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6. 20:57ㆍMusic/Music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 (체 게바라여 영원하라) - Nathalie Cardone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Tu mano gloriosa y fuerte sobre la historia dispara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Vienes quemando la brisa con soles de primaver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Tu amor revolucionario te conduce a nueva emparesa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Seguiremos adelante como junto a ti sequimos Aqui se queda la clara, la entranable transparencia, |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 직후에
Hasta la victoria siempre!(승리할 때까지!)라는 말을 남기며
볼리비아로 떠났다. 쿠바 가수이자 작곡가인 카를로스 푸에블라가 1965년
체 게바라에게 'Hasta Siempre : Comandante Che Guevara
(언제까지나 : 우리들의 지도자 체 게바라)'라는 헌정시를 쓰고
그 시에 곡을 붙인 음악이다.
나탈리 카르돈
(Nathalie Cardone 1967. 3. 29~ ) 프랑스 영화배우, 가수
프랑스 남서부 Pau에서 시칠리아인 아버지와 스페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
1988년 영화 'Drôle d' endroit'로 데뷔, 1989년에는 가장 유망한 여배우에게 주는
César Award 후보에 올랐으며, 가수로도 'Populaire', 'Mon Ange' 등의 노래를 불렀다.
특히, 카를로스 푸에블라(Carlos Puebla)가 아르헨티나 혁명 영웅인 Che Guevara에게
헌정한 시 'Hasta siempre comandante Che Guevara'에 곡을 붙인
체 게바라 서거 30주년 추모 앨범 "Hasta Siempre"로 유명하다.
자유를 원하는가?
너의 권리를 찾고 싶은가?
너의 자유와 권리는 딱 네가 투쟁한 만큼만 너에게 주어진다.
-체 게바라-
체 게바라
(Che Guevara. 1928. 6.14~1967.10. 9)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의 대가인 사르트르는
체 게바라를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고 극찬했다.
1928년에 태어나 1967년에 39세로 죽은 체 게바라는 살아 있었을 때도
쿠바와 남미에서는 유명한 인물이었지만, 사후 그가 생존했던 기간보다 더 오랜 기간,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유명해진 인물. 그는 프랑스 ‘68운동’ 당시 영웅으로 추대받았고
이후 5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양한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게바라는 질병 치료보다 세계의 모순을
치료하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해 안정된 의사직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었다.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라는
이름은 평범한 스페인어 이름이다. 하지만 이 이름이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Ernesto Che Guevara)'가 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이름 이상의 것이 된다.
혁명 과정에서 게바라 스스로가 붙인 ‘체’는 스페인 말로 ‘어이 친구’ 정도지만
바로 이 이름이 ‘격정의 60년대를 뜨겁게 살다간 한 완성된 인간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게바라는 1928년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에서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류 가정에서 5남매 중 맏 아들로 태어났다. 20대 초반까지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스물다섯 살에 의학 박사학위를
딴 후 의사로서의 안정된 삶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아르헨티나를 떠나 진보정권으로 자유로운 분위기가 가득하던 과테말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체 게바라는 자신의 삶에 있어 두 가지 큰 변화를 맞는다. 하나는 페루에서
학생운동을 벌이다가 과테말라로 망명 온 3살 연상의 여성 혁명가 일다 가데아를 만나
결혼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주 선거로 이룬 과테말라의 아루벤스 진보정권이
미국 자본의 지원을 받은 아르마스의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체 게바라는 비폭력적 개혁은 한낱 꿈일 뿐, 남미 민중을 위한
진정한 혁명은 무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이 세계의 모순을 먼저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1955년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나고 구체적인 '쿠바혁명' 계획을 세우게 된다.
게바라는 1956년 11월 80여 명의 ‘전사’와 함께 쿠바에 상륙하지만 독재자 바티스타
정부군에 발각되어 겨우 12명만 살아남았다. 이들은 시에라마에스트라 산맥에 들어가
이때부터 혁명군을 모아 게릴라 투쟁을 시작하면서 전설적인 쿠바혁명의 신화가 창조됐다.
수만 명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의 군인들을 상대해 오다 1958년 산타 클라라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많은 쿠바의 민중들이 체 게바라의 군대에 동조하였고 이 승리로 반군은
수도 아바나로 입성하였다. 마침내 1959년 1월 1일 독재자 바티스타가 도미니카로
망명하면서 반군들은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쿠바혁명에 성공하였다.
피델 카스트로는 총리가 되었고, 체 게바라는 그간의 활동을 인정받아 쿠바국민이
되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 정부의 각료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9년부터
1965년까지 체 게바라는 쿠바 혁명 정부에서 라 카바니아 요새 사령관, 쿠바
국립은행 총재, 쿠바 산업부 장관 등을 거치며 서방세계로부터 쿠바의 두뇌라는
별명을 얻었다. 공산권과 제3세계를 돌며 모든 종류의 제국주의, 식민주의에
반대하는 외교활동을 벌인다. 이때부터 검은 베레와 구겨진 군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그러나 그는,
1965년 4월, 피델 카스트로에게 ‘쿠바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는
편지를 남기고 쿠바에서의 2인자 자리를 버리고 당시 내전 중이던 아프리카
콩고로 가 콩고 혁명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아프리카만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체 게바라는 실패하고 다시 남미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금 볼리비아의 혁명에
가담했다. 게바라가 볼리비아를 택한 것은 볼리비아가 5개국과 국경을 접하는 등
혁명의 불씨가 남미 전역으로 잘 퍼질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 게바라가 이끄는 혁명군은 볼리비아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혁명군 내에서도 조금씩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게다가 체 게바라의 지병인
천식은 고산지대인 볼리비아에서 더욱 악화하였다. 농민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실패한
체 게바라는 산악지역을 전전하며 게릴라 활동을 펼쳤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게바라는 미군의 지원을 받는 볼리비아 독재정권의 정부군에 체포된 뒤
1967년 10월 9일 사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39세였다.
체 게바라!
그가 보여준 현실의 안락과 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죽어간 삶의 궤적은 이후 진보적인 젊은이들이
그를 멘토로 삼기에 주저치 않게 하였고 그의 참혹한 죽음은 ‘전사 그리스도’란
별명을 붙이게 했다. 이런 인기 때문일까. 체 게바라는 혁명의 나라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가장 경계했던 자본주의의 최첨단에 있는 미국에서조차 가장 뜨겁게
인기있는 인물로 소비되고 있다. 혹자는 ‘혁명도 사회주의도 사라진 지금
오로지 체 게바라만 살아남았다’고 할 정도로 체 게바라는
이념과 국가를 떠나 전설의 혁명가로 살아남아 있다.
'Seamos realistas, realisemos lo imposible!'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Hasta la Victoria Siempre'
승리의 그날까지 영원히
Che Guev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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