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13차 (13구간 : 비재에서 밤티재까지)

2009. 7. 3. 18:31山情無限/백두대간(完)

 

백두대간 13차 (13구간 : 비재에서 밤티재까지)


○ 산행일자 : 2006.10.14(토) 04:25 ~ 14:50 (10시간 25분)
○ 산행날씨 : 맑음, 박무
○ 참석인원 : 백두대간 회원 21명, 게스트 7명
○ 산행거리 : 도상거리/20.5㎞        누적거리 : 291.2km
○ 산행코스 : 비재-못제-형제봉-피앗재-속리산(천왕봉)-비로봉-문장대-594봉-밤티재
○ 소 재 지 : 경북 상주시 화북면,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1. 구간별 진행시간

① 접근

10/14 00:25            신복로타리

03:30~04:00  상주 백두대간 식당(식사)

② 구간별 산행 시간

04:25            비재(330m) 도착/출발

05:28            못제(660m)

06:20            형제봉(828m)

07:35~40      조망바위

08:00            산죽밭

08:55            대목리 삼거리

09:20~45      천왕봉(1,058m)

09:50~10:20  헬기장 / 점심

11:28            비로봉(1,032m)

11:55            문장대(1,054m)

12:29            헬기장

14:25            견훤성 갈림길(594봉)

14:50            밤티재(550m)

③ 복귀

15:20~16:20  머루와 다래 식당

20:00            울산도착


2. 산행기록

이력이 붙을 때도 되었건만 막상 대간갈 날이 다가오면 걱정이 된다
그러면서 이율배반적으로 하루하루가 기다려 지는 것은  
아마도 산에 대한 겸허한 마을을 가지라는 것과
대간병에 단단히 걸린 탓이 아닐까.

이번 구간은 산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기대되는 속리산 구간이다.

오는 길 이름도 정겨운 "백두대간 식당"에서 고디탕으로 이른 아침을 먹고
또 오늘 하루 대간길을 이어갈 준비를 하며 마음을 다잡아 본다.

하늘을 보니 날씨도 좋을 것 같아 기분이 좋은데
상주별은 울산별하고 다른지 쏟아질듯 초롱초롱하다.

13번째인 이번 속리산 구간은 도상거리 20.5킬로미터로
상주지역을 지나면서 위태롭게 이어졌던 마루금이 고도를 높이면서
산세 또한 당당해진다. 천왕봉에서는 한남금북정맥이 가지 쳐 나가기도 한다.
속리산 구간의 특징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심하고, 암릉이 많다는 점이다.

비재에서 형제봉까지는 큰 오르내림이 연이어지고 천왕봉 오름길 또한 가파르다.
특히 문장대에서 밤티재로 내려서는 구간은 암릉으로 위험하기까지한 구간이다.
이 구간은 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충분한 물을 준비해야 한다.



(이 일을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일까)


비재는 나는 새의 형국이라 하여 비조(飛鳥)재,
비조령이라 불렸으나 최근들어 비재라고 이름이 굳어졌다고 한다.
상주시 외서면의 동관과 화남면을 연결하는 49번 도로가 가로 지른다.

04:25 들머리 비재 철계단을 오른다.
철계단 위쪽도 철계단 만큼이나 가파른 길이 계속된다.
25분여 화강토 미끄러운 길로 능선에 올라서니 500봉이다.
이후 봉우리 하나를 더 넘어서고 암릉구간을 우회하니
세 번째 봉우리가 위협적인 기세로 버티고 서 있다.



(정겨운 이정표, 하여간 어느지점부터 계속 친절하게 안내를 하고 있다)


못제,
암봉구간은 오른쪽으로 돌아서는 우회로가 있고 사면을 돌아서니
후백제 견훤의 전설을 간직한 해발 660m의 못제가 자리하고 있다는
곳인데 못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대간 마루금에 유일한 못으로 크기는 약 오륙백평 정도된다고 한다.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은 주변 지방을 장악해 가면서
보은군의 호족인 황충과 거의 매일 싸움을 벌여 번번히 승리했다고 한다.
황충이 부하를 시켜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미행했는데
못제에서 목욕을 하면 힘이 난다는 것을 알아내고는 소금 삼백가마를 못제에 풀어
견훤의 힘을 빼고 마침내 황충이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5분 정도 더 진행하여 나타난 헬기장에서 후미를 기다리며 휴식.

암릉을 돌아 오른 후 다시 나타나는 암릉구간 몇 군데를 더 지나면 갈령삼거리
형제봉(700m)과 구병산(9.6km), 갈령재 방향을 알리는 이정표와
상주소방서에서 설치한 "속리산 65번 구조요청지점" 이라는 간판이 서 있다.
이후 길은 계속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이어간다.

갈령삼거리 이후 암릉구간을 통과하자 햇귀가 돌기 시작한다.
형제봉에 올라 일출을 보기 위해 가파른 비탈을 치고 올랐으나
아직 해가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



(형제봉, 정상은 우측 암봉이다)


06:20 형제봉(828m) 할배바위를 지나 길은 북서쪽으로 방향을 트는데
여기서부터 경북 문경시와 충북 보은군의 도경계를 타고 대간길이 이어진다.
국수봉에서 갈라진 충청도 경계가 여기서 다시 만나 문장대까지
왼쪽은 충청도, 오른쪽은 경상도를 경계하며 진행된다.


(가물어서 그런지 기대만큼 단풍의 때깔이 곱지않다. 잎도 많이 말랐고...)


(피앗재 고개, 4거리다)

형제봉에서 피앗재까지는 고도 200m를 낮추는 가파른 내림이다.
피앗재 왼쪽 길로는 산골 마을인 만수동으로 내려갈 수 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천왕봉을 향하여 갈참나무 숲길로 630봉을 지나
667 암봉에 이르니 훨씬 가까워진 속리산 주봉인 천왕봉의 웅장한 자태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바위암봉의 풍광이 박력있다.

천왕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종균씨가 배낭에서 홍어를 꺼내어 무치는데
산중에서 홍어라…톡 쏘는 맛이 별미다.



(한층 가까워진 천왕봉의 웅장한 자태와 문장대로 이어지는 길이 펼쳐 보인다)


(요즘은 선두에 서지않아 길잡이 택명씨 사진 담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어 울창한 굴참나무 군락지, 호젓한 산죽밭과 703봉을 지나
암릉구간을 지나니 지도상 전망바위로 표기된 곳이다.
왼쪽으로 조망이 훤히 트여 지나온 725봉에서 흘러내린 능선과 오른쪽 능선이 만들어 내는
만수동 계곡은 마치 영취산 북바위같이 발 아래가 까마득하다.
그 뒤로 멀리 구병산 능선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에서 지나온 길을 뒤돌아 보며)

점점 더 심해지는 비탈길을 올라가는데 힘이 부친다.
한참 뒤에 오는 줄 알았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김 오 뒤에 나타났다.
속도도 낼 수 없는데 쫓기는 것 같아 두 사람을 앞세우고 천천히 오른다.

대목리 내려가는 삼거리
무명봉을 지나 조금 내려서니 조그만 안부에
대목리와 만수리 갈림길이 표시된 속리산 등산로 안내판이 서 있다.
천왕봉 방향으로는 길에는 나무계단이 잘 놓여있다.

천왕봉 직전, 왼쪽이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들머리다.
바위에 페인트 표시를 해놓고 나뭇가지에도 리본하나를 달아 놓았다.
조금 더 오르면 천왕봉 정상이다.



(천왕봉 정상에서는 거칠 것없이 전망이 좋다)

09:20 속리산(천왕봉/1,058m),
충북 보은군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에 걸쳐있으며
정상인 천왕봉(1,058m), 비로봉(1,032m), 문장대(1,033m), 관음봉(982m), 입석대 등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올망졸망한 능선이 장쾌하며 봉우리가 아홉 개 있는 산이라 해서
신라시대 이전에는 구봉산으로 불리다가 지명산, 미지산, 형제산, 자하산, 광명산으로 불리다가
이후 속리산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다. 해발 천미터가 넘는
기암괴석의 암봉들이 수려하면서도 장엄한 멋을 풍긴다.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바르고 참된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상(俗)을 떠나지 않는데 세상이 산을 떠나는구나." 라는 뜻의 한시는,
신라 진성여왕 8년인 894년경 정치의 어지러움과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구제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세상을 비관하며 각지를 유랑하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의 글이라고 한다.

천왕봉(天王峰)
일제는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과 마찬가지로
'창지개명(創地改名)'을 하여 천황봉이란 이름을 달고 살다가 이제 제 이름을 찾게 되었다니
늦었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루빨리 정상에 제 이름을 새겼으면 좋겠다.

정상석 뒷면에 ...이곳은 조선의 삼대 명수 삼파수 달천수 우통수 중 삼파수의 발원지입니다.
三波水란 동으로 낙동강, 남으로 금강, 서로 남한강으로 흐르는 물을 말하며
이곳 천왕봉에서 나누어진다.

천왕봉에 서니 사방에 박무로 조금 뿌옇긴 해도 사방으로 거칠게 없다.
활목고개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 아기자기한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오고
동쪽으로는 장각계곡, 북쪽으로 비로봉, 신선봉을 거쳐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암릉이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한다. 가슴이 탁 트여 좋다.



(저 입석들은 모두 임경업 장군이 힘자랑한다고 세운 것이라지)

14:50 천왕봉에서 내려 산죽 우거진 길을 지나니 넓직한 헬기장이 나왔다.
모두 식사를 하는데 오늘은 빵으로 준비를 해봤다. 위겸씨는 샌드위치를 싸왔다.
후반부 오르막 길에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배낭무게를 줄여 보려는 생각에서다.
카메라 쌕까지 찼으니 더 힘들다. 배는 고픈데 잘 넘어가지 않는다.




(천왕석문)


(거북바위) 헬기장을 출발하여 거대한 바위문 천왕석문을 지나니
왼쪽으로 거북바위가 이쪽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집채보다 큰 바위들이 벌떡벌떡 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입석대, 경업대 등은 임경업 장군이 7년간 수도한 후에 힘 자랑한다고 세웠다지…



(입석대)

신선은 간데없고 기름냄새가 온 산을 진동하는 신선대 휴게소를 지나
문장대로 향하는데 지금까지 간간히 만나던 산객들과는 달리
문장대 꼭대기에는 개미같이 새까맣고 휴게소 근처는
대목날 시장통보다 더 복잡하게 사람들이 붐빈다.



(문장대에서, 뒤로 충북알프스 상학봉, 묘봉이 보인다)


(문장대 표지석)

문장대(1,054m),
큰 암석이 하늘높이 치솟아 흰구름과 맞닿은듯하여 운장대라고 불렸다.
정상의 암석은 50여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조선시대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을 하고 이곳 석천(가뭄이 아니면 늘 물이 고여 있어 석천이라 한다)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문무 시종과 더불어 운장대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북새통 가운데 문장대 암봉을 오르는 철계단이
올라가는 계단과 내려서는 계단이 나누어져 있어 그 나마 다행이다.

큰 바위 전망대에 올라 호흡을 가다듬고,
지나온 천왕봉과 가야할 백두대간의 기운찬 산줄기와 지난해 종주한 활목고개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 아기자기한 산줄기를 바라보며 그 때의 감동을 되새겨 본다.
지나온 천왕봉쪽도 역시 장관이다. 조망의 즐거움도 좋지만 복잡하여 문장대를 내려왔다.

휴게소는 시장통보다 더 북새통이다.
오늘 밤티재까지 가기로 했으나 진행속도가 빨라 늘재까지 연장한다고 하여
거금 6,000원을 들여 생수 3병을 무장하고, 후미를 기다리는데
상태가 좋지않은 일행이 있어 밤티재에서 끊기로 했다.

문장대에서 밤티재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기는 하나
암릉구간 약 3.3km를 통과해야 하는 위험구간이다.

휴게소에서 문장대 오르는 길 오른쪽으로 빠져나와“등산로 아님” 팻말이
막아서 있는 길로 들어 북동쪽 능선으로 이어지는 헬기장으로 내려선다.
헬기장을 지나면 산죽밭이 이어지고 뒤이어 밧줄을 잡고 올라 통과해야 하는
배부른 사람은 좀 어려운 바위틈새 구간이 먼저 인사를 한다.



(인원점검, 몇 번 세어봐도 인원이 맞지 않는다)


(문장대에는 아직도 개미떼같이 사람이 오르내린다)


(암릉구간, 밧줄을 타다가 개구멍으로 기어 오르고...)


(이런 곳에 길을 뚫은 선답자가 존경스럽다)

몸을 바짝 구부려 바위틈새를 통과한 후 우측 바위에 올라서면 조망이 일품이다.
장암리 시어동 쪽이 훤히 내려 보이고 비로봉에서 시어동쪽으로
흘러내린 톱날 같은 암봉능선이 과히 장관이다.

유격훈련하듯 아슬아슬하게 밧줄타는 재미를 짜릿하게 느끼며
내려온 후 곧 바로 개구멍을 통과

Y자형 팔뚝 굵기 통나무를 건너야 하는데 부러질까 겁이 난다.
아슬아슬한 외나무다리를 건너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이내 또 그보다 더한 곳이 나타난다.
다음에 나타난 개구멍은 머리를 바위에 부딛히지 않게 조심한다고 했는데
대낮에 별이 뻔쩍할 정도로 박치기를 하고 말았다.

그 다음에 나타난 개구멍은 완전히 게구멍이다.
경사면을 엎드려 기어 올라가야 하는데 배낭을 맨데다
카메라 쌕까지 허리에 차고 있어 구멍에 들어서니 아래위가 꽉 낀다.
그기에 밧줄까지 잡아야 하니…
통과하고 나서도 어떻게 저기를 빠져 나왔나 싶을 정도다.

조금도 방심할 수 없는 온통 위험한 암릉길.
길 찾기 까다로운 곳에는 페인트로 방향표시를 해 두어 큰 어려움은 없다.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장관이다)

암릉지대 개구멍이 다 끝난듯 완만한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소나무에 굵은 밧줄이 매어 있는 직벽이 나타났다. 아래를 보니 까마득하다.
각별히 조심해야 할 곳이다. 여기를 통과하면 암릉구간은 거의 끝나는 셈이다.


(이번 구간에는 집채만한 바위들이 우뚝 우뚝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이 후 능선을 완만하게 내려선다.
평탄해진 능선을 따라 내려서다 보면 작은 안부를 지나 올라서게 되는데
이 지점에는 특이한 지형지물이 없지만 오른쪽 비로봉에서 흘러내린 능선이
내내 같이하여 볼거리를 제공한다. 시어동 갈림길을 지나 작은 봉우리로 올라서기 직전
좌우로 높이 약 5m 정도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어 장승 같은 모습이 나타난다.


(꽃이 귀하다 했는데, 산부추가 양지바른 곳에 피어 있다.)


(억세고 거칠었던 길은 갈참나무 숲 호젓한 길로 변했다.)


(그럼 그렇지, 아직은 구절초가 가을을 노래해야 할 때지...)


(대간길은 직진, 견훤성은 우측길)

594봉,
바위에 파란색 페인트로 이정표가 표시되어 있으며 정면으로는 "대간(밤티)",
우측 화살표 방향으로는 "견훤성" 이라 표시되어 있다.

대간길에서 조금 비껴서 있는 장암리 장바위산(545m) 봉우리에는
천연적인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길이 약 650m, 높이 4~15m에 달하는 '견훤산성'이 있다고 한다.
속리산의 상주 지역은 견훤의 주요 본거지로서 충청도 보은과 청주, 괴산으로 통하는 길목인
비재와 갈령, 늘티 등 고갯마루는 전략 요충지인 것이다.

'견훤'(甄萱 867~935)은
후삼국 시대에 상주 가은현(지금의 문경)에서 태어나
서기 900년 완산주(전주)에 후백제를 건국한 난세의 인물로서,
현재의 충북 청주, 괴산, 충주 일대를 점령한 왕건의 세력과 맞서
높이 천미터가 넘는 거대한 천연 성채였을 속리산을 사이에 두고
후삼국 통일의 야망과 함께 치열한 세력 싸움을 펼쳐나갔을 것이다.

견훤산성은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지만 견고한 옛 산성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데,
성채의 망루에서는 마을과 도로는 물론 사람들의 움직임까지 훤히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밤티재에 내려오니 꽃들이 반긴다.)


(길 옆 절개지에는 노란꽃이 군락을 이뤄 피어있다)


(밤티재 동물이동 통로, )

546봉 완만한 안부에 내려서니 홍천용씨지묘(洪川龍氏之墓)가 있다.
무덤을 지나 완만한 내리막길로 평지 같은 봉우리 몇 개를 넘어
나무숲 사이를 헤집고 나오니 앞이 훤한데 산이 짤린 절개지다.

밤티재 동물이동 통로는 말만 이동통로지 급사면에 위치하여 동물들이
제대로 이용할까 싶잖다. 이왕 만들 것이라면 제대로 만들어야 하는데…

내리막을 내려서니 포장도로인 밤티재다.
밤티재는 문장대 온천을 연결하는 997번 도로가 통과하는데
재 이름은 화북면 중벌리 자연부락인 밤치(밤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출입금지 표지판)

왠 간판인지 뒤 돌아보니 내려온 길 쪽에 출입금지 안내판 2개가 서있고,
무단출입 집중단속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


(개망초)


(개쑥부쟁이)

괴산과 보은으로 갈리는 아랫늘티까지 버스로 이동하여 마을앞 개천에서 땀을 씻어내고
이름도 정감있는 머루와 다래 식당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면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했다.


(머루와 다래, 다음 구간은 근사한 이 식당에서 새벽밥을 먹을테지..)

이번 구간은 속리산 절경데다 단풍철이어서 많은 회원들과
게스트가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오붓한 산행이 되었다.
도중에 위험한 암릉구간이 있었지만 전원이 무사히 완주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하다.

이 팀웍으로 향로봉을 넘어 백두산까지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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