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샤울라이 십자가 언덕

2018. 9. 12. 23:36여행/여행기




리투아니아, 샤울라이 십자가 언덕
(종교적 가치와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상징이 공존하는..)






"여행자는 그가 보는 것을 보지만,
관광객은 오직 보러 간 것만 본다."
- Gilbert K. Chesterton -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었던 영국 작가 중의 한 사람인
G. K 체스터턴이 한 말로, 여행자와 관광객을 이렇게 
간결하게 구분지어 정의 내릴 수 있을까.
감탄하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다.
인생은 일생의 여행, 오늘 이 작은 여행도, 일생의 여행도 
관광객이 아닌 진정한 자유 여행자가 되고 싶다.





(리투아니아로)

국경 같지 않은 국경을 넘는다.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국경에는 EU를 표시하는
12개의 노란 별 원 안에 Lietuvos Respublika(리투아니아 공화국)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우리가 가려는 곳 십자가 언덕이 있는
Siauliai(샤울라이)를 가르키고 있다.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약 1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리투아니아의 벌판)







(리투아니아는..)

북유럽에 있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와 함께
발트 3국 중의 한 나라. 공식 명칭은 리투아니아 공화국이며
수도는 빌리우스(Vilnius, 과거에는 카우나스). 동쪽과 남쪽은 벨라루스,
서쪽은 발트해, 남서쪽은 러시아(월경지 칼리닌그라드주)와 폴란드,
북쪽은 라트비아에 닿아 있다. 발트 3국 중에서 영토가 가장 많고 넓고,
인구도 인천광역시와 비슷한 288만으로 가장 많다. (에스토니아 : 130만,
라트비아 : 193만 명). 발트 3국 중에 이쪽은 고대부터 국가가 있었다.
주위에 폴란드, 독일, 스웨덴이 있지만, 이들에게 치여 사는 약소국은
아니었고 한때는 내로라하는 강국으로 존재했다.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제국에 합병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제국에서 독립했으나,
1940년 소련에 강제 병합(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41년부터는 다시 독일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다시 소련군에 점령되면서 소비에트 공화국의 일원이 되었다.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 실패 후 독립을 선언, 9월 독립을 인정받았으나,
독립국가연합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민족 구성은 리투아니아인이 83%이다.
현재는 리투아니아 국민의 90% 이상이 가톨릭 신자이지만, 유럽 기독교
국가 중에서 마지막으로 기독교화된 국가, 리투아니아는 유럽 내에서
가톨릭 전통을 가장 잘 이어가고 있는 나라 중 하나로 발트 3국 중
종교적 신앙심은 매우 특별하다. 로마 가톨릭 문화권에서는
리투아니아가 제일 북쪽에 위치한다.

구소련 붕괴 후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게 되었다.
1994년 IMF 지원을 받은 이후 경제는 안정적으로 성장하여,
2003년 이후 평균 7~10% 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다.
전체 산업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식품 및 담배가 29.6%,
기계 장비 18.3%, 섬유 의복·가죽 제품 17%, 레이저 산업 강국.
교육은 6세부터 11년간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1990년
종교교육을 도입하는 등 교육개혁을 단행했다.
현재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 유럽 연합(EU),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 가입국이다.









(시아울리아이(Siauliai, 샤울라이))


1236년부터 이름이 언급되는 역사가 깊은 도시.
오랜 역사만큼이나 전쟁과 재앙으로 여러 번 황폐해졌었으나,
르네상스 양식으로 유일하게 보존된 고건축물 성 피터 폴 대성당이
있다. 18세기 후반, 고전주의 건축으로 도시가 재정비 되었다고 한다.
리투아니아 북부에 있는 샤울랴이 주의 주도로 인구는 14만 7000명.
리투아니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 십자가 언덕으로
유명해진 곳으로 도심에는 독특한 조각품으로 장식된 보행자
대로가 있으며, 예술가와 음악가, 연극극장 및
다양한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점심은 샤울라이의 분위기 있는 식당에서..)









(지하 식당 옆 편에는)

무슨 박물관에 왔나 싶을 정도로.. 꾸며 놓은 모습.











(특이한 조각과 간판들..)

도심에 많은 조각과 간판들이 있다는데..
세번째 사진은 Siauliai 호텔 앞의 잔디밭에 있는 조각품
"Three Birds"(세 마리 새)로 조각작품을 보면서 걸으면 새들의
날개 선이 움직이면서 마치 날개를 펼치는 것 같이 보인다고 한다.
이 이외에도 Sculpture "Pelicans"(펠리컨), "Motherhood"(모성),
"Three Trolls"(세 난쟁이, Troll - 심술쟁이 거인도 있고 장난꾸러기에
친절한 난쟁이도 있다), "Dawn"(새벽), "A reading man"(책을 읽는 남자) 등
많은 조각작품도 있다는데. 시간이 없다.







(십자가의 언덕 입구, 기념품 숍)







(리투아니아 아가씨들..)

십자가 언덕 입구를 들어서자
잔디밭에는 리투아니아 대학생들이 빙 둘러 앉아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 카메라를 갖다 댔더니 반가워하며
같이 놀자고 한다.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니 좋아하길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아느냐고 하니 안다고 한다. 조금 더 가니
다소곳한 모습으로 아가씨가 기타 지터(? Guitar Zither)를
연주하고 있길래 사진 한 장 찍고 1유로 동전 한 닢을
모자에 넣어 주었다.





(십자가 언덕 입구에 있는 대형 십자가)

이 십자가는
1993년 9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십자가라고 한다. 교황은 리투아니아 국민들의 뜨거운 신앙심의
현장을 목격하고, 리투아니아 국민들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교황의 인사말을 받침돌에 영어로 새겨 놓았다.
"Thank you, Lithuanians,
For this Hill of Crosses
which testifies to the nations
of Europe and to the whole world
the faith of the people of this land."
7. 9. 1993. Pope John Paul II

리투아니아 독립 직후인 1993년, 로마 교황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소련 시절 독립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십자가 언덕은 종교적 힘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압제의 권력과
투쟁한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지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곳은 단순히 종교적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평화의 상징이 함께 한다.









(십자가 순례 언덕(Hill of Crosses))

십자가 언덕은 리투아니아 북부 샤울랴이에서 북쪽으로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지이다.
수 세기에 걸친 리투아니아의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대표하는
성지가 되었다. 십자가 외에 예수의 수난상, 리투아니아의 영웅 조각,
성모 마리아 조각상과 초상화, 묵주 등을 가톨릭교회 방문자들이
놓고 갔다. 십자가의 정확한 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략 5만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십자가 언덕 입구에서)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을 계기로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831년에 일어난 11월 봉기,
1863년에 일어난 1월 봉기는 모두 폴란드인들과 리투아니아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으킨 봉기였지만 실패했다.
이 봉기가 십자가 언덕의 시작과 관련이 있다.

1918년 리투아니아가 독립한 이후에는 평화와 리투아니아
독립 전쟁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위한 기도 장소로 여겨졌다.
소련의 지배를 받고 있던 1944년부터 1990년까지 리투아니아인들은
이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면서 리투아니아인들의 종교, 문화유산에 대한
충성심, 비폭력적인 저항을 나타냈다. 소련은 3차례나 불도저로 십자가를
철거하려 했다. 1993. 9. 7일에 이곳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십자가 언덕이 희망, 평화, 사랑, 희생자를 위한 곳이라고 선언했다.
이 언덕은 리투아니아 로마 가톨릭교회의 특정 교구의 관할 구역이
아니어서 자유롭게 출입하고 십자가를 세울 수 있다.





(우뚝한 예수 십자가상)

리투아니아 독립 직후인 1993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소련 시절 독립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십자가 언덕은 종교적 힘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압제의 권력과 투쟁한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지며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 되었다)

'십자가 언덕'은 매년 세계 각국에서 수만 명이 찾는
리투아니아의 대표적 명소 중 하나가 되었다. 작은 언덕에
크고 작은 십자가가 촘촘히 세워져 있는 리투아니아를
대표하는 주요 상징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많은 십자가가 산을 이루고 있지만)

이곳이 십자가 언덕이 된 정확한 연유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이곳에 십자가를 세운 후 지병이 완쾌됐다는 이야기도 있고,
과거 러시아 차르의 딸 중 한 명이 이곳에 새운 십자가 덕분에 병을 고쳤다는
말도 전해지기도 하고, 제정 러시아 지배시대 식민지 수탈에 항거하는 농민들의
봉기가 실패로 돌아간 후, 돌아오지 않는 가족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기도 한데서
시작됐다라고도 한다. 여러 설 중 어느 것이 맞다 할 수 없어도 확실한 사실은
리투아니아에는 원래 십자가가 많았다는 점이다. 여행객들의 안전과 거리,
방향을 표시하는데 십자가가 그 소임을 수행해 왔다.

십자가 중 대부분이 나무 십자가인 데다
노천에 설치되어 있다 보니 세월이 흐르는 동안 심하게
탈색되거나 삭고 썩어 흉물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앞으로 어떻게 관리하여야 할지도 숙제로 보인다.







(특이한 십자가들도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사람이 각양각색의 십자가를
설치하는데 약간의 규제는 있는 것 같다. 크기가 3m 이상 되는
대형 십자가는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교황 바오로 2세가 집회를 집전했던..)

유럽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기독교화된 리투아니아는
십자가를 단순한 기독교적 상징만으로 보지 않았다. 십자가를
유럽 다른 지역에선 잊힌 고대 상징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 삼아
다른 지역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문화로 발전시켰다. 유네스코는 이를
높이 평가해 리투아니아 전통십자가를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현재까지 연구된 것에 따르면, 14세기 기독교화 이전까지 십자가 언덕은
이 지역을 수호하기 위한 요새로 여겨지며 소규모의 거주지역이 형성됐으나,
독일기사단의 침범으로 허물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십자가 언덕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종교적인 이유와는 거리가 멀다. 종교가 금지되었던
옛 소련 시절 십자가 언덕은 리투아니아 민족정신의 상징인
가톨릭 신앙과 소련의 전제정치가 맞서 싸우는 장소로 변했다.
십자가를 세우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이 지역에선 밤낮으로 삼엄한
경비가 이뤄졌지만 모두 막을 순 없었다. 결국 밤에는 몰래 십자가를
세우고 낮엔 철거하는 일명 '십자가 전쟁'이 이어졌다.







(꽃도 심고 잔디밭도 조성하고..)

교황이 다녀간 후 관광객이 많이 늘었다고 한다.
이곳 십자가 언덕에는 이미 수만 개 십자가가 숲을 이루고 있고,
십자가는 계속 늘어나며 리투아니아인들의 신앙 중심으로,
가톨릭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멀어져 가는 십자가 언덕)

독특한 풍경이 특별한 인상을 주었다.
십자가 언덕 자체로는 의미가 있지만, 리투아니아까지 와서
벌판 가운데 있는 조그만 십자가 언덕만 보고 가기엔 아쉽다.







(리투아니아를 떠나면서..)

8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샤울라이
십자가 언덕에 점 하나 찍고 떠난다. 여행은 시의 은유적 특성도
가지면서 이렇게 소설의 환유적 특성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여러 복잡한 정보와 다양한 볼거리 중에서 유형화된 몇 가지 캐릭터로,
혹은 하나의 단면으로 다른 많은 것들을 통합하여 연결 지어야 한다.
수도 빌니우스도, 심지어 샤울라이 시내에도 들리지 못하고 떠나지만
리투아니아에서 십자가 언덕만 본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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