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탈린, 영화와 역사의 질곡이 오롯한
2018. 9. 17. 23:23ㆍ여행/여행기
에스토니아, 탈린, 영화와 역사의 질곡이 오롯한
(수많은 외침에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문화와 언어)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어..)
국경을 넘은 버스는 탈린을 향해 열심히 달린다.
창밖은 밤 10시가 되었는데도 하늘을 붉게 물들인 노을이 비친다.
해가 뜨고 해가 진다는 점은 같을지라도 뜨고 지는 시간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북구는 낮도 길고 밤도 길다. 우리는 하지와 동지만큼 낮 밤의 길이가
차이 나는 줄 알았지만, 노르웨이 니알순(우리나라 북극 다산과학기지가 있는
노르웨이 작은 마을, 북위 78.55)은 4월 20일께 떠오른 태양이 8월 20일까지
아예 지질 않는다고 한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를 하룻낮으로 친다면
북극의 여름은 하룻낮에 해당하는 셈이다. 세상은 참 같으면서도
아주 다르다. 여행에서 가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호텔에 도착하니 오후 11시)
오늘도 참 먼 길을 바쁘게 달려왔다.
어제 오후 스톡홀름에서 크루즈 선 탈링크 로만티카로
출발하여 오늘 오전 11시 라트비아 리가에 내려, 발트 3국 중
제일 남쪽에 있는 리투아니아 샤울라이 십자가 언덕에 올랐다가,
다시 라트비아로 돌아와 룬달레 성을 돌아보고, 리가로 이동하여
검은머리전당과 삼형제 건물로 유명한 리가의 구시가지를 돌아 보고
에스토니아까지 왔으니.. 오늘은 국경 같지 않은 국경을 3번이나 넘었고,
배에서 보낸 시간을 제하더라도 버스로 이동한 거리가 대략 600km는
되는 것 같다. 2주 가까운 여행 일정도 떠나 온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막바지다. 빨리 간 시간이 아쉽게 느껴진다. 인생도 여행이라고
했는데. 인생 여행을 마칠 때에도 아쉬운 마음이 들까?
(에스토니아(Estonia))
정식 명칭은 에스토니아공화국(Republic of Estonia)이며,
발트 3국 중 최북단에 위치한 국가로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은
에스티(Eesti), 에스티 바바릭(Eesti Vabariik). 면적은 4만 5227㎢,
인구는 1,307,000명(2017년), 수도는 탈린(Tallinn)이다.
북유럽의 요충지인 발트해 연안에 정착한 에스토니아인들은, 바이킹에 이어
1219년 이후 덴마크에 점령당했다. 1226~1227년 교황의 직접지배를 받으면서
기독교가 전해졌다. 독일 기사단이 점령한 후 근대까지 에스토니아 중상류층은
독일계가 많았다. 1917년까지 제대로 된 나라를 가져보지 못했으며, 독일 기사단
이후에는 인근 스웨덴,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에 점령당하기를 반복했다.
1917년 브레스트-리토브스크(Brest-Litovsk) 조약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벗어났으나 대신 독일군에 점령당했다. 그러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독일이 패망함으로 독립국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1940년 8월 독·소불가침조약으로 다시 소연방에 병합되었다가
1991년 8월 20일 독립했다. 독립 과정에서 발생한 '노래 혁명'으로 유명하다.
발트 3국에서 남쪽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
북쪽의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까지 200만 명이 600km가 넘는 도로를 점거,
어려움을 겪다 1990년대 중반부터 발트 3국은 모두 경제 안정을 찾았다.
에스토니아는 1992년 6월 구소련 공화국 가운데 최초로 구소련 화폐 루블
(Rouble) 화의 유통을 금지, 크룬(Kroon)화를 유일한 법정화폐로 선포했다.
2004년에 나토(NATO)와 유럽연합에 가입하고. 2011년에 유로화를 도입했다.
국민 구성은 에스토니아인 65.3%, 러시아인 28.1%, 우크라이나인 2.5%,
벨라루스인 1.6%. 언어는 에스토니아어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종교는 대부분 루터교이고, 러시아 정교도 믿는다.
주요 산업은 건설자재, 제조업, 의료·화학 등이 발달하여
구소련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중에선 경제적으로 선두권에 서 있는 국가.
발트 3국 중에선 가장 성장률이 높은 국가로 휴대폰과 IT, 블록체인 강국이다.
인터넷 전화 프로그램인 '스카이프(Skype)'를 개발했으며, 전국이 와이파이존이고
선거에 전자투표를 도입했다. 얼마 전에는 군용 로봇인 무인지상차량으로
화력 테스트까지 하는 등 디지털 국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고난과 시련,
질곡으로 얼룩진 파란만장한 역사와 부족한 자원을 딛고 일어서는 나라.
1인당 GDP(명목) 17,633$ (2016, IMF)이다.
(탈린 시가지 모습)
(탈린에서 묵은 호텔)
호텔 뒤편에는 에스토니아 레슬링 선수로 세계챔피언을 지낸
ALEKSANDER ABERG(1881~1920)의 상반신이 동상이 있는데
호텔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한산한 도로)
도로는 트램과 자동차가 함께 다닐 수 있도록
전선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도 교통량을 획기적으로 줄여야 하고
특히 도심은 대중교통이나 자전거, 도보 중심으로 활성화하고
일반 승용차의 진입을 막는 게 어떨까?
(탈린(Tallinn)은..)
발트 3국 중 하나인 에스토니아의 수도로,
옛 이름은 레발. 레발이란 이름은 에스토니아 북부의 레발라 지방에서
에서 따 온 이름. 탈린이란 에스토니아어로 덴마크(Taani)의 도시(Linn)라는 뜻.
1219년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가 에스토니아인들이 세운 성채에 성을 세우면서
도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3세기에는 한자동맹의 중심지로서 융성했다.
1346년 덴마크 왕이 튜턴 기사단에 도시를 팔았고, 1561년에는 스웨덴에 속했다.
러시아 제국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과의 전쟁으로 이 도시를 점령한 후,
발트함대의 근거지가 되었다.
적백내전 이후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면서 수도가 되었지만,
2차 대전 이후 소련에 귀속되었고, 소련의 해군 기지가 이 도시에 위치했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에스토니아 수도 역할을 계속해 오고 있다.
탈린 구시가지는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이름이 나 관광객이 많이 찾으며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구시가지 지역은
규모가 작아 인구는 채 4,000명도 안 된다. 구시가 지역은 크게 서쪽의 톰페아 언덕과
동쪽의 저지대로 나뉜다.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당과 톰 교회, 에스토니아 국회
(톰페아 성)가 톰페아 언덕에 있고, 동쪽 저지대에는 라에코야 광장과 올레비스테
교회가 있다. 현존하는 유럽의 약국 중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이곳에 있다.
옛 소련 시절인 1980 모스크바 올림픽 분산개최 도시로 요트 종목이 열렸다.
1980년대만 해도 러시아인이 에스토니아인보다 많았고, 지금도 러시아인이
많이 사는 곳으로 인구의 40%가 러시아인이며 소수의 고려인도
여기에 정착해 한국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탈린도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에 이어
2011년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되었다. 2013년부터 시행한 대중교통 무료
정책을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운영하고 있다.(외지인이나 관광객은 유료)
탈린은 핀란드 헬싱키와 발트해를 사이에 두고 100km 밖에 안 될
정도로 가깝고, 교류가 많아 2030년 개통을 목표로 탈린과
헬싱키를 잇는 해저터널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탈린 역사지구 안내도)
역사지구는 크루즈 선착장과는 거리가 가깝고
성곽 둘레가 2.4km 내에 있기 때문에 넉넉잡아
2시간 정도면 대충 둘러볼 수 있다.
(톰페아 성(Toompea Loss)은..)
톰페아 성은 에스토니아 탈린 역사지구 중심이자
고지대인 톰페아 언덕(Toompea Hill)에 있다.
1226년~1227년 탈린은 교황이 지배하게 되면서 카를 형제의 십자군
기사단 (crusading Order of the Brethren of the Sword, 이후 튜턴 기사단과
합병) 소속이 되었고, 이 지역은 요새(castrum)와 도시의 저지대(suburbum)
두 부분으로 분할되었다. 톰페아 성은 덴마크인들에 의해 1310년 해안가
석회암 절벽에 축성되었고, 1345년 리보니아 기사단이 성을 재건했다.
성은 두께 3m, 높이 15m, 길이 2.4km로 도시를 감싸고 있다.
성곽에는 붉은빛 원뿔몽양의 지붕을 가진 탑이 46개가 있었다.
성안에는 성 니콜라스 교회와 성 올라프(St Olaf) 교회가 있다.
교회는 전형적인 바실리카 회당 양식으로, 탈린 학파(Tallinn
School) 특유의 높은 둥근 천장과 정교한 기하학적 양식이다.
톰페아 성은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됐다.
현재는 의회 등 정부 청사로 사용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국회)
러시아 정교회인 알렉산더 네브스크 맞은 편에 있다.
이곳은 톰페아 언덕에 세워진 톰페아 성이었고, 그 이후에
수도원이었다가 1920년부터 의회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양파모양의 돔을 한 러시아 정교회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
톰페이 언덕에 있는 탈린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Alexander Nevsky Cathedral).
미하일(Mikhail Preobrazhensky)이 설계한 러시안 복고 스타일의
동방 정교회로 탈린 시내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이 교회는 에스토니아가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던 러시아 황제의 종교적 지배 상징물로 지어졌는데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미하일 프레오브라즈헨스키에 의해 1,900년에
완공되어, 1242년 페이푸스호 전투를 승리로 이끈 러시아의 국민적
영웅인 알렉산더 네브스키(1220~1263)에게 헌정하였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 정문)
알렉산더 네브스키의 본명 Alexandr Yaroslavich.
블라디미르 출생. 블라디미르 대공인 야로슬라프 2세(Yaroslav II of Vladimir,
1191~1246)의 아들. 러시아를 외적으로부터 보호한 러시아의 국민적 영웅.
그는 유능한 정치가였으며 당시 강력한 몽골의 지배에는 저항하지 않아
신뢰를 얻어, 125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블라디미르대공에 취임하였다.
국토방위의 공적은 러시아의 민요로도 불리며, 러시아 교회는 그를 성자로
추앙하였다. 한편, 표트르 l세는 네바강변의 싸움터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의 유골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제정 정부는 그의 훈장을 제정하였다.
1942년의 소비에트 정부도 제정 정부의 전례에 따랐다.
(알렉산더 네브스키 대성당 내부)
종탑은 11개의 종으로 이루어졌으며, 내부는 화려한 금박으로 된
이콘(주로 동방교회에서 발달한 예배용 화상) 등이 장식되어 있다.
(도로, 골목길?)
집들은 파스텔 톤으로 소박하게 단장되어 있어 있다.
탈린 구시가지 도로는 바닥이 돌로 되어 있어 정취는 있으나,
바닥 두꺼운 신발이 걷기에 좋을 것 같다.
(Voldemar Panso의 흉상)
Voldemar Panso(1920~1977)는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중의 한 사람인
Voldemar Panso가 살았던 집. 현재는 에스토니아 음악 및
연극 아카데미 드라마 학교건물로 사용 중이라고 하는데,
흉상이 바라보는 쪽에 의회 건물이 있다.
(돔 교회(Dome chruch), 메리 교회(St Mary's Cathedral))
이 교회는 처음에 가톨릭 교회였다가 루터 교회로 바뀌었다.
입장료가 5유로인 이 교회는 내부가 아름답고, 전망대에서 보는
탈린 구시가지 전망이 일품이라지만.. 군침만 삼키고..
(거리의 예술가들)
(30)
(AMBASSADE VAN HET KONINKRIJK DER NEDERLANDEN)
히딩크의 나라 네덜란드 왕국 대사관의 국장.
왕관이 올려진 망토 가운데에는 직사각형 모양의 파란색 방패가
그려져 있고, 파란색 방패 안에는 금색 왕관을 쓴 사자가 무장하고
칼을 휘두르고 있다. 사자 문양 주변에는 일곱 개의 금색 화살이
장식되어 있다. 방패 위쪽에는 금색 왕관이 올려져 있으며
방패 양쪽에는 무장을 한 두 마리의 사자가 그려져 있다.
방패 아래에 있는 파란색 리본에는 네덜란드의 나라 표어인
"나는 유지할 것이다"("Je Maintiendrai")가
중세 프랑스어로 쓰여 있다.
소박한 대사관 건물이지만 국장이 돋보인다.
(34)
(아기자기한 옛 정취가 느껴지는 골목길)
좁은 골목길 사람들을 피하랴 독특하고 클래식한
가게의 간판들도 보랴 기웃거리기에 분주하다.
(코투오차(Khotuotsa) 전망대에서 본 올드 타운의 모습)
탈린 시내 구시가지를 역사지구라 부른다.
13세기 초부터 덴마크와 스웨덴, 제정러시아 등 여러 나라에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세 건축물과 성벽이
원형 가깝게 보존되고 있어 1997년 구시가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중세의 역사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탈린을 '발트해의 숨은 진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 멀리 크루즈 선이 보이는데
이번 여행에서 핀란드 트루쿠 - 스웨덴 스톡홀름,
스톡홀름 - 라트비아 리가 간을 이동할 때 이용한 호와 크루즈 선
탈링크 실야 라인 선사인 AS Tallink Grupp이 1989년 이곳 탈린에서
창립했고 본사를 이곳 탈린에 두고 있다.
(코투오차 전망대에서 돌아 나와)
고지대는 권력층의 거주 지역이었고,
저지대에는 상인과 서민들이 생활하는 터전이었다.
지금은 긴 다리(Pikk Jalg)와 짧은 다리(Luhike Jalg)의 길이
저지대와 고지대를 연결하지만, 중세 당시에는 두 지역이
완전히 분리되어 생활하였다고 한다.
(성 니콜라스(St Nicholas Church) 교회 첨탑)
성 니콜라스(St Nicholas Church) 교회는
13세기에 세워진 교회로 어부와 선원의 수호성인인
니콜라스에게 헌정되었다. 중세 이후에는 기독교 미술품을
주로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올레비스테 교회(Oleviste Kogodus))
탈린 시내 건물 중 시청사 탑과 쌍벽을 이룬다.
한동안 전 유럽에서 가장 높았던 교회. 탈린이 역사에 등장한
12세기 이후부터 약 800년 동안 탈린을 지켜 온 안방마님이다.
교회의 이름은 11세기 노르웨이 왕 올라브 2세에서 따 왔으며,
올라브는 항해자들의 수호성인 이름이기도 하여 북유럽 전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 이름이다. 탑의 높이는 약 159m로 15세기에는
한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으며, 지금도 탈린 시내에서
가장 높다. 152개의 좁고 긴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탈린의 아름다운
전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는데.. 전망대는 고사하고 근처에도
못 가보고 멀리서 높은 첨탑만 바라보았다.
(기념품점 앞에서)
보석과 장신구가 그려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여행객들이 들어 오도록 유인하고 있지만.. 골목을 스쳐
지나가거나, 기념품점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마는 사람들..
나도 그중 한 사람
(??)
(성모 마리아 성당(Cathedral of Saint Mary the Virgin))
1219년 덴마크인들이 이곳에 진출한 이후
최초로 지은 성당이라고.. 톰페아 언덕에 세워진 이 성당은
덴마크인들이 목조건물로 지었으나, 현재의 건물 외관은
15~16세기에 건축한 것. 1684년에는 화재로 피해를 보았다.
첨탑 부분은 1779년에 세워졌다.
(성모 마리아 성당(Cathedral of Saint Mary the Virgin))
발트 3국을 한데 묶어 말할 정도로 겉으로는
(평민들이 사는 아랫동네로..)
평민들의 길인 짧은 다리 문으로 내려간다.
이곳을 기준으로 귀족이 사는 윗동네 평민이 사는
아랫동네로 나뉜다고 한다. 아랫동네로 내려가는
짧은 다리 문을 밤에는 잠갔다고 한다.
(짧은 다리, ‘뤼히케 얄그(Luhike Jalg) 거리)
골목길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툼페아 언덕이 있는 고지대와 시청 광장이 있는 저지대를 연결하는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짧은 다리라는 뜻’의 ‘뤼히케 얄그(Luhike Jalg)
거리이고, 다른 하나는 '긴 다리'라는 뜻의 '픽 얄그(Pikk Jalg)' 거리다.
중세에 귀족들은 툼페아 언덕이 있는 고지대에 살았는데, 말이나 마차를
타고 경사가 완만한 '픽 얄그(Pikk Jalg)' 거리로 다녔고, 평민들은 짧은
'뤼히케 얄그(Luhike Jalg)' 거리로 다녔다고 한다. 우리는 귀족이 살던
동네에서 평민들이 살던 저지대로 내려간다.
(성 니콜라스 교회(St. Nicholas Church))
1230년 독일 상인과 기사를 위해 지었다는데
탈린 성곽이 지어지기까지는 요새의 역할도 했다고 한다.
산타클로그의 유래가 된 니콜라스를 수호성인으로 모신다.
높이가 105m인 성 니콜라스 탑은 구시가지에서 124m인
올라프 교회 탑 다음으로 높다고 한다.
활달한 에스토니아 아가씨들과도 한 컷
(아기자기한 골목길이 정겹다)
(고양이 우물(Cat's Well))
우물의 정령들이 탈린에 원한을 가지고
홍수를 일으키려고 하자, 정령들을 달래려고 죽은 고양이를
우물에 던졌다는 전설이 있는..
(73)
(라에코야 광장, 시청 광장)
약 11세기부터 탈린 시민들의 만남의 광장이자
큰 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탈린의 중심지이다.
검은머리형제단 길드(상공업 조합) 건물을 비롯한 중세 상인의
옛 가옥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청광장은 800년 동안 탈린의 시장이자
모임 장소, 때로는 사형장으로 이용했다. 현재는 매해 여름 중세시대의
카니발을 재현하는 축제 장소 겸 수공예 시장으로 사용된다.
1441년부터 매년 11월 중순에는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지고,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려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여름에는
다양한 길거리 공연과 노천카페가 광장을 가득 메운다.
탈린의 중심광장답게 관광객들이 엄청 많이 찾는다.
검은머리형제단은 독일에서 온 젊은 상인들의 조합,
검은머리형제라는 이름이 붙은 건 이집트 출신인 순교자
성 모리스를 수호성인으로 삼았기 때문. 이들은 재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리가, 탈린 등 발트해 연안 도시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오늘날 세계 최대의 단일 경제권으로 자리매김한 유럽연합(EU)도
그 원류를 찾아 거슬러 가면 13세기 세계 최초의 역내 자유무역협정인
한자동맹과 만나게 된다. 한자동맹의 중심 도시였던 북유럽 발트해
인근 도시, 탈린과 리가는 '유럽의 번영은 국가 간, 도시들 간의
자유로운 연합과 무역에서 비롯됐다'는 걸 웅변이라도 하듯
수많은 번영의 흔적들을 품고 있다.
(라에코야 광장 검은머리형제단 길드 건물을 배경으로)
"내 만약 무너질 운명이라면, 그대에 의해
다시 세워지리라." 건물 입구에 쓰여 있는 문구다.
1334년 지어진 이 건물은 2차 대전 때 파괴되었다가
1999년에 재건되었다.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옛 상인들의
예언이 현대 라트비아인들의 손으로 실현되었다.
(탈린 시청사(Tallin Town Hall, Tallinna Raekoja))
현존하는 북유럽 시청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고딕 양식의 2층 건물로 외관은 석회암으로 마감되어 있다.
건물의 지붕은 급경사의 뾰족한 모양을 이룬 박공 구조로 되어 있으며
창과 입구도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특히 처마 위에는 용머리 형상을
한 물 홈통이 있다. 13세기에 건립된 이 건물은 1402년부터 2년에 걸쳐
재건축되어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탈린 역사의 증인으로 함께하고 있다.
건물 동쪽에는 호리호리한 8각 첨탑이 있는데 이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인
왕관 모양을 하고 있다. 첨 탑 꼭대기에는 ‘토마스 할아버지’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파수꾼 모양의 풍향계가 있다. 이 풍향계가 달린 첨탑이 구 시청
건물 중에서 가장 유명해져 수도 탈린의 상징이 되었다.
1970년까지 시청 건물로 사용했으나, 현재는 박물관,
연주회장, 예식장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구시청사 첨탑의 풍향계)
전설에 따르면 뛰어난 실력에도 불구하고 미천한 신분 때문에
석궁대회에서 상을 받지 못한 토마스는 시를 지키는 파수병이 됐다.
그는 평생 시청 앞 광장에서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줬는데,
그가 죽고 난 후 아이들은 토마스 할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하자
어른들은 가장 높은 첨탑 꼭대기에 토마스 형상의 풍향계를 설치하고,
아이들에게 토마스가 항상 지켜보고 있다고 달래줬다.
토마스 할아버지(Old Thomas)는 오늘날
탈린의 수호자이자 상징이 되었다.
(용머리 홈통, 교회문양)
특이한 모양의 용머리 홈통과
한 때 교회로 사용한 흔적이 되는 벽면의 그림..
시청사 1층은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
(라에코야 광장 주변은 중세 상인들이 세운 집들이 많다.)
(아름다운 골목은 셔트 누르기도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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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 사람들은 친절하고 따뜻했다)
벼락치기로 외운 에스토니아 어로
(라에코야 광장 주변으로 중세 상인들이 세운 건물들..)
탈린은 융성한 14세기까지 많은 상인과 주민들이
이주해 큰 도시로 확장됐다. 시청사, 길드조합 건물 등 새로운 석조 건축물이
들어서 짜임새 있는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15세기에 접어들면서 탈린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한자동맹이 급격히 쇠퇴해졌지만, 탈린은
여전히 활발한 무역을 지속함에 따라 주변 강대국들이 이곳을 지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1561년 스웨덴이 지배하였으나 1710년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가게 된다.
(금강산도 식후경, 점심은 중식당(?)으로..)
분위기는 중식당 분위기인데 메뉴는..
감자, 야채, 튀김.. 그리고 밥.
(거리에는..)
(97)
(고깔모양의 망루가 있는 비루 게이트)
14세기 성문 구조의 톰페아성 비루의 탑
비루 게이트(Viru Gate)와 꽃가게들. 구시가지로 들어오는
입구라는데 우리는 출구가 되어 나간다. 중세에서 현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느낌.
(구시가지를 벗어나니 현대식 건물들이..)
에스토니아는 구시가지 역사지구에 있는 800년이 넘은
중세의 역사유물을 잘 보존하면서 관광상품만 파는 나라가 아니라
현대 지식정보사회로의 이행을 위해 과감한 정책들을 펼치고 있었다.
인구 131만의 에스토니아가 2007년부터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하여
전자정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블록체인 기술에서 만큼은 대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조그만 나라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전자정부 선도국이라는
것이 구시가지에서 중세건물들을 본 것보다 더 놀랍다. 전자 신분증, 전자 서명,
개인정보 통합·활용은 물론 전자영주권까지 만들며 국경을 허물고 있다.
전 세계를 ICT로 연결하고 세계인을 자국민으로 만들고자 하는 강한 의지도
엿볼 수 있었다. 세계 최초로 온라인 국회의원 선거를 한 나라라니
다시 보인다. 1990년대부터 IT 교육을 통한 기술 강국을 지향하며
과감하게 학생들에게 코딩 교육을 했다고 한다.
(트램과 자동차들)
트램 전원 공급용 케이블이 하늘을 가리지만
도로는 교통량이 많지 않아 한산하다. 저기 트램 한 대가
누에가 꾸물거리듯 기어오고 있다. 탈린과도 아쉬운 작별이다
탈린 시내를 벗어나 러시아로 향한다. 이제는 러시아다.
(101)
(풍력발전기가 늘어 선 풍경)
우리나라는 아직도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을
고수하지만, 세계적 추세는 재생가능에너지를 이용한 전력생산이다.
KERC 보고서에 따르면, EU의 경우 덴마크는 총 전력생산의 74%, 독일은 30%,
영국은 28%를 재생가능에너지로 생산하고 있다. 추세는 2010년 대비
재생가능에너지의 성장률이 덴마크가 42%, 영국이 22%, 독일이 17%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앞으로도 재생가능에너지는 더 확대되고
화석연료 발전량은 급격히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러시아 가는 길, 국경도시 NARVA 방향으로..)
발트 3국에서 중세의 건물의 화려한 외양보다는
오히려 이면에 숨겨진 모습, 아니 그 그림자가 더 진하게 보였던 것 같다.
한편으론 애처롭고, 애잔한 마음도 들었다. 파란만장한 역사와 끊임없이
인접한 독일과 러시아, 스웨덴, 덴마크, 폴란드 등이 서로 먹고 먹은 영토전쟁 속에서
도시는 파괴되고 폭정과 억압에 시달리면서 죽음과 학살, 추방, 유배, 망명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까지 겹쳐 매우 곤란한 고통의 연속으로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어
발트 3국의 인구를 합쳐도 부산과 경남을 합친 인구수에도 못 미치는 것을 보면서
그들의 곤란하고 고단했던 역사가 실감 났다. 한편, 지금도 외세에 휘둘리고 있는
우리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동병상련의 정이 느껴졌다.
집을 떠나 이국만리에서 목숨을 걸고 헌신한 우리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역사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이 흥망성쇠를 거듭한다지만
강한 나라는 살아남고 소수민족 약소국의 비애는 엄연히 존재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질서는 불행하게도 자국의 이익이 우선인
냉엄한 약육강식 정글 같은 질서만 존재할 뿐이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 문화와 우리말, 우리글에 대한 고마움도 크게 느꼈다.
어려움이 오히려 끈질긴 민족성과 자극제가 되어 일어서는 모습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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