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7코스, 그리고 송악산, 서귀포까지

2015. 1. 20. 23:39여행/여행기


 

 

올레7코스, 그리고 송악산, 서귀포까지 
(어제 갔던 곳 다시 가고..)



○ 2015. 1.18 (2일차)   날씨 : 흐림
○ 제주 - 올레7코스 - 송악산 - 서귀포





어제 한라산 산행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고
심통이 날 정도로 자랑을 해댄다. 그에 질세라 산속에서는 산을 보지
못하는 거라며 멀리서 본 설봉도 그에 못지않았다고맞서 보기는 했지만
어제 한라산 설경이 좋기는 정말 좋았던 모양이다. 어찌 매번 올 때마다
한라산 비경만 보고 갈 수 있겠는가! 때로는 계획이 어긋날 수도 있고, 찬밥을
먹을 때도 있고 바람맞을 때도 있지. 인생이 직선이면 얼마나 단조롭겠는가!
그렇게 마음을 달래면서도 한편으론 이리저리 한라산 오를 궁리를 해 본다.
한라산을 오르려면 오늘뿐인데.. 박짐에 가까운 배낭을 지고 한라산으로 달려가?
그러면 산우들과 함께 하려고 일정까지 바꿔 따라붙은 의미가 없어지는 것.
오늘 올래길이나 함께 걸어야지.. 아쉬운 마음을 접고 오늘 일에만 집중하자.
산우님들 어제 한라산 자랑 계속하기만 해 봐라
그러면 난 오늘 한라산으로 가버릴테니까..ㅎㅎ
그랬는데..





(난방이 잘 안된 방도 있었다고..)

우리 방은 괜찮았는데, 다른 방은 지난 밤에 소금을
구웠다고 성화다. 집 나오면 고생이라지만 엄동설한에 난방이
제대로 안되면 그것도 낭패. 일출을 보러 간다고 서둘어 일어나
고양이 세수하고 아침 먹고 7시도 되기 전에 출발











(거린사슴전망대 일출)

기사님의 서비스.. 외돌개를 향해 가다 핸들을 돌려
꼬불꼬불한 산길로 오른다. 바다쪽으로 붉은 햇귀가 돌며
하늘을 붉게 물들인다. 금방이라도 해가 솟아 오를듯 하다.
아슬아슬하게 일출 직전 차가 멈춘 곳은 거린사슴전망대.
멋진 전망대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니..

일출은 햇귀가 돌 때부터 일출 직후까지가
셔트챤스인데 태양이 얼굴을 내미는 순간에 도착했다.
트라이 포트는 세울 시간도 카메라를 설정할 시간도 없다.
불타듯 장엄한 태양을 향해 찰칵 찰칵..







(단체사진 한 장은 남겨야지.. 뒷모습의 주인공은?)







(올레7코스에 들어서니)

해는 벌써 한 뼘이나 솟아 올라 있었다.







(송림과 야자수 길을 걸어)

겨울이라 조금은 삭막하지만 바다 바람이 좋다.
상쾌한 기운이 몸과 마음이 가볍게 한다.







(장군바위라고도 하는 외돌개)

바닷바람을 쐬며 걷다보니 외돌개가 나타났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와서 본 이후로 참 많이도 봤는데
아직도 외롭게 홀로 우뚝하다.





(정겨운 길)

봄에는 유채꽃, 가을에는 억새꽃길로 장관을 이루는 길.
어느 것 하나 놓칠만한 풍경이 없다.









(어부와 낚시꾼)

아찔한 벼랑에 붙어서 낚시하는 사람은?





(누워있는 호랑이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범섬)

멀리서 보면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하여
'호도'라고도 불렀다 한다. 범섬을 한 때 고려를 지배했던
원나라 마지막 세력인 묵호를 정벌한 곳. 묵호는 삼별초 항쟁을
진압하면서 원나라에서 들어온 '말을 기르는 몽골인'을 말하는 것으로
'원이 멸망하여 명나라가 제주의 말을 조공으로 요구해 조정이 말을
공출하려 하니 묵호들이 거세게 반대하여 거부한다. 이에 최영 장군과
고려군사 2만5천이 범섬에서 최후까지 저항하는 묵호들을 섬멸하여
100년간 이어진 원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범섬을 이루고 있는 암석은 제주도에서 흔한 현무암이 아닌
조면암(粗面岩,Trachyte). 범섬은 깎아지른 듯한 해식애와 주상절리가
발달하였고 섬 중앙은 평탄하며 가장자리에는 신기하게도 용천수가
솟아 오른다고 한다. 50~60년 전에는 가축을 방목하고 고구마 등을
재배했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고 한다. 범섬을 범섬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두 개의 콧구멍같은 큰 동굴, 바닷속은 10~40m에
세계적으로 희귀한 연산호 군락지가 펼쳐져 있으며 범섬에만
자생하는 희귀식물과 흑비둘기 서식지라고 한다.





(야자수 숲을 지나 돔베낭골로..)

















(올레7코스의 백미, 돔베낭골 절경)

두 갈래길, 왼쪽 바닷가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절경 돔베낭골. 돔베낭골은 제주어로 돔베는 '도마'를 뜻하고
낭은 '나무'를, 골은 '골짜기'를 일컫는다. 하나로 묶어보면,
도마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큰 나무가 많은 골짜기라는 뜻.
지금은 돔베낭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실제로는 골짜기라기보다는
해안 절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돔베낭골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계속 불려지는 것은 아마도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명소가 되는데 이바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 보이는 범섬)

오른쪽 해안 절벽의 기기묘묘한 형상들,
쉽게 발을 내딛을 수 없을 정도로 널부르져 있는 갯돌,
벌집같기도 하고 육각기둥 같기도 한 바위들을 오르 내리며
조심조심 걷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끝없이 펼쳐진 바다.
파도는 서로를 껴안으며 포말을 일으키고 소리를 내고,
멀리 범섬은 외롭게 웅크리고 있다.

































(각양각색, 찍고 또 찍고)

어마어마한 바위벽.. 자세히 보면 그 모양이나 형태가
넋을 잃게 할 정도로 기묘하다. 누가 저렇게 조각할 수 있을까!.
창조주의 솜씨를 보는듯 하다. 마치 신화 속 주인공들이 나타나
손을 내밀듯 신비로운 돔베낭골은 올레7코스의 백미다.

그러나 전면에 보이는 강정해안은 (전 세계적으로
희귀한 지형으로 바위의 길이가 무려 1.2km, 너비가 150m에
달하는 한 덩어리 바위로써 세계에서 유일하다는 자연유산 구럼비 바위,
오백년이나 된 유서깊은 강정마을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하고
포크레인으로 파헤쳐 콘크리트 구조물로 덧 씌우고 있는 가슴아픈 현장.
한 번 훼파된 자연은 영원히 복구가 안될 수도 있다. 이 자연은 당 시대
인간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후손들에게 빌려쓰고 있는 것으로
잘 보존하여 인계해 주어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대륜동, 빨간 스토리 우체통)

편지 쓰는 법도 다 까먹었으니..







(대륜동 속골천)











(포토 타임, 여기가 스모르 공원?)

남국의 한 풍경같이 야자수가 멋지게 자라고 있다.







(양지바른 곳에는 벌써 봄꽃이)





(포토그래퍼는 늘 바쁘다)







(지명이 제주답다.. 막숙은?)

최영 장군이 '묵호의 난'을 진압하러 왔을 때 막을 친 곳..
거란침입, 고려 무신정권, 개경환도, 삼별초, 배중손, 대몽항쟁,
묵호, 묵호의 난, 최영 장군, 원나라, 명나라, 조공, 공민왕,
범섬.. 덕분에 고려말 역사공부까지..

찻길은 막숙포로, 바다쪽 샛길 이름은 최영로







(잔잔하면 바다도 하늘을 담을 수 있다)







(법환동 가배, 올레길 걷는 것은 여기까지..)











(송악산 해안 진지동굴)











(어제에 이어 다시 송악산..)

복습을 안해도 되는데.. 어제도 왔는데..
갈 곳도 많고 볼 것도 많은 제주에서 이틀 연속
송악산에 오다니.. 어제 한라산 못오른 것도 아쉬운데
아까운 시간에 여길 다시 오다니.. 흥미를 잃었다. 에휴~
2시간 정도 이리 저리 돌다 물새들과 죽치고 논다.





(일단은 서귀포로..)

일행들보다 하루 더 머무는 관계로 이틀날은
성산쪽에 숙소를 예약했다. 성산일출을 담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일기예는 내일 제주 전역이 흐림이다. 송악산에서
성산까지 갈길도 멀어 성산으로 넘어 갈까말까 갈등이 생긴다.
일단 서귀포에 가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시장이 크다)

그런데도 식사를 할 만한 곳은 없다.





(정방동 관내도)





















(서귀포시 중방동 이중섭 거리)

화가의 이름을 딴 거리.. 곳곳에는 그의 작품을
형상화한 조형물과 그림을 만나 볼 수 있다.
거리를 잘 꾸며 놓아 산책하기도 좋다.





(이중섭거리 안내도)













(이중섭 미술관)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로 불리는
대향 이중섭 화가가 서귀포시에 거주하면서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광과 넉넉한 이 고장 인심을 소재로 하여
서귀포의 환상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서귀포 체류는 이중섭 화가의 예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의 높은 창작 열의와 불멸의
예술성을 후대에 기리고, 그의 예술적 발자취에 공감할
수 있게 서귀포시에서 미술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제일 아래 그림은 이중섭의 대표작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1953)'





(그냥 소가 말한 것을 옮겨 적었지)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 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소의 말 / 이중섭

당시 이 시를 본 이중섭의 조카가 "삼촌 시도 써요?"하니까
이중섭은 "그냥 소가 말한 것을 옮겨 적었지" 한다.
조카가 웃으며 "소가 조선말을 참 잘 하네요"하니까
이중섭은 "조선 소니까"라고 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근데 소 눈이 예전같지가 않아 전쟁을 겪어서 그런지 흐려졌어.."
소는 이중섭에게 운명적인 오브제였던 것이다.







(아름다운가? 가여운가?)







(수선화)





(서귀포 칠십리.. )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비운의 천재화가 이중섭 생가)

불운한 시대의 천재화가로 불리는 이중섭 화가 가족이
피난을 와서 거주하였던 곳. 이곳에서 이중섭 가족은 1.4평
정도의 작은 방에서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며 찬없이 밥을 먹고,
고구마나 깅이(게)를 삶아 끼니를 때우는 생활이었지만 웃으면서
살 수 있었던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한다.
화가는 이곳에서 이웃주민과 집주인을 위해 마당의 땔감 위에
작은 사진을 올려놓고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며 1년여를 이곳에서
생활하다 부산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이곳을 떠난 후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어렵게 작품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술로 달래다가 1956년 9월 서울적십자
병원에서 타계했다고 열변을 토하는 해설사.
천재화가의 어렵고 힘들었던 그 시절들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자화상,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있었다는 부인사진)

광복되기 바로 전에 결혼한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의
집안이 상당히 부유하여 둘의 결혼을 반대했으나 두 사람은
결혼하여 금슬이 좋았던 걸로 알려져 있다. 마사코는 결혼한
후에 이남덕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 사용했다.
이중섭은 그림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이 때문에
1952년 부인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으로 갔다. 이후 그들의 만남은
이중섭이 부두노동으로 번 돈으로 일본의 처가집을 방문한 것뿐.
정부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부산, 대구, 통영, 진주,
서울 등을 떠돌며 가난 속에서도 창작에 매달렸다. 그 후 그는
죽을 때까지 가족과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그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나 그림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1955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인 전시회를
미도파 백화점에서 열었으나, 이후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이다가 1956년 간염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니 이미 주검과
밀린 병원비 청구서만이 있었다고 한다.
사후, 이중섭의 둘째 아들 이태성(야마모토 야스나리)이
2005년 3월 16일 첫 공개해서 경매에 내놓은 그림 8점이 그 해
10월 가짜로 밝혀져 파장이 일어났다. 이를 기점으로 이중섭 작품에
대한 위작 논란이 있었다. 한국미술품평가원에 따르면 이중섭이
위작이 가장 많은 작가라고 한다. 187건의 감정결과 위작 108건,
진작 77건, 감정 불능 2건. 의뢰작품의 58%가 가짜였던 셈.





(구상시인의 이중섭 거리이름 기념비)















(밤 거리 모습.. 많이 어둡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행복이란 꿈꾸는 순간에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