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북유럽의 베네치아 스톡홀름

2018. 9. 1. 23:22여행/여행기



스톡홀름, 북유럽의 베네치아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국가의 전형 스웨덴의 수도)





어느 여행가가 "여행은
다름에 대한 환타지"라고 했다. 맞는 말이다.
우리와 그들이 다르고 여기와 그기가 다르다.
이왕 다른 것을 기대한다면 도시를 바꾸는 것 보다는
나라를 바꾸는 편이 낫다. 대륙을 바꾸면 확실하다.
동과 서가 다른 것 같이 우리의 반대편에 있는 
스웨덴은 어떻게 다를까?





(옌쇠핑에 도착, 체크인)

헬싱괴르에서 Ferry로 스웨덴 헬싱보리로 건너 왔다.
다시 헬싱보리에서 2시간 반을 달려 베테른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전원도시 옌쇠핑으로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옌셰핑은 내일 스톡홀름을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이지만 북구의
여름은 낮이 길어 밤 10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인데도 밖이 훤하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하는 것이 부담되기는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냥 잠자리에 들 수는 없는 것 아닌가!









(Billingens friluftsomrade)

아직 날이 밝아 호텔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본다.
숲속에 대규모 레저시설도 있고, 숲속으로 잘 만들어 놓은
오솔길을 더 걷고 싶지만 벌써 10시가 넘은 시간.









(시각이 10시 반인데도..)

숲속 길을 30분 정도 걷고 숙소로 돌아오니
이제 외등이 켜진다. 시간이 몇 시인데..





(아침 6시 현재 기온 14℃)

한여름이지만 쌀쌀한 기운에다
공기까지 맑아 기분은 상쾌하다.





(옌셰핑은 스웨덴 물류 중심도시)

스웨덴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옌셰핑 주의 주도이며
약 9만 명이 사는 스웨덴에서 9번째로 큰 도시, 베테른호 남단에 있다.
1845년부터 1970년까지 성냥 제조로 유명한 도시였으며 현재도 스웨덴의
물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이케아와 일렉트로룩스, 후스크바르나 등
기업의 중앙창고가 입주해 있다. 산업도시지만 전원도시 같다.





(스웨덴(Sweden/Sverige)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위치한 우리나라 2배 반이나 되는
큰 나라로 평화로운 발트해와 수많은 호수와 숲으로 이뤄져 있다.
인구는 천 만 명 정도 되며, 우리 교민도 2,500여 명이 사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선진 복지국가로,

'바이킹 시대'로 일컬어지는 9세기경부터 비잔틴,
아랍과의 교류를 통해 해상무역의 강자로 유럽 무대에 등장했다.
1397년 '칼마르 동맹'이 맺어지면서 잠시 덴마크의 연합 왕국으로
지배를 받았으나, 120년 후 핀란드와 노르웨이를 포함한 독립왕국으로
재독립하면서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절대왕정의 시대를 이끌었다.
하지만 1800년대 초 러시아의 공격으로 핀란드와 올란드 제도를
러시아에 넘겨야 했으며, 1905년에는 노르웨이도 독립을
선언하면서 현재의 영토로 정비되었다.

1914년에 덴마크 및 노르웨이와 말뫼 협정을, 대공황 이후
사회민주당 및 노사 대표와 함께 잘트쉐바덴 협약을 맺으면서
현대 스웨덴의 기본 체계인 복지국가 확대발전, 부의 재분배,
전쟁 불개입 등의 기본 골격이 확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민.노후 연금제도, 아동 양육 보조금 확대 등의 복지정책이
확대되면서 경제가 눈부신 성장을 했다. 1994년 EU에 가입.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적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
'이케아', '노벨상'을 만든 알프레드 노벨과 세계적 영화배우
잉그리드 버그만, 팝그룹 아바(ABBA)등이 대표적인 스웨덴의 상징.
볼보 등 자동차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들도 많으며, 2000년대 이후
정보통신, 환경보호, 생명공학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북유럽 경제의 선두주자로 지금까지 자리 잡고 있다.









(스톡홀름 가는 길의 풍경)

넓은 벌판, 드문드문 보이는 농가, 그리고 태양열 발전 설비
(스웨덴 정부는 전력인증제도를 운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2030년까지
추가로 18TWh의 신재생에너지 발전량 확보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리고 IKEA를 비롯한 에릭슨 등 세계적인 기업들의 로고가 걸린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옌셰핑에서 스톡홀름까지는 약 4시간 거리







(스톡홀름에 도착하여 이른 점심을 먹고 나니 12시)









(여기저기 자전거)

스웨덴에서 부러운 것 중 하나가 1만여 개가 넘는
산책 코스와 자전거 도로를 꼽을 수 있다. 자전거 여행과
도보여행도 흥미로울 것 같다. 당장은 경험이 어렵지만..





(스톡홀름(Stockholm)은 1252년에 설립된 역사 깊은 도시)

스웨덴의 수도이자 스칸디나비아반도 최대 도시.
도시의 서부는 멜라렌호와 이어지는 큰 강줄기를 끼고 있고,
동부는 다도해 해안 형태로 발트해와 만나고 있다. 14개의 섬은
운하와 다리로 연결되어 북구의 베네치아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답다.
회토리예트(Hotorget)에 위치한 로열 스톡홀름 필하모니 관현악단의
본거지인 콘서트홀(Konserthuset)에서는 매년 노벨상 시상식이 열리며,
1912년에는 하계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였고, 1958년에는 FIFA 월드컵
결승전이 열린 곳이다. 인구는 2017년 기준 약 100만 명.
중세의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스톡홀름’이라는 이름은 1252년 기록물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Stock은 통나무라는 뜻이고 holm은 섬이라는 뜻으로,
이 이름은 이 지역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멜라렌호 상류에서 통나무를
띄워 땅에 닿는 곳에 도시를 짓기로 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90년대 이후로는 전통적인 도시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버려진 역들과
항구 등을 재활용하며 보다 환경친화적인 도시 쪽에 초점을 맞추어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편 70년대 이후 IT·전자 산업에 특화해 개발된
시스타 (Kista) 지역은 북유럽의 실리콘 밸리라고 불리며
많은 IT 기업들이 입주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톡홀름 시청사(Stockholms stadshus))

스톡홀름 쿵스홀멘 섬에 있는 스톡홀름 시청사가
유명한 것은 노벨상 기념 만찬장이 있는 블루홀, 시의회,
스웨덴의 역사가 있는 황금의 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웨덴의 건축가 랑나르 외스트베리(Ragnar Ostberg)가 설계,
1911년에 착공하여 1923년에 완공된 시청사는 약 800만 개에
달하는 적벽돌과 1,800만 개 이상의 타일이 사용되었다.
건물 내부는 크게 블루홀과 골든홀로 나뉜다.

푸른색을 띤 바닥 타일로 장식된 블루홀에는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파이프 10,270개로 구성된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다.
블루홀은 처음에는 푸른색으로 지어질 예정이었으나 적벽돌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영효과에 랑나르 웨스트베리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블루홀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초기 설계의
모든 약도와 초안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라고.
화려한 골든 홀에는 스웨덴의 역사를 소재로 한 대형 타일
모자이크 작품, 금박 장식을 한 모자이크 벽화가 설치되어 있다.
시청사 남동쪽에는 106m 높이의 탑이 설치되어 있다.
탑은 엘리베이터나 365개로 된 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는데,
탑의 전망대에서 스톡홀름 시가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스웨덴을 상징하는
3개의 왕관이 장식되어 있다.

시청사 내부관람은 가이드 투어만 가능하다.
개인이 관람하는 경우, 가이드 투어 시간이 오전 9시 30분~15시
(09:30, 10:00, 10:30, 11:30, 12:00, 13:00, 14:00, 15:00)에 8회에
걸쳐 진행되며 영어, 스웨덴어(12:00, 14:00)로 설명하며
입장료는 100skr(14,000원)이다.









(스톡홀름 시청사)

이른 점심을 먹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북유럽 최고의 건축미를 자랑하는 시청사다.
시청사는 노벨상 수상 축하 만찬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제일 아래 사진이 2층에서 본 블루홀)

스톡홀름시는 1900년대 초, 정치 업무와 재판 업무를 함께 수행할
시청 청사를 건축하기로 하고, 설계를 공모한 결과 랑나르 웨스트베리의
작품이 당선되었다(1902년). 1907년 시청과 법원을 분리해서 짓기로 처음의
계획을 변경하면서 현재 쿵스홀멘에 위치한 법원 건물과 분리되었다.
법원 건물은 당시 공모에서 2위를 차지한 칼 웨스트만이 설계했다.

블루홀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오르면 시의회와
황금의 방으로 연결이 된다. 오른쪽 회랑에 노벨상의 메달
모습과 같은 노벨의 황금 부조상이 있다.





(무대 공포증을 없게 하는 별?)

노벨 수상자들이 노벨상 수여 기념 연회에 참여하기 위해
계단을 오를 때 무대 공포증이 있다면 벽에 새겨져 있는 별에
집중하여 걷도록 하기 위한 용도라고 한다.







(??)







(스톡홀름 시의회, 의원실이 별도로 없다)

스톡홀름 시의회가 처음 생길 때에는 의원들이
100명이었는데 투표할 때 과반수가 안 되는 경우가 있어
나중에 1명을 추가하여 101명이 되었다고 한다. 의원 수는
남성의원 50명, 여성의원 5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시의회 회의는 매 격주 월요일 오후에 열리는데.. 의원들은
명예직이라 대개 투잡(Two job)을 하므로 각자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자전거로 등원하여, 회의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회의는 공개되기 때문에
방청석에서 누구나 관람할 수 있고, 언론사를 위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염불에는 뜻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는 듯, 하는 일에 비하여 너무 많은
보수를 받으며, 해외 출장을 가장한 외유성 여행, 특활비 등으로
지탄받는 이 땅의 의원들과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인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 아닐까!





(시의회실 천정은 바이킹 배를 뒤집어 놓은 모습이라고..)

북유럽이라고 하면 우리는 쉽게 바이킹을 떠올린다.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폭이 좁고 긴 배를 타며 바다를 건너
약탈을 하던 그런 모습. 그런데 실제로 스웨덴은 바이킹의 후손이며
거칠고 무서운 포스를 풍기는 무시무시한 곳일까? 북유럽에서는
바이킹의 이야기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이야기가 주로 구전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무시무시한 외지인에 대한 시각을
드러낸 것이 뿔 달린 투구로 형상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킹에 대해 주로 알려진 역사는 서유럽에서 정리한 것으로
침략자를 무자비하게 표현했을 것이다. 마치 잔학무도한
콜럼버스를 그들의 입장에서 미화한 것 같이..





(아치형 천장 / 위키피디아)

아치형 방의 천장은 형상이 교차식으로 되어 있어
특이한데 이는 100명의 의원이 각자 다른 의견을 잘 수렴하여
시민을 위한 최선의 의견이 도출될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밑에는 궁전과 왕자, 말을 탄 공주, 병사들의 조형물이 있는데 이는
일종의 오르골로 양쪽 벽에 구멍이 있다. 구멍은 인형들이 움직여서
구멍으로 들어가서 돌아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오르골 / 위키피디아)

매년 여름 12시와 18시에 Orjan의 음악이 울릴 때
성 예란 기사상(Sankt Goran och draken)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 기사 상은 칼마르 연합시기의 섭정이었던 스텐 스투레 1세
(Sten Sture 1440-1503)가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1세(1426~1481)를
브룬케베리 전투에서 물리친 것을 기념하여 베른트 노트케
(Bernt Notke)에게 주문 제작하여 만들었는데 말을 탄
기사가 창으로 용을 무찌르는 장면이다.







(??)







(시청사 설계자 랑나르 웨스트베리)

블루홀에서 올라와 이 건물의 설계자
랑나르 웨스트베리(Ragnar Ostberg, 1866-1945)의
상반신 조형물이 설치된 문을 통과하면
황금의 방으로 연결된다.







(타원형 방의 벽의 태피스트리)

타원형 방은 매주 토요일 오후(12:00-18:00),
시민결혼식장으로 사용되는 매우 좁은 공간이다.
결혼식은 5분을 넘지 않을 정도로 매우 빠른 시간에
이루어지는데도 예약이 많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고 한다.
벽에 걸린 이 대형 카펫은 1600년도 말기에 프랑스의
Beauvais(보에)에서 직접 짠 것이라고 한다.







(왕관 방 창문으로 본 쇠데르말름 섬 풍경과 풍경 그림)

시청사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복도,
좌우로 벽화와 조각들이 있다.





(특이한 진열대)

스웨덴의 유명인들을 조각상을 붙여 놓은 진열대









(시청사 최대의 걸작품인 황금의 방)

이번에 들린 곳은 눈을 의심하게 할 정도로
휘황찬란했으니 곧 시청사의 하이라이트 황금의 방(Gyllene salen).
1,860만 개의 채색된 유리와 금 조각으로 모자이크 장식이 되어 있는 곳.
당시 30세였던 아니나르 포르세트(Einar Forseth)가 만든 Mosaic은
스웨덴의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다.

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황금의 방은 노벨상 수상자
연회장으로 사용되다가 수상자와 참석인원이 늘면서 더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블루홀로 바뀌었다고 한다.









(기둥 면에도 모자이크화를..)

벽면과 기둥의 모자이크 화는 스웨덴 역사를
나타내고 있다. 금박 조각과 채색된 유리 조각으로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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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사의 모형)

종탑은 높이가 106m는 스톡홀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4위에 해당하는 스톡홀름의 랜트마크. 코펜하겐에서는 시청사보다
높은 건물을 짓지 못하게 고도제한을 하는 데 비해 스톡홀름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렇게 해도 스톡홀름시는 짜임새 있게
도시가 잘 발달하고 조화가 있는 것 같다.











(기념품점의 달라헤스트(Dalahast))

블루홀을 통해 회랑으로 가면
기념품점으로 나가는 출구가 나온다.
기념품점에는 청색과 빨간색에 치장한 스웨덴을 상징하는
말목각 인형 달라헤스트(Dalahast)가 눈길을 끈다.
바사왕조의 구스타프 1세가 덴마크에 유학 중 달라르나 지역으로
도망갔다가 이듬해 덴마크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1523년 스웨덴
독립국을 세웠다. 구스타프 1세가 숨어있던 달라르나 지역에 말이
많았던 연유로 말이 스웨덴의 상징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달라하스트는 임업이 발달한 스웨덴에서 남자들이 겨울에 목재의
자투리를 이용해서 아이들의 장난감으로 말을 만들어 주던 것이
1937년 파리엑스포, 1939년 뉴욕엑스포 이후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대중화되어 지금은 스웨덴 어디서나 판매하고 있다.





(회랑에 들어서면 두 건물을 이어주는 중정이 있다)







(이 소녀 동상은..)

스톡홀름 시청사를 지을 때 의미 있는 기부를 한 소녀를
기리기 위한 동상이라는데, 소녀 이름도 듣긴 들었는데..







(노벨상을 만들게 된 동기는?)

노벨은, 그가 만든 폭약이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리라 믿었으나,
그와는 반대로 전쟁의 도구가 되어 사람들을 죽이는 용도로 사용되자
폭약 발명한 것을 후회하기 이른다. 그러던 중 그의 형 루드비히 노벨이 죽자
프랑스 한 신문이 실수로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는 부고 기사를 실으면서
그를 ‘죽음의 상인’이라고 평했다. 신문기사를 본 노벨은 자신의 발명으로
숱한 사람이 죽었고, 자신에 대한 세상의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그의 전 재산의 94%인 3200만 스웨덴 크로나(340만 유로)를 기부하여
노벨상을 만들어 평화에 이바지한 사람에게 상을 주라는
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노벨상 메달 종류)

처음에는 물리학, 화학, 평화, 생물학, 문학 등 5개 부분을
시상했기 때문에 5가지로 되어 있다. 경제학은 나중에 포함되었다.
그 뒤 1968년 스웨덴 중앙은행이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는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을 신설해 오늘날 노벨 경제학상으로
자리 잡으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노벨상은 유언대로 바로 진행되지 못했다)

노벨상은 노벨이 작성한 유언장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시작부터 문제에 부딪혔다. 유산 대부분을 노벨상 제정하고 유지하는데
사용하라는 내용에 유족이 반발했다. 스웨덴 정부에서도 '국적과 관계없이
최고의 공로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국부 유출'이라며 논란을 일으켰고,
노벨 자신이 지명한 수상 위원회조차 그의 유지를 따르기를 거부했다.
혼란이 거듭된 끝에 1900년 노벨의 유산을 관리하는 노벨재단이 설립되고
1901년 12월 10일 노벨 사망일 5주년을 맞이해
최초의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노벨상을 만든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0.21~1896.12.10))

노벨상(Nobel Prizes)은 다이너마이트 발명가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기부한 유산을 기금으로 1901년에 설립된 노벨재단이
1901년부터 매년 인류에 큰 공헌을 한 사람과 단체에 수여하는 상이다.
노벨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에서 공학과
화학을 공부했으며, 스웨덴에서 니트로 글리세린에 관해 연구를 거듭하여
1867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이후 다이너마이트는 굴착공사, 철도 및
도로를 건설하는데 많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했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응용한 다른 폭탄 또한 잇달아 개발, 거대한 재산가가 된다. 막대한 돈을 모은
노벨은 죽기 1년 전 재산을 기부하며 문학, 화학, 의학, 물리학, 평화 등
5개 분야에서 전년도 인류에 큰 공헌을 한 사람들에게 상을 수여하라는
유언장을 남김으로써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수상자 선정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평화상을, 나머지 상은
스웨덴의 3개 기관이 맡도록 했다. 이후 1969년 노벨경제학상이 새롭게
추가되었고(엄밀히 말하자면 ‘알프레도 노벨 추모 스웨덴 중앙은행 경제학상')
현재까지 매년 10월 수상자 발표, 노벨이 사망한 12월 10일에 시상식을 한다.
수상자에게는 약 13억 원(800만 크로나)의 상금과 금메달, 상장 등을 준다.
상금은 노벨이 남긴 유산의 이자로 충당된다.







(시청사 106m 주탑을 배경으로)

주탑의 꼭대기에 있는 3개의 금도금된 왕관은
지름이 각각 2.2m. 왕관은 스웨덴 전체 왕국을 상징하여 스톡홀름
시청사가 스톡홀름만의 것이 아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시청사 뒤로 보이는 풍경)

리다르홀멘섬에 보이는 교회는 리다르홀름교회로
13세기 수도원으로 지어졌으며 17세기부터 역대 국왕과
여왕의 묘소로 사용되고 있다.





(소공원에 설치된 조각품)

시청사와 멜라렌호 연안 사이에는 소규모 공원이 있고,
공원 안에는 15세기 스웨덴의 혁명가 엥엘브렉트 엥엘브렉트손
(Engelbrekt Engelbrektsson)의 동상, 스웨덴의 조각가 칼 엘드
(Carl Eldh)가 제작한 조각 작품들이 설치되어 있다.





(구시가지 감라스탄 가는 길)







(구스타브 아돌프 2세의 기마상)

구스타브 아돌프 광장(Gustav Adolfs Torg) 가운데 있다.
구스타브 2세(Gustav II Adolfs, 1594.12.19 ~ 1632.11.6)는
스웨덴을 강국으로 만든 왕으로 '북방의 사자' 또는 '설왕'으로 불렸다.
전쟁으로 특징 지어지는 시대에 재위한 국왕으로 30년 전쟁 기간
스웨덴을 군사 우월주의로 이끌었고 유럽의 정치적 균형뿐 아니라
종교적 균형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재위 기간 : 1611.10.30 ~ 1632.11.6)





(스웨덴 왕궁 보물관)

SKATTKAMMAREN(ROYAL TREASURY)라고 불리는 이곳은
스웨덴 왕궁의 보물관이다. 스웨덴 왕궁에서 관광객들에게 개방된 3곳 중
한 곳으로, 12대의 역대 국왕과 왕비의 왕관, 보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내부 사진촬영은 금지. 내부 기념품 가게에서 역대 왕들의 사진이 있는
엽서나 왕관 모양의 디자인이 있는 소정의 물건들도 판매하고 있다.







(스톡홀름 대성당)

1279년 건립된 성당으로 증, 개축을 거쳐
1480년 완공되었으며, 스톡홀름 주요 행사인
국왕대관식, 결혼식, 장례식 등이 열린다.

울라우스 페트리(Olaus Petr,1493~1552)의 동상.
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I Vasa 1496~1560)의 명령으로
스웨덴에서 종교 개혁을 실시한 인물로 사후에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울라우스 페트리는 라틴어 이름. 스웨덴어 이름은
로프 페르손(Olof Persson). 이는 스웨덴이 종교 개혁 후
18세기 중반까지 라틴어를 병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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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나 닐스도터/Kristina Nilsdotter(Gyllenstierna)

스웨덴 여왕,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중 한 명.
섭정 후 Sten Sture den yngre와 결혼하여 덴마크 해방 캠페인을
이끌고 덴마크의 방위를 조직했으며 Council의 임명 된 부족 추종자
Kristian II에 대한 스톡홀름 방어를 이끌었다.









(스톡홀름 왕궁)

구시가의 북쪽에 위치한 바로크 양식의 건물.
역대 국왕이 거처하던 곳으로 지금은 대통령궁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외국 귀빈을 위한 만찬장으로 사용된다. 3층 건물 안에는
608개의 방이 있는데 도자기와 유리그릇, 태피스트리 등 귀중한
유물등이 전시된 벨나도트의 방, 영빈의 방, 왕관과 보석 및 귀금속이
있는 보물의 방, 대관식과 왕실의 행사에 쓰이는 마차와 의상 등을
볼 수 있는 무기관 등이 있다. 과거에 사용했던 대포도 전시되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매일 12시에 왕궁을 지키는
근위병 교대식이 있다.







(다시, 스톡홀름 대성당 옆 모습)





(근위병의 행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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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라스탄 풍경)

왕궁을 돌아 나가니 구시가지 감라스탄이 나타났다.
감라스탄은 13세기에 형성된 스톡홀름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 광장은 피의 광장이라는데 1520년 당시 덴마크 왕이 스웨덴의 귀족들에게
이곳에서 파티를 개최한다고 불러모아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한 곳이라고 한다.
나중에 스웨덴 사람들이 덴마크 왕을 체포하기 위해 이곳에 도착해서 대포를
쏘았는데 그 흔적이 앞에 보이는 노란 건물의 우측에 남아있다. 대포알이 벽을
스친 흔적이다. 덴마크 왕을 체포하지만 죽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구시가지 감라스탄)

13~19세기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된 구시가지 중심의
스토르토에트 광장으로 오래된 건물들로 내부에는 레스토랑,
목로주점, 카페 등으로 개조되어 관광객의 인기를 끌고 있다.
감라스탄은 스웨덴 어로 '오래된 동네(Old Town). 이 지역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광장 한가운데에 자리한 우물)

우물이 있는 광장을 '칼마르의 학살장'이라 하며,
우물을 피의 분수라 한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가 1520년 11월
스웨덴 귀족 82명을 단두대에서 처형하고 이곳에 우물을 만들었다.
우물에 귀족들의 목을 베어 모았다. 이 대학살의 결과 스웨덴 농촌에서부터
반덴마크 봉기가 시작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도시였던 뤼베크(Lubeck)까지
내려가 도움을 요청한 구스타브 바사(Gustav I Vasa 1496~1560)의 지휘에 힘입어
스웨덴은 덴마크군을 몰아냈고, 1523년 구스타브 바사를 새로운 스웨덴 왕으로
선출해 덴마크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스웨덴에서 쫓겨난 크리스티안 2세는
이전부터 왕권 강화책으로 인해 사이가 안 좋아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덴마크 귀족들에 의해 덴마크 왕위에서 폐위당했고, 이어 노르웨이에서도
폐위당해 순식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노벨박물관









(감라스탄 구시가지도 인상 깊은 곳)

16세기 어느 마을에 들어선 착각이 들 정도로..





(Karl XIV Johans 동상)





(이 건물은?)







(바사 박물관, 박물관 외형이 바이킹 선박 모양이다)

Vasa 호는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17세기 선박으로
원형의 95% 이상이 보존되어 있으며, 수백 개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어 예술적으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닌 비운의 전함이다.
바사박물관은 바사 왕가의 구스타브 2세(Gustav II)가 재위하던 1625년에
건조되어 1628년 8월 10일 처녀 항해 때 침몰한 전함 바사 호를 인양하여
전시하고 있는 곳, 1988년 새로운 박물관으로 건축하여 1990 7 15 개관하였다.
박물관은 스웨덴 국립 해양 박물관 재단에 소속되어 있다.

당시 스웨덴은 북유럽 발트해 주변 제국 건설에 분주하여 막강한
해군력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전함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다.
바사 호는 길이 69m, 높이 48.8m, 탑승 가능 인원 450명, 대포 64문에 이르는
막강한 화력을 갖춘 전함이다. 바사호는 국내외 귀빈 등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린 진수식에서 균형을 잃고 포문 사이로 물이 쏟아 들어와 수 분 만에
침몰하였다고 한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150여 명 중 30여 명이 익사했다.
침몰한 바사 호는 1956년 해양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에 의해
발견되어, 333년 만인 1961년에 인양되었는데, 인양된 배에서
25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박물관에는 취항과 동시에 침몰한
바사 호를 실물 그대로 복원해 놓고 있다.











(발트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려고 건조한 Vasa)

스웨덴은 한때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1521년 구스타프 바사(구스타프1세)가 덴마크를 물리치고 독립했다.
구스타프 1세 손자인 구스타프 2세는 1611년 즉위하면서 발트해의
제해권을 두고 독일 황제와 겨루면서 북유럽의 강자로 부상했다.
Vasa호는 스웨덴 해군의 주력 군함으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Vasa호에는 64개의 포가 장착되었고, 그중 대부분은 24파운드 포였다.
스웨덴은 약 20척의 군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Vasa 호 만큼 많고
육중한 포가 장착된 군함은 없었다. Vasa 호는 오랜 기간
스웨덴의 숙적인 폴란드를 향해 출항할 예정이었다.









(Vasa 호 전면의 목각장식은 예술품이다)

Vasa 호와 함께 14,000개 이상의 목조품이 발견되었고,
700개의 조각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조각상들은 개별적인 보존 과정을 거쳐
배의 원래 위치에 부착시켰다. 이 작업은 마치 거대한 조각 그림 맞추기와 같았다.
17세기의 군함은 전쟁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에 떠 있는 궁전이기도 했다.
인양된 조각상들은 당시의 도금 및 도장 기술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현대과학으로 분석한 결과 붉은 바탕 위에 번쩍이는 색을 입힌 것으로 밝혀졌다.
조각상은 사자, 영웅들, 로마의 황제, 해양 동물, 그리스 천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조각상의 용도는 스웨덴 국왕을 찬양하고 그 힘과 문명,
그리고 정치적 야망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배 주변에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바사 호에 관련한 자료들..)

바사호는 스웨덴 해군 해양학자로 일했던 고고학자
안드레스 프란첸(Anders Franzén, 1918~1993)에 의해 발견되어
1956년 8월에 선체가 모습을 드러냈고, 1961년에 완전히 발굴된다.
보존을 위해 배는 수십 년간 염분을 제거하는 작업을 거쳐야 했다.

바사 호 건조 당시의 기록들, 침몰한 바사 호를 탐사하는 과정,
위 사진같이 바사 호에 쓰였던 목재 등 바사 호에 대한 자료들을
비치해 놓았거나 영상으로 설명을 돕고 있다.







(당시 스웨덴인의 모습?)









(선실 내부 단면과 설치된 대포)

바사 호가 침몰한 원인은 무엇일까?
처음 설계에는 대포가 32문이었는데 구스타프 2세가
2배로 늘리라고 명령을 해서 설계변경으로 64문이 됐다.
바사 호는 배의 안정과 무게중심을 맞추기 위해 배의 바닥에 돌을
채우고 윗쪽에는 대포를 배치했는데 전투함으로 너무 많은 포를
상부에 설치함으로써 무게중심이 맞지 않은 상태에서 진수식 때
불어온 돌풍으로 대포가 한쪽으로 쏠리면서 배가 기울었고,
포문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와 침몰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150여 명 중 30여 명이 익사했다.
그 후 군사법원이 재판을 하였으나 그 누구에게도 유죄판결을
내리지 않고 바사 호 침몰사건을 종결했다고 한다.
국왕은 잘못도, 책임도, 죄도 없었다.





(바사 호는 전투함이자 떠 있는 궁전)

배의 외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목각 조각품들이나
실내의 이렇게 화려한 장식들은 바사 호가 물 위에 떠 다니는
궁전으로 손색없게 건조되었다. 조각도 조각이지만 채색이
정말 아름답다.







(한 장을 찍긴 찍었는데 웅장한 Vasa 모습은 어디 가고..)





(돛을 달고 있는 바사 호 모형)







(순항하는 바사 호 앞에서)

Vasa 호를 원래 모습으로 채색한 모습,
군함이라기보다는 아름답고 거대한 예술 작품이다
떠다니는 궁전이라는 말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타이태닉호와 어떻게 그렇게 닮은 꼴인지..





(바사호를 건조했던 구스타프 2세의 초상화 )

구스타프 2세는 초대한 국내외 귀빈 등 많은 사람에게
이렇게 순항하는 바사 호를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외관을 위해서 원래의 설계도를 수차례나
변경하도록 지시한 것이 침몰의 원인이 되었다니..
과유불급이다.





(구스타프 2세를 사자 왕이라 불렀다더니..)

사자가 많이 등장한다.
선수의 대형 목각에 큰 사자 두 마리가 문양을 잡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사자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심지어는 사람들 얼굴까지
사자 같은 모양으로 새겨져 있다.







(북방민족 박물관(Nordiska museet))

바사 박물관 앞에 있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북방 민족 박물관, 1907년에 건축된 이 박물관에는 스웨덴
조상들이 살아온 집과 생활터전, 옷차림 등을 전시해 놓아
그들의 옛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131)







(일촉즉발!)

자전거와 자동차가 충돌할뻔 했는데
승용차 기사는 왜 자동차 앞을 급하게 지나가느냐 하고,
자전거 탄 사람은 차가 왜 자전거를 받으려 하느냐다.
스웨덴 사람은 싸움도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한 칸짜리 꼬마 트램도 정겹다)

스톡홀름에서는 자동차보다 보트를 더 많이 본 것 같다.
섬과 섬이 운하와 다리로 연결된 모습은 북구의 베네치아라 해도
손색없어 보인다. 아름다운 스웨덴 스톡홀름도 바사 박물관을
보는 것으로 일정이 끝났다. 횟수로는 스톡홀름이 두 번째인데
떠나려니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한 달쯤 머물면 좀 나으려나.
정들기는 어렵지만 정 떼기가 더 어려운 것은
사람이나 여행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리가로 가기 위해 프라이하멘 터미널로..)

저기 우리를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로
데려다줄 크루즈선 TALLINK Romantika가 보인다.
스웨덴 스톡홀름 프라이하멘 터미널에서 오후 5시 출항하여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에는 내일 오전 11시경에 도착 예정이다.
스톡홀름의 이야깃거리도 많고 TALLINK Romantika를 타고
18시간 가까이 이동하니 한 꼭지 따로 따야 할 것 같다.




Swedish Folk Song
Herr Manneli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