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심장, 붉은 광장

2018. 10. 11. 22:08여행/여행기





모스크바의 심장, 붉은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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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전 정원의 연인과 노동자)





(뒤돌아본 크렘린 사원 지구)

황금빛 돔이 찬란하다. 성당들은 역사의 부침에도
파괴와 복원의 과정을 거치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교회의 용도는
긴 역사만큼이나 많이 변모하고 있다. 크렘린에 이렇게 아름다운
사원 지구가 있다는 것도 놀랍고, 소련 공산당의 폐쇄적이고
비밀스러운 이미지로 각인된 대명사 크렘린의 장벽(울타리) 안에
있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다.







(Spasskaya Tower / 스파스카야 탑)

크렘린의 아름다운 망루 중 하나라는 스파스카야 망루는
붉은 광장의 성 바실리 대성당 옆에 있으며 한때는 크렘린의 메인
게이트로 사용했다. 1491년 이탈리아 건축가 피에트로 안토니오 솔라리와
마르코 루포에 의해 건축되었으며 2016년부터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4면에 있는 아름다운 시계로도 유명한 이 탑의 시계 지름이 6m나 된다.
크렘린 궁전에서 스파스카야 탑 문을 통해
붉은 광장으로..







(붉은 광장.. 광장이 붉은 것은 아니다)

드디어 크렘린궁에서 나와 붉은 광장을 밟았다.
세계 3대 광장의 하나인 붉은 광장은 폭 130m에 길이가 696m.
면적이 73,000㎡이다. 스파스카야 탑문으로 나가니 전면에 양파모양의 돔으로
유명한 성 바실리 대성당이다. 테트리스에서 낯익은 건물이지만 생각보다 화려하다.
광장에서 보면 왼쪽은 시계탑인 스파스카야 탑과 연결된 붉은 벽면이 크렘린
궁전이고, 그 중간쯤에 레닌묘가 있고, 끝자락에 보이는 붉은 건물이 역사박물관,
그리고 카잔 성당, 왼쪽에는 굼 백화점이 길게 늘어서 있다. 성 바실리 대성당이
곁에 있다. 우리는 크렘린 궁전을 거쳐 나왔지만 붉은 광장이
모스크바 여행의 시작점이자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광장은 시장, 화재광장 등으로 불리다가 17세기 말부터
붉은 광장으로 부르고 있다고 한다. 붉다는 의미의 러시아어는
‘크라스나야’로 이 말에는 '아름답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이 광장의 원래 명칭이 ‘아름다운 광장’이었을지라도 현재 광장에는
한쪽에 크렘린 궁전을 감싸고 있는 담장이 붉은색이고, 광장에
있는 레닌의 묘도 붉은색 화강암이고, 러시아 역사박물관도
붉은색이어서 붉은 광장이라 해도 자연스럽다.









(성 바실리 대성당)

모스크바를 상징하는 건축물의 하나인 성 바실리 대성당.
러시아 황제 이반 4세가 1552년 카잔 칸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여
세웠다. 1560년에 완성된 성당은 성모 마리아를 수호성인으로 모셨으며,
정식 이름은 포크로프스키 성당이었다. 1588년에 증축한 부제실에
당시 열렬한 숭배를 받고 있던 성 바실리를 모셨기 때문에 나중에는
바실리라는 명칭이 사람들에게 더 친숙해지게 되었다.
성 바실리 대성당은 러시아 고유 양식과 비잔틴 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건축 형태를 지니고 있다. 성 바실리 대성당은 단일한 토대 위에
모여 있는 아홉 채의 독립된 예배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모두가
중앙의 첨탑을 둘러싸고 있는 형태다. 선명한 원색이 칠해진 9개의
독특한 양파형 지붕은 형태, 크기, 색깔까지 모두 달라서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9개의 지붕은 지상 어느 각도에서도 최대 8개밖에
볼 수 없다. 일반인들에게는 아타리 테트리스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199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반 4세는 완공된 성당이 너무나 아름다워 감격했다.
그는 이 성당을 지은 건축가 포스트닉 야코블레프가 다시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성당을 짓지 못하도록 그의 두 눈을 멀게 했다는
말도 전해 내려오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타지마할 등 다른 건축물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 이 건물을 지은 건축가 포스트닉은 이후에도
다른 건물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 포자르스키와 쿠즈마 미닌의 동상)

성 바실리 대성당 앞 정원에 있는 이 동상은
1612년에 폴란드군을 상대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이 조각상에는 폴란드군의 침공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두 남자,
드미트리 포자르스키 왕자와 쿠즈마 미닌이라는 도살업자가 묘사되어 있다.
이반 마르토스라는 건축가가 만든 이 동상은 원래 1818년 붉은 광장 한복판에
세웠으나, 공산당 집회를 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하여 원래의 자리에서
1936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모스크바에 오면 크렘린 궁전과 붉은 광장은..)

성 바실리 대성당을 보러 왔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동유럽을 처음 접하고 문화충격을 받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화려한 겨울 궁전을 보고 러시아(소련)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꼈다.
크렘린 궁전과 붉은 광장을 보고 참 많이도 속고 살았구나! 통탄할 일이다.
물론 그 이전에 북한 사람들 머리에 뿔이 없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긴 하다. 교육은 중요하다. 정말 제대로 된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귀한 자녀일수록 여행을 보내라는 말은
 백번, 천번 옳은 말이다. 여행보다 훌륭한 교육은 없는 것 같다.
눈으로 본다고 모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것은 들은 것보다 확실하다. 러시아 크렘린의 아름다운 사원들,
붉은 광장의 양파 같은 지붕의 이 화려한 성 바실리 대성당,
러시아는 회색빛 하늘만 있는 나라가 아니라 문학과 음악,
미술은 물론, 건축을 자랑하는 문화강국이었다.

물론, 화려한 건물을 보면서 마냥
감탄만 할 수 없는 것은,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칭송하지만,
성을 쌓을 때 수많은 민중이 죽었고, 죽은 민중들의 주검 위에 세워진
'세계 최장의 무덤'이라는 오명을 가진 만리장성 앞에서 연민의 정을 느꼈듯,
붉은 광장의 화려한 성당 바실리도 러시아에서 가장 두렵고 강력했던
통치자 이반 4세가 지은 것이라니 외양의 화려함과 명성의 이면에는
그에 비례하는 민중의 눈물과 희생이 따랐을 것이다.
그래서 슬픔이 묻어난다.







(로브노예 메스토(лоБноемеСто))

바실리 성당 앞에 우물 모양의 단이 있는데
이 조형물은 모스크바의 역사와 함께해 온 유서 깊은 기념물.
붉은 광장은 나라의 중심 광장으로 오랫동안 역사적 사건들을 지켜봤다.
‘로브노예 메스토’는 1549년 이반 뇌제가 카잔 한국에 대한 승리를 한 후
바로 이 곳에서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역사의 기록에 언급됐다.
그 이후 이곳은 차르가 연설을 하거나 칙령을 선포하는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 시 주요 무대로 활용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레닌 묘의 연단이
이 기능을 담당했다. 이 ‘로브노예몌스따“는 ’단두대‘라고도 부른다.
단어가 단두대라는 의미도 있고, 이곳에서 농민반란 지도자 푸가초푸를
처형하기도 했다니 단두대라고 하는 게 틀린 것은 아니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로브노예 메스토는 처형하는 용도 보다는
공개 연설을 하는 장소에 가까웠다.







(러시아 국립역사박물관)

붉은 광장과 마네즈나야 광장 사이에 있는 건물로
러시아 영토에 살았던 선사 시대 유물부터 로마노프 왕조까지
전 역사에 걸친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755년 미하일 로모노소프가
모스크바 대학교의 학과 건물로 지은 것을 블라디미르 오시포비치 셔우드가
현재의 건물로 재건축했다. 박물관은 1872년 이반 자벨린, 알렉세이 우바로프와
그 외 여러 슬라보필에 의해 설립되었다. 붉은 광장 입구 쪽 국립역사박물관
앞에는 2차 대전시 소련군 총사령관 주코프 장군 동상이 있다.





(카잔 성모 성당)

부활의 문 바깥에 위치한 작고 아늑한
성당으로 그냥 카잔 성당이라고도 한다. 1625년에 건축된 후
여러 차례 재건된 역사가 오래된 성당이다. 소련 시절인 1936년에는
부활의 문과 마찬가지로 철거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1993년에
처음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붉은 광장의 화려함에 눈길이 끌려
언뜻 지나치기 쉽지만 작은 성당 안은 바깥의 시끌벅적한 소리도
잠재울 만큼 고요하여 신자들이 기도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문 바로 위에 있는 카잔의 성모 성화는 러시아에서
가장 숭앙받는 정교 성화 중 하나다.











(명품 백화점 '굼')

모스크바 관광 1번지 붉은광장의 한쪽 면으로
길게 늘어선 3층 건물의 국영백화점이다. 지금은 유명 해외브랜드
매장들과 수입 식료품점들로 러시아의 높은 물가에 한몫하고 있다.
1889년 대형 공장으로 문을 연 뒤, 구소련시대에는 1,200여 개의 점포를 가진
국영 상점으로 현재는 명품이 즐비한 러시아 최고의 호화 백화점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 백화점은 199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해외 브랜드는 커녕 매장에 물건이 없어 비워 두어 볼품이 없었다니
경제성장으로 달라진 러시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백화점은 3층 규모로, 천장은 아치 형태를 이루며 유리로 덮여 있다.
백화점은 시즌마다 테마를 정해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 놓는다고 한다.
성탄 시즌이 특히 아름다운데 내부를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장식물은
물론 복도에 전시된 귀금속과 향수, 드레스까지 화려한 중세 무도회장을
연상시킨다. 중앙홀에는 작은 분수 및 카페들도 많아 물건을 사는
사람뿐 아니라 이이 쇼핑을 즐기러 나온 시민과 관광객들로
항상 붐빈다고 한다. 붉은 광장 쪽으로는 야외 카페가 있어
붉은 광장을 감상하기에 그만이다.









(정원 같이 잘 꾸며 놓은 백화점 내.외부)

백화점 안은 유리 천정으로 하늘이 뻥 뚫려있고,
안팎의 화단에는 화사한 꽃밭으로 장식되어 있다.
모스크바에 진출한 롯데백화점이 굼 백화점만큼 인기를
얻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큰 공간을 만들어 화려하게 꾸며야
하는데 매장 중심이라는 것.. 외국의 대형 마트들이 한국에
제대로 발 붙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사정 아닐까 싶다.

굼이란 러시아어로 '종합 백화점'을 의미하는
정식 명칭 '글라이니 우니베르살니 마가진
(Главный универсальный магазин)'의 약어.
붉은 광장은 고대부터 큰 시장이 섰으며
거래가 활발한 장소였다고 한다.







(굼 백화점 옆 골목에서..)





(이정표, 러시아어를 보고 지레 포기했는데..)

자세히 보니 영어도 함께 안내되어 있다.
Tourist information center가 1분 거리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확인한다. 그 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광장의 사람들..)





(Tserkov' Maksima Blazhennogo)

러시아 동방정교회 '축복받은 교회 막시무스 교회'





(모스크바강의 표트르 대제 동상)

러시아의 근대화를 열고 러시아 해군을 창설하였고,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했던 표트르 1세
(Peter the Great, 1672.6.9~1725.2.8)의 동상. 높이 98m, 무게 1,000t이
넘는 규모로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인 큰 이 동상은 상트페트르부르크에 있었더라면
도시의 주인으로 인정받았을텐데 자리를 잘못 잡아 동상을 좋아하는 러시아인인데도
모스크바 시민들이 싫어하는 동상이 되었다고 한다. 이 동상은 표트르가 창건한 러시아
해군 300주년을 기념해 1997년에 세웠는데 건립당시부터 모스크바 유리 루시코프 시장
간에 비리문제가 제기되어 뒷말이 무성했다. 유리 루시코프 시장이 물러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시키려 했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같은
디자이너의 표트르 1세 동상이 있다며 거절하는 바람에 지금까지
모스크바강 가운데에 서 있다는 슬픈 운명의 동상.







(참새 언덕에서 본 모스크바 신시가지)

크렘린과 붉은광장을 둘러보고 모스크바에서
제일 높다는 해발 220m인 참새 언덕으로 왔다. 주변에
산이 없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이곳에 오르면 조망이 좋다.
저 멀리 2010년대부터는 유럽의 두바이로 불릴 만큼 많은 마천루가 솟아있는
신시가지 모스크바-시티(Москва-Сити)와 1980년 러시아올림픽
주 경기장으로 사용됐던 루즈니키 올림픽 스타디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이 참새의 언덕이 된 사연은.. 참새가 많아서라기보다 러시아어로 참새는
'보로베이'이고 거기서 유래한 성씨의 하나인 귀족 보로비요프 가문이 15세기
중반까지 소유하던 이 언덕 근처 마을을 모스크바 대공 바실리 1세의 아내
소피아가 사들이면서 마을 이름을 '보로비요보'라고 부른 데서 생긴 것이라고..
1935년부터 소비에트 정부가 레닌 언덕으로 바꿔 부르다가
소연방 해체 후 1999년 원래 이름을 되찾았다고..








(참새의 언덕(Sparrow Hills / Vorobyovy Gory)에서)

모스크바-시티와 198m 높이를 자랑하는 모스크바
7자매 건물 중 2번째로 높은 우크라이나 호텔을 당겨본다.

(위 모스크바-시티 사진은 위키피디아에서 빌려 온 것임)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앞에서)

1755년 1월 25일 설립된 Moscow State University
(국립 모스크바대학교)는 소련 시절부터 현재까지 러시아는 물론
옛 공산권 최고의 종합 대학. 처음에는 모스크바의 심장부인 붉은 광장에
있었다. 출범 당시부터 러시아를 대표하는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에는
철학, 법학, 의학 3개 학부만이 있었으며 귀족 출신 위주의 학교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자녀도 입학을
허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소련이 양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학교의 위상도 올라가, 당시 공산주의 국가들의 고위층 자녀들은 모스크바
국립대학교로 유학하는 것이 정석 코스로 굳어질 정도였다.
스탈린 스타일 7자매(스탈린 시스터즈) 건축물로 유명한 이 대학은 36층
240m의 높이 위용을 자랑한다. 제일 높은 중앙 건물이 앞뒤 양쪽으로
18층과 9층의 날개 건물 넷이 있다. 방이 5천 개, 복도길이가 무려 33km..
1990년 한소수교 이후에는 한국인 유학생도 상당히 많다고..
다만 모든 과정이 러시아어로 진행되므로 유학 준비가 힘들다.
도서관은 8백만 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이 학교 출신 유명인으로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바실리 칸딘스키, 박노자, 안톤 체호프,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허가이, 김대중, 황장엽, 멘델레예프,
니콜라이 부하린, 나콜라이 피로고프(러시아의 의사(야전 수술)),
니콜라이 예고로비치 주콥스키(소련의 물리학자, 항공역학 등),
뱌체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 쇼쿠로프(러시아의 대수기하학자),
야코프 그리고리예비치 시나이(러시아의 수학자),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티호노프(러시아의 수학자),
알렉산드르 오스트롭스키(러시아의 극작가) 등





(스탈린 일곱 자매(스탈린 시스터즈) 건물)

모스크바 시내에서는 다른 건물들에 비해 눈에 잘 띄는
특이한 건축물들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일곱 개의 이 건물들은
1947년~1953년 사이에 지은 것으로, 구소련 시절 자국의 위엄을
느끼게 할 만한 건축물을 지어야겠다는 스탈린의 생각으로 짓기
시작한 것들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스탈린 시스터즈', 혹은 모양이
거대한 케이크 같다고 하여 '웨딩 케이크'라고도 불린다.
일곱 자매 건물로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엠게우), 교통성, 외무성,
문화인 아파트, 예술인 아파트, 호텔 우크라이나, 호텔 레닌그라드스카야.
그나마 스탈린을 악독한 차르라고 욕했던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의
8번째 건물의 건축을 막아 7채로 끝났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에는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지금은 스탈린 양식 특유의 고풍스럽고 웅장한 모습이
과거 러시아 제국 시절의 건물과 조화를 이루어
크렘린과 함께 모스크바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늦은 점심을 먹은 코르스톤 호텔)

코르스톤 호텔은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4성급 20층 호텔로 1976년에 문을 열고 2008년 리모델링을 했다.
참새의 언덕과 가까우며, 주변의 공원과 강에 쉽게 접근할 수 있고,
모스크바대학교에서 가까워 유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한다.
부속 건물 1층 로비는 카지노를 연상시키는 화려한 분위기로
일본식과 중국식을 혼합해 놓은 것 같다. 지하에는 오락실, 바,
레스토랑 등이 있으며 일식당, 한식당, 중식당 등 식당이 많아
한국관광객들이 단체로 많이 찾는다고 한다.

센강도 아닌데 여기에 웬 소원의 자물통들이..









(모스크바 세레메티예보 국제공항)

점심을 먹고 곧장 세레메티예보 공항으로 이동했다
모스크바에는 5개의 공항이 있는데, 이 중 국제공항은 3곳.
세레메티예보 공항은 도모데도보 국제공항(DME)에 이어 규모가
2번째로 큰 공항이었으나, 2015년부터 이용객 수가 역전되어
지금은 모스크바에서 제일 큰 공항이 되었다고 한다.
세레메티예보 공항은 아에로플로트의 허브 공항이며, 스카이팀 가맹
항공사 위주로 취항하는 국제공항. 한편 경쟁 공항인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은
S7 항공을 필두로 한 스타얼라이언스와 원월드의 텃밭. 인천에서 출발하는
대한항공과 아에로플로트의 모스크바행 노선은 모두 이 공항으로 들어온다.
스타얼라이언스 회원사인 아시아나항공이나 원월드 회원사인 S7 항공은
인천-모스크바 간 여객기가 없으며, 아시아나 항공은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에
화물기만 취항 중이다. 형편없는 시설, 불친절한 직원들, 수화물 도난 우려,
보딩 게이트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바뀌는 등으로 악명이 높았지만
2018 FIFA 월드컵 개최를 준비하면서 많이 나아진 것 같다.
출국 절차를 마치고 나니 딱히 할 일도 없고, 공항에 4시간 가까이 일찍
도착한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무료한 시간.. 타고 갈 비행기가 게이트에
들어왔다. 나는 여유롭다 못해 지겨운 시간이지만 모두 바쁘게 움직인다.
다행히 공항 내에서 무료 와이파이가 가능했다. 웬만한 서유럽 공항도
무료 와이파이는 없고 대부분 유료인데..





(다시 떠나기 위해 돌아 오는 길, 그래도 내 나라)


  산에 올랐다가도 산에서 내려와야 다시 산을 오를 수 있듯, 여행도 집으로 돌아와야 다시 떠날 수 있는 것. 북유럽은 어떤 모습일까? 떠나면서 가졌던 기대와 설렘, 상상을 많이 했는데 마주친 모습은 하나하나가 상상을 초월하였다. 첫발을 디딘 북반구에서 보는 석양은 역시 별스러웠고, 소설 같은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의 중심지였던 페트로그라드는 레닌이 사망하자 레닌그라드로 이름을 바꾸고,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영웅의 도시로 부르다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다시 옛 이름을 되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 도시에 있는 영국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에 손꼽히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보며 러시아에 대한 편견이 일부분 사라졌다. 편견을 깨는 데는 여행만큼 좋은 것이 없구나.

  우리가 잃어버린 청명한 하늘이 이곳으로 옮겨 오지 않았나 할 정도로 구름 한 점 없어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 청정한 환경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생활의 불편함도 감수하고 있었다. 그 하늘만큼이나 청렴하고 정직한 공무원이 일하고 있는 나라. 시청에서 시장의 판공비 사용 명세를 열람할 수 있는 국가청렴도 1위의 나라 핀란드, 나라 구할 무슨 비밀스러운 일을 한다고 국민의 혈세로 쓰는 이름도 거창한 특수활동비를 공개하지 못하겠다고 억지 부리는 우리 국회와 오버랩되면서 얼굴이 왜 붉어졌는지.. 국회의원, 시의원 하다못해 구의원만 되어도 해외출장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어딘지? 이런 곳에 와서 배울 것을 제대로 배우고 가면 나라에도 보탬이 되고 자신이 처신하는데도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들의 나라 덴마크는 국민들 개개인의 능력이 골고루, 효율적으로 발현되는 사회였다. 덴마크의 행복 사회는 '한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되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든지 어느 시기든지 '행복한 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사회 공동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들이 부러운 것은 비정규직을 양산하여 비정규직이 넘쳐나지만 그들에게 최저임금도 제대로 챙겨 줄 수 없는 각박한 나라에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는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니 안타깝고 화가 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바이킹의 나라에서 어쩌면 바이킹이 그렇게 잔인하고 포학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마치 남아메리카 원주민을 도륙하고 노예장사를 한 포학한 침략자 콜럼버스를 위대한 영웅으로 변신시킨 것 같이.. 때로는 침소봉대하고 때로는 숨기고, 포장하고, 회칠하고.. 지극히 유럽 중심적 사고는 역사의 구석구석에서 틈을 비집고 나온다.

  파란만장한 역사.. 인접한 나라들이 서로 먹고 먹는 자기들만의 리그에 끼어 국토는 유린당하고, 침략자의 폭정과 억압에 시달리면서 매우 힘들고 곤란한 세월을 버텨 온 발트 3국. 동병상련의 정이 느껴졌다. 수 없는 외침과 근래 50년간 지속한 러시아화 가운데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이 언어와 문화였다는 사실은 우리의 문화, 우리말과 우리글이 어떻게 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 다시 생각하게 하였다. 조금은 슬픔이 배어나는 아련한 만남이었지만 지난했던 날들을 오히려 끈질긴 민족성으로 승화시키고 자극제가 되어 다시 일어서는 모습에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러시아에 대한 생각도 하늘과 땅을 넘나들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러시아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깨지기 시작했고,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를 돌면서 선진국의 모습을 제대로 봤다. 그런 나라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에스토니아에서 국경을 넘자마자 달리는 차를 잡아 놓고는 막무가내로 통행세를 강탈했다. 단지 국경 하나 넘었을 뿐인데.. 러시아 경찰들은 대담했다. 이 나라는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푸틴을 두목으로 두고 있는 강도집단이었다. 다시 크렘린과 붉은광장에 섰는데 생각이 끝과 끝을 오고 갔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것은 진리다. 지도자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라 안과 밖에서 실감한다. 세상은 넓고 살아가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개개인을 한 인격체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서로를 배려하는 사회는 행복한 사회이며, 국가의 청렴도가 높을수록 국가경쟁력도 높아진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본다고 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낀 뜻깊은 여정이었다.



러시아 민요 / 머나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