마제국은 로마의 판 신전이 있었던 이곳을 헤롯 빌립에게 하사했고
헤롯 빌립은 이곳에 로마식 도시를 건설하였다. 가이샤라 빌립보는
로마황제 가이샤라와 자신의 이름 빌립보를 따서 이름지은 도시.
바니야스에는 가나안 시대부터 바알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판신(Pan God)을 섬겼기에 파니야스라고 불렀다.
오늘날 바니야스는 파니야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발음이 안되는 아랍인들이
'P'를 'B'로 잘못 발음하여 바니야스로 굳어지게 되었다고.. 연못 뒤쪽
절벽에는 많은 동굴이 있고 동굴 안에 신전터를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16:13, 막8:27)"는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하게 된다. 예수님은 가리사랴 빌립보의 판신전과
가짜제단을 보셨을 것이다. 그 고장까지 찾아가 복음을 전하면서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려 한 것은 우상들을 버리고
주님을 똑바로 알아 보고 주님이 이루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이었는지 인생들이 알길 원하셨던 것 아닐까?
(점심은 베드로 고기로..)
갈릴리 호수에서 잡히는 도미 비슷하게 생긴 생선.
점심 메뉴는 이 베드로 고기 한 마리뿐으로 기대했던 것보다 빈약한 식탁.
그 옛날 베드로가 생업으로 잡던 물고기라니 호기심은 당연지사.
요즘도 가끔 어부 베드로가 하였던 것처럼 갈릴리 바다(호수)에서 그물로
고기를 잡는 사람들이 있지만 생업으로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라기보다는
이 곳을 찾는 관광객들을 위한 상품화된 투망질로 관광객과 순례객들의
식탁에 오를 물고기 수요를 충당하지 못해 지금은 양식을 한다고..
(베드로수위권 교회)
이 곳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에 다시 오셔서 고기잡는 어부로
되돌아 와 있는 베드로에게 나타나 '네가 이 사람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하신 곳(요 21:1~23)으로 작은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4세기 후반에 세워진 비잔틴 교회의 벽면을 보존하면서 1933년
해변가에 다시 세워진 이 교회 안에는 주께서 베드로와 함께 잡은 고기를
구워 잡수시면서 대화를 나누시던 바위(Mensa Christi)가 보존되어 있다.
마당에는 넓은 정원과 베드로가 열쇠와 지팡이를 든 형상의
석상이 세워져 있다. 마 16:13~20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베드로의 이름위에 교회를 세우고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형상화한 것이다.
가버나움 ☞ 사진 클릭
(가파르나움은 현재의 텔 훔(Tell Hum))
현재의 텔 훔(Tell Hum)이 그 터로 알려졌다.
예수의 제2고향으로 불리는 곳.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위치.
예수의 시대 얼마 전부터 예루살렘과 아크레에서 다마스쿠스를 거쳐
바빌론으로 통하는 주요 중계지로 번성하였을 당시 지중해 방면으로
교역과 상업이 번창하여 세관이 있었고 큰 종교회당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관문으로 들어서면 돌기둥이 늘어서 있고, 4세기경에 세워진 시나고그
유적이 있다. 갈릴리에서는 가장 큰 2층 회당이였으며, 1층은 남성,
2층은 여성 예배소였다고 한다. 앞쪽에는 베드로 장모의 집터에 세워졌던
초기 교회의 유적도 남아 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이 곳에서 가난한 자,
약한 자를 위하여 수 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문둥병을 치료하고 중풍환자를
낫게하였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었고 마을의 가장 큰 회당 주인의
딸이 죽었는데 이를 다시 살렸다고 전해진다. 또한 장님을 눈뜨게하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멀쩡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성읍이 몰락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6세기에 퇴락하여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오늘 이스라엘 마지막 날 마지막 방문지 가버나움을
조용히 둘러보고 있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분위기 급반전
사흘 전 우리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로 넘어 오면서 통과했던 타바..
그 곳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나 20여명의 사상자가 났다는 비보를 접했다.
한국은 밤 10시인데 긴급뉴스를 전한다며 한국에서 온 전화로 이집트
테러소식을 들으며 갑자기 일행들이 동요한다.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오늘 느긋하게 이스라엘을 출국하려던 것을 변경하여
요르단으로 넘어가기 위해 곧바로 출발했다.
(이스라엘 국경 벳산을 가는 길에..)
그렇찮아도 이집트 국경 타바에서 충격적인 폭탄테러 소식으로
마음이 심란하고 급한데.. 벳산으로 가는 90번 도로를 어린이와
장애우까지 동원한 시위대들이 점거하여 차들이 오고 가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 요르단으로 넘어가는데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닌가 했는데 다행히
경찰과 협상한 시위대는 5분간 시위할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5분이 지나니 시위를 풀었는데 시위를 한 사유인즉 그 지점에서
교통사고가 많이 나서 신호등을 세워 달라는 요구였다고..
벧산은 이스르엘 평야의 동쪽 끝으로 갈릴리 호수에서 약 25Km 밑에 위치하고 있다.
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최초의 마을은 주전 3000년경으로 보고 있다.
벧산의 이름은 이미 주전 19세기경에 이집트의 고대 문서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해안과 내륙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약 18회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성경에서는 벧스안(수 17:11),
벧산(삼상 31:10), 벳산(삼하 21:12)등으로 불린다.
주전 13세기 가나안 정복 후 므낫세 지파에게 할당된 곳이나(수 1:27),
주전 11세기 길보아산에서 블레섯과의 전투에서 패함으로서 땅을 잃었다.
이 전투에서 패해 땅을 잃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죽고
시체가 성벽에 매달려 있었다(삼상 31장). 후에 솔로몬에 의해서 다시
정복되었다(왕상 4:12). 유대인 학자들은 말하기를 '만일 에덴 동산이
이스라엘에 있었다면, 이 에덴동산의 문은 벧산에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나
오늘날 벧산은 그렇게 매력적인 곳은 못되는듯..
요르단 암만 ☞ 사진 클릭
(요르단 암만에서)
가버나움에서 늦게 출발한데다 어제 타바 폭탄테러 여파로
요르단 입국하는데도 많이 지체되어 암만에는 밤늦게 도착했다.
일찍 자고 일어나니 바깥날씨가 많이 쌀쌀하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옷을 두텁게 챙겨 페트라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여행할 때 그 나라말을 유창하게 잘 하면 바랄바 없겠지만
미소와 간단한 인사 한 가지로도 얼마든지 소통하고 친근해 질 수 있는 것
'앗쌀라무 알레이쿰(당신에게 신의 평화가 있기를)'
'와 알레이쿰 쌀람(당신에게도 신의 평화가 있기를)'
자기들 말로 인사를 하니 좋아라 한다.
(세례 요한의 피 서린 철옹성 마케루스)
페트라 가는 길에 마케루스 요새에 들렸다.
마케루스 요새는 헤롯의 생일잔치가 열렸던 곳이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으로 헤롯을 기쁘게 한 대가로 세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한
곳으로 사해 건너 유대 지역이 훤하게 건네다 보이는 요단 동편에 있다.
마케루스는 하스모니안 왕 알레산더 야나이가 처음으로 요새화
(BC 103∼76)해 그의 보물을 저장하는 금고로 사용했다.
헤롯 왕은 맑은 날이면 온 유대 땅이 눈에 들어오는 좋은 전망에
천연의 온천까지 겸한 이곳을 그의 여름 궁전으로 재건해
아들 헤롯 안티파스까지 사용하게 했다고 한다.
200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마케루스에서 헤롯의 궁전 터와
요새의 흔적들, 그리고 참수 당시 세례 요한이 1년 가까이 갇혀 지냈던
동굴 감옥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헤롯 당시에는 한 유대 땅이었으나
이제는 국경이 가로 놓여 요르단에서 볼 수 있다.
(아르논 골짜기를 구경하고.. 길거리 흥정도 하고..)
셈법이 우리하고는 좀 다른 것 같다.
많이 산다고 해도 가격을 깎아 주지 않더니
1개의 가격은 깎아 주었다.
(페트라 도착 직전 만난 므리바샘)
아카바-에돔-모압-암몬-길르앗-바산-다메섹-바벨론
이집트 12 왕조의 파라오, 세소스토리스 1세가 처음 북방 무역의 길을
열기 위해 가나안 경영에 착수했으며, 신왕국에 들어 와서는 투트모스 1세 때부터
중왕국이나 신왕국 시대에 이집트가 건설한 것으로 보인다.
고대부터 왕의 대로(King's Highway)가 요르단의남북으로 길게 종단하고 있었으며,
이 대로는 낙타를 이용한 대상들의 무역로였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의 바벨로니아, 앗수르, 터어키 지역의 힛타이트, 이란의 페르시아 등의
여러 제국의 군대와 문물이 오가던 주요한 길이었다. 여기에 동방에서 시작된
비단길의 주요 경로가 되기도 하였다. 왕의 대로를 오가며 이 지역을 장악했던
나바테족, 로마, 비잔틴, 아랍, 십자군, 오트만 터어키 등은 모두 독특한
문명의 흔적을 이 땅 여러 곳에 남겨 놓아 오늘날 이곳은 진주와 같이
빛나는 소중한 문화적 유적들로 가득한 곳이 되었다.
모세가 바위를 쳐서 물을 솟게 했다는 '므리바 샘'.
모세의 샘 옆에 모세가 내리친 바위가 있다.
옥상에 3개의 흰색 돔이 있는 건물 주변은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는 황무지인데도 이 샘에서는 1년 내내 샘물이 솟는다고 한다.
또, 1.5km 떨어진 고대도시 페트라는 강수량이 부족하고 물이 없어
이곳에 수로를 연결하여 물을 공급받았다고 전해진다.
페트라 ☞ 사진 클릭
(유네스코 세계유산, 나바테언의 수도 페트라)
영국의 시인 존 윌리엄 버건이
'영원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미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한
페트라는 나바테아인이 건설한 산악도시이다. 나바테아인은 BC 7세기부터
BC 2세기경까지 시리아와 아라비아반도 등지에서 활약한 아랍계 유목민이다.
이들은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붉은 사암 덩어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에 도시를 건설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것이다.
암벽 속에서 꽃피운 나바테 문명
페트라는 이집트, 아라비아, 페니키아 등의 교차지점에 위치하여
선사시대부터 사막의 대상로를 지배하여 번영을 누렸던 캐러밴 도시이다.
좁고 깊은 골짜기를 따라 한참을 가면 극장과 온수 목욕탕, 그리고 상수도
시설이 갖추어진 현대 도시 못지않은 도시가 유령처럼 버티고 있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된
페트라의 건물들은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기원전 1400~1200년 경 에돔과 모압의 접경지에 자리했으며,
구약에서는 '에돔의 셀라'라고 지칭하고 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를 의미하고, 셀라는 히브리어로 '바위'를 뜻하니 페트라는
바위의 도시인 셈이다. 애급(이집트)을 탈출하여 가나안으로 향하던
모세와 그 추종자들에게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통로이기도 했다.
잊혀진 도시, 1200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내다
다마스쿠스에서 카이로로 향하는 탐험 도중 젊은 탐험가 부르크하르트는
페트라에 엄청난 유적이 숨겨져 있다는 말을 듣고 아랍인으로 변장한 후
이곳을 찾아 나선다. 1812년 그는 잊혀진 도시를 발견하였고,
이후 그의 여행기를 통해 페트라를 유럽에 알렸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더불어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이곳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유명해졌다.
(헤스본)
헤스본은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도성.
모세는 이 성을 취하여 르우벤 지파에게 주어
북방 갓 지파와의 경계의 요충지로 삼았다.
모압의 메사가 대원정을 통해 점령한 이후
현재까지 요르단의 땅이라고..
(96)
느보산 ☞ 사진 클릭
(느보산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요단 산지의 광경)
요르단왕국 마다바 읍에서 북서쪽으로 약 10km 지점에 있는 산.
해발 835m의 느보산은 출애굽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로 40년 동안의
광야에서의 방랑 생활을 청산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모세는 이곳에서 가나안 땅을 조망하고 숨을 거둔다.
(민 21:20, 23장, 신 4:49)
출애굽 이후 가나안으로 진군해 들어오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모리 족속의 온 지경을 점령하고 이 지역에 머물러 살기를 원했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에게 요단 동편 지역을 분배해 주게 되는데
느보는 르우벤 지파에게 분배되었다(민 32:3,38 대상5:8).
기원전 9세기의 모압왕 메사의 비문에 의하면 느보읍은 그때까지도
이스라엘의 도시였다. 그런가하면 성경은 느보가 모압의
도시였다는 보도를 남기고 있다. (사15:2 렘48:1,22)
(느보산 놋뱀 십자가 )
정원에 이탈리아 피렌체의 조각가 지오바니 판토니의 작품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모세가 시내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놋뱀과, 인류 구원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시킨
의미 깊은 작품으로 모세를 거역했던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를 인하여
불 뱀에 물려 죽은 사건의 상징물이다.
(마다바, '성 조지 그리스 정교회' 교회 이스라엘 지도 모자이크)
교회는 티켓을 구입하여야 출입이 허용된다.
입장료는 성당에서 자체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요르단 정부에서 받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특별한 수입원이 없는
요르단 정부의 유일한 수입이 관광수입이어서 그런지
입장료는 우리 돈 약 1,500원에 해당하는 1 DINAR
현존하는 성지 지도 중 가장 오래된 마다바 지도는
요르단의 마다바(Madaba)에 있는 성 조지 성당 바닥에 있는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 지도로 지도를 자세히 보면 정말감탄이 절로 나온다.
요르단에서 '모자이크의 도시'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sandart의 대가)
마다바, '성죠기 교회' 가는 골목의 상점들..
양탄자와 장식품, 모자이크 제품 등 화려한 물건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끈 것은 sandart.. 정말 눈을 의심할 정도로
정교한 손놀림은 낙타와 하늘과 새를 순식간에 병 속에 새겨 넣는다.
한 골목에 sandart를 하는 집이 두 곳 있는데 한 눈에 봐도
실력차가 났는데 사용하는 sand도 다르다고 했다.
(이제는 집으로..)
마다바에서 점심을 먹고 곧바로 암만 국제공항으로 직행,
암만공항에서 카타르 도하공항으로 가서 transit 해야 하는데
도하공항에서는 무려 6시간 30분이나 기다려 인천행 항공기를 탔다.
역시 서비스와 시간이 돈이다는 것 절감하며 인천에서 서울거쳐
이번 성지순례중에 접한 타바 폭탄테러로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나마 불행중 다행인 것은 이제 우리 세대에는 수르광야를 거쳐
시내산에 오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데 우리가 막차를 타고
다녀온 것 같아 한편으론 감사하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소망하던 것 한가지를 이루었다.
이번 여행은 일반 여행과는 달리 성지순례라는 특수성도
있었지만 정말 의미있고 뜻깊은 여정이 된 것 같아 감사하다.
피상적이거나 관념적으로 알고 있던 성경의 내용들을 역사의 현장에서
출애굽하여 황량한 광야에서 40년을 유랑하며 연단받는 과정을 조금이나마
심하게 요동하며 일렁이는 모습도 보았고, 부자와 낙타가 통과해야 할
'바늘귀'까지 제대로 이해하였으니 실로 배우고 느낀 바가 크고,
예수의 공생애 사역의 현장을 둘러본 것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이번 성지순례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속박된 생활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 같이 나를 짓누르며
속박하고 있는 것들에서 Exodus하여 참자유인으로 살 수
있기를 결단을 해 본다.
(성지순례 경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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