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 바다로 향한 거대한 꿈

2015. 12. 28. 20:52여행/여행기

 
 

 


 리스본, 바다로 향한 거대한 꿈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



 
포르투갈하면
대항해시대의 해양강국이 떠오르지만
포르투갈의 상징은 의외로 '닭'. '바르셀루스의 닭'은
정의의 상징이자 행운의 상징인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어떤 순례자가 성지를 방문하러 가다 바르셀루스의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마침 그 집에 하녀가 그 순례자를 보고 연정을
품었으나 그가 받아주지 않자 하녀는 그에게 도둑 누명을 씌운다.
재판정에 서게 된 순례자는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재판관의
식사로 나온 닭을 가리키며‘내가 무고하다면 저 닭이 살아 움직일 것’
이라고 했다. 그러자 진짜 그 닭이 움직여 순례자는
무고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문화적인 의미에서 포르투갈의 상징은
3F. 곧 Football, Fatima, Fado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세계적인 축구 스타
레알 마드리드의 호날두가 포르투갈 출신이고,
성모발현 성지 파티마에서 하루를 묵으며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가톨릭 신자들의 천주를 향한 신심도 엿볼 수 있었다.
프랑스에는 샹송, 이탈리아에서는 깐소네가 있고,
스페인에는 플라멩고, 아르헨티나에는 탱고,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음악은 파두









(오비도스에서 까보다로까 가는 길의 풍경)

파티마에서 출발하여 중세도시 오비도스를 거쳐
까보다로까로 향하는데 구름이 잔뜩 끼고 비까지 뿌리며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반도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까보다로까(로까곶)는
포르투갈에서도 최서단 유럽대륙의 서쪽 땅끝마을!
드뎌 대서양이 보이기 시작한다.







(까보다로까를 상징하는 십자가)

버스에서 내리니 바다방향으로 높다란 십자가가 보인다.
까보다로까는 수도 리스본에서 서북쪽으로 약 4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최서단 곶이다.









(야생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까보다로까, 포르투갈의 땅끝마을)

북위 38도 47분, 서경 8도 30분.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또 다른 시작점이 되는 곳.
아찔한 해안 절벽밑으로 대서양의 거대한 파도가 거세게
몰아치며 더 이상 발 내딛을 곳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날카로운 바람을 등지고 우뚝 서 있는
십자가상의 기념비에는 '이곳에서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된다'는
포르투갈의 유명한 시인 카몽이스의 시구가 새겨져 있으며
그 밑으로는 호카 곶 현지의 좌표가 기록되어 있다.
바람과 절벽, 붉은 등대만이 홀연히 남아있는 호까 곶에서는
푸른잔디와 들꽃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대서양의
물결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휴식이 된다.
호까 곶의 절벽 근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건물이
바로 관광 안내소이며 기념품 숍이다.







(까보다로까를 중심으로 남쪽 방향)

까보다로까 도착 직전까지만 해도 거의 구름속을
달려왔는데 구름이 빠르게 걷히기 시작하면서 시야가 트인다.
멀리 동쪽에서 온 손님을 배려해 유라시아 대륙 서쪽 바다를
보여 주는 것 같다. 감사한 뿐이다.











(해안은 수십 길 아찔한 단애..)

잔잔한 파도가 포말을 일으키며 해변으로 밀려오고 있다.
거친 대서양이 오늘은 의외로 잠잠한 것 같다.





(대서양을 배경으로..)

대서양 광활한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호까곶. 여기서
직진하면 1600km 밖 대서양 상에 아조레스 군도가 나오고
계속 직진하면 위도가 비슷한 미국 워싱턴이 나오겠다.
GPS 좌표를 찍어보니 직선거리 5,700km







(서쪽 방향.. 대서양을 가로질러 가면..)

대서양의 드넓은 바다는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이 바다끝은 지옥이거나 죽음의 바다,
혹은 지구가 네모지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인이 생각한 세계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뿐이었다. 그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땅이 좁고, 자원도 부족하고, 외세의 침략도 빈번하여
전쟁이 많이 일어났다. 이러한 영향으로 그들은 자극과 모험을 즐기며
대범하고 열정적인 민족성을 지니게 되었다. 수많은 위기와 거친
역사적 풍파에 시달리는 가운데 1249년 알가르베(ALgarve) 지역 전역을
통합함으로써 현 포르투갈이 탄생했고 강한 군주제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 대서양을 보고 정말 황해가 불가능한 곳일까? 하고
도전에 나선 이가 있었으니 곧 항해 왕자 엔히크(1394.3.4~1460.11.13)로
아비스 왕가의 왕자이며 포르투갈 제국 초창기의 주요인물이었다.
그는 유럽의 땅끝 마을인 까보다로까에서 출발하여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진출해 아프리카의 황금과 상아,
후추를 리스본으로 들여왔고 국고가 늘어갔다.

포르투갈이 해상강국으로 발전하는데는
항해왕자 엔히크가 대항해 시대를 열었고, 엔히크의 업적을 물려받은
바스톨로뮤 디아스가 인도를 향해 가다가 아프리카 희망봉까지 진출(1488)하였고,
디아스 이후 바스코 다 가마가 등장하여, 유럽인들이 꿈에 그리던 인도에 유럽인
최초로 상륙(1498)하는데 성공하게 된다.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에 자극을 받은
마젤란(포르투갈 왕실이 인도의 향신료 중계업을 허가해 주지않는데 반발하여
에스파냐로 망명하였다)함대가 세계 최초로 세계일주에 성공(1522)하게 된다.
대항해 시대를 통해 세계 곳곳으로 뻗어나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아시아 각국의 향신료 등 무역을 바탕으로 막대한 부를 쌓고,
포르투갈 역사상 가장 전성기가 되는 시기를 맞는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전성시대는 모로코와의 전쟁에서 참패하고
스페인 왕에게 귀속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친구는 스페인에서 왔다고 했다)

꽤나 폼내며 라이더들이 무리지어 달리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는데.. 이 친구들은 유럽대륙의
서쪽 끝 더 달릴 곳이 없는 데까지 왔단다.











(중세분위기를 간직한 숲속의 작은 도시 신트라)

신트라는 리스본에서 2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인구 2만명의 소도시로 로까곶에서 리스본 가는 길에 있다.
신트라는 리스본 근교의 여행지로 첫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인기있는 곳,
포르투갈의 왕족과 영국 귀족들의 휴양지로도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곳.
울창하고 깊은 산 속에는 13∼15세기의 왕궁인 신트라성 궁전과 동화속의
그림같은 페나성, 산꼭대기 무어인의 성터는 신트라에서도 인기있는 곳.
그리고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는 신트라의 전경은 한 폭의 그림같다.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 전체의 풍경과 식민지에서 가져온
외래종 수목과 토종 식물들이 조화를 이루어 도시를 장식하고 있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이곳을 '위대한 에덴'이라고 묘사했고,
다른 많은 문학가들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앞다투어 찬양했다고 한다.
조용하고 아담한 고도(古都)로 아기자기한 숍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고,
아줄레주 타일로 장식된 옛 귀족풍의 저택과 건물들을 거리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또한 매년 여름이면 도시에 산재해 있는
교회나 공원에서 수준 높은 대규모 음악 페스티발이 열려
신트라를 찾는 여행객을 즐겁게 해 준다고 하는데,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바람에 속속들이 보지 못하고
이동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던 신트라.







(간단한 식사, 꼬마 자동차 잘 어울린다)

유럽의 식사는 대개 빵과 커피, 샐러드로
간단하게 해결되고 설겆이도 쉬워 편리하다.









(신트라 시가지 모습)





(신트라 시내 지도)







(2개의 원뿔형 굴뚝이 특징인 신트라 왕궁)

멀리서도 보이는 원뿔 모양의 우뚝한 굴뚝 2개가 특이하다.









(무어인의 성, 성으로 가는 열차형 버스, 페나 성)

독일 퓌세지역의 노슈반슈타인성을 지은 루드비히2세의
사촌인 페르난두2세가 1836년에 포르투갈의 여왕 마리아2세와 결혼하고
리스본에서 가까운 신트라를 찾아 왔다가 이곳 경관에 매료되었다.
신트라를 너무나 사랑했던 페르난두2세는 신트라의 16세기 건물들
(수도원, 교회 등)이 1775년 리스본 대지진 이후 무너진 채 그대로 폐허로
남아있는 것을 보고는 페나성 근교 부지와 신트라 성 모두를 사들여 1839년에
아름다운 성을 완성했다. 페르난두2세의 왕궁건축 명으로 독일인 Eschwege가
건축한 이 성은 무어, 고딕, 마누엘, 르네상스, 바로크 양식까지 다양한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이채로운 성이다. 갖가지 색깔로 장식된 건물 외부와
화려한 내부도 볼만하지만 산꼭대기에서 조망되는 주변의 푸른 산의 모습과
리스본 시가지와 떼주강, 대서양의 풍경까지 전망이 멋지게 펼쳐진다고..
저 차를 타고 페나성에 올라가 봐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페나 성의 아름다운 모습은 빌려온 사진









(신트라 역)

리스본에서 버스로 오는 것보다
기차로 오는 것이 편리하다.









(산꼭대기에 보이는 것은 무어인의 성)

포르투갈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고대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부터라고 한다.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500여년간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라틴문명의 영향을 받았고 624년에는 서고트 왕국, 711년에는 이슬람 세력인
무어인의 지배를 받는다. 이때 기독교 세력은 지속적인 국토회복운동을 벌여
1139년 즉위한 아폰수 엔히크가 이슬람세력을 축출하고 마침내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해 신왕조를 세운다. 그 후에도 국토회복운동을 꾸준히 전개한 결과
1239년 오늘날의 영토를 확보하게 된다. 북아프리카 지역의 무어인에게
400년의 지배를 받는다. 무어인의 문화는 포르투칼과 스페인의 해양제국
기초에 영향을 주었으며 오히려 우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좁은 골목길 바닥은 반질반질한 타일)

미로와 같은 골목길엔 기념품점들과 레스토랑들이 도열해 있다.











(골목길을 따라 올라 가니..)

점점 고색창연한 풍경이 나타나지만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파스텔톤의 건물들)

하루를 묵으며 찬찬히 돌아 봤으면 좋겠다.
아쉬움이 많이 남기고 발길을 옮겼다.









(신트라 궁전 계단에 앉아.. 이탈리아에서 온 여행객들과..)

1174년 무어인들이 물러났을 때 세 곳의 요새가 남아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변하여 신트라 왕궁이 되었다고 한다. 동 주앙1세(1385~1433)때
지은 이 궁은 1910년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인 마누엘2세가 1910년 공화혁명 이후
영국으로 도망갈 때까지 왕실의 정식 여름별궁이었다. 신트라 왕궁은 리스본의
더위로부터 탈출하거나 사냥을 위해 왕실가족들이 머물던 곳이다.
1747년 페드로 왕자의 명령으로 몇 차례 증축을 거쳤기 때문에
무데하르 양식을 비롯하여 고딕, 르네상스, 마뉴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이 궁은 1755년 지진에도 무사했으며 2개의 거대한 원뿔은 신트라의 상징적인
유물이 되었고 왕궁 내부는 이줄레주라는 장식 스타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원뿔모양의 기둥은 높이가 33m. 부엌의 굴뚝이다.
이 굴뚝은 비가 새지 않고 환기가 잘 이루어져
궁전 내부에 음식냄새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막다른 골목 교회 마당에서 본 풍경..)

길이 끊겼다. 대저택들이 모여있는 곳은 다른 길로 가나 보다.
멀리 대서양까지 보인다.





(리스본으로 가기위해 버스를 기다리며..)







(신트라에서 리스본으로.. 리스본)

영어로 리스본(Risbon), 포르투갈어로는 리스보아(Lisboa)
라포르투갈의 수도이자 가장 큰 도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시가지의 저렴하고 풍부한 해산물, 정 많은포르투갈 사람들의
친절함에 매료된 유럽인들의 주말 휴가지로 새롭게 각광받고 있다.
리스본 항구와 접한 테주 강(타호 강)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으로, 하류측의 강폭이 약 10km나 되어
강이라기 보다는 바다라고 할 만큼 규모가 크며
어느 곳에서나 멋진 석양을 감상할 수 있다.

현재 리스본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1755년의 대지진 이후 폼발 후작의 지휘로 정비된 것이라고 한다.
지진으로 인한 화재와 해일로 시가지의 3분의 2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역사적 건축물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서쪽 끝의 벨렘지구에는 본래 성채였던 벨렘 탑과 16세기
마누엘 양식의 제로나무스 수도원이 남아있다.







(제로니모 수도원,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의 무덤이 있는 곳)

리스본에 도착하여 제일 먼저 들린 곳은
벨렘지구에 있는 제로니모 수도원이었다. 제레니모 수도원은
리스본의 역사적인 구역 벨렘에 있으며, 이 도시에서 가장 훌륭한 역사 유적 중
하나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플랑드르 디자인을 병합한 건축 양식의 걸작인
이 수도원은 '항해 왕자 엔리크'가 세운 오래된 종교 암자가 있었던 자리.
1497년, 또 다른 탐험가인 바스쿠 다 가마와 그의 부하들이 인도로 출발하기 전
이곳에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1499년 다 가마가 희망봉에서 귀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마누엘 1세의 명으로 이 자리에 수도원이 세워졌다.
디오구 보이탁의 책임 아래 1502년 건축이 시작되었고, 1517년에는
스페인 건축가 조앙 데 카스틸류가 작업을 이어받아 계속했다.
프랑스 조각가 니콜로 샹테렌은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르네상스 디자인의 요소를 첨가했다.

건축 비용은 동양에서 수입해 오는 특정한 향료에 매긴
세금 5퍼센트로 충당했다. 마누엘 왕이 죽자 건축이 중단되었다가
1550년 재개되었다. 두 명의 포르투갈 왕, 마누엘과 조앙 3세와
바스쿠 다 가마도 수도원 부속 성당에 묻혀있다.
수도원은 1850년 한 차례 증축되었으며 고고학 박물관과
해양 박물관이 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인근 타주강에 있는
벨렘 탑은 1983년 '히에로니무스회 수도원과 벨렘 탑'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수도원은 포르투갈이 '발견의 시대'를 이끌어 갈 때
누렸던 영광을 반영하고 있다는데..
줄이 길어서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관광객을 태우고 도심을 활보하는 마차와 트램)











(대단한 빵집 ??, 줄이 길다)

빵과 카스테라가 포르투갈에서 유래된 것..
16세기 이후 포르투갈과 일본이 활발하게 교류할 때
일본을 통해 포르투갈의 빵이 우리나라에 전해졌는데
어원도 포르투갈의 빵(Pang)에서 유래되었다고.. 카스테라도
스페인 카스타야 지방을 포르투갈어로 카스테라로 발음.
빵과 카스테라는 우리와 포르투갈이 발음이 같다.





(풍물시장을 한참 구경하느라..)









(범선모양 53m 높이의 발견기념비)

발견의 탑, 대항해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의 용감한 선원들과
그들의 후원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범선모양으로
대항해 시대 공헌을 했던 사람들.. 엔히크 왕자, 마젤란, 바스코 다 가마 등의
순서로 조각되어 있다. 포르투갈의 번영을 이룬 대항해시대의 힘이 느껴지는
조각상이다. 이 자리가 인도양을 개척한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을 떠났던 곳.
엘레베이터로 탑 전망대에 오를 수 있다. 요금은 3유로.
다른 곳을 두르고 오느라 시간이 없어 그만 패스.





(테주 강, 바다인지 강인지..)













(한 때는 해양강국이었던 포르투갈)

유럽 이베리아 반도 서부에 있는 나라.
국명은 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 포르투에서 유래한다.
포르투갈은 지중해,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4지역을 잇는 해상
교통의 결절점에 위치, 지리상의 발견시대에는 에스파냐와 더불어
세계 최대의 해외 영토를 보유하였던 해양 국가였다. 그러나 식민지
무역에서 획득한 부가 국내의 근대산업형성에 사용되지 못함으로써
오늘날 에스파냐와 더불어 유럽에서는 후진국에 머물러 있다.

기원전 750년경 켈트족이 정착하여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카르타고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BC 2C경 케사르, 아우구스투스의
원정으로 로마제국에 편입된 뒤 로마화가 시작되어 루시타니아
(Lusitania)라고 불렸으며, 지금도 로마 시대의 양식이 남아 있다.
5세기 초에 이주한 서고트족이 711년 무어족이 침공할 때까지 통치.
8세기에는 이슬람의 지배를 받았다. 1139년 엥리케 왕이
무어족을 축출하고 독립, 1143년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다.
1385년 스페인 카스틸랴 왕국에 승리하여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15세기 초 주앙1세의 아들 항해왕 엔히크(Henrique)가 인도 항로와
브라질을 발견함으로써 스페인과 함께 해양 왕국이 되었으나,
1580년 왕가의 분규로 스페인에 합병(1580∼1640)되었다.

수도 리스본은 식민지로부터 몰려드는 부로 번창했으나,
왕실과 귀족의 낭비와 경제실패로 부르조아가 형성되지 못했다.
16세기 중엽부터는 영국에 경제적 종속이 심화되고, 브라질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도 네덜란드, 영국의 진출에 의해 점차 축소되어 갔다.
19세기 초 나폴레옹 군대가 침입하자 왕실은 브라질로 망명했고,
나폴레옹 몰락 후에도 영국의 장군이 부임, 섭정하며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1822년 브라질이 독립독립 선언을 하자 포르투갈의
국력은 쇠퇴해 갔으며, 사회적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1910년 공화파의 혁명이 일어나 마누엘2세가 폐위되고
공화제가 성립하였으나, 1926년 군부 쿠데타에 의하여 코스타 장군의
독재정권이 출현하였다. 경제 정책 실패로 코스타 독재 정권이 실각하고,
카르무나 대통령이 살라자르를 경제장관으로 기용하여 경제 재건에 성공했다.
그러나, 1932년 이래 살라자르, 카에타노의 독재가 계속되었다.
1974년 4월 25일 민주화를 목표로 군부 소장파 장교들에 의한
무혈쿠데타가 성공하여 드디어 독재정치를 끝냈다.
인구는 2015년 어림 10,477,800명, 주산업은 농업과 광업.
산업 경제구조는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이다.
2007년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21,018 달러.













(제로니무스 수도원 앞 임페리우 광장)

정원을 잘 꾸며 놓았고, 시원하게 뿜어져 나오는 분수..
두 필의 말 조각상이 특이하다. 에구 바쁘게 다녔드니 힘들다.
정원 나무 그늘아래 벤치에서 잠시 휴식.. 달콤하다.






(식민지 전쟁기념관의 뜰에 있는 식민지전쟁기념비와 비행기)

1922년 리스본에서 브라질 리오데 자이네로까지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기라고..?

1960~1970년에 다른 유럽국가들과 달리 포르투갈 정권은
아프리카 식민지와 자치령에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식민지와 자치령에서 다양한 무장 독립운동이 일어났고
포르투갈 군과 포르투갈령 아프리카 식민지간에 군사적 충돌이 빚어졌다.
전쟁 당시 많은 군인 및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훗날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기념탑이 세워졌다.벽면 가득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과 사망자들의 이름이 촘촘히 새겨져 있다.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출발한 곳, 벨렘탑)

탑 모샹이 드레스 자락을 늘어 뜨린
귀부인 모습같다고 하여 '테주강의 귀부인'이라고 불린다.
1515년 마누엘1세 때 시작하여 21년에 걸쳐 마누엘 양식으로 완성했다.
원래 인도, 브라질 등으로 떠나는 배가 통관 절차를 밟던 곳으로,
왕은 이곳에 나와 오랜 황해에서 돌아온 선원들을 맞이 했다고 한다.
스페인 시절부터 19세기 초까지는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어 스페인에
저항하던 정치범과 독립운가들이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한 곳이다.
내부 관람이 되며 4층 테라스에서 테주강과 벨렘지구를 조망할 수 있다.
탑의 모양이 나비가 물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누엘 양식의
건출물로 마누엘1세가 항구를 감시하기 위해 세운 요새라고 한다.
이 탑에서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를 향해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는 탑은 당초 물속에 세워졌으나
테주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
1983년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함께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4월 25일 다리와 크리스투 헤이)

발견의 탑 옆으로 '4월 25일 다리'가 보인다.
리스본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가는 테주강은 스페인 중부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1008km의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 넓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바로 '4월 25일 다리'이다.
1966년 완공 당시에는 독재자의 이름을 붙여 '살리자르의 다리'
라고 했으나 1974년 4월 25일에 일어난 포르투갈 혁명쿠데타를
기념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유럽에서 2번째로 긴
2,278m의 거대한 현수교로 상단은 자동차가, 하단은 열차가 달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와 비슷한데 이는 다리의 시공을
미국의 건설회사가 담당했기 때문이라고..
다리 끝쪽에 거대한 예수상이 보인다.

이 예수상은 크리스투 헤이(Cristo Rei)라고 하는데
테주강 맞은편 카실랴스(Cacilhas)의 언덕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거대한 석상이다. 이 석상은 1959년 브라질의 리우데 자이네루에 있는
거대한 그리스도 상을 본을 따 만들었다. 티켓을 사서 석상이 있는
대좌의 탑으로 들어가면 1층에 작은 성당이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그리스도의 발 밑에 전망대가 나온다고 한다.
기단 높이 75m 예수상 20m로 테주강과
리스본 시내를 향해 우뚝 서 있다.







(104)











(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을 재건한 폼발 후작 동상)

에두아루도7세 공원 밑으로 폼발 후작 광장이 있고
광장 중심에는 폼발후작 동상이 시가지와 테주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동상 바로 앞에 시작하는 리베르다드 거리는 리스본의 상젤리제 거리로
불릴 정도로 고급상가와 디자이너 숍, 금융회사와 호텔 등이 있으며,
로시우 광장 앞 레스타우라도레스역까지 곧게 뻗어 있다. 대로 옆의
가로수 길은 도보로 이동하기 쉽게 정비되어 있으며 작은 화단,
분수대, 카페테리아, 벤치 등이 있어 산책하기가 좋다.

대지진 이후 폐허가 된 리스본을 새롭게 부흥시키고
도시 계획에 의해 리스본을 재건축한 자가 바로 폼발 후작.
그 밖에 포르투갈 내에 영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국가의 경제력 독립을 강화시키는 등의 업적을 남겨
포르쿠갈 국민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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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치며 일렁이는 것 같은 호시우 광장)

광장은 물론 인도까지 대리석 조각으로
각양각색의 모습들을 표현하고 있었다.
광장 한 복판에 27m의 화려한 분수대가
시원하게 물을 뿜고 있다.





(로시우 광장 동 페드루4세 동상)

동 페드루4세(브라질 페드루1세:1798~1834)는
1798년 10월 12일 동 주앙6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807년 나폴레옹이 포르투갈을 정복했을 때 왕가와 함께
브라질로 피신했다. 동 주앙6세는 브라질에서도 통치자로
활동했고, 그러던 중 페드루는 독립을 선언하고 3개월도 안돼
브라질에서 1822년 10월 12일 브라질 황제가 되었다.
1826년 3월 10일 동 주앙6세가 사망하자 명목상 포르투갈왕이 되었지만
2개월 뒤 마리아2세에게 왕위를 이양했다. 브라질에서 통치를 했던
페드루4세는 국민들의 열렬했던 지지가 점점 식어갔고 반감마저 일었다.
의회 내에 강력한 반대세력이 등장하고 여러 차례 폭동이 일어나자
1831년 5살된 아들(페드루2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다.

바이샤 지구와 리베르다드 거리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동 페드루4세 동상이 있어 원래 동 페드루4세광장으로
불렸으나 현재는 로시우 광장으로 더 많이 불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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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샤 지구)

각종 노천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숍, 호스텔 등이
즐비하고 관광객들로 붐비는 리스본 최고의 번화가이다.
호시우 광장에서 시작해 바다를 마주하는 코메루시우 광장 전까지
길게 뻗은 길 위로 한 방향을 향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나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구경하는 재비가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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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게이라 광장에서 보이는 알파마 지구의 상 조르제성)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다.
5세기 로마인들이 축성하기 시작해서 9세기경 무어인들이
완성시킨 것으로,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된 것을 1938년에
복구했다. 리스본 언덕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루에서 시가지와 4월 25일 다리가 훤히 조망된다고..







(피게이라 광장)

광장 중심에는 황해의 왕 엔히크의 아버지인
동 주앙1세의 동상이 있다. 로시우 광장 동쪽에 이웃하고 있으며,
시내 교통의 요충지라고 할 만큼 버스와 트램이 교차한다.
광장을 끼고 호스텔과 숍, 카페 등이 늘어서 있다.





(배움도 깨달음도 언제나 길 위에 있다.)

직접 떠난 곳에서 가던 길 멈추고 바라보고
또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사연 속에는 역사와 문화,
예술, 철학 등이 보물처럼 숨어있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떠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을 충부하게 해주고 삶에 풍요로움을
더해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신선한 마음,
놀라운 일에 대한 견문, 새로운 풍경을 보는 기쁨,
몰랐던 인물과 만나는 것, 그리고 고결한
배움의 습득이 바로 여행 아닐까.






Barco Negro(검은 돛배)
Amalia Rodrigu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