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이유 궁전, 프랑스 절대왕제의 상징 태양왕 루이 14세 궁전

2014. 9. 23. 23:43여행/여행기


베르사이유 궁전, 프랑스 절대왕정의 상징
(호화로움 극치를 보여주는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



○ 2014. 5. 11  날씨 : 흐렸다 소나기 후 갬
○ 프랑스, 파리, 베르사이유





베르사유 궁전!
그동안 수없이 들은 이름이어서 단어 자체는 익숙하지만
막상 대면을 하려니 오랫동안 연모하던 사람을 만나는듯 가슴 설렌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말하면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은 역시 루이 14세!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지은 것은 절대 왕정 하에서 왕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자 또한 프롱드의 난(1648-1653 프랑스 귀족들의 왕정에
대한 최후의 반란)에서 교훈을 얻어 귀족들을 베르사유로 강제 이주시켜 왕에게
반대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루이 13세가
1624년 사냥터에 별장을 지으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루이 14세가 1661년부터 1665년에 걸쳐 증축을 시작했는데
1667년부터 1670년까지 궁전의 정원이 조성되었고 1675년부터
1682년까지는 세느 강을 이용한  분수대 공사가 이루어 졌다.
1668년에 2차 증축이 이루어졌으며 1699년 부터 1710년까지는
예배당이 건설되었고 1753년 부터 1770년까지 오페라 극장이 건설되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루이 14세는 1661년 건축가 르보, 실내장식가 르 브룅,
정원예술가 르 노트르 등을 초빙하여 50년이라는 긴 세월과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궁전을 지었다. 1672년 왕궁을 이곳으로 옮기자, 베르사이유는 왕국의 수도로서
정치, 문화, 사교의 중심이 되었다. 루이 14세 시대는 황금시대를 이루었으므로
베르사이유의 명성이 높았으며, 빛나는 고전주의 문화의 전당으로서 자리잡았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이 완성되고 1682년 이 궁전으로 옮겨 살면서
25년간 궁전과 정원의 진행 과정을 감독했고, 각 지방의 영주들을 불러
 이 궁전 안에서 살게 했는데 당시 이 궁전에는 약 5천 명이 살았다고 한다.
백성들이 자유롭게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을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
'왕의 정원 감상법'이라는 가이드북을 발행하여
백성들은 이 가이드북에 따라 정원을 감상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왕의 위대함을 느끼도록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르사이유 궁전)

루이 13세 때 사냥용 별장으로 쓰이던 것을
루이 14세 때 대정원을 착공하고 1668년 건물 전체를 증축하여
외관을 가로축 부분이 앞으로 튀어 나온 U자형 궁전으로 개축하였다.
1783년 미국 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프로이센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의 선언을 했으며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거울의 방에서 독일의 패전을 책임지는 평화조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베르사이유 궁전은 1979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매년 400만명 이상이 방문한다고 한다. 7~8월 바캉스 시즌에는
입장표를 사는데만 3시간 이상 걸린다고 한다.





(정문에 있는 루이 14세 기마상)







(몇 시간씩 줄을 선다는데..)

이 곳은 파리 시내와 달리 바람도 많이 불고
날씨가 춥다고 하여 방풍 채비를 해 왔는데도 줄을 서 있는데
완전 겨울날씨. 다행인 것은 30분 만에 입장했다는 것.

입장료 : 15 유로(A관, 코스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관람시간 : 5월 ~ 10월 : 09:00-18:30 (마지막 입장 : 18:00)
close 30분 전까지 입장 가능, 계절에 따라 close시간이 다르다.
궁전은 A,B,C관으로 나뉘는데 일반적으로 A관만 간다.
 
 우리는 15 유로짜리 입장권으로..









(검색대를 통과하여 궁전 마당으로 입장.. )

온통 금빛! 말로만 듣던 그 베르사이유 궁전..
과연 호화찬란하기 이를데 없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여러 모습)

 위로부터..
Versailles circa 1668(by Pierre Patel),
구조도, 정원쪽에서 본 스카이 뷰, 미니어쳐, 관람코스.
오늘 얼마나 볼 수 있으려나?

베르사이유는 17세기 말~18세기에 지어진
부르봉 왕조의 호화스러운 궁전과 정원으로 유명하다.
궁전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뻗어있는 도로와 3줄의 아름다운 가로수가
있는 큰 도로에서 찬란했던 절대왕정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절대왕권과 권력,
영화를 상징하는 베르사이유 궁전은 프랑스 역사상 최고 권력을 누렸던 '태양왕'이자
'짐이 곧 국가다'라 말했던 루이 14세가 루브르 궁전에 싫증을 느껴 이곳에 궁전을
지어 옮겨왔다. 왕국의 영광과 권위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루이 14세는
부친의 단순한 사냥터였던 한촌 지역을 베르사유 궁전으로 바꾸었다.
궁전의 건축 담당은 르 보(Le Vau), 조경원 담당은 르 노트르(Le Notre),
전체의 장식 담당은 화가 르 브랭(Le Brun), 진행은 콜베르, 모든 결정은
국왕 자신이 맡았다. 이 때, 루이 14세는 "인공과 황금의 힘에 의해
자연을 개량하고,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즐겁다."라고 했다고..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파리로 다시 궁전을 옮겼다고 한다.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베르사이유 궁전 건물과
로코코 양식의 내부 장식들은 아름다움과 호사스러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화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비참하고 서글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후에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가 호사를 누리다가 프랑스 대혁명으로
최후를 맞으며 107년간의 전성기를 누렸던 왕조가 막을 내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 때문.





(건물 내부로 들어가는 회랑)

긴 회랑에는 왕과 장군들의 대리석 조각들이 배치되어 있다.







(베르사이유의 부르봉 왕가(1589∼1792, 1814∼30), 문양)

부르봉 왕조의 명칭은 부르봉 라르샹보시(市)에서 유래한다.
원래는 소영주였으나 1272년 프랑스왕 루이 9세의 여섯번째 아들인 로베르와
부르봉가의 베아트리스가 결혼, 그들의 소생인 아들 루이 1세가 공작이 되었다.
1488년 장 2세가 죽자 그의 동생 피에르 2세가 영지를 계승하여 루이 11세의
왕녀 안느와 결혼. 이들의 딸인 수잔은 1505년 몽팡시가의 샤를과 결혼했다.
샤를의 사후에 다시 직계가 단절되었으나 그의 일족인 앙트완이 프랑수아 1세의
누이 마르그리트 드 나바르(에프타메롱의 저자)의 아들 잔 달브레와 결혼함으로써
부르봉가를 재흥하게 된다. 이들의 아들인 앙리 드 나바르가 바로 신교도의
수령으로서 1589년 프랑스의 왕위에 오른 앙리 4세이다.

앙리 4세 이후 루이 13세, 루이 14세로 왕위가 계속되어
프랑스 절대왕정의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루이 14세에 이어 15세,
16세가 잇달아 왕위에 올랐으나 1792년 프랑스 혁명으로 폐위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몰락 후 다시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복위했다.
다음 샤를 10세(부르봉왕조 최후의 왕)가 1830년의 7월혁명에 의해
퇴위할 때까지 부르봉왕조의 왕위가 지속되었다.

7월왕정 이후에도 샤를 10세의 가계는 계속되어
손자인 샹보르백작은 파리코뮌 이후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스스로 사양하여 83년 그의 죽음과 함께 정통(正統)은 단절되었다.
그러나 부르봉가는 앙리 4세 이래 여러 외국의 왕가와 혈연관계가 깊었다.
에스파냐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공(公)이 1700년에 왕위를 계승(에스파냐 왕
펠리프 5세)한 관계로 프랑스에서 왕정 폐지 후에도 부르봉왕조는 계속되어
1931년에 공화혁명으로 인하여 퇴위한 알폰소 13세가 최후의 왕이 된다.
이탈리아에서의 부르봉가는 나폴리 왕위를 계승하여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14)







(벽면 가득한 그림들..)

액자에 설명도 없고, 찾으려니 시간이 없어 일단 Pass!
오디오 가이드가 설명을 하지만 작품 하나 하나를 확인하기는 무리











(여긴 가족들 사진들을 모아 놓은듯.. )

마리 앙뚜아네트와 가족들인듯..
세번째 사진은 마리 앙뜨와네트와 딸 마리 테레즈, 아들 루이 샤를. 
제일 아래 사진은 '아름 광장에서 바라본 1722년 베르사이유 궁의 전경'
(피에르 드니 마르탱/Pierre Denis Martin, 1663~1742)





(The Grand Project or Grand Design)

베르사유의 모든 장식들은 권력의 상징이었으며,
1680년 초까지 이 마법의 성관은 기마 퍼레이드,
연극 [몰리에르 작『타르튀프』-(1664)의 상연],
오페라, 축제 [마법 섬의 환락(1664)],
군주와 외국 대사들의 회견 장소의 중심이 되었다.











(벽면 가득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첫번째 윗 그림은 Charles vii Roi de France
(샤를7세 왕의 초상/Henri Lehmann), 아래 그림은 Bataille de Formigny
(1450년 4월 18일, 포르미니 전투, 총사령관, 그리고 두번째 그림은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클레르몽의 백작의 승리/Prosper Lafaye)
두번째 그림은 Le roi LOUIS-PHILIPPE el sa famille Louis Philippe,
la famille royale et le roi Leopold Ier, visitant la grande
salle des Croisades du chateau de Versailles(Juillet 1844)
그림 찾기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려 PASS.









(여기도 조각상 들이..)

역대 왕과 장군들의 조각상이 있는 복도를 지나는데
HENRI DAGUESSEAU, LUXEMBOURG..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이름들..
처음엔 조각상을 카메라로 찍다가 너무 많아서 그냥 PASS했고 다음은
건성으로 보고 가다 그 중에 있었다던 루이 14세를 놓쳤다.















(Upper Chapel Vestibule)













(Hercules Drawing Room의 그림들..)

제일 윗 그림은 Feast in the House of Simon, 1570
(by Paolo Caliari called Veronese, 1528–1588)
두번째 천정화는 Apotheosis of Hercules 1733~1736 (ceiling)
(by François Le Moyne, 1688~1737)
마지막은 Rebecca at the Well second half of the 16th century
(by Paolo Caliari called Veronese, 1528~1588)





(Diana Drawing Room 천정화)













(Salon de Venus)

화려한 천정화로 유명한 비너스의 방
거의 모든 방은 천정화(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Gold doors, Venus drawing room)

베르사이유 궁전은 황금으로 장식되어 있다.
정문부터 금장을 하고 궁전내부에도 금 장식의 문들이 많다.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된 베르사이유 궁전은 금 장식을 한 구리,
청동, 대리석 등 고급스러운 재료들을 사용한 루이 14세 스타일의
화려한 건축물로서 일주일에 세번씩 사치스런 파티가 열렸던 장소.
뷔페연회가 열렸던 Salon de I'Abondance와 루이 14세 때 당구장으로 쓰인
Salon de Diane, 원래는 대기실이었으나 때때로 리셉션 장소로 쓰인
Salon de Mars, 각국의 외교 사절들을 접견하던 Salon d'Spollon,
화려한 천정화로 유명한 Salon de Venus로 구성되어 있다.









(전쟁의 신 미르의 방)







(Drawing room of Plenty, Chateau de Versailles)









(창으로 본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과 정원의 규모)

프랑스의 모든 건축은 앞쪽으로 건물을 세우고
정원은 건물 뒤편에 배치한다고 한다. 앞에서 보면 건물만 보이지만
건물에 들어와서 보면 뒤쪽으로 엄청난 규모(250만 평)의 정원이 숨어 있다.
베르사이유 궁전 정원을 한 바퀴 도는데만 며칠이 걸린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정원이 유럽 정원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태양왕을 상징하는 표상과 루이14세 조각상)

루이14세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재위 1643~1715).
태양왕이라고 불리었으며, 절대왕정의 대표적인 전제군주.
왕권신수설을 정립하고 왕을 또 하나의 교황 정도로 여길 수 있게 만들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을 지어 유럽 문화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재상제를
폐지하고 파리고등법원을 격화시켰다. 신교도를 박해하였고
화려한 궁정생활로 프랑스 재정 결핍을 초래하였다.













(전쟁의 방)

화려한 천장의 그림들과 다양한 조각품들이 눈길을 끈다.
한 쪽 벽면에는 타원 모양의 커다란 부조가 있는데, 말을 타고
적을 물리치는 루이 14세의 위엄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대형 전쟁화들도 전시되어 있다.





(궁전 내부에서 창문을 통해 본 어마어마한 정원)

창문밖으로는 하나의 소도시가 들어 설 만큼 넓은
250만 평에 달하는 드넓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화려함의 극치 거울의 방)

거울의 방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제일 유명한 방으로
전쟁의 방과 평화의 방을 연결해 주는 복도.
루이 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호화롭고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곳으로
베르사이유 궁전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 이곳에서 궁정축제와
중요한 행사를 열거나 외국 사신들을 접대 했다고 하는데 이후,
1783년 미국독립혁명 후의 조약, 1871년 독일제국의 선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이 베르사이유 조약
거울의 방에서 서명하는 등 국제적 행사 무대가 되었다.

1687년부터 1695년까지 8년에 걸쳐 망사르의 설계와 르브당의
장식에 의해 완성된 방으로 궁전 중앙의 2개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길이는 75m,폭 10.5m, 높이 12m의 넓은 방을 17개의 벽면으로
나누어 578개의 거울로 장식하였고 천장은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천장에 걸려있는 샹들리에는 찬란한 빛을
발산하고, 창문 맞은편에는 창문과 똑 같은 크기로 만든
거울이 장식된 아름다운 벽은 방의 크기를 2배로 키워준다.
거울의 방에서 정원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대형 아치로 된
창문의 수 만도 17개가 될 정도로 큰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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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의 방을 지나 이제 Peace Drawing Room)

베르사이유 궁전은 45년간 건축가의 건축과
수많은 장인이 만든 가구와 침대, 예술가의 작품들,
보석 세공가의 샹들리에, 정원사가 만든 도시만한 크기의
정원 등 궁전 자체가 최고의 예술품이 되었다.

이 궁전에는 루이 14세부터 15세, 16세,
그리고 혁명을 일으킨 나폴레옹까지 살았으며,
방도 왕의 방, 왕비의 방, 공주의 방, 평화의 방,
전쟁의 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의 방, 루이 14세 / 참고)





(마리 앙뚜아네트 / 참고)

프랑스 역사상 근대사의 상처를 가장 많이 간직한
베르사이유 궁전은 왕궁과 왕비의 궁전에는 부귀 영화의 덧없음을 알리는
호사스러움이 그대로 녹아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은 사치, 낭비, 향락으로
프랑스 혁명을 재촉한 것으로 지목되는가 하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당하게 폄하되고 마침내 죽임을 당한 비운의 여인으로 동정 받기도 한다.
38살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애 마지막 6개월 동안
남편과 4명의 자녀의 죽음을 지켜보는 비참한 운명을 거쳤다
그 운명의 여인의 삶이 아로 새겨진 베르사이유 궁전.











(왕비의 방, 마리 앙뚜아네트가 사용했던 방의 침대)

마리 왕투아네트가 사용했을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곳으로
로코코양식으로 꾸며져 있어 모든 가구들이 화려하다.
뒤로 보이는 작은 꽃 그림들은 장인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자수품이라고.. 이 방은 여왕들의 출산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젊잖고 검소하고 소심한 루이 16세와는 달리
마리 앙뚜와네는 사치스런 생활을 하다가 결국은 프랑스 혁명 때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왕비. 오스트리아 합수부르크 왕가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로 태어난 마리 앙뚜와네트는 15세에
정략결혼으로 프랑스 부르봉 왕조 황태자 루이 16세에게 시집왔다.
루이 16세와는 너무도 다른 성격과 성향 탓에 정상적인
부부로서의 생활을 하지는 못하였다고 한다.











(장식품이야 없어져도 건물 장식이야..)

프랑스혁명으로 가구·장식품 등이 많이 없어졌으나
궁전 중앙부, 예배당, 극장 등을 제외한 주요 부분은
오늘날 역사미술관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회랑, 화랑..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도..)

여기에 있는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가 나폴레용의 요청에 의해 그린 두번째 작품.
첫번째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작품은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첫번째 작품과 이 작품의 차이점은 아래 왼쪽 부분에 서 있는 여인들 중에
두번째 여인의 드레스 색깔.. 이 그림이 완성되어 갈 즈음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유배를 가게 되자 다비드가 약해진 왕권에 용기를 내어
평소 마음에 두었던 나폴레옹의 둘째 여동생의 드레스를 분홍색으로 그림으로써
공주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그림에 담은 것이라고 하는데
한 벽면을 가득 채우는 대단한 크기의 그림인데 어떻게
두 그림을 그렇게 똑 같이 그릴 수 있는지..

이 궁전에 나폴레옹의 그림이 있는 것은
루이 14세부터 15세, 루이 16세가 폐위될 때까지 살고,
이후 혁명을 일으킨 나폴레옹이 살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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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들.. 찬찬히 보고 싶지만 부족한 것은 시간..)











(흉상과 조각이 전시되어 있는 회랑을 지나)





(관람 끝, 그리고 베르사이유의 루이 14세)

루이 14세
'짐이 곧 국가'라며 절대 왕권을 행사했던 그도
말년에는 후계자로 세운 왕세자가 죽고, 후순위 왕위계승자도
갑자기 숨지는 변고를 겪었다. 맹트농 부인의 독살이라는 소문까지 무성했다.
자신도 지병으로 인한 고통과 암살의 공포까지 느끼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 증손자 뻘인 미래의 루이 15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닮지 말거라. 화려한 건축물에 마음을 쏟지도 말고, 전쟁을
좋아하지도 말아라. 이웃나라와 싸우기보다 화친하도록 애쓰거라.
늘 신을 경건히 섬기고, 백성들이 신을 편안히 섬길 수 있게
돕거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군주가 되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단다.'

루이 14세,
만물 위에 군림하며 자신을 만물을 생육하는 태양에
비견하며,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이 위인도 마지막에 가서야
이웃 나라와 화친해야 하고 백성을 섬기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종은 치고 막은 내려지고 있었다.
그의 인생은 희극이었을까 비극이었을까.
영광의 끝은 무엇일까?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한참동안 소나기를 퍼부었다)

영국으로 입국하는 날부터 계속 비가 내리거나
춥고, 바람도 많이 부는 등 일기가 도와 주지 않았다.
오늘은 다행히 비가 오지 않았지만 날씨는 겨울 날씨같이 스산하다.
관람을 마치고 정문앞 양지바른 곳에서 일행을 기다리다
차를 타러 가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져 내린다.
알 수 없는 유럽의 날씨. 빠리에서의 작별 인사인가 보다.

루이 14세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베르사이유 궁전? '루이 14세 양식'이라고 불리는 미술사적인 흔적?
아니면 융성했던 고전주의 문학과 초기 자본주의의 실마리?
그러나 더 중요한 유산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아닐까.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
어찌됐건 루이 14세 시대에 프랑스는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불과 백 수십 년 전만 해도 왕국 깊숙이 영국의 영토가 있고, 남부에는
독립 공국이 버티고 있으면서 지방마다 제각기 관습과 종교를 가지고 때마다
툭탁거리던 나라. 그 나라가 부르봉 왕조에 와서 하나의 국가로 정비된 것이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그 국가를 수립함과 동시에 왕조의 역량을
자기 대에서 대부분 소모해 버렸다. 따라서 후계자가 된 두 왕은
이미 자체적인 생명을 가진 프랑스 국가에 거추장스러운 존재!
그 허울을 걷어내고 '국민의 프랑스'를 만드는 데는
그가 죽은 뒤로도 70년이나 필요했다.

그가 죽자 백성들은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려온 해방을 주신
하느님 앞에 감사하며 크게 기뻐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러나,
그는 현시대 프랑스인이 존경하는 인물 3위에 오르며 새롭게 살아났다.
오늘날 그가 이룩한 베르사이유를 비롯한 문화유산들로 인해 이탈리아가
 문화대국, 관광대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한 이유일테고..


G. Bizet
L' Arlesienne, suite for orchestra No. 1
from the incidenta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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