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 31. 00:45ㆍ山情無限/한라산
한라산, 폭설과 한파가 만든 그 환상의 설국을 걷다.
성판악휴게소 - 진달래대피소 - 사라오름 - 성판악휴게소
18. 1. 25 (목)
올 겨울에는 꼭 한라산을 가 보리라.
최근 몇 년 사이 제주도를 안 간 것도 아닌데 겨울 한라산에 오른 것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동안 비행접시 같이 하늘에 떠 있는 한라산을 멀찌감치서
바라보기만 했었다. 올래길을 걷다가도 한라산 한 번 쳐다보고, 시내를 걷다가도 가끔씩
한라산 방향을 쳐다보았다. 2박 3일 이번 일정은 순전히 싼 항공요금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왕복 삼만 원, 거기에다 숙소도 2박을 6만 9천원에 예약하였는데 하루는 아침까지 제공된다니..
한 달 전에 여행을 계획하면서 제주에 갈 때쯤 한라산에 눈이 많이 오기를 바랐다.
눈천지가 된 한라산을 걸어 보고 싶었다. 기대가 너무 간절한 탓이었을까.
갈 날이 가까워지자 호남지방과 강원도 지방, 제주도는 연일 대설주의보다.
제주도는 한파가 공항 활주로까지 얼어 며칠씩 비행기가 제대로 뜨고 내리지 못한다는
반갑잖은 소식.. 그만 눈이 그쳤으면 좋겠건만 출발하는 날까지 제주도는 대설주의보다.
제시간에 비행기가 뜨기나 하고, 한라산은 오를 수 있을까
오기는 제대로 올 수 있을까하는 우려도 있지만 일단 출발이다.
하늘이 하는 일.. 눈도 오라면 오라지..
숙소 가는 길, 눈을 한 쪽으로 치워 길을 터놓았으나 길은 빙판길.
아니나 다를까 앞서가던 여학생이 멀쩡한 길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진다.
볼을 세차게 때리는 바람까지 살을 에이는듯하다. 여기가 제주가 맞나 싶을 정도다.
시내에 나가려던 생각은 접고 숙소에 퍼져 정현의 호주 오픈 8강전 경기 재방송을 보다가
어둑어둑할 무렵 저녁 먹으러 나서는데 그 사이 두텁게 내려앉은 구름은 눈을 뿌리고 있다.
귀한 님 만나듯 반겨야 할 눈이건만 달갑잖다. 내일 한라산을 못 가는 건 아닐까..
그렇잖아도 폭설에 한파까지 겹쳐 516도로는 오늘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이 열려
첫 버스가 출발했고, 한라산은 아예 입산을 통제했다던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181번 버스를 운행하는 동진여객에 전화를 했더니 정상운행을 한다고 한다.
이제 한라산 입산여부가 관건. 성판악탐방안내소에 전화를 하니 입산이 가능하단다.
야호!
첫차를 탈 필요도 없고,
39,000원 짜리 호텔이지만 조식까지 제공한다지 않는가!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고 7시 36분 버스를 타고 성판악으로 가는데
어제 못 가져간 차들인지 길옆에 서있는 승용차들이 많이 보인다.
제설차가 분주하게 오가며 길을 내지만 눈은 계속 내린다.
성판악에 도착하니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엄습한다.
성판악, 오늘은 성판악도 한산하다. 입산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드디어 산문에 들어선다.
얼마만인가! 뜻이 있으면 길이 있는 법..
산문을 들어서니 잠자듯 조용하다. 추운 날씨지만 눈이 주는 분위기는 포근하다.
성판악의 을씨년스런 분위기는 오늘 산행코스 잡는데 고민거리를 던진다.
성판악으로 되돌아 와도 그 시간쯤 516도로가 온전할까 걱정되는 상황인데
관음사 코스로 가려니 제1산복도로가 막힐 것 같다는 우려.
대설주의보가 내렸다더니, 폭설이 내렸다더니..
몽실몽실한 눈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이런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려고
어제까지 눈은 그렇게 많이 내리고,
산문을 굳게 닫아 놓았나 보다.
漸入佳境(점입가경)!
점점 더 깊은 설국, 아름다운 세상으로 빠져들어 간다.
저기.. 설국 속 눈으로 덮인 진달래대피소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달리다 휴전선에 막혀 멈춰선 철마같이,
아! 더 오르고 싶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기상악화로 정상 가는 길 통제중.
사정을 해 보지만 지침이 그렇다는데야 더 방법이 없다.
여기까지 온 것도 감사해야지..
진달래대피소, 대피소 주변의 풍경.
지난 1월 10일부터 진달래대피소 매점이 폐쇄되어 한라산의 명물
컵라면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한라산에서 컵라면을 먹으려면
컵라면과 보온병에 물을 담아 오는 수고를 해야한다.
아쉽게도 한라산 동봉 정상은 오르지 못하지만
이제 시간도 충분하니 내려가면서 설국을 충분히 즐겨야겠다.
그러고 보니 동봉 정상에서 관음사 길이냐 성판악 길이냐
고민할 일도 자동적으로 해결된 셈.
언제 한라산을 이렇게 한적하게 걸어 본 적이 있었는가?
이런 환상적인 눈 세상을 몇 사람만이 전세 내어 보는 것만 같아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여유가 있으니 평소 지나쳤던 사라오름에도 올라 본다.
산정호수는 얼고 눈에 덮여 북구의 어떤 지역 같은 모습이다.
사라오름 서쪽 전망대에 올라 한라산 동봉을 본다.
바로 저긴데.. 한라산을 다시 한 번 더 오라는 뜻인가 보다.
이번에 한라산 정상에는 오르지 못하고 구름 위의
한라산 정상을 두 번이나 본다. 비행기에서 본
구름 위로 솟은 한라산은 정겨웠지..
황무지에도 꽃이 핀다더니
마른 가지에도 눈꽃이 활짝 피었다.
메마른 가슴에도 꽃을 피워본다.
그냥.. 좋다. 이 순간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한라산 설국에서 묶이고 싶은 마음에
문정희 시인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를 떠 올려 본다
드문드문, 혼자 또는 몇 몇이 무리지어 걷는 호젓한 눈길..
굴거리나무도 눈을 뒤집어 썼다.
조금 상황이 호전되기는 했지만 아직도 을씨년스러운 성판악휴게소로 원점회귀..
산속은 손이시리고 춥긴 추웠지만 바람이 없이 안온했다.
성판악은 완전 한겨우 날씨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날씨가 보통 날씨가 아니다.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버스 기다리다 얼어 죽겠다는 말까지 나온다.
제주에서 이렇게 추운 날씨는 처음 만나는 것 같다.
올해는 유난히 눈과 사연이 많다.
지리산은 대피소 예약까지 해 놓았는데도 대설주의보가 내려 못 가고,
덕유산은 겨울비를 맞으며 출발했다가 산 정상부에서 눈을 만나는 전화위복도 있었고,
한라산은 대설주의보로 입산 통제된 다음날 들어가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또 다시 입산통제시켰다니.. 산문이 잠깐 열렸다 닫히는 사이 들어갔다 온 셈.
이렇게 아름다운 설국을 전세낸 듯 원 없이 걸었으니 감사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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