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 가톨릭 교황국, 세계 최소의 독립국

2014. 10. 29. 01:50여행/여행기

 


바티칸, 가톨릭 교황국, 세계 최소의 독립국
(지금까지 여행한 곳중 가장 기억에 남을 바티칸)


○ 2014. 5. 15   날씨 : 쾌청, 여행하기 좋은 날씨
○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바티칸시(Vatican City)라고도 불리며
가톨릭의 총본산인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성베드로 대성당,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에 있는 교황궁(Pontifical Palace), 여름 휴양지를
포함한 로마 부근의 5개소 및 이탈리아에 흩어져 있는 일부 23개소를 영토로 한다.
전세계 가톨릭교회와 교구를 통괄하는 가톨릭교회 최고통치기관인 교황청이 있다.
하나의 국가이지만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고 소수의 스위스 근위병이 있다.
국명은 그리스도교 발생 이전부터 전해져 온 오래된 말로,
티베르강(Tiber R.) 옆에 위치한 '바티칸 언덕'을 뜻하는
라틴어 '몬스 바티카누스(Mons Vaticanus)'에서 유래한다.

지금의 건물은 약 70년간의 '아비뇽 유수(1309-1377)'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교황이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함께
궁전을 정비하기 시작하면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후 교황 클레멘스 14세와
피우스 6세의 후원을 거쳐 1790년 지금의 모습을 갖췄는데 엄청난 규모와 화려함은
베르사유 궁전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다. 지금까지 세계를 여행하면서 가장 인상깊은 곳을
꼽으라면 바로 이탈리아의 로마 북서부에 있는 카톨릭 교황국인 바티칸시국이 아닐까?
바티칸시국은 바티칸미술관과 시스티나 성당, 베드로 대성당 등 이곳은 정말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만들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만드는 곳이다.
Musei Vaticani, 총 24개의 미술관을 다 채우고도 모자랄 만큼 방대한 양의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어서 며칠을 돌아봐도 다 감상하기 어려운 서계 최대 박물관 중 하나이며,
박물관과 베드로 대성당으로 이루어진 바티칸은 나라 자체가 세계적인 문화유산들의 寶庫.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시스티나 성당 등에는 산드로 보티첼리, 베르니니, 미켈란젤로,
라파엘로라고 하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솜씨를 발휘한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바티칸은 1984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바티칸시국은 19세기 이탈리아가 근대 통일국가로 바뀌자 교황청 직속의
교황령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1929년 라테란(Laterano)협정에 의해
이탈리아로부터 교황청 주변지역에 대한 주권을 이양받아 안도라,
산마리노와 함께 세계 최소의 독립국이 되었다.









(줄서서 기다림)

9시 조금 못되어 도착, 끝이없을 것 같던 기다림도
바티칸시국 성벽 아래서 1시간 반 정도 기다려 드디어 입구까지 왔다.

가운데 사진.. 성벽의 조각상은 일생을 바쳐 바티칸을 꾸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조각상.. 두 사람은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급여를 받던, 말하자면
직장 동료 사이. 라파엘로가 37살로 단명했지만 잘 생기고, 성격 좋고, 집안 좋고,
사교적이었던 반면, 미켈란젤로는 89세까지 장수했지만 못생기고, 성격이 그늘지고
괴팍하고, 교황과 싸우기도 했던 성격파. 두 사람은 질투심 때문에 서로 사이도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은 저렇게 나란히 방문객을 맞고 있다.

이제 성문으로 들어서면 이탈리아 안의 또 다른 국가인
바티칸시국(Stato della Citta del Vaticano)이다.









(바티칸의 위치, 배치도, Miniature)

로마 안의 작은 나라로 면적은 0.44㎢, 2012년 현재 인구 836명,
수도 바티칸시티(Vatican city), 1929년 2월 11일 건국, 공용어로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며 국가원수는 2013년 3월에 선출된 프란치스코(라틴어,FRANCISUS) 교황.
교황을 수반으로 별도의 법률과 제도에다 이탈리아와는 다른 화폐와 우표 등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가톨릭의 총 본산이자 전세계의 가톨릭교도들을 관장하고 있는 나라로서
베드로 광장과 베드로 대성당, 정원과 박물관 및 부속건물이 포함되어 있다.
교황청은 유럽의 역사를 주도해왔지만 1870년 9월 20일 로마의 포르타 피아에서
이탈리아 왕국의 군대에게 항복한 다음부터 그 위력이 극도로 약해졌다.
이탈리아가 통일하고 정부를 수립한 지 10여 년이 지나면서 로마가 신흥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수도로 확정되었다. 교황의 권력은 천 년의 영화를 끝으로
1929년 라테란 조약 때까지 바티칸의 궁정 안에 묻혀 지내야 했다.











(드뎌 입장(입국))

국경을 넘었으니.. 또 줄서서 입국심사 받고
통로를 따라 나오니 피냐의 안뜰(Cortile della Pigna)이다.
현재시간 10시 45분. 줄을 서기 시작한지 거의 2시간만이다. 입장 티켓은 15유로.
바티칸은 일종의 성지(聖地)이기 때문에, 명문화되지는 않지만 복
장 규정이 있는데
참고로 여자는 무릎이 나오는 반바지 차림, 민소매는 입장이 안되고,
샌들은 뒤꿈치에 끈이 있어 끌리지 않고 발에 딱 붙는 것이라야 하고,
휴대용 칼, 뾰족한 물건, 삼각대 등은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갈 수 없단다.
또, 배낭이나 캐리어 등은 안으로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간단한 소지품만 작은 가방에 넣어서 갖고 와야 한다.





(검문을 통하여 입장(입국)하니.. 피냐의 안뜰(Cortile delle Pigna))

솔방울의 정원이라고도 하는 피냐의 안뜰.
솔방울(Pigna)이 공기를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바티칸이 세상을 정화하는 솔방울이 되겠다는 의미이고
양 옆의 공작새는 영원을 의미한다고..





(피냐의 뜰 한가운데에 있는 명물 '지구안의 지구')

1960년 로마 올림픽을 기념하여 제작된 구리 지구본은 오염되고 멸망되는
지구를 형상화한 현대적 조형물로서 '지구 안의 지구(Spheve within spheve)'라는
이름으로 아르날도 포모도로(Arnaldo Pomodoro)의 작품.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설명을 듣고..)

시스티나 성당 안에 들어가면 말도 못하고 사진 촬영도 안되기 때문에
피냐의 안뜰에 설치되어 있는 그림으로 사전 공부를 하였다.









(피냐의 안뜰(Cortile della Pigna))

원래 벨베데레 정원과 함께 붙어있던 바티칸의 궁정의 일부.
정원을 가로질러 바티칸 도서관 건물이 세워지면서 둘로 나뉘었으며,
높은 곳에 있는 정원이 피냐의 정원으로 불리는데 정면에 있는 솔방울 상 장식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 4미터 가량되는 거대한 솔방울 상은 본래 판테온 부근에 있던
로마 시대 분수대 장식이었으나 중세에 성 베드로 성당의 정원으로 옮겨왔고,
160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고.. 솔방울 양쪽의 청동 공작상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무덤 장식을 카피한 모조품이고,
원본은 브라치오 누오보 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래는 피냐의 안뜰에 있는 아폴론..







(Museo Chiaramonti)

그리스 조각과 로마시대 카피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이 복도를 지나면
라오콘 상과 토루소, 아폴로 상이 있는 벨베데레 정원이 나온다.





(벨베데레 정원)

바티칸 궁전의 안뜰이었던
벨베데레 정원은 아름다운 풍경의 정원이라는 뜻.

비오-클레멘스 미술관(Pio-Clementine Museum)은
1771년 교황 크르레멘스 14세가 세운 미술관으로 고대 그리스.로마와
르네상스 시대 작품들을 소장하는 곳이었는데, 후임자인 교황 비오 6세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이곳에는 콘트탄티누스 대제와 가족들의 석관이 전시된
그리스십자가의 방(Greek Cross Gallery), 판테온을 축소한 것처럼 만들어 놓은
많은 신화속 신들과 휴상들이 전시된 원형의 방(Sala Rotonda), 바티칸을 대표하는 조각상인
라오콘 군상이 전시된 팔각정원(Cotile Ottagono), 유명한 조각상인 토루소(Belvedere Torso)가
전시된 뮤즈의 방(Sala delle Muse) 등바티칸박물관과 그리스.로마시대를 대표하는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이다.







(벨베데레의 아폴로(Apollo del Belvedere))

벨베데레 정원에 들어서자 늠름한 아폴로가 제일 먼저 맞는다.
기원전 4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태양신 아폴로가 활을 쏜 후 과녁을
확인하러 앞으로 나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아름다운 옷의 주름과
현대의 것이라 해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세련된 샌들의 정교한 묘사가 돋보인다.
아폴론과 아폴로는 동일 인물인데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폴론이라고 부르고
로마 신화에서는 아폴로라고 부른다.









(벨베데레 정원의 하이라이트 라오콘 군상)

바티칸박물관을 대표하는 라오콘 군상(Laocoon Group)은
헬레니즘(Greece Hellenism) 시대, BC 150- BC 50년 경 제작 추정
그리스 헬레니즘(Greece Hellenism) 시대의 걸작 '라오콘'은 기원전 100년 경에
그리스 그리스 '아키이아(Achaea)' 지방의 '로도스(Rhodos)' 출신의 '하게산드로스
(Hagesandros)', '아타노도로스(Athanodoros)'. '폴리도로스(Polydoros)'
세 사람의 공동 작품으로 그리스의 대표적 서사시인 일리아드의 트로이 전쟁 마지막에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으로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조각품이다. 이작품의 내용은
트리오의 사제 라오콘이 그리스인이 보낸 목마를 받아들이지 말라고 알려주자 신들이
두 마리의 뱀을 보내 라오콘과 그의 아들들을 질식시켜 죽이는 장면이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팔과 부풀어 오늘 핏줄에서 두려움과 공포, 아픔 등의
감정표현을 아주 사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라오콘은, 1506년 로마의 '에스퀼리노(Esquilino)' 언덕 위,
네로의 궁전 터에 세워진 산타 마리아 마죠레(Santa Maria Maggiore) 성당 근처
포도밭에서 밭을 갈던 한 농부가 땅 밑의 공중 목욕탕 유적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안에서 '라오콘(Laocoon)'이 발견되었다. 라오콘은 로마의 아그리파 목욕탕을 장식하던
화려한 장식품으로 그리스 청동 조각상을 로마 시대에 대리석으로 복제한 '리플리카(Replica,
원작의 모사본)' 작품이다. 가까이서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실적이고,
표정 하나 하나 근육의 모양 하나 하나가 정말 예술 그 자체다.

이 조각상은 특히 고대 로마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는 라오콘이 고대 로마 건국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
많은 트로이인들이 '라오콘(Laocoon)'의 호소를 듣지 않아 결국 멸망했지만, 제 때
트로이를 빠져나온 트로이의 영웅 '아이네이아스(Aeneas)'는 여러 모험끝에 이탈리아로 가고,
거기서 마침내 로마 건국에 위업을 달성하였다. '베르길네우스'의 로마건국 서사시
아이네이아스에 나오는 이 전설은 로마인들이 트로이를 자기 뿌리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고대 문명의 운명적 계승지로서 스스로를 이상화하는 한 수단이 되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있어 '라오콘(Laocoon)'은 바로 그 문명의 혜안을 가진
올바른 선지자로서 자신들의 시대를 밝힌 인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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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체의 비너스와 안드로스의 헤르메스)

기원전 350년 경의 그리스 헬레니즘기의 조각가 '프락시텔레스(Praxiteles)'의
'크니도스(Cnidus)'의 '아프로디테(Aphrodite)'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추정.
아들을 데리고 있는 로마의 여느 엄마의 모습이다. 이 조각의 얼굴은 2세기 경의
한 여왕후의 얼굴이라고 하는데, 아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부인
'파우스티나(Faustina)이거나 혹은 '코모두스'의 부인이며, 파우스티나의 며느리인
'크리스피나'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비너스(Venus)' 즉, '베레네(Verene)' 여신이
'에로스(Eros)'의 모습으로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있다.

아래 그림. 코르킬레 오타고노(Cortile Ottogono)'의 '안드로스의 헤르메스
(Hermes of Andros Statue)'는 제우스의 아들로 신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
이 조각상은 '안토니우스 어드미란두스(Antinous Admirandus)'로도 알려져 있다.
독일의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요한 요하킴 빈클레만'은 이 조각상을
'최고 수준(First Class)'의 조각상으로 인정했다.









(벨베데레의 토루소(Torso del Belvedere))

바티칸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이자 그리스 헬레니즘 미술을
대표하는 조각상이라고 할 수 있는 '벨베데레의 토루소(Torso del Belvedere)'.
짐승 가죽을 깔고 앉아 있는 남상의 상체 몸통만 남아 있는 작품으로
아테네인 아폴로니오스가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에 심취해서 극찬을 찬 작품으로 그의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토루소(Torso)'란 목이랑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 있는 조각품을 총칭하는 말.
이 조각상의 모델은 헤라클레스(Heracles)라는 설도 있고
트로이의 목마에 나오는 아이아스(Aias) 장군이라는 설도 있다.
이 '벨베데레의 토루소'를 모델로 로댕(Rodin)이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을 만들었다고 한다.













위는 '성 헬레나의 석관(Sarcophagus St Helena)'이다.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의 유래는 로마 사람들이 이집트에 쳐들어갔을 때
그곳이 있는 석관(石棺)을 열어보니 살은 다 없어지고 뼈만 남아 있어서
이 관이 살을 먹는다고 생각하고 Sarcophagus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아래 그림 전시실 중앙, 여러사람들이 보고 있는 원반모양은
'네로 황제의 욕조'로 직경이 5m나 될 정도로 크다.
아래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그림은 채색한 대리석이 아닌
천연대리석을 모자이크한 것이라고 한다.







(원형의 방(Sala Rotonda))

판테온(Pantheon)을 본따서 만든 원형의 방.
돔이 실제 판테온의 돔과 닮은 모습..

















(촛대의 방(Galleria dei Candelabri))

이 방은 8개의 촛대 조각상들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방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시스티나 성당으로 이어지는 복도.
천장화도 봐야하고 수많게 늘어선 조각상 보느라 셔트 누를 틈이없다.
그래도..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유명한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찍고 가야지.
가슴에 매달린 하얀 주머니들은 번식력이 강한
황소의 생식기를 표현한 것이라고..







(41)







(Galleria degli Arazzi(아라찌 회랑))

태피스트리(Tapestry) 전시관. 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의
마지막 섹션인 촛대의 방 다음에 나오는 방으로 촛대의 방까지만
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이라고 한다.
아라찌 회랑의 천장화는 영락없는 부조로 보여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눈을 의심하게 한다.









(이 방의 이름은 태피스트리(Tapestry))

아라찌 회랑이라고도 하는 이 방의 이름인 태피스트리(Tapestry)는
여러가지 색의 실로 카페트같이 그림을 짜 넣은 직물을 말하는데 중요한 건
손으로 그린 것도 아니고 실로 짜넣은 그림에서 느껴지는 정말 생생한 묘사와
입체감의 표현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이런 그림이 한 두 장이 아니다.
이 작품은 예수님의 몸과 눈동자와 밟고 있는 판이 우리를 따라 같이 움직인다는 것.
바티칸 박물관에 전시되는 작품은 뭐가 달라도 다른듯..









(감탄!! 벌어진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정말 조각같은 입체감이다. 누가 이걸 그림이라 하겠는가?
눈을 의심했다. 빛이 비치는 쪽으로 음영이 있는 것을 보고
그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믿기지 않았다.










(지도의 방)

여기도 앞에서 이어지는 시스티나 성당 가는 복도.
길이 120미터, 폭 6미터나 된다. 이 회랑이 지도 회랑이라고 불리는
연유는 길게 늘어선 양쪽 벽면에 40여 점의 프레스코화로 제작된 이탈리아
각지의 지도가 있기 때문. 16세기에 제작되었다는 지도들이 현재의 지도와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졌다는 것도 놀랍지만,

정말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천장의 그림들..
그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 지지않는다. 감탄사 연발!! 화려함의 극치다.
눈을 떼지를 못한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눈을 두는 곳마다 시선을 잡아 끌지 않는
작품이 없다. 천장화와 벽화, 조각품 등 어디 한 곳 눈길이 머물러 있기가 아깝다.
천장화를 보면 중간 중간 조각을 해놓은 것처럼 사람들이 보이는데
사실은 이것이
모두 그림이다! 사람이 이런 작품을 창조해낼 수 있을까 싶었다.





(시스티나 성당 가는 길)











(55)

3번째 그림은 Ponziano Loverini (1845-1929),
S.Grata raccoglie le spoglie di S.Alessandro, 1887.
마지막 그림은 폴란드 화가 Jan Mateiko가 그린 그림으로
폴란드의 왕 John 3, Sobieski가 투르쿠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교황에게 메세지를 전달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무원죄 수태의 방)

이곳은 지도 전시관과 라파엘로 전시관의 사이에 있는
임마쿨라타 콘체지오네 방(Sala dell'Immacolate Concezione)이라는 곳으로
우리말로 하면 '무원죄(無原罪) 수태(受胎)의 방'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무원죄 수태'란 얘기는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를 잉태한 순간부터 아담의 죄
(즉, 원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은 아담이 지은
원죄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성결한 상태라는 것














(라파엘로의 방)

바티칸 박물관에 많은 그림들이 있고 그 중에서
특히,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의 그림이 유명하다.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 바티칸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이지만,
사실 바티칸의 그림들은 라파엘로와 그의 제자들 그림이 가장 많고,
미켈란젤로의 그림 못지않게 라파엘로의 그림 중에서 유명한 것이 많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그림들에 대해서는 일화가 많지만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일화는 원래 미켈란젤로는 조각가이지 화가가 아니었다는 점일 것이다.
교황 율리우스 2세 때 바티칸 궁전 재건사업이 진행되면서 총책임자였던 브라만트는 당시
재정이 어려워 사업의 속도를 늦추고자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를 시스티나 성당 천정화를 그릴
화가로 추천하였는데 미켈란젤로가 너무나 잘 그려 내었던 것. 만약 미켈란젤로가 천정화를
리다 포기를 했더라면 아마 라파엘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그렸을 것이라고 한다.
4개로 되어있는 라파엘로의 방은 바티칸 궁전에 있는 라파엘로의 작업장이자
그의 프레스코화가 있는 방으로, 시스티나 성당과 함께 바티칸 더 나아가
로마 르네상스 문화의 최고 걸작 중 하나이다.

천사들이 등장하는 화려한 천장벽화 아래 그림(3번째)이
그 유명한 라파엘로의 성체논의. 아폴로 학당 맞은편에 있는 벽화이다.
교황 레오 10세가 라파엘로에게 신학, 법, 철학, 예술을 주제로 자신의 도서실 벽화를
그려줄 것을 부탁한 그림으로 구도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이 성체논의는 신학을 상징한다.
두말 할 것없이 아테네 학당은 철학을 상징하고, 파르나소스는 예술을 상징한다.
4번째 그림은 '샤를 마뉴의 대관식' 그림으로
교황 레오 3세가 교황의 권위를
지키면서 로마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후원자인 프랑크 왕조의 샤를 마뉴를
서로마 제국 즉,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임명하는 장면이다.
사를마뉴 때 프랑크 왕국은 황금기를 맞이하고 샤를 마뉴가 사망한 이후
서로마는 붕괴되고 다시는 통합하지 못한다. 평생 글을 읽고 쓰지 못했지만
문화와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서 문화적으로 꽃을 피우며
중세 유럽의 기틀이 마련된 시기다.





(아테네 학당)

'아테네 학당(School of Athens)'은 이탈리아어로는 '스쿠콜라 디 아테네
(Sculola di Athene)'라 부르는 이 작품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
(Raphael)'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로 1510년에서 1511년 사이에 그려졌다.
'성체 논의(Disputation over the Most Holy Sacrament)'를 완성한 라파엘로는 그 다음으로,
반대편 벽면에 아테네 학당을 완성하게 된다. 그림에는 고대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천문학자,
수학자들 총 54명이 옮겨져 있다. 학당은 성 베드로 성당과 비슷한 모양을 지니고 있다.
건물 밖으로는 광활한 하늘이 보이며 둥근 천장, '아폴로와 '아테네의 상들을 안치한 벽감 등은
웅장한 분위기와 우아함을 지녔다. 아테네 학당은 바티칸 궁의 장식화뿐 아니라
라파엘로의 그림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그림. 라파엘로의 치밀한 계산 아래 그려진
상상화이지만 규모나 웅장한 느낌, 조화감 등은 초인간적인 느낌이다.
무대같은 투시도의 공간 속에, 인물들은 놀라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점 소실점에 의한 원근법을 따르고 있어, 등장인물이 많아도 산만하지 않고
집중된 느낌.. 고전 건축의 균형감각과 질서, 선명성, 부분과 전체의 조화가 뛰어난
르네상스 미술의 걸작이다.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라파엘로는 많은 스케치를 준비하고
시행착오를 거쳤다. '암브로지아나 미술관(Pinacoteca Ambrogiana)'에 보관된 최종
밑그림을 보면 그가 피렌체파의 전통을 충실히 따랐음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심리묘사와 미켈란젤로의 육체표현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변용(The Tranfiguration))

라파엘로의 1518∼1520년 작품. 라파엘로는 1518년부터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였으며, 그후 제자 로마노가 완성하였다.
타보르산에서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변모를 소재로 한 이 그림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모세, 엘리야가 그려져 있는데,
환상적인 조용함과 정숙함으로 성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느낄 수 있도록 표현했고,
가운데 부분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놀라는 모습과 경탄하는 모습을 그렸으며,
그 아랫부분에는 세상 사람들의 갈등과 혼돈을 표현하고 있다. 밝고 평화로운 천상의
신비스러운 광휘와 지상의 어지러운 소란을 대비시켜 S자 형의 자유분방한 구도로
동적인 표현을 시도한 이 작품에서 라파엘로는 이미 르네상스 미술의
고전양식을 해체하고 바로크미술의 시작을 예고하고 있다.
인물들의 제각기 다른 표정들이 예술이다.















(시스티나 성당)

시스티나 성당(라틴어: Aedicula Sixtina)은 바티칸 시국에 있는
교황의 관저인 사도 궁전 안에 있는 가장 유명한 성당이다. 일설에 따르면 건축 양식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하며,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산드로 보티첼리 등 위대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오 2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1508년 부터 1512년 사이에 성당의 천장에 12,000점의 그림을 그렸다.
시스티나 성당은 1477년에서 1480년 사이에 오래된 옛 대성당(Cappella Magna)을 복원했던
황 식스토 4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 기간에 피에트로 페루지노, 산드로 보티첼리,
도메니코 기를란다요를 포함한 화가 무리는 모세와 그리스도의 생애를 묘사한
프레스코화 벽판 시리즈를 만들었다. 그 그림들은 1482년에 완성되었으며,
1483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기념 미사 때 식스토 4세에 의해 축성되었다.
식스토 4세의 치세 이래,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이 종교적·직무상의 활동을 하는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오늘날에 이곳은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모두 모여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종교의식인 콘클라베를 여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서기 전부터 '사전촬영 금지'라하여
아예 카메라를 꺼고 입장하는 바람에 사진이 없어 사진을 빌려왔다.
라파엘로의 방 다음 순서는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이다.
이 안에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불후의 명작인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이 있다. 
정말 집중하여 '프레스코 천정화'와 '최후의 심판'의 감상에만 집중했다.
(천정화(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은 빌려 온 사진)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천지창조)에 대한 자세한 그림 설명은
http://blog.daum.net/click21net/4508 ☜클릭







(시스티나 성당을 나와 베드로 대성당 가는 길)





(성년에만 열리는 '성년의 문')







(웅장함과 화려함에 넋을 잃었다)

마데르노의 중랑, 성단소 방향. 베드로 대성당 안으로
들어서자 그만.. 거대하고 장엄한 공간에 압도되고 말았다.
호화롭게 장식된 실내를 보고 할말을 잃었다. 성당의 내부 길이는
현관을 포함해 211.5m이며, 천장 높이는 무려 45.44m.
성당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일단 입구 오른쪽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걸작 '피에타(Pieta)'로 향했다.

 

 

 





(피에타(Pieta))

피에타를 보자마자 한참동안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숨죽이고 보았다. 비탄에 잠겨있지만 슬픔을 내색하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모습을 어떻게 24살된 청년 미켈란젤로가 표현해 내었을까?
점점 작품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미켈란젤로의 걸작중의 걸작이자
성당안의 조각품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인 피에타(Pieta).
25세에 제작(1498~1499년)에 완성한, 대리석 높이 175cm. 피에타(Pieta)란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님을 안고 슬픔에 잠겨있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들을 총칭'하는 말.

이탈리아어로 피에타(pieta)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
이 작품이 수많은 피에타 조각상들 중에서 단연 으뜸으로 꼽힌다.
이 피에타 상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가운데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마리아가 두른 어깨 띠에는 '피렌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제작
(MICHEL. AGELVS. BONAROTVS. FLORENT. FACIEBAT)'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피렌체에 있는 다비드상, 로마 산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모세상과 함께 그의
3대 작품으로 꼽는데, 그 중 완성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피에타 상은 1972년 한 정신병 환자가 휘두른 망치에 손상을 입고
난 뒤 보수하여 방탄 유리 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다.









(어디서 무엇부터 봐야 하나?)

일단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는 봤으니.. 다음은 주교좌,
돔, 베드로 청동상, 베르니니의 발다키노?? 뭣부터 봐야할지
행복한 고민.. 일단 한바퀴 돌아보다









(베드로 묘지 위의 발다키노(Baldacchino))

대성당 한가운데에는 교황이 미사를 집전하는 곳인
중앙 제대가 있고 그 위를 닫집 모양의 발다키노가 덮고 있는데,
그 높이가 꼭대기의 황금 십자가 부분까지 29m나 되며 무게는 무려 37,000kg..
교황 우르바노 8세의 요청으로 베르니니가 1633년 6월 29일에 완성한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과 함께 르네상스, 바로크의 양대 예술작품 중 최고로 평가받는다.
발다키노의 지붕을 받치는 네 개의 나선형 기둥은 마치 소용돌이 치듯 감겨있는 모양을
띠고 있는데 이는 사람의 영혼이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내부 중앙에는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빛을 뿜어내는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고,
위쪽으로 네 명의 천사가 화관을 하늘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 발다키노는 높은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제작 당시에는 과다한 청동 사용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심지어 판테온 내부
천장에서 수십 톤의 청동을 떼어 와야 할 정도.. 이 제대에 오르도록 설치된 일곱 개의
계단은 한 개의 대형 대리석을 깎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중앙 제대 밑에는 성 베드로를 포함한 역대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지하 묘지가 있다.





(중앙제대 기둥의 4성인 석상)

중앙 제대를 사이에 놓고 쿠폴라를 받치는 네 모서리
벽에는 각각 네 개의 커다란 대리석상이 자리 잡고 있다.
1629년~1640년 사이에 조각한 작품들로 위쪽 시계방향으로
성 안드레아(프랑수아 뒤케스노이의 작품), 성 론지노(베르니니의 작품),
 성녀 베로니카(프란체스코 모키의 작품), 성녀 헬레나(안드레아 볼지의 작품)의 석상들로,
이들 석상 안에는 예루살렘에서 성녀 헬레나가 직접 가져왔다는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일부분,
성녀 베로니카가 예수의 얼굴을 닦아 준 베일의 일부분, 그리고 예수가 운명하신 후 검사관이었던
성 론지노가 가져 온 예수의 옆구리를 찌를 때 사용했던 창의 일부를 보관하고 있다.
베르니카가 가져온 베일에는 골고다로 향하던 예수의 피묻은 얼굴을 닦을 때 자연스럽게
베일에 예수의 얼굴 형상이 배여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후 이 베일과 베로니카의 베일을
재현한 도상들을 베라이콘(vera-icon)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는 진실된(vera)
그림(icon)이라는 의미와 함께 베로니카의 그림이란 중복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
베로니카의 베일에 배여있는 예수의 얼굴은 이후 예수의 얼굴의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성유물들은 1년에 한 번 일반인들에게 공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성 베드로의 주교좌(Cattedra di San Pietro))

바티칸 대성당이 있는 이 자리는 원래 예수님의 제자이자
네로 황제에 의해 순교한 성 베드로의 묘지 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성당이 세워졌고 성당의 이름도 베드로의 이름을 딴 성 베드로 대성당이되었다.
하지만 이 성당은 이민족들이 이동네를 침략할 때마다 약탈 등으로 피해를 입으며
몇 번의 리모델링을 하다 16세기 초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아예 재건축을 하라고 명하여
브라만테 - 라파엘로 - 미켈란젤로 - 마테르노 - 베르니니 등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거장들의 손을 거치며 차근차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도 이 성당의 건축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돈을 받고 면죄부를 판 것이 그 불씨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전성기 바로크는 1640~70년 사이에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이끌었다.
베르니니는 서양 예술사 전체를 통틀어 미켈란젤로와 함께 시각 예술의
전 분야에 정통한 천재. 조각을 기반으로 한 점과 장수하면서 여러 명의 교황을
후원자로 둔 점도 같았다. 10대 초반에 조각 실력을 인정받아 교황청 공방에 들어간 이래
평생 동안 교황청 대표 예술가로 승승장구하며 평탄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스스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신학자로 그의 예술은 중세 때 장인이
그랬던 것처럼 창작 행위보다는 구도 행위에 가까웠다.







(76)





(베드로의 천국 열쇠, 천국 문은 황금 열쇠로 열어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9 KRV)







(대성당안에는 기념비도 있고..)

위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Cristina) 여왕의 기념비
아래는 잉글랜드 스튜어트 왕가의 기념비





(성당안에서 한 컷..)





(베르니니의 후원자 '교황 알렉산도 7세 기념비')

이탈리아의 천재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베르니니
(Gian Lorenzo Bernini 1598.12.7 ~ 1680.11.28)의 마지막 작품.
베르니니는 산피에트로대성당의 건축주임으로서 완성에 힘을 쏟아
부었다고 한다. 광장 주랑(柱廊)도 그의 작품이다.

어떻게 저렇게..
베르니니의 작품도 그렇고,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도 그렇고..
엄청나게 큰 대리석을 깎아내 조각했을텐데 어떻게 저렇게 매끈하고
아름다운 굴곡과 따스함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정말 상상도 안된다.
그냥 둔기로 한 대 맞은듯 멍하다. 너무 많은 작품들이 끊임없이
큰 파도처럼 몰려왔다. 현기증이 날 정도다. 이해하려 하지 말자
지금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자.







(아~ 경이롭고 감탄스럽다!)





(성 베드로의 청동상)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있는 성 베드로의 청동좌상은
13세기 플로렌스 출신의 조각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1245-1302)의 작품으로
작가는 현재 베드로 대성당 지하 무덤 출구 앞에 놓여 있는 성베드로의 오래된 대리석상
(5세기경으로 추정)에서 영감을 얻어, 이와 비슷하게 청동으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세부터 이곳에 다녀간 신자들이 베드로의 발에 입맞춤해서 오른쪽 발가락이 거의 다 닳아 버렸다.
이는 1857년 3월 15일, 교황 비오 9세가 특별한 회칙을 통해 이 날부터 50일간을 임시 성년으로 반포하며,
베드로 대성당에 와서 이 동상의 발에 입맞춤 해야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럽 전역의 많은 순례자들이 이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려들어 베드로의 청동상
오른쪽 발등에 입맞춤하는 바람에 발등이 심하게 닳아 버렸다고 한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바로 이곳 로마에서 순교를 당하는데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하여 머리를 아래로 두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 그의 유해는 바티카누스 언덕 위 비아 코르넬리아로 통하는 인근 길에 묻혔다.
위치는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의 공동묘지. 베드로의 무덤은 처음엔 기념비 하나 없이 그의
이름을 상징하는 붉은 돌만 있는 단순한 형태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듯..
베드로라는 이름은 라틴어로는 "페트루스(Petrus)"이며 그리스어로는 "페트로스(Petros)",
그리스어로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
이는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에서 기인한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80)









(솔직히 경건함보다 전율을 느끼며 흥분했다)

어떤 작품 앞에서는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소름이 돋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문제중에서 아는 문제를 골라 푸는 시험을 치룬 기분.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문제도 다 읽지 못하고 답안을 작성한 심정이랄까!
사진 찍는 것이 병인듯 사진촬영 금지구역에 들어가면 안달을 하는데
베드로 대성당은 사진을 맘대로 찍게 해주었는데도 사진 찍는 것 자체도
잊을 정도로 정신을 뺐겼던 것 같다. 놓친 사진이 많다.









(85)





(베드로 대성당 회랑에서 본 베드로 대광장)

밖으로 나와 참았던 숨을 토해 내듯..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는 광장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교황청 근위병)

노랑, 파랑, 빨간색 제복에 베레모를 쓰고 교황청을 지키는
사람들은 모두 스위스 출신의 교황청 근위병.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
1506년에 창설. 교황청 근위병들도 처음에는 여러 나라 출신으로 구성되었는데
1527년 독일 용병들이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공격하자 대부분의 근위병들은 도망쳐 버렸지만
스위스 출신의 근위병들만 목숨을 바쳐 교황을 지킨 이후 용감히 교황을 지켰던
스위스 병사들만 교황청 근위병이 될 자격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교황청 근위병은 스위스 시민으로 구성된 일종의 시민군으로 교황과 교황청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현재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근위병은 110명으로 모두 남성이며
복무 기간은 최소 2년을 기준으로 연장할 수 있다. 근위병 지원자격은 나이는 만 30세 미만,
가톨릭 신자로 미혼이어야 하며, 키는 174cm 이상. 근위병이 된 이후에는 결혼할 수 있다.
교황청 근위병의 월급은 생각보다 적은 1800 스위스 프랑. 한화로 환산하면 200만원 미만,
선진국 수준의 월급으로는 적은편. 스위스에서는 스위스 국민이
외국 군대에서 근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지만 유일하게
교황청 근위병은 허락하고 있다고..











(조반니 로렌초 베르니니의 작품 산피에트로 광장.)

잔로렌초 베르니니(1598~1680년)는 새로 지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바로크 시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승리를
과시하듯 지금껏 본 적도 없는 규모의 광장을 설계하였다. 교황 알레산드로 7세의
의뢰로 조성된 이 광장은 바티칸 관내의 중세적인 구조에,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착공한 거대한 대성당으로 통하는 의례용 통로를 완성함으로써 질서를 확립하였다.
베르니니의 계획은 대성당과 굴대형으로 배열하여 빙 둘러싸는 고전주의 구조물.
교회가 양팔을 뻗어 교인들을 끌어안는 형태의 타원형 주랑을 설계한 것.
또 이 광장에는 칼리골라 황제가 자신이 만든 원형경기장에 세워두고자 37년에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BC 1200년경 제작)를 거대한 타원형의 중심점으로 정했다.
바티칸 교황청의 총 본산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150년 대역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작품으로
거대 기둥 숲이 타원 윤곽을 감싸면서 기독교 영웅주의를 창출했다.
커다란 트래버틴 대리석 기둥 위에는 기독교의 중심에서
위풍당당한 분위기를 강조하는 성인들의 석상이 서 있다.











(베드로 대광장(산피에트로 광장)의 회랑)

3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광장이라는데도
완벽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
베르니니의 작품인 이 광장은 정면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두고 광장 양 가장자리로
커다란 팔을 벌려 전 우주를 포옹하고 있는 듯이 원주들이 네 줄로 회랑을 이루고 있는데,
그 회랑은 328개의 거대 기둥 숲 타원의 테라스 위에 142명의 성인 석상이 설치되어 있다.
모두가 조각가 베르니니에 의해 계획된 예술품들..
1655년에서 1667년 사이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베드로 대성당을 배경으로 증명사진 한 장..)

표현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것인지..
한참을 씨름해 보지만 마지막에 할 말이 정리되지 않는다.
유럽여행을 여행하면서 대형 성당들을 보면서 장엄함과 화려함에 감탄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이 곳은 아니다.
베드로 대성당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이렇게 꾸미려다 보니 면죄부까지 팔아서
재원을 조달했나 싶기도 하다. 성 베드로 대성당(산 피에트로 대성당, Basilica di San Pietro)이
달고 다니는 수식어로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총 본산, 그리스도교 교회당 중 세계에서 가장 크고,
면죄부 판매로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기도 했던,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성당의 총 본부..
1626년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마데르나, 브라만테를 비롯한 많은 예술가들이
120년동안 작업한 끝에 지금의 대성당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그들은 작품 하나하나에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구도자의 자세로 임했으리라.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과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 세계 3대 박물관에 속한다는 바티칸 박물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대화가들의 내부의 벽화와 장식으로 유명한 박물관의
소장품 또한 대성당 못지않다. 아라찌 회랑의 조각같은 그림,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 지도의 방 천장화, 4개의 작업실마다 단명한 천재화가의 조화롭고 아름다운 채색으로
이루어진 라파엘로의 방, 설명이 필요없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그려져 있는 시스티나 성당 등등..
화려한 천장화를 보고 있으면 떠밀려 가는 바람에 벽면에 전시된 조각품과 작품들은 그만 놓치고..
사진 찍는 것도 많이 놓치고.. 천장을 오래 쳐다본 바람에 목을 풀어줘야 하기도 해야 하기도 했지만
예술에 조예가 없어도 그 순간은 흥분되고 전율을 느낄정도로 황홀하고 행복했다.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 안에 그렇게 장엄하고 웅장한 규모, 화려한 장식, 과장되고 극적인
분위기를 모두 다 갖추고 있는 바티칸시국. 예술과 종교가 주는 극한의 감동을 안고 아쉽게
바티칸에서 발길을 옮긴다. 지금까지의 여행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된 것 같다.
로마에 다시 와야 할 이유가 한 가지 더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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