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가을 길을 걷다.

2018. 10. 28. 21:04山情無限/한라산




한라산, 가을 길을 걷다


18. 10. 23 (화) / 홀로

성판악 대피소- 백록담 - 관음사 대피소






한 달 전 제주도의 가을을 보려고

싼 항공권을 잡았다. 늦은 시간에 들어가 하루를 더 보내고

이른 아침에 나오는 표였는데, 숙소를 잘 구하면 항공권과 숙박비를 합쳐도

정상요금의 항공권보다 싸게 갔다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3박 4일 일정이지만

실제 제주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꼬박 2일, 밤과 아침시간 한 번씩은 덤.

그러면 가성비가 좋다.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항공권을 끊었는데..

감기에 테니스 엘보까지 겹쳐 갈 형편이 못 되었다. 취소하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현듯 가야겠다는 생각에 길을 나섰다.





한 달 전에 잡은 일정인데다 항공권이 싼 날짜를 잡다 보니

애초부터 날씨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으니 순전히 복불복이다.

한 달 후의 날씨는.. 그 날의 날씨도 중계방송하듯 하는 우리 기상청을 믿느니

오히려 자신의 감을 믿는 것이 나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도착한 어제는 비가 내렸고,

오늘은 구름 많음에 비 올 확률 40%, 내일은 쾌청, 비 올 확률 10%를 예보하고 있는 상황.

일정을 바꿔 내일 한라산을 오르면 좋으련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안타까움..

7시 28분발 버스로 성판악 대피소로 향하는데 자꾸 한라산 쪽으로 눈길이 간다,

성판악 대피소에 도착하니 사람보다 구름이 많았다.





손거스러미가 생겨 뜯었더니 살이 조금 찢겼는데 여간 걸리적거리지 않는다.

대피소에서 대일밴드를 하나 구하여 손가락에 감고, 산행채비를 하여 입산한다.

오늘 하산하여 바로 성산포로 가려고 트라이 포트를 비롯한 3박 4일 여행 짐

전부 지고 산에 오르니 거의 박 배낭에 육박하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제주의 가을 길을 걷고 싶었다, 한라산 길도 걸어보고 싶었다.

단풍을 보러 온 것은 아니지만, 가을 산은 역시 단풍이 있어 더 아름다운 것..

한라산은 단풍이 들기도 전에 바람에 나뭇잎이 떨어졌는지 빈가지가 많고

단풍이 그렇게 곱지는 않은 것 같다. 아무렴 어쩌랴.





10분 정도 걸었는데 벌써 0.6km를 올랐단다.

길이 부드러워 진도가 잘 나간다.






마포를 융단같이 깔아 놓은 길, 산죽 사이로 난 정겨운 길

부드러운 길을 조금 속도를 내었더니 앞서 출발한 산객들이 나타났다.

이 길은 단풍이 곱지 않아 다른 길로 갔는지 산객들이 많지 않다.

오히려 복잡하지 않아 좋은 면도 있다.





벌써 자리 잡고 앉은 산객들.. 정상까지 갈 심사는 아닌 듯..

꼭 피크 헌팅을 해야 산행인가? 산에 들어 자연과 함께하면 그것이 좋은 것이지..

빨리 가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연의 소리와 모습을 보며 유유자적하며 자연과

하나 되는 그런 산행도 얼마나 멋있는가! 이런 길은 좀 그렇긴 하지만..






호젓한 산죽 길을 따라 올라가니 속밭대피소.

물 한 모금 마시며 잠시 휴식한다.







구름이 터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드러나니 단풍이 살짝 본색을 드러낸다.

잎을 떨군 빈 가지에 자리 잡은 겨우살이가 꼭 까치집 같아 보인다. 국립공원이니까

겨우살이가 저렇게 남아있지.. 영남알프스에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마가목과

겨우살이가 많았는데 요즘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힘들다.






이마에 땀이 맺힐 즈음 나타난 진달래 대피소

마치 여기가 정상같이 느껴질 정도로 장막을 두른 듯 구름이 내려앉아 있다.

진달래대피소도 많은 산객으로 번잡했는데 오늘은 꼭 파장같이 한산하다.

이곳 명물이자 별미였던 컵라면은 이제는 볼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해발고도 1600m를 알리는 표지석이 나타났다.

지금부터 마음 다잡고 걸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것 같다.

여기까지 잘 왔듯 한눈팔지 말고 이대로 쭉~





고도 1600m를 지나자 식생이 달라지고,

날씨도 달라졌다. 이제 구름 속이다.






고사목들이 여기저기 나뒹군다.

고사목들이 나뒹굴고, 구름은 짙어지지만

정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허투룰 수 없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고 하듯,

정상 직전이 거칠고 힘들다. 특히 오늘같이 한 치 앞도 안 보이고

길이 미끄러울 때는 발 디딜 곳을 잘 보며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디뎌야 한다.

수도사의 심정으로 정상으로 향한다.





이렇게 구름 속에서도 제자리를 지키고 서서 길을 안내하고 있는

이정표가 고맙다. 이정표도 제자리를 지키고 서서 제 할 바를 다할 때 의미가 있다.

하물며 사람이야!






20분 동안 줄 서서 기다리다 찍은 한라산 정상 사진.

이 사진도 없으면 오늘 사진이 한 장도 없을 것 같아 찍긴 찍었는데

줄을 서 있는 20분이 좀 아깝고 멋쩍긴 했다.





백록담 돌판을 세우기 전까지는 동능정상 표지목에서 증명사진을 찍느라

인기가 많았는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이쓴 동능정상 표지목도 세월 무상을 느낄까?

자리를 뺏기는 것은 사람만이 아닌 것 같다.


백록담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 같은 마음이다.

보고 싶은데, 보고 갔으면 좋겠는데.. 꼭 비싸게 굴던 건넛마을

아가씨처럼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다음에 다시 오라는 듯..





짙은 구름으로 백록담이 보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다

정상은 바람도 세차고 한기까지 느껴진다. 이제는 내려서야 할 시간..

짙은 구름 속에서 관음사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조금 내려서니 관음사 방향에서 오르는 산객이..

사실, 관음사 코스는 성판악 코스보다 고도도 130m나 낮은 데서 시작하지만

등로는 900m 정도 짧다. 구 용진각 대피소부터 정상까지는 곧추서듯 가파른

비탈이 경을 친다. 이전 겨울 폭설이 내렸을 적에 이 길을 오르다 두 발 오르고 한 발

미끄러져 내리면서 악전고투하던 기억이 새롭다. 이 길로 오르면 힘은 들지만,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번잡하게 많은 사람과 떼지어 오르지 않아 좋고,

성판악으로 내려서는 길도 마주치는 사람이 없어서 좋다.






지리산이나 한라산이나 고사목이 많다.

우리나라도 기후가 바뀌면서 식생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

생태계의 변화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진행되고 있다.

다 인간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가 부메랑이 된 것이다.





진달래 대피소 지나면서 구름 속에서 이슬비를 맞았는데

관음사 코스에서 오르는 산객들은 비를 흠뻑 맞았다고 한다.

나무에 맺힌 빗방울이 꼭 수정구슬 같다.





해발 1700고지에 있는 무덤 2기..

분명 산을 사랑하던 사람의 무덤일 것 같다.

여기까지 어떻게 운구를 했을까? 벌초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모두가 산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람들일 것 같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단..

가파르게 구 용진각 대피소를 향해 내려선다.

가을비를 맞은 산죽은 힘을 얻은 듯 푸른 빛이 한데,

단풍은 첫사랑을 떠나보낸 기억처럼 애잔하다.





구 용진각 대피소가 있던 자리..

잠시 쉬어 간다. 여기에는 정상에서 내려온 사람과

관음사 대피소에서 올라오다 오르기를 멈춘 사람들로 붐빈다.

지금 정상을 오르기는 바쁜 시간이기도 하다.





이전 용진각 대피소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용진각 대피소는 2007년 태풍 나리가 왔을 때 폭우로 한라산 북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암반과 급류와 함께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 머리 위에 머물던 구름이 걷히면서

북벽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장관이다!





천지가 개벽하듯..

순식간에 구름이 걷히며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장구목 능선이 나타났다.





한라산 북벽이 완전히 드러났다.

자주 다닌 길이지만 이렇게 여유롭게 보기는 처음이다.

북벽은 무너져 내리면서 더 거칠고 험준해진 것 같다.

과연 절경이고 비경이다!





태풍으로 쓸려 내려간 옛 용진각 대피소 흔적





거대한 철제빔의 용진각 현수교

전에 있던 다리가 폭우에 유실되었다고 이렇게 육중한 다리를 놓았다지만

경관 좋은 탐라계곡과 썩 어울리는 구조물 같지는 않아 보인다.






삼각봉 대피소에서 제주 시내가 조망된다.





왕관릉과 한라산 북벽







시몬, 나뭇잎 저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길에 밟히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

낙엽은 날개소리, 여인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

이리 오라, 우리도 언젠가 가련한 낙엽이 될 것을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고

바람이 우리를 휩쓴다 //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낙엽 / 구르몽





 가을 산길이라고 산객을 그냥 보내지는 않으려는 듯..

단풍나무 숲에는 불을 켠 듯 환하게 가을빛을 밝힌다.

한라산에 들어 제대로 보는 단풍 같다.





좁은 길.. 손 잡고는 갈 수 없는 길

뚱뚱한 사람도 쉽게 통과할 수 없는 길

좁은 길은 여기에만 있지 않다.





대부분의 나무는 이미 잎을 다 떨구고 나목이 되었는데

여기는 아직도 미련이 남은 듯.. 마지막 정념을 태우고 있다.





해발 1000m 표지석.. 관음사 대피소의 고도는 620m

아직 고도를 400m 가까이 낮춰야 한다.





이제 산길에도 제세동기가 비치되어 있어 위급할 때 사용할 수 있겠지만

얼마나 효용성이 있을지는 의문? 이 지점에서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몰라도..







가을 산에 오른 것이 실감난다.






구린굴





반영





탐라계곡







한라산 단풍은 내세울 것이 못 된다지만 이 주변은

단풍으로 찬란하고 황홀하다. 날머리까지 융단같이 이어지는..

가장자리에 노란띠가 있는 산죽 길도 정겹다.





이제 다 왔다. 산문을 나설 시간이다.

8시 반 성판악 대피소에서 입산하여 오후 4시 반에 관음사 대피소

산문을 나서니 꼭 8시간 걸렸다. 구 용진각 대피소 터에서 30분 넘게 머물렀는데

이 정도면 오늘 무거운 배낭을 메고도 잘 걸은 것 같다.






날머리, 관음사 대피소





(한라산 등산로)


제주에 도착하여 한라산 산행 일정을 변경하고 싶을 정도로

일기가 좋지 않았고, 실제로도 잔뜩 찌푸린 날씨에 산을 들어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는 한 치 앞을 분간 못할 구름 속으로 걷다 이슬비를 맞았다.

물론, 백록담은 다음에 오라는 듯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구 용진각 대피소 터에서 머무는 동안 순식간에 날려간 구름은

한라산 북벽과 삼각봉, 장구목 능선,왕관 능선 등 한라산의 비경을

펼쳐 보여 주었다. 구름이 걷히면서 보이는 모습을 정말 장관이었다.

이후 날머리까지 펼쳐진 찬란하게 빛나는 단풍 숲은 황홀경이이었다.

내가 왜 한라산을 올랐느냐고? 너도 올라 보면 알 테다.

이렇게 조금은 고독하면서도 행복한 산행을 완료한다.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장필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