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2018. 10. 4. 22:02여행/여행기



모스크바,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





'백 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도 하고, 보는 것은 믿는 것'이라고도 한다.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은 여러 단계를 거치며 각색되거나 윤색된 정보의 왜곡도
줄이고, 현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여행에 제일 적합한 말이 아닌가 싶다.
국가 청렴도가 높고, 복지 수준이 높은 북유럽의 나라들이 늘 궁금했고,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제일 높다는 덴마크, 행복하게 산다는 그 나라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도 보고 싶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스위스, 쿠바, 동유럽
국가들도 늘 궁금했다. 그동안 배운 것들은 너무 편향적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상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중에 제일 궁금한 나라가 러시아였다.
러시아를 알기 위해서는 나라의 덩치만큼이나 다양한 지식이 필요하겠지만 알고 있는
미천한 지식마저 편향적이다. 이번에 러시아다. 이번 여행에서 첫발을 디딘 황제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다시 찾은
모스크바에서 러시아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라고 해소해 보고 싶다. 잠깐 스쳐 가는
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을까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의 오류를
범하지 않으며 실사구시의 자세로 있는 실상 그대로를 보고 싶다.
오직 과거에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국경에 줄지어 선 자동차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국경을 넘었지만 아직 갈 길이 먼데
러시아 국경 경찰 검문소에서 차가 잡혔다. 1시간 넘게 잡혀 있었다.
순순히 바치면 600유로, 이유를 물으면 1,000유로인 통행세(?) 때문이다.
우리 버스 기사는 이유를 물은 모양이다. 버티다 백기를 들었지만 가진 것이
600유로 밖에 없는지 가이드에게 400유로를 빌려서 1,000유로를 건네고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 버스 기사가 안쓰럽다.
강탈당한 돈을 버스 회사에서 보전해 줄까?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부정부패가 심각한 나라 중 하나다.
그만큼 부정부패는 러시아의 가장 큰 사회문제이자 치부로 꼽힌다.
국제투명성기구(Transparency International)가 발표하는 부패 인식 지수에서도
2017년 180개국 중 135위를 차지하면서 하위권을 기록했다. 우리나라도 낯 들고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러시아 공무원들은 뇌물을 요구하거나 받는 것은 약과고
공금을 빼돌리는 것도 예사. 고위층이 청렴한데 하위 공무원들만 부패했을까?
월급이 얼마 되지 않는 고위 공직자들이 고급 주택과 승용차,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고 한다.
푸틴 대통령은 2014년에 이어 2016년에도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러시아에 만연한 부패는 소련 이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고질적 문제이고,
고위 공직자의 부패는 손을 쓸 수도 없이 심각할 정도라고 한다.
근래 매스컴에서 세계 최고 부자가 제프 베조스나 빌게이츠가 아닌
러시아 현 대통령 푸틴이라는 기사를 보도하고 있듯이 최고 권력자
자신이 부패의 몸통이자 전형인데 아래 사람들이 본받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지. 자고이래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아진다 하지 않았는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가는 길의 풍경)





(톨게이트)





(러시아 연방은..)

동유럽에서 북아시아까지 걸쳐있는 유럽 국가이다.
수도는 모스크바(Moscow), 공용어는 러시아어. 국명의 유래는 러시아인의
근간인 동슬라브족, 혹은 그들이 사는 땅을 가리키는 중세 그리스어로 루스를
가리키는 명칭인 로시아(Ρωσσ?α)에서 유래했다. 러시아는 기본적으로는
슬라브 문화가 바탕이나, 그리스도교와 함께 들어온 동로마 문화와 몽골
지배로 유입된 몽골 문화는 러시아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동로마 문화는 러시아인의 종교관에 큰 영향을 끼쳐, 황제=하느님의
대리인이라는 관념이 뿌리 깊게 차용되었다. 종교는 정교가 분리되었다고는
하나 정교회가 러시아 제1의 종교이자 국교의 역할을 하고 있다.

국토 면적 17,125,407km²(인구 세계 9위). 면적은 유럽, 오세아니아,
남극 대륙 전체보다 넓은 나라. 나라가 넓은 만큼 열네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최서단 칼리닌그라드에서부터 최동단 추코트카까지 11개의 시간대를 사용하며,
국토가 넓은 데다 도로기반시설이 열악하여 도로 수송보다 항공, 철도에 의존한다.
국토가 비옥하고, 천연자원이 풍부하여 세계 최대 천연가스 매장국, 석유 매장량
8위, 석탄 매장량 2위 등 경제의 많은 부분을 천연자원 수출이 기여하고 있다.
소련 시절에는 세계적인 과학 강국이었으나 현재는 인재유출이 심각한 상태.
미국, 중국, 유럽과 함께 선진적인 우주기술을 보유한 국가이다.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는 공산주의를 폐기하고 1993년에 제정된
러시아 연방 헌법에 의한 민주주의를 표방, 이원집정부제, 연방제 국가이나
오늘날 러시아에서 실질적으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1945년 UN 창설 원년 회원국이며,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을 승계하여
현재 UN 상임이사국이며. G20의 참가국. G8의 마지막 멤버. 또한 중국,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함께 상하이 협력기구의 회원국이며
독립국가연합의 창설국이다. 2012년 1월 유라시아 연합 창설.
브릭스 (BRICS)에서 R이 러시아다.





(러시아의 간략한 역사 연표)

약 200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러시아인이 인구의
81%인 1억 1,500만 명, 550만 명의 타타르인, 2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부터
98명인 콜라 노르웨이인까지 다양하다. 고려인도 50만 명, 아프리카인도 5만 명이
살고 있으며, 평균 수명은 71세(여성 77.1세, 남성 65.3세). 저출산과 고령화,
남녀 성비 86 : 100인 심각한 여자 초과 국가. 공용어이자 모국어는 국내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러시아어로 인구의 약 92%인 1억 3천만 명이 사용한다.

근대문학에서는 푸시킨을 비롯하여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로
러시아에는 유명한 작가들이 많다. 러시아가 문학사에 남긴 발자취는 크다.
클래식 음악도 미하일 글린카, 차이콥스키, 러시아 5인조,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라흐마니노프 등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작곡가들. 클래식과 함께 발레도 발전했고, 러시아 민요도 유명하다.

공무원을 비롯하여 나라 전체에 부패가 심하고, 치안이 불안하다.
러시아 레드 마피아의 세력이 강하며, 인종차별주의자 스킨헤드의 테러도
자주 발생한다. 차를 즐겨 마시며, 음주를 많이 하는 보드카의 나라이다.
2015년 국가대표팀 도핑 스캔들 파문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전통공예로는 나무 인형 마트료시카가 유명하고, 테트리스가 바로
러시아 게임이다. 코마네치, 테니스의 샤라포바, 레슬러 알렉산더
카렐린, 체스 선수 가리 카스파로프가 유명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바강 언저리의 건물들)





(소련 시절의 아파트)

소비에트 시대의 건축물은
시대를 상징하는 기념비일 뿐 아니라 과거 크렘린을 지배한
소련 최고 지도자들이 생각하던 사회적 이상을 바로 보여주는 결과물.
'스탈린카', '흐루쇼프카', '브레즈네프카' 처럼 최고 지도자들의 이름을 딴
건축양식이 존재하는 것도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건물의 벽에는 소련의
공동아파트 '코무날카'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역사가 배어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모습)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 교통도 모스크바 못지않게
만성적인 정체가 있다지만, 정체 시간을 피해서인지 크게
막힘이 없다. 도로에는 일반 버스와 같이 타이어로 구동되지만
전선에서 전원을 공급받아 가는 트롤리버스가 가끔 지나가고.
현대차와 기아차도 심심찮게 보인다.







(호텔, 호텔에서 나오는 군인들)





(새벽,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으로..)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날, 새벽부터 바쁘다.
어제 밤늦게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3시에 일어나
호텔 출발, 풀코보 공항에서 6시발 모스크바행 항공기를 타야 한다.
비도 부슬부슬 내리는데 새벽부터 긴장되는 마지막 일정이다.
공항 카운터도 몇 군데만 열려있고 처음 출발하는 항공기를 타려는
사람들만 부산 떠는 한적한 공항에서 빵으로 아침을 때웠다.





(풀코보 공항의 피터 대제 조각상)

러시아 조각가 미하일 드로노브(Mikhail Dronov)가
풀코보 공항(Pulkovo Airport)에 맞춰 제작했다는 피터 대제
조각상. 2015년 5월 14일 이곳에 설치된 조각상 높이는 받침대 포함
2.2m로 현대적으로 표현된 그는 전통적인 의류와 검은색 3각형
모자를 쓰고, 현대 여행자의 특징인 편안한 소형 가방과
스마트 폰을 손에 들고 있다.

풀코보 공항은 시내와 가까워 접근성은 좋은 편.
지하철은 연결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공항으로 불리다가
1973년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시설이 낙후되어 1980년대와
1996년, 두 차례에 걸쳐 보강 공사를 하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비슷한 규모의 다른 도시 공항에 비하면 아직도 시설이나
규모가 협소하고 열악한 편이다.





(모스크바 브누코보 국제공항(Vnukovo International Airport))

새벽 첫 비행기로 도착한 모스크바 브누코보 국제공항.
대통령의 해외 방문 및 해외 국빈들의 러시아 방문길에 자주 이용하는
비행장으로 유사시 대체 공항으로 운용되며, 국제공항으로 러시아에서
네 번째로 분주한 공항. 모스크바에는 국제공항이 3개가 있다. 
풀코보 공항에서 짐을 부치고 인천공항에서 찾으면 되는 줄 알고
캐리어를 모두 패킹하여 부쳤는데.. 국내선과 국제선이 연결되지 않아
다시 짐을 찾느라 이른 아침부터 우왕좌왕.





(모스크바(MOSCOW)는..)

러시아의 수도. 인구는 약 1,240만 명으로 유럽 최대 도시다.
인구순 세계 5위, 면적은 2,500㎢, 러시아 전 GDP의 25%를 담당한다.
모스크바는 역사적으로 1147년 유리 돌고루키 대공이 만든 도시로
몽골 제국이 동유럽을 침략할 때 러시아 남부가 전멸하자 노브고로드와 함께
루시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킵차크 한국에게 다른 루시 공국들의
세금을 모아서 바치는 역할을 담당하며 이때 세금을 떼어먹으면서 국력을 키웠다.
동로마 제국 멸망 후 후계를 자처하며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로 호칭하게 된다.
이반 3세가 몽골로부터의 독립하면서 러시아의 최고 중심 도시가 되었다.
1571년 크림 한국, 1610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침략을 받았다.
1712년 표트르 1세가 러시아 제국으로 전환할 때 수도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갔다.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 9.12~10.19일까지 한 달간 점령당하면서 청야전술로
인해 도시 70%가 불탔지만, 여전히 러시아의 중심지로, 수도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긴 이후에도 역대 러시아 황제들은 모스크바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볼셰비키 정부가
1918년 모스크바로 다시 수도를 옮겼다.
1922년 소련이 건국하며 공식적으로 소련의 수도가 되었다.
1941년 모스크바 공방전 당시 영웅적 전투로 영웅 도시의 칭호를 받으며
1947년 소련에서는 모스크바 800주년 기념 메달을 제정했다.
1991년 12. 26일 소련 붕괴 직후 모스크바 시내 식료품점에는
농산물밖에 없었고 시내 중심가 간이 판매소에는 콜라가
한 병씩만 비치되어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교통으로는, 모스크바에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
도모데도보 국제공항, 브누코보 국제공항 등 3개의 국제공항이 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비롯해 러시아 철도의 수많은 노선이 모이는 중심지.
특히, 모스크바 지하철은 소련 시대에 만들어진 화려한 장식들과 미국과 핵 전쟁 시
방공호로 사용될 수도 있는 엄청난 깊이, 일본 도쿄 지하철에 이은 세계 2위의
이용객 수 등 여러모로 유명하다. 시내에는 버스와 트램도 운행된다.
모스크바는 옛 러시아 제국 및 구소련 시절의 건축물(7자매 건물 등)과
현대의 건축물이 모두 모여있는 도시인데 이 건축물들은 조화를 이룬다.
외곽 지역에는 아파트가 정말 많다. 시내 면적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단지이다.
2010년대부터 건설된 모스크바-시티 등은 유럽의 두바이로 불린다.
2012년 도시를 확장하면서 면적이 2배 이상 늘어났다. 구시가지를 외에
혁신도시, 연방도시, 물류도시, 과학도시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다.

러시아 국내 총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집중된 경제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주요 공기업들과 기관들을 지방인 시베리아
등지로의 이전을 추진 중이며, 천도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전 후보지로 우랄산맥 동쪽 지역(시베리아)이 언급되고 있다.
모스크바는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의 결과로 굉장히
조밀하고 전술적으로 짜인 대공망이 유명하다.









(차창 밖으로..)

고급 아파트,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동방정교회 등
특색있는 모스크바의 건축물들이 스쳐 지나간다.







(아르바트 거리 쉑쉑(SHAKE SHACK) 버거)

아르바트 거리는 '구 아르바트'와 '신 아르바트'로
나뉘는데 신 아르바트 거리는 전형적인 유럽식 번화가라서
인기가 적다. 아르바트 거리의 명소는 보통 구 아르바트 거리를
말하는데 최근 들어서는 모스크바의 유명 관광지가 되면서
과거의 낭만적인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다. 이른 시간이어서
그런지 거리가 한산하다.





(푸시킨 박물관 건너편에 있는 푸시킨 부부의 동상)

푸시킨은 1837년 2월 8일 죽음으로 내몬 프랑스 귀족의 젊은 장교
조르주 단테스와 비운의 결투를 벌이다 1837년 2월 8일 오후 4시 30분경
복부에 치명상을 입고 이틀 후인 2월 10일 37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총상을 입은 대문호의 안위를 걱정하는 인파가 집 앞에 모여드는 바람에,
주콥스키는 시시각각 푸시킨의 상태를 적어 문밖에 고시해야 했다. 그의
서재에는 총 3,560여 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그 책들에 눈길을
멈추었던 시인의 마지막 한마디는 “안녕, 친구들!”이었다.
두 사람의 결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에 파다하게 퍼진 ‘단테스가
푸시킨의 부인 나탈리야 곤차로바(Наталья Гончарова)를 연모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푸시킨은 1831년 미모로 소문난 13년 연하의
나탈리야 곤차로바에게 격렬하게 구애를 한 끝에 결혼하였다.
그녀는 얼마나 미인이었을까?





(아나톨리 리바코프(Anatoly Rybakov, 1911. 1.14~1998.12.23))

이 집에서 '아르바트의 아이들'을 쓴 소설가
아나톨리 리바코프가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살았다.

구소련시대 마지막 낭만적 혁명가’로 불리는 리바코프는
1911년 우크라이나 체르니고프에서 태어나 볼셰비키 혁명이 러시아를 휩쓸던
시기에 부모를 따라 모스크바로 이주했으나 1934년에 NKVD(내무부 인민위원회)에
체포되어 3년간 시베리아로 유배되었고, 유배가 끝난 후 운송 노동자로 일했다.
2차대전 때는 탱크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1948년 Dirk, 1950년에는 Drivers를 출간했고,
1979년에는 나치 점령하에 유대인 가족의 운명에 관한 소설 Heavy Sand를 출간했다.
가장 인기 있는 소설인 <아르바트의 아이들>은 1960년대에 저작되었지만 20년 이상
억압을 받으며 출판을 못 하다가 고르바쵸프의 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발표되자
1987년 아르바트의 어린이들인 디티 아르바타(Deti Arbata)를 출간했다.
이후 1974년에는 Fear, 1994년에는 Dust & Ashes를 출간했다.
소련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상과 1948, 1951년에 스탈린 상을 받았다.
텔 아비브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거의 책은 모두 영화로
제작되었고, 52개국에서 출간되었으며, 2천만 권이 판매되었다.
1998.12.23 뉴욕 맨해튼에서 작고했다.

아르바트 거리에 서 있는 동상은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동상이 아니라
불라트 오쿠자바의 동상이다.





(러시아의 음유시인 불라트 오쿠자바(Bulat Okudzhava, 1924~1997) 동상)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스탈린까지 비판하는
통렬한 풍자와 연민, 동정, 슬픔을 응집된 노래 시를 기타를
치면서 낭송했던 대중 시인. 특히 남달리 모스크바를 사랑하였으며
아르바트를 찬미하는 시도 여럿 남겼다. 그가 어릴 적 그루지아인
아버지가 소련 공산당에 처형당했고, 아르메니아인 어머니도 18년이나
옥살이를 해 일찍부터 독재에 저항하는 의식을 키웠다. 그의 시는
출판이 금지됐지만 사람들의 입과 녹음테이프를 통해 소련 안팎에서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 들어 해금되면서 시를 출판하였다.
2002년 5월 2일 생일에 세운 동상으로 어릴 적 그의 집 마당에
서 있던 아치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건물을 보수하는 노동자)







(아르바트 거리 풍경)

세계의 어느 젊은이나 스마트 폰에 빠져 있지만
러시아의 독서 열을 말해주듯 책을 지니고 다닌다.







(푸시킨 박물관)

1831년 갓 결혼한 푸시킨 부부가 석 달 가량
세 들어 살던 이층집을 작은 박물관으로 꾸몄다.
알렉산드르 푸시킨(Aleksandr Pushkin, 1799~1837.1.29)은
모스크바 출생, 러시아 근대문학의 창시자로서 문학의 온갖 장르에
걸쳐 그 재능을 발휘했다. 과거 100년간 러시아 시 분야에서 그의 간결하고
평이 명료한 시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지 않은 시인은 없다고 할 정도며,
산문에서도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의 기초는 그에 의해 구축되었다
푸시킨은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 '위대한 국민 시인' 등으로 불린다.
막심 고리키의 말대로 '시작의 시작'이라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많은 비평가 역시 푸시킨의 작품을 심도 있게 연구하면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보편성’(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강조했다. 그의 문학작품은
모든 예술사조(ism)를 수용하면서 새로운 예술사조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는 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의 모든 요소를 받아들이는 동시에
모든 것을 부정하는 아이러니한 대화를 하고 있다.

근대 문학을 논함에 있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러시아.
알렉산드르 푸시킨, 니콜라이 고골, 미하일 레르몬토프, 이반 투르게네프,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안톤 체호프, 막심 고리키, 이반 부닌,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미하일 불가코프,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미하일 숄로호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등은 러시아가 세계에 자랑하는 작가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소설가거나 시인 겸 소설가인데 사실 러시아 시도 상당히 유명하다.
알렉산드르 블로크, 오십 만델슈탐, 빅토르 흘레브니코프,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조지프 브로드스키 등 현대 문학사에 발자취를 남긴 시인들을 많이 배출해냈다.
미래주의 문학이 러시아에서 출발한 건 덤. 이처럼 러시아가
세계 문학사에서 남긴 자취는 정말 크다.









(이른 아침인데도 노상 중고 서점이 열렸다)

학력, 직업을 불문하고 누구나 "문학"을 아는 곳이
러시아라는 말이 있다. 푸시킨,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솔제니친, 파스테르나크 등 수많은 세계적 문호를 배출한 러시아의 강한
자부심이 배어있는 표현이다. 러시아의 독서율이 세계 3위라는 조사결과가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러시아 사람들은 책을 많이 읽는다.

또한, 러시아의 인문학 수준을 나타내는 말로,
영국에서 어제 한 축구 얘기를 하다 주먹 싸움이 벌어진다면,
러시아에선 식료품점에서 칸트 사상 논쟁을 하다가 총을 쏜다.
실제로 러시안 사람들은 철학 토론을 매우 빈번하게 하는 편.







(아르바트 거리의 '빅토르 초이' 추모 벽 / 빌려 온 사진)

내용을 정리하다 알게 된 사실. 아르바트 한 쪽에 있는
러시아 록&롤 '최후의 영웅' 빅토르 초이를 추모하는 팬들의 낙서로
도배된 '초이 벽'을 보지 못했다. 그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다. 아쉽다.
1962년생인 빅토르 초이는 그룹 '키노'를 이끌며 러시아 록을 이끈 록의
선구자로 구소련 국민들의 정신을 각성시키고 자유를 위해 투쟁한 한국계
러시아인 가수로 러시아 대중음악계에서는 전설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이다.
1990년 라트비아에서 휴가 중 KGB가 관여했다는 의혹이 있는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임을 당하자 이날 아르바트 거리의 벽에
'오늘 초이가 죽었다(Сегодня погиб Виктор Цой)'라는 문구가
검은색으로 쓰였으며, 이 아래 '초이는 살아있다(Цой жив!)'라는
말이 덧붙여지며 일명 '초이 벽'이 만들어졌다. 현재 이곳은
키노 팬들의 성지와 더불어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이곳을
방문할 때는 아래에 위치한 재떨이에 부러뜨린
  불붙인 담배를 두고 가는 것이 전통이라고..







(러시아 외무성 건물, 기아차 광고판)

소련 건축가 겔프레이흐와 민쿠스가 지은 27층.
높이는 172m며 1948년에 공사를 시작해 1951년에
완성되었다. 저쪽 거리에는 'KIA MOTORS' 광고판도 보인다.
현대기아차의 러시아 시장 점유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러시아 자동차 시장은 저유가와 루블화 가치하락에 따른
경기침체를 겪다가 최근 경기가 개선되는 모습을 보인다.
2015년만 해도 GM과 폭스바겐, 푸조, 미쓰비시, 르노-닛산 등이
러시아에서 철수하거나 사업을 축소했지만 현대기아차는
러시아 내 사업을 유지하면서 시장지배력을 높여왔다.
한데.. 이전엔 한국의 기업 광고를 만나면 좀 뿌듯한 감정도
느꼈는데 근래는.. 국내에서 돈 벌어 외국에 투자하는 형태가
그렇게 좋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이윤을 좇아가는 것이
기업의 생리라 하더라도 말이다.





(도로 차단용 시멘트 블록)





(고행자 시몬의 교회)

다른 교회의 돔은 황금색인 데 반해 유독 파란 돔이
특징인 이 건물은 1676~1679년에 건축된 정교회
건물로 1966년 건물이 무너져 1966~68년 복원을 했다.
러시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러시아 국방부와 M. V. 프런제 기념비)

Russian Ministry of Defense(러시아 국방부)의
무장한 군인들.. 그 아래는 M. V. 프런제 기념비. 찾아보니
Mikhail Vasilyevich Frunze (1885. 2. 2 - 1925. 10. 31)는
1917년 혁명 이전의 볼셰비키 지도자로, 러시아 남북 전쟁 중
크림에서 적군 사령관 남작 우란을 격파한 것으로 유명하다네요.
기념비 뒤 건물은 모스크바 특별 음악 학교(?)







(크렘린 궁이 담장 너머로 목을 내민다)

십자가를 잡고 서 있는 블라디미르. 키예프
공국의 대공으로 그리스도교를 러시아의 국교로 제정했다.
그 뒤로 비밀의 대명사가 되었던 크렘린 궁전이 보인다.
청색 돔에 금장되어 있는 건물이 대통령 궁전







(??)





(쿠타피아 망루 앞에 줄 선 사람들..)

크렘린 궁전으로 들어가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복잡하다. 사람이 많이 붐비는 곳에서는 첫째도 둘째도 가방 조심.
크렘린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검색대를 거쳐야 한다.

모스크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붉은 광장',
'크렘린 궁전' 아닐까? 크렘린은 특이하게도 목요일은
개장하지 않는다. 요일을 알아보고 가야 할 듯..







(쿠타피아 망루를 통해 크렘린으로 입장)

이 요새 형 탑문을 통과하여 예전에 해자였던 다리를 지나
트로이츠카야 망루 문을 통하여 크렘린궁에 들어갈 수 있다.
쿠타피아 망루는 1516년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리오시오 카르카노라가 지은 건축물이다.

모스크바의 심장부 크렘린 궁전이다.
러시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곳. 요새라는 의미가 있는
이곳의 면적은 약 26헥타르(25,000 제곱미터) 정도 되며, 붉은 성벽에
둘러싸인 건물 안에는 시대별로 크고 작은 아홉 개의 궁전과 성당,
탑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700개 이상의 방을 갖추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군주제가 폐지되고,
1922년 소련 탄생 이후에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의회가
설치되면서 소련 공산당의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오늘날에도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 관저와 정부 기관이 이곳에 있다.









(크렘린궁, 삼위일체 트로이츠카야 탑)

삼위일체 트로이츠카야 탑은,
1495~1499년 사이 만들어진 탑문으로 높이가 79m나 되어
사원 성벽의 탑 중에서 제일 높다. 이 문은 나폴레옹과 러시아군이
싸울 때 패전한 나폴레옹이 나간 문이기도 하다. 16-17세기에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500kg의 금도금으로 만들어진
별은 지름 3.75m나 된다. 이 탑문을 통과하면 크렘린이다.

크렘린(Kremiin)은 원래 러시아어로 성채 또는 성벽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나 대문자로 시작하면 모스크바의 크렘린 궁전을 의미한다.
오랫동안 러시아 황제의 거처이자 러시아 정교회의 중심지였던 크렘린은
모스크바의 창건자 유리 돌고루키공이 1156년 무렵 작은 언덕 위에 숲과
목책으로 요새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1382년 타타르족의 침입으로 전소했다.
15세기에 이반 3세가 이탈리아의 건축가들을 불러 러시아 전국을 둘러보고
러시아의 건축 양식으로 짓게 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크렘린이라고 한다.
성곽과 내부 주요 건물들은 백여 년에 걸쳐 복원되었으며, 19개의 크고 작은
고딕 양식 탑과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을 대표하는 네 개의 대성당과 대통령 궁,
무기고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성벽에 둘러싸여 있다.
소련 시절부터 백악관의 정 반대편에 있는 또 하나의 권력의 축이자
공산주의의 상징물로 여겨져 왔다. 대통령의 집무실이 크렘린 성벽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속을 알 수 없거나 비밀이 많은 사람을 크렘린 같다는
말이 생겼듯이 요새와도 같은 비밀의 궁전이다.

전면에 보이는 건물이 크렘린 대회 궁전이다.







(크렘린 대회 궁전(국가 크렘린궁))

크렘린 입구 매표소를 통과 후 트로이츠카야 망루를 통과하면
바로 오른쪽에 나타나는 크렘린의 다른 건물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 현대식 건물은, 구소련시절 공산당 회의를 위해 1959년에 건축을 시작해
1961년 10월 17일 소련 공산당 제22차 회의와 함께 개장하여 정치적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는 제2의 볼쇼이 극장으로 불리며 콘서트나 발레 등
공연을 하는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의 가수 머라이어 캐리,
티나 터너도 공연을 했고, 몇 해전 우리나라 '열린음악회'도 열렸다.
1962년 이 건물을 건축한 미하일 포스힌(Mikhail Posokhin)이
레닌 상을 받았다.







(궁전 병기고)

18세기 초에 지어진 2층 건물 병기고는
1736년에 건설되어 1737년 모스크바 화재 당시 소실된 것을
1796년 복원,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후퇴하던 군대가 폭파했으나
1828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이 건물은 크렘린의 다른 정부 건물과
마찬가지로 노란색이며 일반인에게는 공개되지 않는다.
현재 러시아 대통령을 위한 주요 보안업무를 담당하며 크렘린
연대의 본거지이다. 건물 앞에서 전쟁 당시 노획한
대포들을 볼 수 있다.





(뒤 돌아본 트로이츠카야 탑)





(열두 사도의 교회)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것은 총대주교 궁전과
십이사도 교회. 크렘린의 다른 사원들과는 달리 열두 사도 교회는
은색의 돔을 가지고 있다. 사진 아래 아치로 된 통로로
들어가면 사원 광장이 나온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성모승천 대성당))

크렘린 궁전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우스펜스키 대성당(Cathedral of Dormition Assumption,
성모승천 대성당). 옛날 러시아 제국의 국교 대성당이었던 곳으로,
이탈리아 볼로냐의 명장 아리스토텔리 피오라반디가 설계하고 건축했다.
당시 모스크바의 라이벌이던 고도 블라디미르의 대성당을 모방했다고 한다.
1479년에 완성되었으며 그의 이름은 이 성당을 건설함으로써 영원히 남게
되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은 옛 러시아 제국의 국교 대성당이라 불렸는데
이곳에서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들이 선출되었으며, 황제의 대관식이
거행되고, 모스크바 총주교의 장례식을 치렀다. 또 많은 전쟁에
나갈 때 이곳에 들러 승리를 기원하는 기도를 가졌다고 한다.

대성당의 벽과 처마 밑의 이콘은 프레스코화로 꾸며졌는데
이곳에 성화를 그린 화가의 수가 무려 1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12세기의 성 게오르기 상과 13-14세기의 삼위일체상이 유명하다.
서쪽을 둘러싸고 있는 벽 주위에는 부주교와 총주교의 영묘가 있다.
이 밖에 나폴레옹 군대가 퇴각할 때 훔친 300kg의 금과 5ton의
은을 되찾아 만들었다는 은 샹들리에와 검은색 락카를 칠한
동판 위에 성서의 20장면을 금으로 그린 그림도 있다.









(우스펜스키 대성당 내부 모습)









(아르항겔리스키 성당(미카엘 대천사 성당))

아르항겔리스키 성당(Archangel's Cathedral)은
러시아 정교회 대천사 미하일(미카엘)을 기리는 성당으로
이탈리아 건축가 Aloisio the New의 감독하에 1503~1508년에
완성되었다. 전통적인 러시아 양식의 건축물로 하나의 황금색 지붕과
4개의 회색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외벽은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양식이 가미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러시아군의 승전식과
황제의 대관식, 장례식 등이 거행되었던 곳이며 내부에는 황실의
묘지라 불릴만큼 많은 차르와 그의 가족묘가 있다.
대성당의 내부는 주로 러시아 교회의 전형적인 방식으로
지어졌다. 높이가 13m인 대천사 대성당의 내부에서 가장
오래된 성화인 페오판 그레크 작인 Archangel Michael
(대천사 미하일)이 유명하다. 원래 군대의 수호성인인
미하일 아르항겔을 모시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위키피디아 참조)









(블라고베시첸스키 성당(주님 탄생 예고 성당))

황금으로 도금된 아홉 개의 지붕과 성당 내부의
15~16세기 대가들의 상상화로 유명한 블라고베시첸스키 성당
(Annunciation Cathedral, 성모 수태 고지 성당)은 1484~1489년,
모스크바와 프스코프의 명장들이 건축하였다. 16세기 중엽 화재로
손상되었으나 이반 대제에 의해 복원된 교회. 이때 확장된 부분이
원래 교회를 에워싸고 있는 포치로 이반 대제의 포치라고 불린다.
크렘린의 다른 교회에 비해 러시아풍 색조가 강하다. 프레스코화도
유명하며, 1508년에 페드오시가 그린 작품은 몇 번이나 덧칠해졌으나
1947년에 복원되었다. 제단의 이코노스타스(聖障)에는 페오판 그레크,
안드레이 루블료프, 프로할 가로데츠가 만든 성화가 걸려 있다.
이 이코노스타스는 15-16세기 무렵에 만든 것이다.
프레스코화는 요한 묵시록을 토대로 한 것이 많다.









(이반 대제의 종루(The Ivan the Great Bell Tower complex))

사원 내에서 제일 높은 건물로
이반 대제(이반 4세) 때 이탈리아의 건축가 프리아친(Fryazin)이
1505~1508년에 걸쳐 본체를 세우고, 페트로프 마리가 1532-1543년에
걸쳐 팔면체의 종루를 덧붙여 완성했다. 1600년 보리스 고두노프 황제 때
현재의 높이인 81m로 증축되었다. 나무가 아닌 돌로 모스크바에서 건설된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이다. 1883 년에 구세주 그리스도의 성당이 건축될 때까지,
모스크바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이 종탑보다 더 높은 어떤 건물도
모스크바에 세우는 것이 금지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300개가 넘는 좁고
긴 나선형 계단을 통해 가장 높은 전망대까지 올라갈 수 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퇴각할 때 종루를 폭파할 것을 명했으나
논란 끝에 살아남았다. 옛날, 모스크바를 둘러싼 수도원의 감시탑에서
적의 습격을 알리는 신호가 오면 34개의 종이 일제히 울렸다고 한다.
소형 종은 종탑과 종탑 중간에 매달려 있다. 제일 큰 종은
Upsensku Bell로 불리며 무게는 65.5 톤.
(위키피디아 참조)






(아항겔리스 성당 문 앞에서..)

오래된 건물 곳곳을 보수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문 장식을 보수하는 모양이다. 낡고 훼손되면
보수하고 복원하기도 해야겠지만, 복구하는 모습을 가림막도 없이
그대로 펼쳐 보이는 것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방식으로 복원을
하다니.. 신비감이 저 회칠 속에 묻히는 것 같다. 소시지와 정치는
그 만드는 과정을 보면 안 된다는 것과 같이 고건축물
복원과정도 그 못지않은 것 같다.









(아항겔리스 성당과 이반대제의 종루)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는 '황제의 대포'와 '황제의 종')

제정 러시아 시절 차르의 권력을 상징하는 유물들..
1586년에 제작된 구경 890mm, 길이 5.94m, 무게 40ton에 육박하는
러시아 포병의 기념비적인 유물이자, 러시아 무기 제작 능력을 자랑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 일명 '황제의 대포(Tsar Cannon)'.

2년에 걸쳐 제작된 무게 약 202ton, 지름 6.6m, 높이 6.14m인
세계 최대의 종. 주조가 완성될 시점인 1737년 모스크바 크렘린에
화재가 번지자 이 종을 관리하던 경비원이 종에 찬물을 붓는 바람에

균열이 생기면서 11ton이나 되는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크렘린에 전시되어 황제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지만
한 번도 발사한 적이 없는 대포, 한 번도 타종한 적이 없는 종
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Grand Kremlin Palace(크렘린 궁전))

1837년에 시작하여 1849년에 건설된 크렘린 궁전은
궁전은 길이 125m, 높이 47m이고 총면적이 약 25,000㎡로
궁전 건물은 내부 안뜰이 있는 사각형이며 외관은 3층으로 보이나
실제는 2층 건물이다. 이 궁전은 이전에 차르의 모스크바 거주지였다.
현재는 러시아 연방 대통령의 공식 거주지로 현 푸틴 대통령이
사용하고 있으며 대통령 궁전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이 크렘린 궁전이라니 격세지감이다.
지금도 저 건물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공산당 시절 당 간부들이 모여서 회의를 주로 하던 장소로 어디서
회의를 하는지 어떤 내용의 회의를 하는지 항상 비밀이었고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크렘린이라고 하니..





(크렘린 안내도)

크렘린 궁전 안에는
그라노비타야 궁전, 테렘노이 궁전, 크렘린 대궁전,
국립 크렘린 궁전, 러시아 대통령 관저, 무기궁(공예 박물관),
등의 많은 궁전과 열두 사도 성당, 우스펜스키 대성당,
아르항겔리스키 대성당, 블라고베셴스키 대성당,
이반 대제의 종탑 등 성당도 여럿 있다.


Cranes / Dmitri Hvorostov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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