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0. 01:54ㆍ여행/여행기
피렌체, 르네상스의 발상지
(아름다운 꽃의 도시 피렌체)
○ 2014. 5. 16. 날씨 : 여행하기 좋은 날씨
○ 이탈리아, 피렌체
토스카나 지방의 주도이자 '꽃'의 도시. 중세의 유적과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을 대리석 위에 꽃피워 놓았다.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간직한 아름다움은 보는 것마다 눈길을 끈다.
두오모 대성당, 우피치 미술관, 산타마리아 노벨라 성당, 산 로렌초 성당,
베키오 다리, 피렌체 역사지구를 단아하게 채색하는 유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역사지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피렌체는 '이탈리아 예술의 수도'라는 별칭이 결코 과하지 않다.
여기에는 르네상스의 발상지이자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메디치 가문이 있고, 단테,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카치오,
미켈란젤로, 카를로 콜로디 등 열거하기에도 벅찰정도로 많은
사상가와 예술가의 고향이거나 흔적을 남긴 도시.
피렌체를 상징하는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1296년에 공사가 시작돼 170여 년 만에 완성됐고 바사리,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담겨 있다. (비록 올라가 보지는 못했지만) 돔이나 조토 종탑
꼭대기로 연결되는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면 피렌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조망과 도심의 지붕과 골목이 만들어내는 궤적이 가슴을 파고든다고..
두오모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10년후
만나기로 한 연인의 약속 장소로 그려지기도 했다.
(피렌체가 도착이 가까워졌나 보다)
오는 길 차창밖으로 보이던 포도밭 풍경은 이탈리아가
세계 제일의 포도주 생산국이라는 것이 실감나게 했다.
(피렌체의 옛지도와 관광안내도)
고대 로마 시대부터 부유한 곳으로 알려졌던
토스카나 지방의 중심 도시 피렌체는 13세기에 이미 문학, 과학,
예술의 도시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는 도시와 지역마다
여러 공화국이 있었다. 피렌체는 어느 공화국보다 풍부한 경제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피렌체의 상인들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종교, 예술에
이르기까지 많은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피렌체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이 모여들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 운동 중 하나로
평가받는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은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이를 재생시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냈던 문예 부흥 운동을 말한다.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뛰어난 인문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예술가들과 학자들을 믿고 지원해 주었던 메디치 가문과
상인 조합인 길드가 없었다면 오늘날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작품을 만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
피렌체는 단테가 다시 태어나도 집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도시의 옛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2번째 지도와 관광안내도를
비교해 봐도 골목이 달라진게 없어 보인다.
(금강산도 식후경)
피렌체는 로마에서 3시간 반 거리. 어제 벌써 점심시간이 되어
이탈리아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고..
(좁은 골목길..)
우리 같으면 길이 좁다고 건물 허물고,
건물이 오래되었다고 허물었을텐데.. 그들은
불편함을 감수하면서 옛 것을 잘 보존하고 있었다.
우리와 많이 다른 것 같다.
(산타크로체 교회)
단테의 빈무덤이 있어 단테교회라 하는
'산타크로체 교회'는 '성스러운 십자가 교회'라는 뜻.
단테(A. Dante, 1265~1321), 이탈리아의 가장 위대한 시인.
이곳 피렌체에서 태어나 당파 싸움에 휘말려 피렌체로부터
추방당하여 그토록 사랑했던 피렌체로 돌아오지 못하고
라벤나에서 그는 생을 마감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사후에라도
피렌체로 돌아오기를 원했으나 단테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이곳 단테 빈 무덤은 아직도 단테를 기다리고 있다고..
단테의 무덤은 라벤나에 있다.
(산타크로체 교회 주변풍경)
(좁은 골목길. 단테 생가 가는 길)
(11)
(단테의 생가.. 단테의 조상을 보며..)
상업과 금융업이 발달하여 부유해지자
이탈리아 각지에서 예술가와 인문학자, 사상가들이
피렌체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이름있는 인물들이 많다.
단테와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출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인근 피사,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인근 작은 시골 마을
빈치 출신. 피렌체가 고향이라고 부른다.
단테가 그 유명한 장편 서사시 '신곡'에서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고 잇달아 페트라르카,
보카치오와 함께 르네상스 정신에 불을 지폈고, 충분한
환경이 조성되어 있던 피렌체에서 불길이 타 올라
르네상스의 발상지가 된 것 아닐까?
단테의 생가는 수리중.
(피렌테를 상징하는 두오모 가는 길)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웅장함과 하늘을 찌를듯한 높은 종탑,
특이한 건축양식으로 압도하는 두오모 대성당은
1296년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설계하고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감독인 그가 죽고, 이어 종탑을 설계하고 공사감독을 을 맡았던
조토 디 본도네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공사가 중단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대성당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던 쿠폴라(반구천장)의
공사가 조각가이며 건축가, 화가, 학자, 선원근법을 개발하기도 한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 부르넬레스키(1400~1450)에 의하여
1434년에 완성되고, 높이 114m인 주황색 돔의 쿠폴라에 바사리가
성서의 이야기를 프레스코화로 그려 두오모가 완성되었다.
두오모 대성당과 함께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하늘을 찌를듯 84m의 높이로 치솟아 있는 종탑은
장식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색채의 대리석으로 되어있어
완벽한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탈리아의 꽃 피렌체, 피렌체의 얼굴 두오모 성당)
이탈리아의 꽃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 1865년부터 5년간 수도이기도 했던 피렌체.
르네상스의 발상지이며, 고대 로마시대부터 부유한 경제력과
정치와 종교, 예술로 피어난 꽃처럼 아름다운 도시.
빨간 지붕들이 그림같은 곳 피렌체.
(산조반니 세례당)
대성당 맞은 편에 있는 세례당은 4세기경 건축된
소성당을 11~13세기에 재건한 것으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1402년 세례당 청동문 제작 경합이 있었고, 22살의 기베르티가
23살의 브르넬레스키에게 이겨서 10톤이 넘는 청동으로 20년에 걸쳐
청동문을 제작하였고 현재의 동쪽문이 그의 작품이다.
첫 번째 청동문 제작을 완료한 후, 기베르티는 북쪽 문의 제작도
의뢰받아 다시 27년동안 작업하게 되었는데 먼저 제작한 청동문보다
세밀하게 8면으로 분할하여 구약성서의 이야기를 담았다.
기베르티는 22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작업을 시작해서
47년 동안 평생을 바쳐 세례당 2개의 문을 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청동문을 '천국의 문이라 불렀고
후에 로댕은 이 문에서 영감을 얻어 생각하는 사람이
들어있는 지옥문을 제작했다고 한다.
한편, 기베르티에게 졌던 브루넬레스키는 이후
로마로 가서 공부를 하여 두오모 대성당의 쿠폴라를
건축하는 등 르네상스 건축의 거장이 된다.
(산 조반니 세례당 '천국의 문')
이탈리아 최대의 시인 A.단테가 세례를 받았다는
산조반니 세례당 앞에 서니,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고
칭송했다는 세례당 문이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다가온다.
10개의 황금 부조작품으로 구성된 천국의 문에는 성서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에서 솔로몬과 시바 여왕에 이르기까지 구약 사건들을
묘사하고 있다. 황금 빛 화려함이 극에 달하고, 미술적 원근감
표현이 수려하며, 예술적 가치가 출중한 이 천국의 문은
로렌초 기베르티가 27년 동안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두오모 정문)
(메디치가 문양인가.. ??)
(풀 프레임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두오모)
여행사진은 광각과 줌까지 되면 딱인데..
유럽에서 두오모라는 성당을 많이 만나는데, 두오모는
라틴어의 도무스(domus)가 어원으로 영어의 돔(dome)과 같으나,
영어의 돔은 반구형의 둥근 지붕, 둥근 천장의 뜻으로 사용되는데 대하여
이탈리아어의 두오모와 독일어의 돔은 대성당(大聖堂)을 지칭한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주교신부가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을 말한다.
큰 도시에는 모두 두오모 성당이 있으며, 대표적인 두오모 건축양식 3곳은
이곳 이탈리아 피렌체, 밀라노, 그리고 독일 퀼른의 두오모를 꼽는다.
두오모는 단순한 종교적 장소뿐만 아니라 지역민들의 가장 중심지로,
과거 한 도시를 건설할 때 가장 핵심적인 위치에 두오모를 배치한 후
주변에 시민광장, 관청, 공공시설, 상가 등을 배치하였다고 한다.
피렌체의 두오모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꽃다운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라고 한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1296년 공사를 시작하여
1462년 완공되었다고 하니 공사기간이 무려 166년..
(이제 시뇨리아 광장으로)
(시뇨리아 광장.. 다비드, 포세이돈 등 조각상이..)
두오모 대성당 가까운 곳에 위치한 시뇨리아 광장에는
피렌체 공화국 당시 청사로 사용하던 베키오 궁전이 하늘을 찌를듯한
94m 높이의 우뚝한 탑과 의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시뇨리아 광장은 정치의
중심지로 시민들이 토론하고 정사를 결정하던 곳. 베키오 궁전 입구에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헤라클레스'상이 궁전의 문을 지키고 있다.
광장에는 르네상스의 예술품들이 많아 사진 찍을 거리도 많고
광장이 아름다워 영화의 배경지로 자주 나오는 명소..
피렌체를 무대로 촬영된 영화로는
전망좋은 방
여인의 초상
냉정과 열정사이
한니발
토스카나 태양 아래서
뭇솔리니와 차 한 잔을..
(시뇨리아 광장을 지켜보고 있는 '코시모 1세 청동기마상')
수세기 동안 피렌체의 정치·사회적 중심지인
시뇨리아 광장에는 피렌체를 일으킨 코시모 데 메디치의
청동기마상이 먼저 반겨준다. 피렌체하면 역시 메디치 가문을
먼저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영원한 피렌체의 통치자
메디치 가문은 평범한 중산층 상인이었으나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면서 권력자 가문으로 성장, 유명해진 메디치 가문이
역사에 드러난 때는 1400년부터이며 이때부터 1748년까지
약 350년간 피렌체공화국에서 가장 유력하고 영향력이 높았던
가문으로 공화국의 실제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코시모 1세는 메디치 가문의 일원으로 교황의 인정을 받아
1537년부터 1574년 사이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토스카나
대공국을 지배했다. 냉혹한 독재자였지만 피렌체를 강력하고
부강한 나라의 수도로 만들고 메디치 가문을 일으켰다.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들)
메디치 청동 기마상, 바다의 신 포세이돈, 다비드,
헤라클라스 상.. 등등
(시뇨리아 광장의 '다비드 상')
손등의 돌출한 혈관까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1504년부터 베키오 궁을 지키던 다비드상은 훼손방지를 위해
1873년 아카데미 갤러리로 옮겨가고, 1910년 부터 복제된 다비드 상이
시뇨리아 광장을 지키고 있다. 다비드상 바로 뒷편에 있는 베키오궁전은
16세기까지 피렌체공화국의 정부청사로 사용되었던 곳이며 궁전의
종루는 시민들을 공공집회에 불러 모을 때 사용한다고 한다.
당시 26세였던 미켈란젤로는 피렌체 대성당의 지도자들로부터
다비드상 조각을 의뢰 받는다. 50년 넘게 방치되어 있던 5m가 넘는
거대한 대리석은 결도 좋지않아 조각이 어려웠지만 1501년에
시작하여 3년만인 1504년 5m가 넘는 거대한 다비드상을 완성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의 청년의 모습을
예술적으로 위엄있게 표현해 냈다. 현재 피렌체의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에 소장되어 있다.
(헤라클레스와 카쿠스 상(반치오 반디넬리, 1533))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제우스 신과
인간사이에 태어난 괴력의 사나이. 소도둑 카쿠스를 몽둥이로
때려잡는 장면으로 신화에 따르면 이 때 휘두른 몽둥이 때문에
로마 팔라티노 언덕 한쪽이 움푹 들어간 모양이 되었다고..
(로자 데이 란치 난간에서..)
(메두사의 목을 벤 페리세우스(1554 Cellini))
(사비니 여인의 강간(16세기 Giambologna))
(란치의 회랑(로자 데이 란치)의 조각상들..)
광장 우측에는 Loggia dei Lanzi(로자 데이 란치)라는 회랑에
15개의 조각상이 전시되어 있다. 처음엔 코시모 1세를 지키던
독일 용병들이 대기하던 장소로 쓰였기 때문에 용병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Lanzichenecchi에서 따 왔다고 한다.
회랑의 윗부분을 장식한 4개의 조각상은 각각
용기(Fortitude), 절제(Temperance), 정의(Justice),
신중함(Prudence)을 나타낸다.
(50)
(우피치 미술관 회랑의 모습들)
미술관 회랑 큰 기둥에는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데카메론의 보카치오, 지동설의 갈릴레이, 조각가 도나텔로, 화가 조토,
두오모 돔의 브루넬레스키, 군주론의 마키아벨리, 인문학자 페트로라카,
조각가 피사노, 다비드상의 미켈란젤로, 모나리자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피렌체의 대주교 성 안토니오 등 피렌체를 빛낸
거장들의 석상이 세어 본 것만도 20개가 넘었다.
('ㄷ'자 모양의 우피치 미술관)
'우피치'는 '사무소'라는 뜻으로 메디치가의 코시모 1세가
정사를 보던 곳으로 바사리가 설계하고 1560년부터 14년에 걸쳐
지어진 미술관에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걸작을 포함한 2,500여 점의
이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13~18세기 작품이 대부분이며,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비너스탄생, 레오나르도 다 빈치 등
거장들의 걸작이 전시되어 있다.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후원하며
창작혼을 불태워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게 했던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이 막을 내릴 때 수백 년에 걸쳐 예술가들을 후원한 결과
얻게 된 엄청난 양의 예술품 그 전부를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에
기증하도록 유언을 남겼고, 그 결과 오늘날 피렌체는 세계의
관광객이 줄을 잇는 명소가 된 것이다.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와 '비너스의 탄생'은
우피치 미술관에서 꼭 만나고 싶어하는 작품이자 르네상스의
대중적인 아이콘이다. 고대 철학을 통한 고대 문화의 부활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선언적으로 나타난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고대 그리스의 조각을 연상시키는
이상적인 육체미를 보여 줄 뿐만 아니라 인물이 취한 자세나 의상으로
고대의 신화를 거리낌없이 재현했다. 한편, 비너스의 탄생은
1485년경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자신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주문했다는 작품으로 비너스의 모델은 당시 최고의
미인으로 꼽던 시모네타로 전해진다.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들의 계보)
1453년 비잔틴은 투르크족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무려 천 년을 유지했던 제국의 문화는 비록 그리스 정교가
지배적이었지만 서유럽에 비해 고전의 학문과 문화를 잘 보존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에서 망명했던 많은 학자들과 예술가들은 주로 이탈리아로 향했고,
특히 피렌체는 이들을 받아들여 자국의 문화적 부흥을 도모했다.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공화국 체제를 유지했던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은 쌓아온 경제력으로
정치권력을 누리면서 학문과 예술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기반으로 하는 아카데미아 린세이를 설립, 피치노같은
학자를 양성하여 르네상스 학문을 주도할 신플라톤 철학을 펼치게 했다.
코시모 데 메디치와 그의 손자였던 로렌초의 시대는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무르익는 시기였다.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주도하는 도시가 되었고
여기서 발탁되고 길러진 예술가들인 마사초, 기를란다요, 보티첼리,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은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룩한
예술가들로 평가된다.
(아르노 강 베키오 다리의 아름다운 모습)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나 사랑을 느끼고,
단테가 베아트리체로부터 시적 영감을 얻었다던‘베키오 다리’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운명적 만남이 담겨 있어 더욱 애틋하다.
단테가 9살 때 한 살 아래인 베아트리체를 봄의 축제에서 만나
"바로 그 순간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내 가슴 가장 깊숙한 곳에서
역동적인 감정이 솟구쳐 올랐으니 내 가슴은 떨리기 시작했고
그 떨림 때문에 내 맥박은 잦아 들었다"(신곡 신성 2장)..
중세의 사랑은 신만이 하고 인간은 욕망할 뿐이었는데
단테의 달콤한 사람의 감정 속에서 이미 중세가 끝나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를 메디치가에 결혼으로 떠나 보내고 9년 후 우연히
길에서 만났으나 말 한마디 못하고 쓰라린 가슴을 안고
아르노 강 강둑을 걸어 집에 가서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그 글이 바로 중세 1000년을 장사지낸 신곡이 된 것이다.
(김상근 교수의 '인문학 특강'중)
(55)
(지금도 광장에는.. 거리의 예술가들이..)
(한 장 사주는 건데..)
얼마까지 깎아 주나 알아 보려고 말을 걸었는데
너무 애를 태우게 한 것 같다. 한 장 사주고 싶었지만
가지고 다니기 귀찮아 사지 않았는데 오는 길 내내
어떻게든 팔려고 하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꽃의 도시, 꽃 같은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 문화가 꽃피도록 후원한 메디치 가문의 흔적이
피렌체의 고고한 모습들에서 배어 나온다. 메디치 가문의 저택이었던
피티 궁전, 메디치 가문 사람들이 영면한 산 로렌초 교회, 우피치 미술관..
메디치를 빼놓고는 피렌체의 주요 명소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다.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은 학문과 예술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고, 그 덕분에 피렌체는 이탈리아 내에서도 문화적으로 가장
윤택한 곳으로 인정받는다. 어느 도시를 가건 마찬가지겠지만
가기 전에 피렌체의 역사에 대해 공부를 안하고 간게 많이 아쉬웠다.
르네상스가 서구인의 시각으로 서구의 우월성을 내세운 문화운동의
정의라 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창작열과 예술혼을 불태울 수 있도록
지원한 후원자의 힘이 컸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부자가 어떻게 돈을 써야 하는 가를 메디치
가문이 잘 보여주는 것 같다.
Whoever wants to be happy, let him be so:
about tomorrow there’s no knowing.
행복하고자 하는 자들이여, 행복을 즐겨라
내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니.
-로렌초 데 메디치-
서유럽 여행 바로가기
'여행 > 여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이델베르크 / 네카어 강변의 아름다운 대학도시 (0) | 2014.12.30 |
---|---|
인스부르크 / 알프스의 장미, 황금지붕이 있는.. (0) | 2014.12.28 |
바티칸 / 가톨릭 교황국, 세계 최소의 독립국 (0) | 2014.10.29 |
로마,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0) | 2014.10.20 |
밀라노, 유럽 최고의 고딕양식 두오모 대성당이 있는.. (0) | 2014.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