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 리가, 발트해의 진주 리가

2018. 9. 5. 23:45여행/여행기





라트비아, 발트해의 진주 리가
("백만 송이 장미"는 러시아 민요가 아니라 라트비아 음악가의 작품)






호화 크루즈 TALLINK Romantika에서
낭만의 밤을 보내고 작은 섬 만한 배를 산책하듯 한 바퀴 둘러 본다.
풍성한 식탁, 식사 후 커피도 마시며 오랜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가졌다.
어제 스톡홀름 프라이하멘 터미널에서 오후 4시에 탑승하여 5시 출항,
거의 18시간 가까운 시간이 걸렸으나 그렇게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몇 년 전 남미 여행 갔을 때 이구아수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동하는데
심야 버스가 꼭 18시간 걸렸다. 최고급 버스에 조수 겸 교대기사가 함께 타고,
버스에서 2끼의 음식까지 제공했다. 좌석도 우리나라 우등 고속버스 수준인
까마석(프리미엄 까마는 비행기 비즈니스 석 정도)이었지만 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이 무척 힘들게 했다. 호화 크루즈 선과 고속버스를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고통스럽긴 해도 장거리 버스 여행도 기억에 남기는 마찬가지다.
집 떠나면 고생이고, 그런 고생마저도 여행의 매력이니 우열을 가릴
성질은 아니나 여행의 백미가 크루즈 여행이라는 것을 조금 느껴
본 셈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크루즈 선을 3번이나 탔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내리니 11시가 다 된 시간.










(라트비아 리가 항 도착)





(터미널을 빠져나오니 11시가 다 된 시간)







(발트 3국 중 한 나라인 라트비아는)

북유럽에 위치한 발트 3국에서 중부에 위치한 국가로
정식 국명은 라트비아 공화국(Latvijas Republika). 북쪽의 에스토니아,
동쪽의 러시아, 남쪽의 리투아니아, 벨라루스와 접한다. 수도는 리가(Riga).
18세기부터 제정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적백내전 당시 독립했지만,
2차대전 때인 1940년 8월 소련에 강제 점령 병합되었고, 1991년 소련이
붕괴되기 직전 독립했으나, 독립국가연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발트3국의 수도가 모두 유럽의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다. 2009년에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가, 2011년에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이,
2014년에는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도 유럽의 문화수도로 지정되었다.
라트비아 인구의 61.8%는 라트비아인, 25.6%는 러시아인, 그 외에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 인, 폴란드인 등 소수민족이 있다. 공용어는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
수도 리가에서는 러시아어 사용자가 라트비아인보다 많고 라트비아에서
러시아어를 못 하면 취업에 제한이 있을 정도다. 의료시설이 잘되어 있다.
초·중등교육이 무상의무교육이며, 언어는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를 같이
배운다. 국민소득의 48.6%를 서비스업이 23.9%를 제조업이 22.8%를
농업이 차지한다. 2004년 EU(유럽연합)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가입했다. 2015년 EU이사회 의장국이 되었고, 2016년는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했다.

현대 성가 작곡가가 많이 나오는 나라로 섬세하고
따뜻한 감성이 엿보이는 종교적 음악이 많이 작곡되고 있다.
독일과 스웨덴의 지배로 인하여 루터교회의 영향력을 많이 받았다.
2차 대전 전까지는 전체 인구에서 3분의 2가 루터회 교인이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재정위기가 매우 심각했으나 IMF에서
110억 달러를 빌려 위기를 극복하고, 2013~2017년 유럽연합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빠른 성장률을 기록했다. 2014년부터 이전의
통화단위인 라트를 버리고 유로화를 쓰기 시작했다.







(리가 시내로 들어가면서..)







(리가 시내의 모습)

리가 시내를 관통하는 다우가바 강 건너에는
첨탑의 도시 리가답게 성 베드로 교회의 첨탑을 비롯한 높은 첨탑들이
고개를 드러내고 있고, 다리를 건너니 또 반대편에 1989년에 건설하였다는
높이 368m의 리가 라디오 TV 타워가 위용을 자랑한다.







(시내를 빠져나와 리투아니아 가는 길)

먼저 이웃 나라인 리투아니아의 시아울리아이
십자가 언덕을 둘러보고, 다시 라트비아로 넘어와
라트비아의 바로크 시대 대표 건축물인 룬달레 성에
들렸다가 시가지 자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돼 있다는
리가의 구시가지를 살펴볼 계획이다.





라트비아의 바로크 시대 대표 건축물인 룬달레 성
http://www.rundale.net/









(룬달레 성은,)

룬달레는 독일어의 '평화의 계곡'이라는 뜻.
라트비아에 있는 18세기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로,
16세기에 최초로 건축되었다가 17세기 중반 비론 대 공작이 고궁을 헐고
여름별장으로 재건축한 후, 주인이 예카테리나 대제에게 넘어가게 되고,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 유명한 예카테리나 대제는 이 궁전을 애인인 주보프에게
선물했다. 그녀는 주보프를 사랑했지만 그의 동생도 사랑했다고 한다.
궁전은 수난이 많았다. 라트비아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919년 심하게
손상되고 1920년에는 일부가 학교로 이용되었다. 1933년 라트비아
국립역사박물관이 인수하였으나,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병원, 곡물 창고
등으로 사용되다가 1972년에야 룬달레궁 박물관이 들어섰고
최근인 2014년에 실내외의 복원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이 궁전에는 '골든 룸', 무도회장인 '화이트 룸', 침실 등
138개의 방이 있으며 방마다 테마별로 원색과
파스텔 색조로 꾸며져 화려하다.





(궁전의 긴 복도를 지나)

궁전 내부 사진 촬영을 위해서 2유로를
지급하고 받은 스티커를 카메라에 붙이고..





(예카테리나 2세)

예카테리나 2세(1729. 5. 2 - 1796.11.17)는 러시아 제국의
황후이자 여제(1762 - 1796). 로마노프 왕조의 8번째 군주로,
본래는 프로이센 슈테틴 출신의 독일인이다.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대신해 섭정했으며, 화려한 남성 편력으로도 유명했다.
1762년 남편 표트르 3세를 축출하고 차르가 되었다.

1745년 러시아의 황태자이던 표트르 3세와 결혼했으나 지능이
부족하던 남편을 대신하여 섭정했다. 그러나 남편 표트르에 대한
평판이 나빠지자 1762년 정변을 일으켜 남편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표트르 대제의 업적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정치무대와 문화생활에 완전히 편입시켰다.

내각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제도를
개선했으며 크림반도와 폴란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영토를 넓혔다.
계몽주의 사상에 감명하여 볼테르 등과도 문학으로 교유하였고, 문학과 예술,
학예와 교육 등의 장려에 큰 관심을 쏟았고 각 지방관들로부터
정무를 직접 결재하면서 황권을 강화했다.

투르크와 싸워 영토를 넓혔으며 폴란드 분할의 주역의
한사람이었다. 내각의 도움으로 러시아 제국의 행정과 법률 제도를
개혁했다. 본래 이름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폰 안할트체르프스트며,
개명한 이름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다. 루터교 세례명은 조피 프레데리케
아우구스테, 러시아 정교 세례명은 예카테리나, 이후 그는 러시아 정교회
세례명을 이름으로 사용했다. 행정 개혁과 내치, 문예 부흥 등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예카테리나 대제로 불리기도 한다.









(먼저 들린 곳은 Gold Hall)

회랑을 따라 들어가니 듀크가 집무실로 사용하였다는
'황금의 방'이 나왔다. 요한 마이클 그라프 (Johann Michael Graff)가
제작한 이 방은 한두 가지 색상의 치장 벽토를 배경으로 한 황금색
장식은 여러 홀 중에서 제일 화려하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Francesco Martini와 Carlo Zucchi가 만든 천장 그림은
Duke Ernst Johann의 신화를 묘사하고 있다.







(Porcelain Cabinet)

이 홀은 골드 홀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디자인으로 궁전의 주인이 동양의 도자기를 좋아했는지
전시실에는 34개의 장식 콘솔에 배치된
동양의 도자기 화병이 전시되어 있었다.





(타원형의 도자기 캐비닛)

45개의 rocaille(로코코 장식의) 콘솔에는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 화병들이 전시되어 있다.











(White Hall)

White Hall은 처음 예배당으로 설계되었다가
리모델링 하면서 ballroom(무도회장)으로 변형되었다.
흰색 벽토 장식은 사람이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이며
장식은 세계의 사계절과 다양한 목가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황새와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

화이트홀 천장에 황새가 조각되어 있는데,
창문으로 보이는 성의 한 굴뚝 위에는 실제로 황새가
둥지를 틀고 있다. 황새 집을 실제 황새가 둥지를 튼 듯
나뭇가지로 붙여서 만든 것도 흥미롭다.





(그랜드 갤러리)

그랜드 갤러리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천장 그림을 복원하는 데 14년이 걸렸다고 한다.







(도서관)





(36)





(장미 홀)

화려하게 꾸민 벽장식과 금장식을 한 골드 홀, 그린 홀,
장미를 조각하여 붙인 장미 홀, 핑크 방, 침실 방, 화장실 방,
무도회장인 화이트홀 등 룬달레성은 138개의 방이 있다.





(궁전 주인의 침실)

룬달레 궁전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본떠서 만들었다.
공작의 침실이 사람들이 오가는 복도 한가운데 배치된 것도
마찬가지.. 왕이 잠자리에 드는 시간에 맞추어
특별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벽난로)

예술품 같은 청색 도자기 벽난로는
화부가 뒤쪽으로 들어가 불을 지피게 되어 있다.
방마다 설치되어 있다.





(41)







(공작부인의 침실과 화장실)

Francois de Cuvillies가 디자인한 공작부인의 침실은
침대 양쪽에는 비밀 문이 두 개 있게 했다. 왼쪽 편 문은
바로 화장실로 연결되고, 오른쪽에 있는 문은 복도로 연결된다.
아래 사진은 천장이 화려한 공작부인의 화장실(toilet-room).
공작부인의 화장실은 오래된 사진으로 재구성했다고 한다.
방에는 세면대와 비데가 있고, 화장실 의자를 대신할
도자기 그릇(요강 같은 용도?)도 보인다.





(그린 홀)

18세기의 양식은 녹색 패널이 묻혀있던 이 방에서 드러났다.
조각가인 조셉 슬라 비치(Joseph Slavichek)의 작품인 "그린 홀"은
라트비아의 유일한 로코코 스타일의 나무 벽 장식이라고 한다.







(궁전의 식당)

진열된 그릇들은 진품으로 만질 수 없다.
가까이 가면 센서가 울리게 되어 있다고..









(12대 요한네스 존 비론 공작의 초상화와 당구대가 있는 방)

비론 공작의 아들인 피터 요한네스 본 비론이
12대 대 공작으로 즉위를 하였으나, 즉위한 얼마 안 되어,
쿠를란드 공국은 남자만이 대공작으로 즉위할 수 있는
전통 때문에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다.
피터 본 비론은 부인을 세 명이나 갈아치웠는데 먼저
두 명의 부인은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고, 세 번째
부인은 딸만 넷을 낳고 말았다고 한다.





(룬달레 궁전을 관람 중인 꼬마친구)





(??)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에 있는 건립 초기 문양)





(기념품 가게)







(앳된 매점 아씨들)

일하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사진을 찍어 주려 하자 둘이 수줍은 모습으로
의논하더니 포즈를 잡아 준다.







(룬달레성 주변 가로수와 숲)

룬달레성 들어가는 입구부터 성에 이르는 길 양쪽으로
늘어선 아름드리나무들이 초록의 싱그러움을 자랑한다.

* * *

룬달레 궁전을 나서면서 하는 생각..
로마를 여행하고 나면 세상의 모든 건축물이 감동이 덜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나면 다른 궁전들은 눈에 차지 않는다고 한다.
그만큼 화려하고 정교한 건축물이나 궁전을 보면서 눈높이가 높아졌다는
점에서는 일정 부분 동의를 하더라도 깊이 들여다보면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룬달레 궁전을 보고 나서 아쉬움이 컸으니
그것은 베르사유 궁전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로 아쉽다는 것이다.
그것은 복원의 문제다. 긴 세월 동안 우여곡절을 많이 겪고 충분하지 않은
예산으로 거의 새로 건축하다시피 복원을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을 수
있겠지만 쉽게 표나게 복원시킨 부분들은 쉽게 감동을 줄 수 없다.
이런 점은 룬달레 궁전뿐만 아니라, 유럽의 많은 유적지에서
볼 수 있는 일이고,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당장 복원하느라 조잡하게 복원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가지고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다시 리가로 돌아 왔다)

다우가바 강에는 유람선이 떠 있고,
그 뒤 우뚝한 빌딩에는 LG로고가 선명하다.





(현재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는)

12세기 로마 가톨릭 교황은 이교도 지역이던
라트비아에 기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십자군을 파견했다.
주로 독일 기사단이 이곳에 가톨릭을 전파하면서 유럽문화를 접했다.
독일 기사단과 함께 독일 상인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1201년 독일의 주교였던 알베르트에 의해 리가가 건설되었고
1282년에 한자동맹에 가입했다. 1621년 스웨덴에 점령되었다가
1721년부터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라트비아가 처음으로 독립한
1918년에 라트비아의 수도가 되었다. 소련 점령기에는 라트비아 SSR의 수도였다가
1990년에 소련의 상태가 나빠지면서 라트비아의 독립과 함께 다시 수도가 되었다.
구시가지는 800여 년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도시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2014년에 유럽 문화 수도로 지정되었다. 리가는 원래 독일인, 라트비아인, 러시아인들이
모두 살던 도시였으나(1867년 기준 독일인 42%, 러시아인 25%, 라트비아인 23%)
1차 세계 대전 이후 라트비아가 독립하면서 라트비아인이 인구의 다수가 되었다.
라트비아가 소련에 병합되면서 러시아인의 이주로 2006년까진 라트비아인보다
러시아인이 더 많았다. 라트비아가 다시 독립한 이래 러시아인이 빠져나가면서
2014년 현재 라트비아인 42.8%, 러시아인 39.5%의 인구 구성을 보인다.
대다수 주민이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를 기본으로 구사한다.

중세 시절부터 발트해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한 리가는
발트 3국 최대의 도시이며 러시아 제국 시절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의 뒤를 이은 러시아 제3의 도시로 크게 번영했다. 리가 번영의
원천인 다우가바 강은 수도 리가뿐 아니라 라트비아의 젖줄이다.
독일 출신 상인들은 리가에 접한 다우가바 강을 통해 러시아 및 흑해
지역과 교역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축적된 부로 리가를 건설하였다.
리가는 라트비아 국민총생산의 50% 이상을 차지한다. 라트비아 인구의 1/3이
거주하며 북유럽 금융과 경제 중심지, 세계의 여행자들이 사랑하는 도시이다.
그러나 저출산, 해외 이주 등으로 1990년대 이후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
소련 붕괴 직전의 인구는 90만이었으나, 지금은 64만 정도이다.
리가의 구시가지는 시가지 자체가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있어 모든 건물이
관리되고 있다. 국제공항으로 리가 국제공항이 있고, 발트 3국 중 최대
항공사인 에어 발틱이 이곳을 허브로 쓰고 있으나 아시아 주요 공항에서
리가로 가는 직항은 없다. 기후는 한랭하면서 습한 날씨를 보인다.
1월 평균기온은 -5.1℃, 7월 평균기온은 +17℃이다.





(리가 삼소총수 석상)

러시아가 라트비아를 지배한 시절 러시아 군인 복장을 하고
있지만, 라트비아에서는 그대로 두고 있다.









(검은 머리 전당 / 하우스 오브 더 블랙헤드 )

1344년 이래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검은 머리 전당은
리가에서 가장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검은 머리 전당은 13세기 당시
여행자와 길드의 무역상들이 머물고, 모임을 했던 고급 숙박시설로
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 르네상스식의 전면과 고딕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후에는 로코코 양식이 가미되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검은 머리 전당은 2차대전 때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은
이 건물을 독일인들이 세웠다는 이유로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그래서 라트비아가 러시아로부터 독립 이후 199년 재건하여,
2001년 현재의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 머리 전당'이라고 부르게 된 것에 대해
검은 머리 길드의 회원은 젊은 독신의 상인들과 배의 선장들로
구성되었는데, 상상 속의 아프리카 흑인 무어인인 '성 모리셔스'를
그들의 수호신으로 삼아서 검은 머리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검은 머리 전당-당시 전통사회에서 큰 역할을 한 이 길드의 행사에는
러시아 황제를 포함한 많은 귀빈이 참석할 정도로 영향력을 과시했다.
최근에는 모임 장소와 최고의 콘서트홀로 활용되고 있으며
그 밖의 시간대에는 일반에게 공개된다.

광장의 하얀 석상은 롤랑(Roland, 롤런드).
롤랑은 샤를 대제의 12용사 중 한 명으로 샤를 대제의 수좌로
스페인 원정 시 끝까지 싸우다 전사한 영웅으로
'롤랑의 노래' 주인공이기도 하다.





(카메라에 반응하는 관광객..)

라트비아를 찾는 관광객들은 대부분
리가의 구시가에 있는 화려한 건축물들을 보러 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성 베드로 성당)

리가 베드로 조각상-중앙 현관문 위에 토르소처럼
목과 팔이 달아난 조각상이 서 있었다. 가톨릭 성당 시절 주보성인이자
지금 교회의 이름으로 남은 베드로였다. 좌우에 천사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오른쪽 감실에 성배를 든 성인상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요한복음을
쓴 성 요한이다. 왼쪽은 사도 바울인 듯하다.
왼쪽 문 포털에선 오른쪽 감실에 로마의 성녀 아그네스가
책 위에 양을 얹고 있다.? 위에는 모세의 조각상이 서 있다.

뾰족한 첨탑이 있는 높이가 123.25m나 되는 큰 성당,
1209년 처음 베드로 성인에게 헌정하는 가톨릭 성당으로 건축되어,
15세기 초에 증축되었다. 성 베드로 성당은 가톨릭 성당, 루터교회, 박물관
등 시대에 따라 기능이 몇 차례 바뀌었다. 리가에는 이처럼 독일 루터교의
영향으로 가톨릭 성당에서 루터교 교회로 변경된 교회 건축물들이 많다.
성 베드로 성당은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에서 가장 높은 목조건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지붕과 탑이 소실된 것을 1970년에 복구하면서,
구소련의 기술자가 시가지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게 72m 높이의
전망대를 만들고 엘리베이터도 설치했다.

교회 내부에는 무역의 수호신인 ‘롤랑’ 동상의 진본을 비롯한
여러 유물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리가 시내에는 높은 교회 첨탑이 많다.
그 첨탑들 꼭대기에 서 있는 금빛 찬란한 수탉 모양의 풍향계는 리가의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베드로 성당 꼭대기에
있는 금으로 만든 수탉이다. 탑은 여섯 번이나 벼락을 맞았는데, 1666년과
1721년의 붕괴도 번개로 인한 것이었다. 현재의 탑은 1746년에 완성되었고,
1973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복구되었다.





(웬 목마?)









(67)







(노상 기념품 매점)





(브레멘 음악대)

리가는 중세부터 교역을 이끌었던 독일 상인들의 조직인
한자동맹에 속했던 도시이다. 독일 상인 길드가 만든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는 브레멘의 동물음악대 조각.
평생토록 주인을 위하여 일하다 늙어서 쓸모없다고 버려진 뒤 음악대를
조직하여 나중에 대박을 터트린 당나귀, 개, 고양이, 수탉의 조각상이다.
리가에서 활동했던 브레멘 상인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브레멘 시에서 기증했다고 한다.







(이럴 땐 유리하네..)

뛰어서 맨 위에 있는 수탉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설이 있다길래 뛰었다. 만졌다. 뭔 행운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만지는 행운까지는 얻은 것 같다. 그렇다고 그 행운이
나에게만 오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도 기분은 좋다.





(74)





(리가에는 꽃 장식이 많이 되어 있다)

라트비아에 와서 바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는, 원곡이 라트비아의 가요라는 것.
'마라가 준 인생(Davaja Marina)을 러시아어로 번안한 곡이다.
'백만송이 장미'의 원곡인 'Davaja Mariņa meitiņai muzinu(마라가 딸에게 준 삶)'은
1981년 라트비아의 방송국이 주최한 가요 콘테스트에 출전한 아이야 쿠쿨레(Aija Kukule),
리가 크레이츠베르가(Liga Kreicberga)가 불러 우승했다. 작곡은 라이몬즈 파울스
(Raimonds Pauls), 작사는 레온스 브리에디스(Leons Briedis)가 했다.
소련의 가수 알라 푸가초바가 불러 대중에게 알려졌다.







(개성 있는 간판이 달린 가게들)







(81)





('고양이' 첨탑 길드 건물 )

길드 건물 구역에 있는 푸른 지붕 꼭대기에 고양이상을 설치한
노란색 4층 건물. 이 건물은 대상인들의 건물 구역 앞에 소상인 길드가
지은 건물. 대상인 길드가 소상인 길드인 이들을 무시하자 건물 꼭대기에
고양이상을 설치하고, 대상인을 조롱하는 의미로 고양이의 엉덩이를
대길드 구역으로 향하게 하였다. 결국, 시에서 개입하여 고양이 회전시켜
현재의 모습인 얼굴을 대길드 구역으로 향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런 일화로 리가 대표 상품에 고양이가 많이 등장한다.







(모래시계를 단 간판, 고풍스런 간판 등 각양각색, 개성이 넘친다.)







(화약 저장고가 박물관으로)

이 탑은 14세기에 도시를 이끌었던 방어용 성채로
샌드타워, 즉 모래탑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1625년 이 탑은
스웨덴이 침략하여 승리하면서 화약 탑으로 새워져, 화약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25년 동안 잘 보존되다가 스웨덴 점령 당시 거의 파괴되어 14세기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은 지하뿐이다. 지금의 탑은 1650년 다시 세워진 모습이다.
높이 25.5m, 지름 14.5m, 두께의 벽 3m의 둥근 원통형 건물이다.
외벽 곳곳에 작은 창문들이 뚫려 있다. 화약 탑은 리가 도시의 가장 주요한
도로인 샌드로드를 지켜오면서 리가의 탑 중 가장 중요한 탑이 되었다.
1938년에는 전쟁박물관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건물 전체를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





(구시가지 성벽(세계문화유산))

13c에서 16c에 세워진 것으로 당시 주교의 성과
리보니아(라트비아의 옛 이름) 기사단의 성을 지키는 요새였다.





(91)





(맨홀에 새겨진 문양은?)

검은 머리 전당 정문 문양에도 보였던 모양으로
리가를 상징하는 그림 같긴 한데..







(구시가지 뒷골목의 모습)





(스웨덴 문)

1698년 도시 방어를 위하여 세워진 시설로,
도심과 도시 외곽에 배치된 병력을 연결하는 통로였다고 한다.
리가는 러시아와 스웨덴의 침입을 여러 차례 받았다. 스웨덴문 양 옆으로
대포 포신이 거꾸로 박혀 있다. 문 위에 스웨덴을 상징하는 사자의 얼굴
표정도 어리벙벙하다. 이는 스웨덴이 불침을 선언한 징표라고 한다.
하지만 그 후에도 스웨덴은 여러 차례 침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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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전쟁기념비)

사진을 한 장 찍으렸더니 꼬마 친구가 비켜 주지 않는다.







(이 건물은 무슨 건물이지?)







(Riga Dome Cathedral / 리가 대성당)

구시가지의 중심부인 Doma laukums에 세워진
성당으로 리가의 역사만큼 유서 깊은 리가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성당의 원형은 리가에 터를 잡은 앨버트 주교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211년 건축하기 시작하여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물도 고딕, 로마네스크,
바로크, 아르누보 양식까지 혼합된 유서 깊은 건축물이다.
지금도 동쪽의 광장을 향한 부분은 로마네스크 양식이 그대로 남아 있고
15세기에 개축되어 고딕 양식으로 바뀌면서 90m 높이의 탑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18세기에는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성당의 내부는 중세의 부조와 19세기 독일인에 의해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도 있으며 20세기의 아르누보 양식까지 첨가되어 있다.
성당에서 유명한 것은 본당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으로
이 오르간은 유럽에서도 가장 큰 규모라고 한다. 이 오르간이
완성된 것은 1883년이며 6,768개의 파이프가 장치되어 있는데
짧은 것은 13mm이고 가장 긴 것은 10m에 달한다고 한다.
성당 내부도 아름답다는데 들어가 볼 시간이 없다.







(광장에서..)







(골목 끝에 보이는 교회들..)

아래 사진은 St. Jacob Catholic Cathedral of Riga
높은 첨탑의 교회들이 많이 보이는데,
리가에는 루터교회, 가톨릭교회, 정교회 건물들이 혼재해 있다.
라트비아인의 종교 성향은, 스웨덴과 독일 북부의 영향으로 개신교의
루터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소련 통치와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루터교는
크게 위축되었다. 루터교 신도가 가장 많으며, 소련 시절 러시아인의
이주가 많았으므로, 러시아 정교회 신도도 상당수 남아 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향으로 남부지방에는 로마 가톨릭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라트비아의 종교 구성은 루터교 34.3%,
가톨릭교 25.1%, 정교회 19.4%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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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올드타운 삼 형제 건물)

리가 구시가에서 인기 많은 장소. 삼 형제 건물!
좁은 골목에 어깨를 맞대고 있는 이 세 건물은 리가에 있는
석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00년 간격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사진 오른쪽 흰색 건물이 맏형으로 16세기에 지어진 것을 시작으로
왼편으로 갈수록 나이가 한 세기씩 젊어진다고 한다. 외관상 5층
건물로 보이지만 4층 건물. 현재 라트비아 건축박물관으로 사용 중
이라고 한다. 유명세를 치르는 건물이어서 사람이 많이 몰리는데다
장소까지 협소하여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는 아쉬움.
여행에는 광각렌즈가 있으면 좋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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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r Lady of Sorrows Church)





(Riga Castle)

Riga Castle 리가 성으로 구시가 가장 북서쪽에 있는 마지막 건물.
입구는 강변에 있다. 사진은 성의 후면! 이곳은 1330년에 리보니아
기사단의 본부로 지어졌으며, 현재 대통령 관저와 집무실로 사용된다.
모르고 그냥 보면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오래된 건축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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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기념비(The freedom Monument)와 인간 띠 기점 동판)

리가 구시가 자유의 거리에 있는 라트비아의 상징 자유의 기념비.
사랑의 신 "밀다"를 모티브로 한 46m 높이의 기념비는, 1935년 라트비아가
소련, 독일 등을 상대로 독립전쟁 중 희생당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웠다.
기단에 'TEVZEMEI UN BRIVIBAI(조국과 자유를 위하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소련은 이 자유의 기념비 철거하려 했으나 주민들의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곳은 소련에 저항하던 시민들의 시위가 빈발했던 곳으로, 라트비아 국민의
올곧은 성격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곳으로 성역화되어 있다.

라이마 광장 바닥에는 발바닥이 새겨진 동판이 설치되어 있다.
1989년 발트 3국은 소련으로부터의 독립을 외치며 발틱해안까지 600km
거리를 손을 잡고 인간사슬을 만들어 '노래하는 혁명' 평화의 시위를 벌였다.
이곳은 세 나라의 수도인 투아니아의 빌니우스, 에스토니아의 탈린,
라트비아의 리가를 인간 띠로 이었던 중간 지점을 나타내고 있다.
소련은 발트 3국 독립을 1991년에 승인했다.







(라트비아에서 저녁을 먹고..)







(에스토니아를 향해 달리는 라트비아의 풍경)

라트비아에는 2,256개의 호수가 있고, 삼림도 울창하여
라트비의 절반이 푸르게 우거진 숲으로 덮여 있다.





(에스토니아 국경)

 잠시 휴식하기 위해 국경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여기서 에스토니아 탈린까지는 약 200km,
2시간 반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같다.



 원   곡
 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