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슬로, 뭉크와 바겔란, 입센과 그리그.. 예술의 도시

2018. 8. 16. 23:04여행/여행기




뭉크와 바겔란, 입센과 그리그.. 예술의 도시 오슬로
(바이킹, 오로라, 스발바르 군도, 노르웨이 숲은 어디에..)






사는 지구의 반대편에서
느끼는 것들은 삶이 같으면서도 살아가는 방식은
동과 서의 물리적 거리 만큼이나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산에 올라야 산 넘어 산이 보이듯, 여행은 넓은 세상을 보여주면서
확신하고 있던 상식마저도 의미 없게 하며,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며,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 얼마나 좁은지 깨닫게 해 주는 것 같다.
 여행은 하면 할수록 배워야 할 것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그곳의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할 때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되는 것 같다.
정해진 답만 강요받다가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다는 것,
 나와 다른 방법으로도 자신들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실증해
보이는 것이 여행인 것 같다. 무엇보다 경험이 동인(動因)이 되어
꿈꾸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점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기도 하고..






(노르웨이)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쪽 부분,
얀마옌섬, 스발바르 제도, 그리고 부베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385,252km², 인구는 약 523 만명. 유럽에서 두 번째로 인구밀도가 낮다.
동쪽은 스웨덴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노르웨이의 북쪽 지역은 남쪽은 핀란드, 동쪽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쪽의 스카게라크 해협의 건너편에는 덴마크가 있다.
수도는 오슬로다. 북극해와 바렌츠해와 접한 해안선은 피오르로 유명하다.

노르웨이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 목재, 해산물 등이 풍부하며,
지형을 이용한 대량의 수력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원 매장량은 엄청나서
세계 3위의 천연가스, 5위의 석유 수출국, 관련 산업이 GDP의 25%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자원에 힘입은 노르웨이 국부펀드는 세계에서 제일 크며, 규모는 현재 한화 650조 원.
세계 주식시장의 1%를 보유하고 있다. 석유가 발견되기 전인 1970년에는 스웨덴의
총 경제 규모의 1/3밖에 되지 않았으나 자원에 힘입어 200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2배인 옛 종주국 스웨덴을 총 경제력마저 추월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입헌 군주제이며, 국가 원수는 하랄 5세.
유럽 연합의 회원국은 아니나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미국의 대표적
우방국 중 하나. 유엔에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공헌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UN군에도 참여하여,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수단, 리비아 등에 파견하였으며,
유엔, NATO, 유럽 평의회, 북유럽 이사회의 창립국 중 하나이며, 유럽 경제 지역,
WTO, OECD의 멤버이자 솅겐 조약에 서명한 국가 중 하나이다.

2001년부터 2006년, 그리고 2009년부터 가장 최근의 통계까지
노르웨이는 인간 개발 지수에서 세계 정상을 기록한 대표적 선진국이다.
2010년 기준으로 연간 근로시간은 약 1,400시간으로 주당 27시간 정도이며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는 국민 중 하나다. 최저임금은 산업마다 다르나
연간 310,000크로네(약 6,100만 원)정도며, 2010년 기준으로
대졸자 초봉 평균은 420,000크로네(약 8,300만 원).









(야일로에서 골(Gol)을 거쳐 아름다운 크뢰단 호수를 감상하면서 Oslo로..)





(오슬로)

오슬로(Oslo)는 노르웨이의 남부 해안에 있는 노르웨이의 수도.
1048년에 바이킹 왕 하랄드에 의해 건설되었다. 13세기 호콘 5세에 의하여
수도로 정해져 한자 동맹의 항구로서 번영했다. 1624년에 일어난 대화재 후에
재건되었으며 그 당시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에 의하여 크리스티아니아
(Christiania 또는 Kristiania)라고 명명되었으나, 20세기에 이르러 오슬로란
본명으로 되돌아갔다. 도시의 크기는 남북 약 40km, 동서 약 20km로 면적이
매우 넓다. 그리고 도시 안에는 녹지와 숲과 공원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또 피오르가 들어와 있어서 경치가 아름답다.

오슬로의 상징인 시청사(Radhuset)를 비롯하여
현재 왕이 거주하고 있는 왕궁과 의회 건물, 오슬로 대성당,
오슬로 국립극장, 가장 번화가인 칼 요한 거리, 뭉크를 비롯한 세계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오슬로 국립 미술관, 1894년에 설립된
노르웨이 최대의 야외 문화·역사 박물관인 노르웨이 민속 박물관(Norsk
Folkmuseum), 모놀리스 조각탑으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조각가 구스타프
비겔란이 200여 개의 조각품으로 완성한 조각공원(Vigeland parken), 오슬로
피오르에서 발견한 3척의 바이킹 배(오세베르그호, 고크스타호, 투네호)의
복원품이 전시된 바이킹 배 박물관 등으로 유명하다.
오슬로의 인구는 634,463명(2014), 면적 454㎢
부산광역시와 대구광역시와 자매도시



오슬로의 상징 오슬로 시청사
https://www.oslo.kommune.no/










(오슬로의 상징인 시청사)

오슬로의 상징인 시청사(Radhuset)는
왕궁과 의회 건물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어
오슬로 피오르를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1915년 오슬로의 시장이 오래된
오슬로 항구에 새로운 시청사 건물을 건립하여 이 지역을 새롭게 단장하려는
목적으로 1920년 공사에 착수하여 1950년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조금 실망스러운 외양은 66m와 63m 높이의 사무실용 2개의 타워가 양쪽으로
 솟은 모양이 웅장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고 경상도 사람처럼 무뚝뚝 우직한 느낌.
그래서 '갈색 치즈 조각'이라는 별명까지 얻은 것 같다. 그러나 외양과는 달리
건물의 내외벽은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이 헌정한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현관 위쪽에 높이 선 조각상은 Joseph Grimeland의
'오슬로의 소녀(Oslopike)', 광장 복판에는 조각가 Dyre Vaa가 조각한
오슬로를 상징하는 '청동 백조상'을 올린 분수가 있다. 노르웨이 소설가
한스 에른스트 칭크가 백조를 '오슬로의 영혼'이라고 묘사한 이래
백조는 오슬로 여러 조형물에 즐겨 쓰는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오슬로의 소녀'상 오른쪽 벽에 설치된 지름 5m의 천문시계는
태양이 운행하는 궤도를 12성좌로 나눈 황도 12궁, 서양식 12간지라
할 수 있는 조디악(12궁도)들이 빙 둘러 있는데 조각가
Nils Flakstad의 부조 작품이라고 한다.





(노벨 평화상 시상식이 열리는 역사적인 장소 메인 홀)

입구를 들어서면 높이 21m, 가로 세로가 각각 31m, 39m인
천장까지 탁 트인 메인 홀이 나타난다. 한 눈에도 노벨상 만찬이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 블루홀을 벤치마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톡홀름 시청 홀은
벽면을 벽돌로 그대로 노출한 데 비해 이곳은 4면을 벽화로 장식한 것이 다르다.
이곳에서 외국 귀빈을 영접하고 다양한 국내외 행사가 열리지만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1990년 12월 10일 김대중 대통령께서 이곳에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이다. 다른 노벨상 수상식은 스톡홀름에서 갖지만 노벨 평화상 만은
이곳에서 하는 것은 노벨의 유언 때문이라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메인 홀과 2층 연회실, 2층 복도의 벽화들은 '벽화 형제들'로 불렸던
세 화가 Axel Revold, Alf Rolfsen, Per Krog(크리스티안 크로그의 아들)와
헨릭 쇠렌센이 맡았다. 행사 준비 중인 2층은 들어갈 수 없었다.





(남쪽 벽면의 '일하며 노는 나라')

헨릭 쇠렌센(1892~1962)의 대형 벽화
'일하며 노는 나라(The Nation at work and play)'는
압제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국영 기구들로부터 교육받고
일자리와 집을 얻고 치료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관 위쪽 알프 롤프센의 벽화)

이 작품은 농부로부터 어부, 노동자, 벌목공까지 노르웨이의
정체성을 이룬 다양한 직업인들 그렸다. 맨 오른쪽은 190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극작가이자 소설가, 시인인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에른손(1832~1910)을 그려
국민의 자부심을 북돋우고, 새로운 이상을 제시한 국민작가를 배치하고, 맨 왼쪽엔
탐험가이자 평화운동가 프리드쇼프 난센(1861~1930)을 배치하고 있다.







(동쪽 벽면에 길게 펼쳐진 그림( 부분))

이 벽화는 알프 롤프센의 작품으로
나치 점령기(1940~1945) 노르웨이 국민의 수난을 담고 있다.
노르웨이 정부와 왕실은 영국으로 탈출해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노르웨이인들은 나치에 대항해 3만 5천 명이 감옥과 집단수용소에 갇혔다고 한다.
맨 오른쪽에는 저항군들이 감옥과 수용소에 갇혀 연합국 승전소식을 기다리다
마침내 감옥 문이 열리고 자유의 광명을 찾는 모습, 광복의 기쁨을 누리는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 앞에는 긴 의자가 놓여있어 쉴 수 있다.





(서쪽 계단 입구에 있는 벽화)

알프 롤프센의 작품으로 무언가를 든 남자 앞에
아기를 가져 배가 부른 여자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남자는 오슬로의 수호성인 성 할바르. 할바르 뵙외른손(1020~1043)은
왕가 귀족의 아들로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사람으로 정평이 났었는데 어느 날
시장에서 먹을 것을 훔쳤다는 누명을 쓰고 시장 상인들에게 쫓기던 임산부를
배에 태우고 피신시키다 추격해 온 상인들의 화살에 맞고 숨진다.
상인들은 살인을 감추려고 할바르의 시신을 맷돌에 묶어 바다에 버렸지만
시신이 이튿날 맷돌을 매단 채 다시 떠오르는 것을 비롯해 여러 기적이 일어난다.
그림에서 그는 왼손에 상인들이 쏜 화살 석 대를, 오른손에는 맷돌을 쥐고 있다.
그는 가톨릭교회 시절 성인이 돼 오슬로 사람들이 수호성인으로 모셨고
종교개혁 이후 루터교에서도 성인으로 이어오고 있다.
그의 뒤로는 오슬로의 상징 백조가 날아가고 있다.
롤프센은 벽화에 할바르 이야기와 함께 역사의 혼돈 속에서
솟아오른 오늘의 노르웨이 번영도 담았다.





(진지하게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

반면 중국 여행객 일행도 잠시 만났는데.. 어휴~
사실, 우리도 중국인들 말할 형편이 아니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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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입구 회랑 양쪽에 설치된 부조)

회랑 벽에는 조각가 Dagfin Werenskiold(1892~1977)가
북유럽 신화 에다(Edda)를 현대적으로 묘사한 채색 목각 부조 16점이
설치되어 있다. 에다 신화는 8~12세기에 걸쳐 노르웨이 음유시인들의 서사시
'옛 에다'와 12세기 아이슬란드 시인이자 역사가 스노리 스툴루손(1179~1242)이
문자로 기록한 '새 에다' 두 버전으로 전해온다고 한다.
천지 창조에서부터 신들의 싸움, 인간계의 형성을 거쳐
거인족과 선악 대결 끝에 신들이 죽고 살아남은 일부의 신과
인간들이 새 출발 하는 이야기로 끝난다고 한다.





(시청사 지하에 걸려 있는 오슬로 시내를 표현한 거대한 태피스트리)





(난센의 기념물)

서쪽 회랑의 바깥쪽 벽면에는 노르웨이의 국민적 영웅이자
북극탐험가, 난민의 아버지이자 민중 운동가, 외교관인 프리드쇼프 난센
(1861~1930)을 기리는 기념물이 설치되어 있다. 그는 1888년 역사상
최초로 그린란드를 횡단하고 1890년 북극 탐험에 나서 당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북방인 북위 83도 59분까지 진입했다.
난센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포로의 본국 송환과 난민 구제에 힘썼다.
그는 1922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해안 쪽에서 본 시청사 외관)

왜 '갈색 치즈 조각'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지 알 듯하다.
적어도 외관만으론 특별한 건축물로 보이지 않는다.










(항구, 어디론가 떠나고픈..)





(외계인 (or 잠수부)과의 조우)













(시청사 주변 정원과 조각상들)

항구와 시청 중간에는 조각가 에밀 리에(1897~1976)가
엄마와 아이를 소재로 조각한 분수대와 Per Palle Storm(1910~1994)이
시청사를 짓는데 기여한 기술자와 노동자를 조각한 6작품 등 조각작품들이
설치되어 있고, 잘 꾸며진 정원에는 여름꽃들로 화사하다.







(오슬로의 파란 하늘은 그저 있는 것이 아니다)

텅 빈 도로, 철길을 따라 유유히 도심 곳곳을 누비고
다니는 트램, 푸른 잔디밭 위로 철길이 놓이고 그 위로 트램이 달리는
모습은 환경보전에 앞선 유럽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모놀리스로 유명한 비겔란 조각공원
http://www.vigeland.museum.no/en/vigeland-park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 parken))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 parken)은 노르웨이의 조각가
비겔란(Vigeland, Adolf Gustav)이 1915년부터 오슬로시의 지원으로 만든
세계 최대의 조각공원이다. 비겔란은 사람의 일생과 갖가지 희비를 수백 개의
청동과 주철, 화강암으로 나타내려고 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그의 제자들과 시민들이 합세하여 조각공원을 완성하였다. 
총면적 32만 3,700㎡에 부지에 인간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조각 작품에 표현하고 있다.

높이 17m인 하나의 화강암으로 121명의 인간군상을 조각한
모놀리스는 서로 위로 올라가려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으로 20년에 걸쳐 완성한 걸작. 인간의 본성을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공원을 상징하는 명물로 꼽히고 있다. 비겔란 조각공원을
프로그네르 공원(Frognerparken)이라고도 부른다.





(비겔란 조각공원의 테마는 인간의 삶의 희로애락)

200여 개의 조각상은 모두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리 위 청동 조각상 58개를 비롯하여 화강암, 주철을
사용하여 표현한 작품들의 공통 테마는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인간의 희로애락이다.





(Angry Boy, 화가 난 아이)

비겔란 조각공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관광객들이 이 아이의 손과 발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하여
얼마나 만졌는지 반질반질하고, 사진 한 장을 찍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릴 판이다. 작품명과 설명은 따로 없지만
그냥 느껴지는 느낌 그대로이다.





(링 안의 남자)

삶의 수레바퀴 속에서 고뇌하는 우리들의 모습.. 실감이 난다.





(여섯 거인이 떠받치고 있는 중앙 분수(The Fountain))

분수는 거대한 화강암으로 조각되었는데
흡사 올림푸스 신들과의 싸움에서 패해 평생 지구를 떠받쳐야 했던
거인족 타이탄의 아틀라스 같다. 무거운 수반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를 상징하는 것이리라. 분수 주위를 둘러싼 20그루의
나무들 또한 한 몸으로 조각된 사람들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조각 공원의 모든 조각 작품들이 인생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분수 하단의 부조들은 사람의 일생, 요람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나열해 놓았다.





(공원 한가운데 서 있는 모놀리스(The Monolith))

공원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모놀리스.
높이 17m에 달하는 화강암 조각상인 '모놀리스(Monolith)'는
멀리서 보면 그저 거대한 원통 기둥 같아 보이지만, 121명의 남녀가
엉켜 괴로움으로 몸부림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위로만 올라가려는 듯 안간힘을 쓰는 군상은 인간의 본성을 나타내며
실제 인체 크기로 조각되어 더욱 현실적이고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모놀리스 주변에도 36조의 군상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하나같이 흠
잡을 곳 없는 완벽한 예술품들.. 200명 이상의 조각가가 함께했다니
그들의 예술작품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와 노력으로 후손들이
누리는 문화 혜택은 예술혼의 덤인 셈이다.





(또 다른 군상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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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수레바퀴, The Wheel of Life)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팔, 다리를 잡고 모두가 엉켜
하나의 원을 이루고 있다. 돌고 도는 우리의 삶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생에서 최종적으로 다다라야 할 영원을 염원한 것일까? 







(비겔란 조각공원을 나오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조각공원으로 모놀리스를 비롯한 경이로운
조각 작품은 물론, 정원과 숲도 잘 가꾸어 놓아 작품을 감상하며 쉬어
가기에 좋은 공원 같다. 비겔란 공원은 노르웨이 오슬로시뿐만 아니라
수많은 개인과 기업에서 기부하여 1939년에서 1942년 사이에 건설되었다는데
비겔란이 모든 조각작품을 오슬로시에 기증하면서 조건 2가지를 내 걸었으니
하나는 '예술작품은 작가만의 것이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는 모든 사람의 것이다.
그래야 예술작품이 되기에 누구나 맘껏 만지고 즐길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과
다른 하나의 조건은 '작품을 보려는 사람들에게 관람료를 받지 말라'고 한 것.
훌륭한 작품만큼이나 철학적 사유가 깊은 예술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청동 조각 작품들은 만져서 반질반질한 부분이 많고,
연중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고 한다



뭉크로 유명한 오슬로 국립미술관
http://www.nasjonalmuseet.no/en/visit/locations/the_national_gallery/






Oslo National Gallery는 노르웨이 최대의 미술관으로
오슬로의 중심가인 칼 요한 거리에 있다. 1836년 의회의 결정에
따라 1842년 설립되었다. 이전에는 노르웨이의 왕궁 건물에 있다가
1882년 현재의 건물로 이전하였다.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에는 피카소, 르누아르,
세잔, 마네, 모딜리아니, 드가, 뭉크 등 세계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노르웨이 작가 작품과 18~19세기 덴마크, 핀란드 화가들의 작품도 소장되어 있다.
특히,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의 하이라이트는 <사춘기> <마돈나> <절규> 등
노르웨이의 자랑이자 표현주의 대표적인 화가인 뭉크의 작품을 전시한
뭉크 관이라 할 수 있겠다

에드바르드 뭉크는 노르웨이 뢰텐(현재는 루티니아)에서
의사 크리스티안 뭉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슬로에서 성장했다.
5살 때 어머니 라울라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오랜 병상에 있던
한 살 위인 누나 소피에도 그가 14살 때 결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어머니의 죽음은 가정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과묵하고 엄격했던
아버지는 더욱 말이 없어졌으며 계속되는 가족 간의 불화와 그들을 엄습한
빈곤이 한 집안의 단란함을 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어두운 가정 분위기와
갑자기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아 가 버린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어린 뭉크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뭉크는 고통스러운 시절에 대해
"나의 요람을 지켜보고 있던 것은 질병과 광기와 죽음이라는 검은 옷의 천사였다.
그들은 계속 나의 생활에 달라붙어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라고 말했고
이런 어두운 운명은 그대로 그의 예술을 길러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뭉크는 1886년과 1889년부터 3년간 두 차례에 파리 유학을 다녀왔다.
첫 번째는 4주일간의 단기간으로 인상파에 마음이 끌렸으나 만족하지 못했고,
두 번째 유학에서 고흐, 고갱, 로트렉 등 반 인상파 적이며 세기말적인 작품에
공감하여 "호흡하고 느끼고 괴로워하고 사랑하며, 살아있는 인간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고 일생 계속하여 그린 결정적
주제였던 <생명의 프리이즈> 연작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Leiv Eirikson discovering America, Christian Krohg 1893 Maleri)

2층 계단 오르는 아치형 천장 아래, <승리의 비너스> 상 위
벽에 설치된 크로그의 대작 <레이프 에릭손, 북아메리카를 발견하다>이다.
에릭손은 서기 1000년쯤 탐험대를 이끌고 그린란드를 떠나 북미 뉴펀들랜드에
도착해 신천지를 발견한 바이킹이었다.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에 상륙하기
500년이나 앞선 시기. 에릭손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곳이 뉴펀들랜드이다.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 크로그도 민족주의적 소재엔 낭만적인 화풍을 보였다.
나중에 뭉크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크로그는 노르웨이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독일에서 그림을 배운 뒤 덴마크와 파리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귀국해 죽을 때까지
노르웨이 예술아카데미에서 가르쳤는데 그에게서 큰 영향과 영감을 받은
제자가 뭉크였다. 뭉크가 살롱전에서 혹평을 받자 그는 뭉크야말로
제3세대 화가라고 옹호하기도 했다.





(Venus Victrix(승리의 비너스), 르누아르)





(Stuggle of Survival(생존을 위한 투쟁), Christian Krohg)

입구 계단에 걸려 있는 작품으로 현재 오슬로의 가장 번화한
카를 요한 거리의 한 상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을 배급해 주는
일상을 담은 작품이라고 한다. 앞쪽의 어른들에 밀려 맨 뒤에서 추위에 떨며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이런 과거의 모습도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가 세계 제1의 복지국가로 거론되는데
이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도 많다.





(The Last Shots, Arne Ekeland(1908~94, 노르웨이))





(Winter Night in the Mountains, Harald Sohlberg 1914 Maleri)





(Street in Røros, Harald Sohlberg 1902 Male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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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Beach, Rolf Nesch(1893!1975, 독일))





(Portrait of the Painter Oda Krohg, b. Lasson, Christian Krohg 1888 Maleri)

Krohg가 그린 부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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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with Cigarette, Edvard Munch 1895 Maleri)

1895년 작 <담배를 든 자화상> 뭉크가 31살 때 그린
자화상으로 작품 전체에는 여전히 뭉크 특유의 우울감이 감돈다.
인물과 배경의 경계가 불분명하고 검고 푸른색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 손은 눈에 띄게 강조되어 어둡고 불분명한 배경에 반해
빛나는 듯 보인다. 에드바드 뭉크는 그의 얼굴과 시선은 감상자 쪽으로
향하게 하여 시선을 끌지만, 자신의 내면의 세계 역시 똑바로
응시하고 있음을 표현했다고 추측할 수 있겠다.





(Puberty, 1894~95 Maleri)

1895년 작 <사춘기>, 벌거벗은 채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성숙해 가려는 몸을 감추려는 소녀를 그린 작품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뭉크가 오슬로 전람회에
전시한 최초의 누드화인 이 작품을 아버지가 볼까 봐 덮개를 씌어
놓았다는 일화가 있는 작품.





(Ashes, Antagelig 1894 Maleri)





(The Scream, 1893)

뭉크의 작품 중 가장 표현성이 강하며 널리 알려진 작품
1993년 작 <절규>. 이 작품은 뭉크가 앓았던 공황발작에서 기인한다.
소리 지르면서 절규하는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뭉크는 자신이 크리스티나 교외를 산책하고 있었던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어느 날 저녁 나는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한 쪽에는
마을이 있고 내 아래에는 피오르가 있었다. 나는 피곤하고 아픈 느낌이 들었다.
... 해가 지고 있었고 구름은 피처럼 붉은색으로 변했다. 나는 자연을
뚫고 나오는 절규를 느꼈다. 실제로 그 절규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진짜 피 같은 구름이 있는 그림을 그렸다.
색채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뭉크는 유화, 템페라, 크레용, 파스텔로 그린
총 4점의 <절규>를 남겼다. 그중 파스텔로 그린
1895년 작이 2012년 소더비 경매에서 약 1355억 원에 낙찰되었고,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된 <절규>는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개막일인
1994년 2. 12일 도난당했다가 되찾은 것으로 유명하다.





(Mother and Daughter, Mellom 1897 og 1899 Maleri)





(Moonlight, 1895 Maleri)





(Parisian Model, (1896) Maleri)





(Night in Saint-Cloud, (1890) Maleri)





(The Day After, Antagelig 1894 Maleri)





(Inger in Black and Violet, 1892 Maleri)





(The sick Child, 1885~86 Maleri)

1886년 작 <병든 아이>.
병상에 누워있는 소녀는 뭉크의 누나 Sophie이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성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 그들을 보살폈던 이모 Karen으로 추정. 1877년 결핵으로 사망한
누나의 죽음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줄곧 따라다닌
죽음에 대한 공포와 절망, 정적, 슬픔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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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nce of Life,1899~1900)

900년 작 <생명의 춤>,
뭉크는 사랑과 죽음을 주제로 한 연작을 통하여
예술적 생명성을 나타내려고 노력하였는데, 이 작품 역시
뭉크의 체험적 심성을 표현하여 내면적인 세계인 사랑과 죽음을 보여주고 있다.
뭉크는 여자를 꿈꾸는 여인, 삶을 갈망하는 여인, 체념하는 여인상으로 나누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축제에서 느낀 감상을 표현한
이 작품은 대담하게 배치된 인물들, 강렬한 색채, 멀리 일직선으로 그려진
해안선 등을 통해 충만한 생명감을 표현하고 있다.





(Melancholy, Antagelig 1892 Maleri)





(White Night, (1900-1901) Maleri)





(Madonna, 1894~95)

뭉크의 대표작 중 하나인 1895년 작 <마돈나>
서양미술사에서 '마돈나'는 마리아로 순종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순결과 성스러움의 상징이나
뭉크는 성과 사랑에 사로잡힌 여인으로 마돈나를 표현하고 있다.
뭉크의 <마돈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젊은 시절 연애사와
관련되어 있다. 1885년 밀리 탈로와 사랑에 빠지지만, 매우 자유분방한
그녀와 연애를 하면서도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렸다.
이후, 어린 시절 친구인 다그니 유을을 만나 연인 사이로 발전하였지만,
그녀가 자신의 친구와 열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다시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급기야 두 사람이 결혼에 이르자, 다그니에 대한 사랑은
증오로 바뀌고, 결국에는 여성 전체를 가증스럽게 여기게 된다.
이 작품에서 뭉크의 잠재의식 속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와
여성 혐오증을 엿볼 수 있다. 뭉크에 있어 마돈나는 남성을
파멸시키는 사악한 요부인 셈이다.





(The Girls on the Bridge, Ca. 1901 Maleri)

1901년 작 <부두의 소녀들>,
이 작품은 뭉크가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와서 그린 것으로
뭉크 예술의 새로운 출발을 나타낸다. 색감이 1890년대 작품보다
밝고 신선하며, 소녀들의 흰색, 빨간색, 녹색의 드레스는 색의 사용을
대담하게 강조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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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베르그의 'Winter Night in the Mountains' 앞에서)





(꼬마 숙녀의 멋진 포스)













(칼 요한 거리(Karl Johan Street))

약 1.3km에 이르는 오슬로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있는
최대의 번화가로 이 거리의 끝 언덕 위에 왕궁을 건립한 ‘칼 요한’왕의 이름을 땄다.
상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며 중앙역과 왕궁을 연결하고, 거리의 중심에는 국회의사당이
있다. 거리의 서쪽에는 입센과 뵈른손의 동상이 서 있는 국립극장이 있다.







(노르웨이 왕궁(Det Kongelige Slottet))

칼 요한 거리 끝의 언덕에 있는 왕궁(Det Kongelige Slottet)은
1858년 칼 요한이 완성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전사이며, 원래 이름은
장바티스트 베르나도트(Jean Baptiste Bernadotte)인 칼 요한은 1818년
당시 스웨덴 왕인 동시에 노르웨이를 지배했던 왕으로서, 왕궁 앞에
그의 청동 기마상이 서 있다. 입헌군주제인 노르웨이의 국왕이
현재 기거하는 왕궁으로, 궁전의 내부는 비공개이나 주변
정원과 광장은 오슬로 시민들의 대표적 휴식공간이라고..









(칼 요한 거리 풍경 2)





(오슬로 대학교 캠퍼스)

오슬로 대학은 노르웨이의 국립대학으로,
1811년 덴마크령(1397∼1814)으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노르웨이인들의
요망에 따라 프리드리히 6세가 창설하였다.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교이며, 대강당의 E. 뭉크의 벽화가 유명하다.

전 세계에서 자국민은 물론, 외국 유학생에게 학비를 받지 않는 나라는
독일과 노르웨이 두 나라뿐. 핀란드와 스웨덴도 국제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으나, 스웨덴은 2012년, 핀란드는 2016년에 각각 유료로 전환되었다.
노르웨이도 사립대학교는 학비를 낸다고 한다.







(오슬로 국립극장)

칼 요한 거리 서쪽에 있는 오슬로 국립극장.
1899년에 세워졌고 2년에 한 번씩 입센축제라는 국제적인 문화축제를
개최한다. 건물 앞에는 19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든 연극 <인형의 집>의 극작가 입센과
<우리들은 이 나라를 사랑한다>는 노르웨이 국가를 지은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로
190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비에른손의 동상이 서 있다.









(칼 요한슨 거리.. 그날 오슬로도 덥긴 더웠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성향은 '외유내강' 형으로,
일찍부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평등주의적 시각과 '함께 사는 세상'을 표방한
노르웨이 사람들의 자세는 일찍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대외정책의 큰 방향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으로 자리 잡아 왔다. 그래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다른 스칸디나비아
국가의 사람들보다 더 친절하면서 순박한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 '짠돌이'의 성향도 지녔다. 다른 나라와 달리 옷차림새도 튀지 않는다.
시내에는 할인 슈퍼마켓과 중저가 브랜드의 숍이 성업중인 반면 명품 매장은 썰렁하다.
물론 높은 물가와 세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는 겉모양보다
내실을 중시하는 자세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유 수출 이후 부를 쌓으면서
생활 성향을 두고 풍요를 누리는 현재 세대와 가난을 경험했던
기성세대가 갈등하는 양상은 우리와 비슷하다.

 



(곳곳에 보이는 공공 무인자전거)

오슬로는 도로에 승용차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반면 자전거 도로가 잘 구축되어 있고 곳곳에 공공 무인자전거가 설치되어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 자전거는 오슬로 관광안내소에서 신청, 스마트카드를 발급받아
사용할 수 있다. 최대 3시간 사용 가능하며 보증금은 500NOK, 1Day 이용권은 120NOK
그러나 시내를 걸어 다니느라 자전거를 이용할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미세먼지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우리나라도 승용차 이용을 줄이기 위한 도보나 대중교통,
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전환이 필요하다 하겠다.








(코펜하겐으로 데려다줄 DFDS 크루즈)

오슬로에서의 짧은 만남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동화의 나라
  덴마크를 가기 위해 북유럽 초호화유람선 DFDS SEAWAY를 승선..
15:30분에 승선, 16:30 출발하여 다음 날 09:45분에 코펜하겐에 도착한다.

타고 갈 DFDS 크루즈선의 제원을 살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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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달려 온 것 같은데..)

저 멀리 오페라 하우스와 오슬로 시청사가 보이고
그 뒤로 숲속의 집들이 보인다. 부산의 집들하고는 정말 대비되는
모습이다. 우리는 미세먼지가 국가 재난 수준인데 노르웨이의 공기는 

청정하기만 한데 푸른 숲속의 집들은 얼마나 공기가 좋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눈앞에 갑자기 작은 섬 하나가 나타났다. 저 바위위의 앙증맞은
집은 개인 소유일까.. 공공건물일까?









(배는 역시 갑판이 좋지)

오슬로에서 코펜하겐 가는 뱃길은 오슬로가 피오르 깊숙한
곳에 있어 거의 100km를 나가야 바다다운 바다를 만나기 때문에
한참 동안은 육지 속 바다로 해변 풍경이 좋다.





(해안선에 설치된 벙커와 야포)

여자도 징병제인 노르웨이지만 인구가 523만 명이니
전군이 2만 6천200명 수준. 포병전력이 야포 35문, M109 A3 자주포 14문,
M270 12문 정도라니 이 지역에 전력 몇 %를 투입했다는 건지..
해군은 이지스함 5척과 1150톤짜리 잠수함 5척을 보유하고 있다고







(석양이 붉게 물든 창가에서 저녁을 먹고..)





(꼭 가 보고 싶었던 Oslo Viking Ship Museum의 바이킹 선)

노르웨이를 떠나면서

 바이킹과 노르만족, 서유럽을 연결하여 살펴보면,

서유럽 세계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로마제국으로부터
흉노족으로 불리는 훈족의 서진으로 촉발된 게르만족의 대이동,
남진한 게르만족의 한 부족인 프랑크족이 일구었던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원형이 형성되었다.
9~10세기 약탈로 악명 높았던 바이킹이 영국과 아이슬란드, 노르망디,
지중해의 시칠리아까지 진출하여 곳곳에 새로운 공국(왕국)을 수립하면서
서유럽 여러 나라의 기원이 되고, 유럽은 중세 봉건사회로 이행하는
중요한 기점이 되면서 서유럽 세계가 완성되었다.


바이킹은 게르만족 중에서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지방을
원주지로 하는 일파로 북방인을 뜻하며 인종적으로는 북유럽 인종, 장신,

백색 피부, 금발, 파란 눈이 신체적 특징. 바이킹은 게르만의 이동 때 원주지에서

농경, 어업, 목축, 해상약탈을 해 왔으나, 8세기경 본국이 통일된 왕권을 형성함에

따라 독립적인 지위를 잃은 소수 장들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주민들을 이끌고

약탈적 이동을 시작했다. 바이킹은 항해술에 능하고 모험심이 강하여
노르웨이계는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일부는 북아메리카까지 진출했고,
덴마크계는 잉글랜드, 프랑크로 향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스웨덴계는 러시아, 지중해 시칠리아섬에서 왕국을 세웠다.
바이킹의 초기의 약탈적 성격은 정착하게 되면서 상업에 종사하고

원주민과 융합, 동화하여 중세 유럽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이킹은 상업하면서 약탈을 자행했기 때문에 해적을
의미하는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탔던 배는 길이 30m, 폭 5m 정도로
50명 정도 탈 수 있는 크기여서 좁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도 유리했다.
배를 타고 가다 더 전진할 수 없을 때는 몇 사람이 배를 머리 위로 들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을 뿐 아니라, 해도나 나침반 없이도 순풍을 타면,
노르웨이에서 아이슬란드까지 9일, 불과 3일 만에 북해를
횡단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고 한다.
(사진은, 오슬로 피오르 부근에서 발굴된 바이킹 선
'오세베르그 호' 길이 23m, 폭 5m, 9세기 제작 추정)






(DFDS CROWN SEAWAYS도 넓은 바다로 나섰다)




Solveig's Song / Sissel Kyrkj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