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 / 화산재로 뒤덮힌 비운의 도시

2014. 9. 15. 23:27여행/여행기

 


폼페이, 화산재로 뒤덮힌 비운의 도시 
(2000여 년을 잠 자다 깨어난 로마의 도시)



○ 2014. 5. 14   날씨 : 햇살 따갑고 더움
○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 폼페이
 





어제 오후 피사를 출발하여 4시간 조금 더 걸려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인 로마에 입성했지만 로마투어에
앞서 오늘은 남쪽으로 내려가 나폴리 인근 비운의 도시 폼페이
유적을 돌아보고, 소렌토로 이동하여 카프리 섬에 들어갔다가
나폴리로 나와 로마로 복귀하는 빠듯한 일정이다.

로마에서 약 3시간 거리인 폼페이는 로마시대 잘 나가던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은 휴양도시였지만, AD 79년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뒤덮여
역사속에서 사라진 화석같은 도시. 당시, 폼페이는 BC 89년에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후 철저하게 로마화가 진행되었던 도시로 로마의 상류계급이
별장지로 선호했던 휴양지였다고 한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인 63년 2월에
대지진이 일어났지만 도시는 착실하게 재건되고 있었으나, 그로부터 16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자 하늘에서 비오듯 쏟아져 내린 엄청난 양의
흙과
돌은 순식간에 한 도시를 삼켜 버렸다. 이 폭발로 당시 폼페이
인구의 10%인 2,000여 명이 도시와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한다.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폼페이가 다시 등장한 것은 1592년.
폼페이를 가로 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건물과 회화 작품들이
발견되면서 폼페이의 소재가 밝혀졌지만 그 당시는 여건상 본격적인 발굴을
할 수 없었으나, 1748년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프랑스 부르봉 왕조가
약탈에 가까운 발굴로 아름답고 값 비싼 출토품만 발굴하여 프랑스 왕궁으로
실어 나르고 다시 나머지 유적들은 인정받지 못하고 사장되었다가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자 폼페이를 본격적으로 발굴하면서 도시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화산이 도시를
파괴하였지만 화산재가 지켜주어 옛로마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로 그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
현재 도시의 약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낸 상태.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드문드문)

나폴리를 지나 해안을 따라 폼페이로 가는데
우측 나폴리만에 카프리 섬이 나타났다.
폼페이가 가까워졌나 보다.







(Scavi di Pompei / 폼페이 유적지 입구)

현지인들은 폼페이 유적을 스카비(Scavi)라고 부른다.
서쪽에 위치한 유적지 입구, 북쪽과 동쪽입구도 있지만
대부분 관광객들은 서쪽 입구를 이용하는 듯..





(역사 속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

AD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있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나폴리 남동부에 자리잡고 있던 폼페이는
이 화산 폭발로 순식간에 많은 시민이 도시와 함께 화산재에 묻혀 버린다.
당시 로마 황제 티투스는 폼페이 참극에 대해 보고를 받고 곧바로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화산 분출물에 의해 도시는 완전히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로마 황제까지 나서서 폼페이의 몰락을 막아보려 했지만 폼페이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것.. 그러나 역사속으로 사라졌던
폼페이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





(마리나 문(Porta Marina))

당시 마을에서 항구로 통하던 길의 성문을 통해서 입성.
폼페이는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로서 각종 무역이 발달했다.
본래 이탈리아 남부는 해상 무역에 밝은 그리스 출신이 주도했고,
폼페이도 각지에서 들락날락하는 수많은 뱃사람과 외지인들로 붐볐을테고
당연히 상업이나 문화 활동이 성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길로 마차들이 들어와 배의 짐을 옮겼다고 한다.
마차길 바로 옆에는 사람들이 다니는 인도가 있었다.
그 당시 차도와 인도가 구분되어 있었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바 없는 문명을 이룩하고 살았던 것





(2000년 전 포도를 따라)





(포로(FORO) 공공 광장에 들어서자 )

하늘을 찌를듯 우뚝한 도리아식 대리석 기둥들이 맞이한다.







(시가지 중심가, 주도로 모습)

도시 안으로 들어서면, 로마가 자랑하는 도로의 실체가 드러났다.
마차가 자유롭게 다니면서도 사람들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는 건널목,
말을 묶어둘 수 있는 장치, 그리고 항상 깨끗한 물을 제공하는 공동 수도 등.
복잡하고 번화한 도시에서 많은 시민이 같이 살 수 있게 한 시스템이 인상적.
이 도로를 따라 짐을 실어 나르고, 사람들이 어울려 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과거와의 만남이 절로..







(대리석 조각으로 모자이크한 바닥과 벽 모습)





(길에는 친절하게 야광표시까지..)





(이 길로 쭈욱가면 어디?)

폼페이 원형극장 가는 길.
길과 건물들이 참으로 정갈하게 잘 정비되되어 있다.
양쪽은 상점, 제일 번화가. 유럽이 이런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AD 3)하고,
 김수로왕이 금관가야 건국(AD 42) 한 시기..





(대문, 미닫이 문틀의 홈?)

대로로 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좁은 길로 들었다.

 





(Terme Stabiane(스타비아네 욕장))

목욕탕 문화가 발전한듯 폼페이 시내에도
여러개의 대중 목욕탕이 있었다는데 스타비아네 욕장은
AD 62 폼페이 지진 이후에는 사용을 못했다고 한다.

무너진 담 너머로 훑어 보고 PASS..

 








(높다란 벽으로 둘러쳐진 좁은 골목길..)

인산인해를 이루며 가고 있는 이 곳은 어딜까?
바로, Lupanare!(매춘집)
 











(그림은 온통.., 19금)

베수비오 화산 폭발은 끔찍한 사건이지만
한편으로 이 비극적인 사건이 고대 로마 전성기의 생생한 현장을
보여주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 2000년 전 고대 로마 사람들..
일부 귀족들이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생활 모습과 환락가 등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를 찾다 보니 폼페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도시로 여겨졌다. 매춘집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유물중 상당수는
벽화로 또는 조형물로 표현한 것들이 많았다. 특히 폼페이를 비롯해
화산 폭발로 사라진 폼페이의 벽화와 유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는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Naples 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은 아예
19금에 해당하는 유물들을 별도로 보관 전시하고 있는 곳도 있었다.
이는 폼페이가 화산재로 멸망한 이유가 폼페이인들이
타락한 것에 대한 하늘의 징벌이라고 하기도 한다.
폼페이는 엄청난 향락과 환락의 도시였던듯..





(골목으로 빠지는 Lupanare 뒷문)

Lupanare 정문 맞은편에는 병원이 있었다.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했을테니까..





(26)







(그 당시 이런 수도관이 집집마다 수돗물을 공급했다니..)





(벽의 모습.. 돌로 쌓고 회반죽을 바르고..)







(공동 우물, 석조물을 고정한 이음쇠)

폼페이 시내 곳곳에 이런 우물이 있었는데..
돌을 고정하는데 이런 쇠와 납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우물은 사람들이 잠든 밤에 도로를 깨끗하게 씻고
청소하는 용도로도 사용했다고..











(폼페이 뒷 골목 모습..)

정교하게 잘 계획된 도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좁은 골목길 마저 일직선으로 뻗어 있고
인도와 차도가 구분되어 있다.









(큰 길은 큰 길 대로..)

시원하게 뚫린 도로가 참 인상적이다.





(남성 심볼 모습으로 도로 안내를..)









(에우마키아(Edificio Eumachia)건물 문 입구의 화려한 문양)

포로의 동쪽에 있는 에우마키아(Edificio Eumachia).
건물의 입구는 62년 폼페이 지진 이후 벽돌로 재건된 것으로
이 문을 들어서면 넓은 안뜰이 나타난다. 과거 이 건물이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아마 양모시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건물 문 입구에 있는 문양은.. 폼페이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리석 조각 장식이라고 한다.









(43)









(44)





(Terme del Foro(포로 목욕탕), 테라스와 정원)

로마하면 역시 목욕탕 문화를 빼 놓을 수 없듯
로마의 중요한 유적지를 가면 항상 공중 목욕탕이 있다.
폼페이에도 몇 개의 목욕탕(Terme, 떼르메) 유적이 남아있지만
62년에 있었던 지진이후 공중목욕탕으로 사용되던 곳은 이 곳
포로 욕장(Terme del Foro)이 유일하다고 한다.







(채광 창.. 아래는 사람의 형상까지..)

채광 창으로 빛이 들어오면 형상이 뚜렷이 드러나는 부조까지..
창문의 크기가 작은 것은 열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벽 테두리 장식.. 구석구석까지..)

벽은 부조와 채색.. 디테일한 장식으로 아름답게 꾸며 놓았다.
바닥은 대리석 조각으로 모자이크로 처리하였다.







(목욕탕 수조.. 지금 목욕탕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

목욕탕 내부가 오늘날 욕장과 거의 흡사하다.
남탕과 여탕 온탕과 냉탕 탈의실 등으로 구분된 모습이
놀라움을 자아 내게 한다. 둥근 모양은 냉탕인듯..
또한 로마시대 목욕장은 단순히 몸을 씻는 기능 외에
사교장으로의 기능이 있었다고 한다.




(때밀이 침대가 아니고 청동화로..)

사우나.. 방을 따뜻하게 데워주기 위한 화로인듯..







(천정을 지탱하고 있는 아틀라스 모양의 조각상..)

탈의실과 보관소도 갖추고 있다.
각각 다른 모습의 조각상은 락커 번호의 개념이라고..









(목욕탕 천정의 모습)

로마 대중이 즐겼다는 목욕탕은
지금의 목욕 시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장을 통해
자연 채광이 되도록 하고, 뜨거운 물방울이 옆으로 흘러 내리도록 하고,
시원한 물이 나오는 분수대가 옆에 놓여 있다. 오히려 차가운 물방울이
머리위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온탕의 천장은 돔형으로 만들고
빗살 무늬로 골을 파서 물방울이 양쪽 벽으로 흘러 내리도록 설계..
로마시대의 목욕탕 문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2000년 전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


우리는 그림이나 옛 문헌, 때로는 돌 위에 쓰인 메모를 통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추측한다. 상상의 나래를 펴고 과학적
분석과 고증을 바탕으로 퍼즐 맞추듯 짜 맞추어 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생활 방식이 변화하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현 시대 아파트가 일반화되어 생활하지만 수천 년이 지나면 주거형태가
어떻게 변할지도 모르는 일.. 아파트를 상상하기도 어려울 때
만일 과거 형태(아파트)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많은 세월이
흘렀더라도 눈 앞에 보이는 현상으로 당시의 생활상 자체를
연구하고 입증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목욕탕 맞은 편에는 슈퍼(?)가 두 집 있었는데..
한 집은 장사가 잘 되고 한 집은 장사가 안되었다고..
그 때나 지금이나 목도 좋아야 하지만, 오히려
목 보다는 서비스가 좌우한듯..





(62)







(가림막을 쳐 놓고 그림만 달아 놓았다.)











(베수비오 화산, 그 날은.. / 빌려 온 자료)

하늘이 화산재가 암흑세상을 만들었으리라..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있는 1,281m의 유럽대륙 유일의 활화산.
79년 8월 24일 정오.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에 우뚝 솟아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돌연 폭발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검은 구름이
분출되면서 화산이 분화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화산은 엄청난 양의
화산재와 화산분출물을 뿜어내면서 인근 도시로 쏟아져 내렸다.
이 때 Pompey 인근의 휴양도시 stabiae, oplontis도 함께
화산력과 화산재에 매몰된 것으로 알려진다.







(발굴과 복원작업은 계속된다. / 빌려 온 자료)

























(폼페이에서 발굴하여 복원한 그림들..)

발굴된 폼페이의 많은 벽화를 통하여
유품이 적은 헬레니즘 회화를 엿볼 수 있다.
그림은 현지 및 나포리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 Wall Painting From Pompeii, Medea Against Blue Blackground,
2. Wall Painting From Pompeii, "Flora" Woman Picking Flowers,
3. Wall painting of the baker Terentius Neo and his wife,
From the House of Terentius Neo, 4. Europa on the bull,
5. Perseus And Andromeda, 6. ?, 7. ?, 8. Sappho,
9. House Of Titus The Three Graces, 10. Isis, Fresco
depicting the arrival of Io at Canopus, 11. ?
(사진 출처 :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

 












(Casa dei Vettii, 베티의 집 / 빌려 온 자료)

House Of The Vettii, 폼페이 유적 중 파우니의 집,
큐피드의 집 등 당시 부유한 귀족들의 저택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호화로우며 보존상태가 좋은 집으로 상인 부호
베티우스(Vettius, Vettio) 일가의 주거지로 방마다 장식한
벽화는 소위 제4양식(62~79)의 대표적인 예이다.

베티의 집은 고대 그리스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기둥과
대리석 수영장, 오리를 안고 있는 큐피드 동상으로 유명한 저택.
1세기 초 폼페이의 부호 베티의 집으로, 아름다운 프레스코
벽화가 실내를 장식하고 있어 폼페이의 어떤 저택보다 아름답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기 17년 전인 서기 62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진 것을 복원한 베티의 집은, 안뜰에 있는 기둥과
조각과 함께 여러 개의 방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가 유명하다.
큐피드가 일하는 모습을 비롯하여 신화 속의 멋지고 극적인
장면을 그려 놓았는데, 원근법을 잘 활용하고 있어 당시
로마인들의 뛰어난 예술성을 엿볼 수 있다.







(발굴하여 복원한 폼페이의 모습)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순식간에 폼페이는 폐허가 되었다.
전혀 예측도 못했기에 미처 피할 수도 대비할 수도 없었다.
그냥 평상시처럼 삶을 영위하다가 갑자기 당한 것이다.
그 후 화산재 속에서 2천년을 묻혀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었고,
발굴로 실체가 하나씩 드러났다. 천재지변으로 묻혀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러했기에 그 형태를 보존할 수 있었다.

비록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고 시일이 가면서
훼손되었지만, 그 당시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폼페이가 역사의 소중한 유적이 된 배경이다.













(폼페이 최후의 날, 처참한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들..)

그 날 얼마나 빠르게 화산재에 묻혀 버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각양각색인 사람들의 모습..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를 한듯한 모습도 보인다. 이런 형상들은 화산재 사이에
구멍을 뚫고 석고를 부어넣은 방식을 개발하여 형태를
그대로 살릴 수 있었다고 한다.







(중요 발굴품은 나폴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조금 덜 중요한 유물들은
이 곳 현지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2000년 전 유물들.. 현재까지 도시의 5분의 4가 모습을
드러난 상태로 발굴은 계속 진행중..









(75)







(포로(Foro), 공공 광장))

이 곳이 바로 공공 광장인 FORO.
신전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건물들이 모여 있었던 곳으로
바실리카와 아폴로 신전, 시장, 성당, 욕장 등 여러 공공
건축물들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기둥과 담, 제단,
비석 정도만 남아 있는 상태. 남아 있는 기둥들과 벽으로나마
로마 시대 신전의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FORO에서 전면에 보이는 베수비오 화산은
그 날의 참상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베수비오 화산은
현재 유럽대륙에서 유일한 활화산이라고 한다.









(북쪽 방향에 우뚝한 베수비오 화산이..)





(성벽으로 폼페이를 둘러 쌓는데..)

한변의 길이가 2km나 될 정도로 큰 도시였다고..





(2시간도 못 보다니.. 맛만 보고.. )

타임머신을 타고 2000년 전으로 돌아가 로마시대를
보고 온 것 같다. 로마시대의 생활상이 부분적으로나마 생생하게
느껴진다.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폼페이 극히 일부분 밖에 보지
못해 아쉬운 맘이야 말할 수 없지만.. 아이러니 하게 화산으로
망한 도시를 2000여 년을 화산재가 잘 보전하여 준 결과, 현재에서
그 때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큰 의미로 다가온다.

계획된 도시, 잘 뻗은 포장도로, 상수도 시설, 공공시설 등
인프라가 잘 구성되어 있었고 시민들을 잘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 때도 지금의 생활상과 큰 차이가 없게 보인다. 희로애락이 있고,
어울림이 있고, 공동체 속에서 같이 살아가기 위해 지혜를 짜낸다.
누군가 "로마 문명 이후 우리가 새로 발명한 것은 별로 없다"라고 한 말이
공감이 된다. 로마시대의 시스템은 지금보다 나은 면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 비운의 도시 폼페이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오버랩되는 것일까?

유럽 여행을 계획한다면, 추천하고 싶은 곳.
더운 지역이어서 여름은 피해야 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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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ubert 
Impromptus D 899 Op.90
No.3 in G flat major An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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