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4. 10. 20. 23:24여행/여행기

 


로마,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생은 짧고 역사는 유구하다)


○ 2014. 5. 15   날씨 : 맑았다 먹구름
○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시국)




 

"내일 밤은 마침내 로마다.
나는 지금도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이 소망이 이루어지면 그 후에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괴테가 나이 37세 때 감행한 이탈리아 여행길에서 이렇게 적고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고 한 말이나
프랑스 시인 라 퐁텐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지금도
사람들 가운데 빈번히 회자되고 있다. 로마는 단순히 여행지를 넘어서서
역사의 장관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는 인류사의 보고이다. 수천년
옛 제국의 향기가 가득한 로마에 왔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이자 라치오 주의 주도로,
테베레 강 연안에 있다. 한 때는 서양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로서
 로마 제국의 수도였고,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는 로마 가톨릭의 중심지였다.
그 역사 덕분에 전 세계 문명사회에서는 로마를 가리켜 '세계의 머리,
'영원한 도시(la Citta Eterna)'라고 부른다.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여름에는 고온건조하다. 2013년 현재의 인구는 약 286만명.
로마 시내에는 교황이 다스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인
바티칸 시국이 자리잡고 있다. 법적으로는 엄연히 외국이지만
 역사·종교·문화적으로 이탈리아, 특히 로마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로마의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지역은 거리가 좁고 대부분이 테베레 강
동쪽에 위치해 있다. 로마의 과거 영광의 흔적인 기념 석조물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있다. 로마는 지붕없는 박물관이라고 할 정도로
역사적 유물도 많지만.. 그 외에도 로마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으니 바로
오드리 햅번 주연의 '로마의 휴일'. 젤라또를 입에 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영화를 지배할 정도로..
오늘은 설레임으로 그 로마를 만나러 간다!!









(idea HOTEL)

바티칸 입장을 위해 줄을 선다고 일찍 호텔을 나섰다.





(교황이 다스리는 나라 바티칸 시국)

아침 일찍..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1시간 반동안 담벼락 밑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 입장했다.
보통 2시간은 줄을 서야 한다는데 다행이었다.









(바티칸에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감탄스러웠고 경이적이었다!! 위에서부터
 지도회랑의 천장화.. 정말 화려함의 극 극치,
미켈란젤로의 걸작중의 걸작 피에타,
베르니니의 작품 성 베드로 주교좌





바티칸 바로가기 ☞ 사진 클릭

(나라 규모는 최소, 영향력은 대단한 바티칸 시국)

이탈리아의 로마 북서부에 있는 가톨릭 교황국.
바티칸시(Vatican city)라고도 불리며,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성베드로 대성당,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있는 교황궁(Pontifical Palace)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세계 가톨릭교회를 통괄하는 가톨릭 교회 최고통치기관인 교황청 소재지.
하나의 국가이지만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고, 소수의 스위스 근위병이
경비를 서고 있다. 국명은 그리스도교 발생 이전부터 전해져 오는 말로,
티베르강(Tiber R.) 옆에 위치한 '바티칸 언덕'을 뜻하는
라틴어 '몬스 바티카누스(Mons Vaticanus)'에서 유래한다.

19세기 이탈리아가 근대 통일국가로 바뀌면서 교황청 직속의
교황령을 상실하게 되자, 1929년 라테란(Laterano) 협정을 통해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지역에 대한 주권을 이양받아
안도라, 산마리노와 함께 세계 최소의 독립국이 되었다.





(로마의 길 한모퉁이에서..)

여행을 꿈 꾸는 사람은 많지만
여행은 떠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가까이 가든 멀리 가든 여행은 마음이 생길 때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여행은 몇 가지가 조건이 맞이야 갈 수 있는데
그 중에 중요한 것은 건강일 것이다.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생긴다고 해도 힘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것이 여행이니까.
인생 교훈인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힘이 될 때가 많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진실의 입)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는 헤라클레스 신전터 위에
6세기 때 세워진 것으로 종탑은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이 교회의 현관 왼쪽에는 강의 신 플루비우스의 얼굴을 부조한
둥근 돌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여행객들의 눈길을 끄는 진실의 입.
이 진실의 입에 손을 넣고 거짓진술을 하면 강의 신 홀로비오가 손을 삼켜
버린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중세 때 이를 악용한 일부의 영주들은
반감이 있는 사람에게 손을 넣게하고 몰래 뒤에서 손을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산타 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의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지름 1.5m 진실의 입은..
하수도 뚜껑으로 사용하던 것이라고..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 바닥 모자이크)

이 교회는 진실의 입 때문에 유명하기도 하지만,
발렌타인데이의 원조가 되는 Saint Valentine의 유골이 있는
 곳이라고 하니 역사성도 있는 교회인듯.. 교회는 아담하고 조용한데
교회 바닥 모자이크나 기둥, 주춧돌 등은 재활용(?)을 한듯..
일부러 다르게 한 것 같지는 않는데
모두가 각각이어서 이색적이었다.





(캄피돌리오 언덕 가는 길)

로마는 적어도 일주일은 시간을 준비해 와야할 것 같다.
물론 보름을 가지고 오면 더 좋겠고.. 로마를 유유자적 걸으며
이곳 저곳 기웃거려 보고 싶다. 오늘은 60유로를 주고 벤츠 택시로
시내투어를 하니까 편리하고 시간이 절약되기는 하다만
그래도 걷고 싶다. 그럼 시간이 안되나??





(곳곳에서 만나는 배낭객들.. 부럽다.)

나름대로는 스케쥴이 있겠지만
자유여행이니까 우리 만큼은 빠듯하지 않겠지?
 로마는 스쳐가는 곳이 아니라던데..







(Michelangelo Buonarroti Piazza Campidoglio)

고대 로마의 발상지로 전해지는 7개 언덕중 가장 존엄한
캄피돌리오 언덕 한 모퉁이에 미켈란젤로의 구상으로 1547년에 건설되었다.
캄피돌리오 언덕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광장은 교황 바오로 3세의 위임을 받은
미켈란젤로가 투시법을 절묘하게 사용하여 설계한 작품. 광장에는 오른쪽에
콘세르바토리 궁(1564∼1568), 왼쪽에 누오보 궁(1644∼1655), 그리고 중앙에
세나토리 궁(1592년 완성)이 있는데 왼쪽과 오른쪽 건물은 서로 평행이 아니고
83도 각도로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어서 광장은 실제보다 더 넓게 느껴진다.
이 광장은 코르도나타라고 하는 계단을 통하여 진입하게 되어있다.
이 계단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인 스페인의 카를로스 5세의 입성을 위하여
미켈란젤로에 의해서 설계되었으나 황제는 이 계단이 완성된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계단이 시작되는 부분에는 이집트의 사자상이 입구를 지키고 있고, 계단이 끝나는
부분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이 말에서 내려 서 있는 거대한 석상이 있다.
조화를 위하여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할수록 넓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광장 중앙에는 로마의 賢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청동 기마상이 있다.
광장과 건물의 디자인은 그 수법의 독창성과 공간통일의 탁월성으로
미켈란젤로의 가장 뛰어난 건축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S.P.Q.R, 세나토리오 궁전과 아우렐리우스 기마상)

S.P.Q.R은 라틴어 문장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약자로,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을 뜻한다. 이 말은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부를
이르는 말이었으며, 로마 정부의 공식 표어로 쓰였다. 이 말은 주화,
그리고 돌이나 금속으로 된 국가 비문에 끝부분, 공공 사업이나 기념물의 헌정문,
로마 군단의 군단기에 나온다. 이 문구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연설문이나
티투스 리비우스의 역사서 등 로마의 정치, 법, 역사 문헌에서도 수없이 등장한다.
 S.P.Q.R은 오늘날 로마 시의 모토이며, 이 도시 문장으로,
시내의 수많은 공공 건물, 공공 분수, 맨홀 뚜껑에서도 보인다.

광장에 서 있는 고대로마의 아우렐리우스 청동 기마상은
기원 166~180년의 제작. 본래는 전체가 도금(鍍金)되어 있었다.
중세기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상이라 오인된 덕분(?)에 
파괴를 면했다고 한다. 1538년 교황 파울루스 3세(Paulus Ⅲ, 재위 1534~49)의
의향으로 로마 시내의 라테라노 광장에서 이 곳으로 옮겨져,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캄피돌리오 광장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높이 424cm. 르네상스 이후 모든 기념 기마상의 범례가 되었다.
광장의 기마상은 복제품. 진품은 카피톨리아 박물관에 있다.




(세나토리 궁을 오른쪽으로 돌아 나오면..)











(Foro Romano(로마 공회장))

세나토리오 궁전 뒤쪽 좌우에 설치된 테라스에 서면
언덕 아래로 넓게 펼쳐지는 포로 로마노(로마 공회장) 유적지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도시 생활의 구심점을 이루는 장소로 주변의 언덕들이
마주치는 곳이어서 도시를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
공회장(Foro)은 신전,
바실리카(공회당), 기념비 등의 건물들로 구성된 도시 공간으로
공공생활을 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었다. 나중에는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약 1,000년 동안 로마제국의 심장 역할을 했다. 283년 화재로 파괴된 후 복구되긴 했으나
중세 이후로는 이 공회장의 건물들을 헐어 건축자재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1871년 발굴작업을 본격화했다. 한 때는 막강했던 위엄있는 건물들이
지금은 거의 폐허가 되었지만, 아직 흔적이 남아있는 유적을 통해
로마의 영광을 되새겨볼 수 있다.

최고 권력자 카이사르가 믿었던 브루투스에게 칼을 맞고 쓰러지며
"브루투스 너 마져도!"하고 소리치며 죽어갔던 곳이 이 포로 로마노의 원로원이었다.
역사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와 소멸의 과정을 거쳐 다시 부활하는 것일까?
포로 로마노도 그 오랜 세월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다가 19세기에 비로소
발굴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이탈리아가 조상 덕에 산다고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조상의 빛난 유산을 잘 되살리고 보존하여
오히려 역사 속에 사라져간 고대 로마와 조상들을
더욱 영화롭게 하며 살아가고 있다.









(Foro Romano(로마 공회장)의 구성도)

1.원로원  2.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  3.로스트리 연단
4.??  5.비아 사크라  6.사투르노 신전  7.포카 황제 기념 원주
8.율리우스 시저 공회당  9.에밀리아 공회당  10.율리우스 시저 신전
11.카스토르와 폴룩스 신전  12.??  15.안토니노 파우스티나 신전  16.??
17.로물루스 신전  18.?? 19.막센찌우스 공회당  20.콜로세움
21티투스 황제 개선문  22.팔라틴 언덕





(미네르바 광장의 아기 코끼리 등의 오벨리스크)

이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6세기 경에 만들어져
이집트 이시스 신전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인데 미네르바 성당을
개축할 때 발견되어 코끼리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이 코끼리는
베르니니가 스케치한 것을 그의 제자 페라타가 제작하였다고 한다.
광장에는 로마의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전쟁과 지혜의 신인 미네르바를 기념하여
신전을 세웠는데 세월이 흘러 신전이 허물어 지자 1280년 미네르바 신전 위에
이 성당을 지어 '미네르바 신전 위의 산타 마리아 성당(Basilica di Maria
sopra Minerva)'라는 긴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성당을 지을 때
로마에서는 보기 드문 고딕양식으로 지어 유명했는데 계속 증개축을
하여 지금은 여러 시대의 양식이 복합되어 있다고 한다.





(미네르바 성당 벽에는 침수 흔적들이..)

로마도 홍수로 도심이 침수되는 일이 많았던듯..
침수 자국이 있는 곳에 침수 시기를 기록해 놓았다.







(로마의 만신전 판테온)

판테온은 그리스어의 "모든 신들"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로,
한국어로는 범신전(汎神殿), 만신전(萬神殿)으로도 번역된다.
모든 신을 위해 지은 신전의 의미. 이런 의미에서의 판테온은
주로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판테온은 본연의 역할을 잃어버렸다.
인본주의적 풍토의 르네상스 시대를 거친 뒤의 16세기에는
종교적 건물뿐만 아니라 위인들을 모신 건축물에도
판테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의 8개 기둥)

 코린트 양식은, 도리아 양식과 이오니아 양식 이후에 발생한
주식(柱式)으로 가장 화려하다. 기둥의 머리에 아칸서스 잎을 2단으로
부조 조각하여 두르고, 그 상부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장식을 첨가하였다.
이 양식은 익티누스(Iktinus)가 처음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코린트 양식을 최초로 도입한 건축은 기원전 500년의 바세신전이며
그리스 후기와 로마 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다.









(하늘의 구멍과 바닥의 구멍)

하늘의 구멍은 채광, 환기구.. 바닥의 구멍은 배수구..

 













(판테온(PANTHEON))

원형 본당의 안지름과 천장의 높이는 똑같은 43.2m,
벽의 두께 6.2m. 북측 입구에 코린트식 8주 전주식의 돌출랑이 있으며,
기둥 높이 12.5m. 당 내부에는 제우스 아폴론 아르테미스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등
다신교였던 로마의 중요 신들을 위한 7개의 방이 있다. 돔의 내측은 원래 천창 부분을
제외하고는 28열의 방사상 격간으로 덮여 있고, 각각의 격간은 5단으로 되어 있다.
채광은 돔 정상에 설치된 지름 9m의 천장의 창뿐이며, 벽면에는 창문이 없고,
본당의 외형에는 장식이 없다. 그 수적 비례의 미와 강대한 내부 공감의 창조라는
당시의 경이적인 토목기술로서 서양건축사상 불후의 명작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판테온의 돔 건축 방식을 차용해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건축한
브루넬레스키는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가로 인정받았다.







(판테온 주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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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비 분수 가는 길의 풍경)

로마는 세계 각 국에서 수많은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관광명소로 향하는 골목길은 거의 떠밀려 가다시피 한다.
2013년 로마를 찾은 여행객이 670만(소스 : 비자카드).
세계 13위, 생각보다는 적은 것 같다.







(트래비 분수 주변 거리 풍경, 야외 카페들..)









('로마의 휴일'로 잘 알려져 있는 트레비 분수)

트레비 분수에 가면 전 세계 동전을 모두 볼 수 있다.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어도 좋은
이야기로 인해 어쨋거나 하루 평균 분수로 던져지는
동전은 3천 유로(500만원)
트레비 분수는 가만히 앉아서 수입을 올린다. 다행인 것은 분수에 던져진 동전은
교황청 산하의 국제기구에서 에이즈 환자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데 사용한다고..
'트레비 분수에 던져지는 동전의 달콤한 거짓말이나 또는 1953년에 제작된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펙의 '로마의 휴일' 영화까지,
모든 이야기는 전설이 되고 낭만이 되고, 그리고 추억을 새긴다.
트레비 분수는 사진 한 장 제대로 찍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여행객들이 붐비는
로마의 명소.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트리톤, 해마 등의
조각이 배치돼 있다. 분수의 조각상은 밤에 조명이 들어와
야경은 또다른 볼거리를 보여준다고 한다.







(스페인 계단에서 먹는다는 아이스크림은 여기서..)





(스페인 계단을 가려는데 하늘에는 먹구름이..)









(로마의 휴일이 생각나는 '스페인 계단')

'스페인 계단' or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의 계단'.
1600년경부터 이 주변은 로마 최대의 호텔 밀집 지역으로
항상 여행객들과 집시들로 붐볐다고 한다. 당시 이 광장 주변은
스페인 사람들을 중심으로 프랑스인 등 외국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으로 호텔과 상점이 늘어선 번화가였다고 한다.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은 17세기에 교황청 스페인 대사가 이곳에 본부를 두면서
 '부르봉(Bourbon)' 왕가의 스페인 대사관과이 광장을 '스페인 광장'이라 부른다고..
이후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콘도티 거리, '코르소 거리', '메르세데 거리'의 일부가
스페인의 영토여서 한 때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면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이탈리아 사람들과 달리 예외적으로 통행할 수 있었는데
이는 광장 위에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이 프랑스 소유였기 때문.
아마 19세기 인천이나 상해에 있던 '조계(租界)'의
외국인 치외법권지역과 같았던 것 모양..

이 곳 스페인 계단은 오늘날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영화 속 명소 중 최고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한 편의 영화 '로마의 휴일'이 만든 힘은 실로 엄청난 것 같다.
영화를 본 사람이든 아니든 세계인이 이 계단으로 몰려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곳은 로마시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약속장소이자 로마를 찾는
여행객들이 '모이는 장소'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계단이 아닐까 싶다.
로마는 모든 지난 이야기들이 전설이 되고 낭만이 되어,
이어져 오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다.







(ROMAN holiday(로마의 휴일))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에서
오드리 햅번이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곳은 13번째 계단.
이 장면 이후 반세기가 훌쩍 넘은 얼마전까지도 사람들은 계단 주위에
즐비하게 늘어선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엄청 비싸게 산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오드리 헵번이 된듯 낭만(?)을 즐겼지만.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옛말..
로마 도심규제법이 시행됨에 따라 '스페인 계단'에서는
아이스크림과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금하고 있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은
오드리 햅번과 그레고리 펙이 주연한 '윌리암 와일러'감독이
1953년에 제작한 영화. 1950년대의 이탈리아는 아직 2차 대전의 여운이 남아있는
가운데 아직 모든 것이 넉넉치 못하고, 고대 문화 유적들이 아무렇게나 뒹구는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미국인들에게는 만만했던듯..
미국인들은 이러한 로마와 이탈리아 여행에 열광했던 것 같다.
영화 '로마의 휴일'은 이탈리아 여행의 낭만적 상상과
욕망과 쾌락이 넘쳤던 시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여기가 스페인 대사관(?))

스페인 국기와 스페인 왕가 휘장이 달려 있다.
계단도 스페인 계단 도로도 스페인街.. 여기는 로마속의 스페인.
스페인은 16세기와 17세기 대부분에 걸쳐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와
식민지 무역으로 쌓은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남아메리카와 중앙아메리카, 멕시코,
오늘날 미국 남서부 지방에서부터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까지 차지했다.
1580년부터는 지금의 포르투칼 영토와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는 물론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의 전체 혹은 일부 영토를 정복하고
스페인의 영향력이 북부 아프리카까지 미치게 된다. 스페인 제국은 이 때부터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라는 별칭을 얻게되어 "스페인이 움직이면
전 세계가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였다고 하니..





(자유분방함 속의 질서(?))









(Trajan's Column(트라야누스 원주))

트라야누스 황제의 승전 기념비로 로마 포룸 북쪽의
트라야누스 포룸 유적지에 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재위 98∼117)가
다키아 전쟁(101~102, 105~106)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여 세운 도리아 양식의
기념비로 113년 완성하였다. 원로원의 명에 따라 다마스쿠스 출신의 건축가
아폴로도루스(Apollodorus)가 감독하여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을 포함한 높이가 35m, 탑신의 높이 30m, 탑신의 지름 3.7m.
까라라産 대리석을 사용하였으며 탑신 내부에 185개의 나선형 계단이 있다.
원주 표면 가득히 다키아 전쟁에 관해 나선형으로 돌아가며 부조로 표현했다.
총 길이가 190m에 이르는 부조가 탑신을 23회나 감아 올라간다.
고대 동전에 담긴 내용에 의하면, 원주 꼭대기에 청동 독수리상을
설치하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트라야누스의 청동상을 놓았다.
중세시대에 트라야누스의 청동상이 사라졌으며 1587년 12월 4일
교황 식스토 6세의 명으로 복원하면서 성 베드로의
청동상으로 교체되었다.









(베네치아 광장,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일명 비토리아노라고 불리는 이 거대한 기념관은
베네치아 광장의 분위기를 압도한다. 이 웅장한 백색의 석조건물은
이탈리아의 통일을 기념하여 사코니의 설계로 1885년에 착공하여 40년만에 완공.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는 수많은 도시국가들로 난립해 있었는데
사르데냐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외세를 아내고 통일의 기반을 조성. 
이탈리아 초대왕이 된 후 통일을 완성하고 '조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이 기념관은 통일의 구심점이 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바쳐진 것이다.
계단 양쪽에 있는 2개의 분수는 이탈리아 반도를 둘러싼 바다를 상징하고,
키아라디아가 제작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기마상이 계단 한가운데에 있다.
이 기마상을 받치고 있는 부분에는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들을 상징하는
형상들로 채워져 있는데 이는 막키니의 작품이다. 이 기념관의 내부에는
이탈리아 통일역사연구소, 도서관, 통일박물관 등이 있다.







(콜로세움 가는 길)

차창으로 조금 전에 들렸던 세나토리 궁이 나타났다.
멀리서 보니 궁으로 올라가는 코르도나타 계단입구의 사자상도 보인다.
진실의 입으로 유명한 산타마리아 인 코스메딘 교회를 지나서
콜로세움에 가는 길인데.. 구름이 끼기 시작하던 하늘은
당장이라도 소나기를 쏟아부을 것 같은 기세다.







(팔라티노 언덕과 대전차 경기장)

고대명은 몬스 팔라티누스(mons Palatinus[라틴어]).
'로마의 일곱언덕' 중 하나로 포로 로마노를 사이에 두고
카피톨리노 언덕과 마주보고 있는 로마 발상지. 신화전설에 의하면,
알바 론가의 왕녀 레아 실비아는 왕위를 빼앗은 숙부에 의해 웨스타 여신의 무녀가 되었으나,
군신(軍神) 마르스와 통정하여 쌍동이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를 낳게된다.
쌍둥이는 어미가 저지른 파계의 죄로 상자에 넣어져 아니오 江(아니에네 江)에 던져졌으나,
그 상자가 티베리스 江(테베레 江)을 떠내려 가다가 팔라티누스 언덕의 기슭에서 건저져,
두 아이는 늑대의 젖으로 길러졌다. 그 후 한 목자에 의해 성인이 된 후 어미의
원수를 갚고 이 언덕에 시가지를 세웠다. 이것이 로마 발상지의 단초가 되었다.
16세기에는 파르네제 家의 빌라가 있었고 19세기에 겨우 발굴됐다.
현재에는 도무스 아우구스티아나, '리위아의 집', 도무스 프라위아, 도미티아누스의
스타디움 등 제정로마 시대의 유구(遺構 : 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가
즐비하다. '리위아의 집'은 아우구스투스의 거주지였다는 설이 유력하며
세 방에 벽화가 있다. 이 언덕 위에는 작은 미술관이 있는데
여기서 발굴된 것들을 진열하고 있다고 한다.





(오렌지 정원은 차를 타고 가면서 패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선문(Arco di Constantino))

콘스탄티누스 1세의 즉위 10년을 기념하여
원로원이 세웠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가 312년 로마에 진군할 때,
대낮에 십자가와 "이것으로 이겨라"라는 환상을 전군과 함께 보고
막센티우스군을 티베르 강 근처에서 격파했는데, 황제의 그때
싸움 장면이 이 문의 부조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 사건은 기독교 공인과 제국의 통일에 획기적인 것이었다.
문은 흰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세 개의 통로가 있으며,
일부는 다른 건축물에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콜로세움 외관.. 내부는 빌려 온 사진)

서기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의 궁전 터였던
늪지대에 세운 '콜로세움'은 로마에서 가장 큰 원형극장이다.
거대한 네로의 동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그 흔적도 없다.
콜로세움의 공식 명칭은 '플라비오 원형극장(Flavio Amphithetre)'.
둘레 527m, 높이 48m, 8년간의 건축기간을 통하여 원형극장을 완성하였다는 것은
당시의 건축 기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콜로세움의 1층 기둥양식은 전형적인 도리아식이고,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으로 그 아름다움이 다양하다. 4층으로 지어진 콜로세움에는
아치로 장식된 80여 개의 문으로 5만 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황제가 드나드는 입구가 따로 있었으며, 신분에 따라 자리도 구분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싸워야 했던 검투사들은 노예 전쟁포로 죄수 등이었고, 그들은 죽는 순간까지
오로지 싸움에 충실해야 했다. 검투사끼리의 싸움만이 아니라 다양한 맹수들과도
싸워야하는 검투사들.. 상대를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피비린내 나는 잔인한 게임은
그것을 즐기려는 황제와 귀족들의 오락거리에 불과했다. 경기가 시작되고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순간 승자는 멀리 중앙에 앉아있는 황제를 올려다 본다.
황제의 엄지손가락이 내려가면 죽이는 것이고,
황제의 엄지손가락이 올라가면 상대 검투사를 살리는 것이다.
검투사들의 생사여탈권이 황제의 손가락 끝에 달려 있었다.

현재의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붕괴되어 그 당시의 모습을 완전하게
상상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미로처럼 분할된 방들과 그 위에 지붕이 있었으며,
지하에는 검투사들의 대기실과 무기창고, 그리고 동물들의 우리가 있었다.
폐허가 되어 상상하기 힘든 콜로세움을 바라보며 영화 '글래디에이터' 속으로 들어간다.
할리우드 골든 글로브 최우수 작품 수상작이며, 영국 오렌지 브리티시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이다. 경기장의 문이 열리고
용감한 검투사가 등장을 한다. 맹수가 달려들고 창과 칼이 부딪치는 콜로세움 중앙에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던 러셀 크로우가 분한 막시무스 장군이 검투사로 변신하여
황제에게 도전을 한다. 정의와 용기가 있고, 사랑과 슬픔이
분노와 복수로 연결되는 전율과 감동이 있는 작품이다.





(86)

포로로 잡혀와서 이 원형경기장에서 목숨을 걸고
결투를 해야만 했던 검투사들.. 그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라는 절체절명의 아슬아슬한 생존의 줄타기를 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 내었을 것이다.
검투사들에게 살아남은 그 하루는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이었을까?
나의 안일한 삶을 뒤돌아 본다.
그 옛날 검투사들의 거친 호흡으로
가득했을 콜로세움은 그 거대한
위용만큼이나 정신 번쩍들게 한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aurelian wall))

아우렐리아누스 성벽(무라 아우렐리아나)은
3세기에 들면서, 팍스 로마나도 위태롭기 시작하여,
갈리에누스 황제 때에도 이민족의 침입이 계속되었으며 고트족을 물리친
클라우디우스 2세에 이어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때는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성벽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되었다. 이에 273년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쌓게 된다.
카시우스 이래로 자유롭게 바깥쪽으로 퍼져 나갔던 로마시의 거주구역도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의해
안과 밖으로 나뉘게 되었다. 농민들조차 시내에 살면서 아침에 시내 밖으로 나가 농사를 짓고
저녁 때 돌아오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팍스 로마나'가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던
로마제국 전역에서는 교외 인구가 줄어들고 도시가 과밀화하는 현상이 계속 진행되었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부터, 로마는 제국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밀라노와 라벤나로 이탈리아반도의 정치적·경제적 중심이 옮겨갔다.
현재 로마는 테베레강 왼쪽 연안 베네치아광장을 중심으로 많은 도로가 방사상으로
뻗어있는 구시가지와, 아우렐리아누스 성벽 바깥쪽의 넓은 신시가지로 되어 있다.
이 성벽은 길이 46km에 이르며, 현재 그 대부분이 남아 있어
당시 번영했던 고대 로마제국 도읍지의 크기를 말해준다.





(로마의 수도교(aqueduct))

로마 제국은 머나먼 수원지에서 도시나 마을로
공중목욕탕, 공중화장실, 분수, 사유지에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하여
다양한 수도교를 지었다. 또한 농장이나 장원에 공급되었고, 사용하고 남은 물은
하수처리 위한 복잡한 하수도를 통해서 오수와 폐수등을 배출하였다.
수로에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통해 물을 흘려서 공급하였다. 경사도는 평균 0.2~0.5%,
경우에 따라서는 16.5%가 되었는데, 공사지역의 기후와 특성에 따라서 돌과 시멘트를
사용한 것과 벽돌을 사용한 것도 있다. 언덕이 그리 넓거나 크기 않다면, 갱도를 파고 들어가
관통하는 방법을 택했고 일정한 간격으로 언덕에서 수직으로 굴을 파서
수리구멍과 환기구를 만들었다. 골짜기가 나오면 다리를 높거나
사이펀 원리로 밑을 파고 들어갔다.

로마의 첫번째 수로는 성벽 안의 도시에 물을 공급하였고,
3세기 무렵에는 로마에 11개니 될 정도로 많은 수도교가 건설되었다.
수도교는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 로마의 경제를 지탱하였다. 물의 대부분은
공동수조나 분수, 목욕탕 등에 사용이 되었고, 로마제국이 성장하면서 다른 도시나
자치구역에 수도교가 추가로 건설되어 로마제국의 시민들에게 공공의 이익을 이유로
공동수조는 무료로 개인용은 저가에 공급이 되었다. 이 튼튼한 수도교는 현재도
일부 지역은 유물 보존을 위하여 현대식 수도관을 내부나 아래에 설치하여
시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하고 있다. 유명한 수도교 건축물로는
세고비아 수도교의 다리와 콘스탄티노플의 수도교가 있다.









(89)







(내일은 베네치아.. 오늘 턱밑에서 여장을 푼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All roads lead to Rome).
오래된 이야기지만 걷고 있는 길을 계속 걸으면 로마가
나오는 줄 알았다. 조금씩 깨달아 가면서 그렇게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세월이 많이 흐르고 보니 로마까지 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는게 맞았다. 로마에 와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로마도 역시 주마간산이 되고 말았다는 것.

BC 753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 의해
테베레 강 동쪽 로마의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팔라티노 언덕 위에
건설된 도시국가 로마. 조그만 도시는 점점 강성해져 왕정-공화정-로마제국으로
발전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할 때까지 세계 제국의 중심이 되었던 나라.
AD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 나뉘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6세기 이후 동고트족을 정복한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 왕국 등 게르만족의
지배를 거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손아귀에 떨어졌다가 15세기 중반 이후,
교황령의 수도가 되어 다시 번창해진 로마는 그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 때 유명한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대거 로마에서 활동했으며,
15세기 말엽에는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라파엘로 등이 교황을 위해 예술활동에 전념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루터교 용병들의 침략을 받으면서 르네상스 시대는 그 막을 내렸다.
16세기 말의 교황 식스토 5세 때 중세 도시가 근대화되기 시작, 포폴로 광장에서
도시 중심부로 이어지는 세 개의 도로를 닦았으며, 광장과 샘도 만들어 찬란했던
로마의 모습을 되살려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공사가 끝난 때도 이 시대.
로마의 특징인 바로크 양식은 17세기 베르니니, 보로미니 같은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로마의 외관을 바꾸어갔기 때문. 18세기에는 교황의 통치 아래비교적 평화로운 시대.
스페인 계단 등에서 볼 수 있는 18세기 전반의 로코코 양식의 건물은 신고전주의라는
독특한 건물로 대체되었다. 1797년 나폴레옹 1세는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점령하여
다수의 귀중한 미술품을 약탈해 갔다.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후 빈 회의의
결정에 따라 로마는 다시 교황령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로마는 찬란한 역사와 풍부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유럽을 대표하며
세계인이 찾는 도시가 되어 사랑받고 있다.

 고대역사의 현장을 보고 느끼며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듯 로마는 미리 공부를 좀 하고 가면 더 유익할 것 같고
한 일주일쯤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꿈도 가져본다.
여행이란 우리가 사는 장소를 바꾸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편견을 바꾸어 주는 것이라 했던가?
 

 G. Bizet
L' Arlesienne, suite for orchestra No. 1
from the incidental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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