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2. 1. 02:35ㆍ山情無限/한라산
한라산, 대설주의보가 내린 설국 속으로..
어리목 - 사제비 동산 - 윗세오름 - 영실
20. 1. 14 (화) / 대설주의보
이전에는 제주도 갈 때 밤 배를 이용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항공편을 이용하고 있다. 밤 배의 낭만이
좋긴 한데 부산서 제주 가는 배가 한동안 운항을 하다 말다 한 데다,
저가 항공편이 생기면서 어떨 땐 항공료가 만원도 안 되는 초저가
항공권이 나오니 경제적인 도움도 되고, 초저가 항공권 구하는 재미로
항공을 이용하는 것 같다. 배편으로 갈 때는 일정이 계획적인데,
항공편으로 갈 땐 구한 표에 맞춰 계획을 세우게 된다.
초저가 항공권을 구하고는 대단한 횡재나 한 듯 기분 내지만,
그 나름대로 또 치러야 할 대가도 있다. 어쨌건 이번에도 싼 표를
구했고, 그로 인해 억지로라도 제주도를 갈 기회를 만들었으니
좋은 일 아닌가! 거기에다 가는 날에 맞춰 한라산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는데도 입산할 수 있다니 겹경사 아닌가!
'쫓기며 살지 말자'고 늘 다짐하지만,
또 제주 가는 첫 항공편을 구한 덕분에 새벽부터 비상이다.
공항버스가 집 가까운 정류장을 거쳐 가지만 시발점에서부터
만차가 될 것 같아 택시로 태화로타리 정류장으로 갔다.
예상대로 긴 줄이 늘어서 있다. 첫차는 내 너댓 명 앞에서
끝났지만, 4시 50분 차를 타도 시간은 충분할 것 같다.
구름을 뚫고 오른 비행기는 햇귀를 잠깐 보여주고는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더니 주적주적 비가 내리는 제주에 내렸다.
한라산은 대설주의보로 진달래대피소에서 통제한다고 하여 성판악
코스 대신 어리목 코스로 가려니 바빠졌다. 8시 30분에 어리목 가는
버스를 타려고 택시를 탔는데 연세 지긋한 노련한(?) 기사님은
버스로도 10분이 안 걸리는 거리를 10분 넘게 걸려 도착하는
바람에 바로 눈앞에서 240번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 차는 1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앞차를 놓쳤을 때는 택시 기사님이 원망스러웠는데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덕분에 1시간이 생겨 느긋하게
아침도 먹고 버스도 여유 있게 탔다. 제주 시내에는 제법 굵은
비가 내렸는데 시가지를 벗어나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길은 이미 눈길이다. 버스는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하는데
길옆에는 승용차들이 멈춰 서 있고, 가끔 눈길에
미끄러져 비스듬히 누워있는 자동차도 보인다.
40분 거리를 1시간 넘게 걸려 어리목입구에 도착.
눈은 소강상태다, 어리목 탐방안내소 가는 길은
융단을 깔아 놓은듯 밟기도 아까울 정도로
하얀 눈길이 펼쳐져 있다.
덩그러니 서 있는 한라산 표지석을 찍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 한 달 전에 최저가 항공권을
구했는데 이렇게 때가 맞다니.. 겨울 한라산은 도로가 막히거나
폭설로 입산이 통제되는 등 변덕스런 날씨만큼이나 입산이 힘든데
이렇게 좋은 날, 때 맞춰 한라산에 들 수 있다니..
이런 행운이 따르다니.. 감사할 뿐이다.
박 배낭도 아닌 것이 어깨를 짓누른다.
며칠 머물 짐을 몽땅 지고 오르니 박 짐에 버금간다.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놓쳤던 8시 30분 버스를 타고 왔다면 어쩔 뻔했을까?
택시 기사님.. 밥을 챙겨 먹고 한라산에 들라고
버스를 놓치게 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시험이 그렇듯 세사도 인생도 지나고 보면
답이 보이니 말이다.
나목은 하얀 분을 바른 것 같고,
산죽은 하얀 이불을 덮은 것 같다.
황량한 겨울 산의 이불이 산죽인 줄 알았는데
산죽도 겨울에는 눈 이불을 덮는구나!
사제비동산 오르는 길,
구상나무와 나목도 차별받지 않고 공평하게 눈꽃을
피웠다. 눈은 허물을 덮어주고 평등하게 만드는 것 같다.
사람들도 이렇게 두루 베풀 수는 없을까!
한라산 명물 큰부리까마귀 조형물도
얼어붙은 듯 가만가만 눈을 맞고 있다.
어찌 강아지만 눈이 좋아 날뛰겠는가?
설목 사이로 오르면서 만나는 키 큰 빨간 깃대가
좀 뻘쭘해 보이지만, 눈이 쌓이고 쌓여 길이 사라지면
난쟁이가 된 깃대를 보고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 때맞춰 올 수 있을까!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너와 처음 만났던 도서관 숲길이다
아니다
네가 처음으로 무거운 내 가방을 들어주었던
버스 종점이다
아니다
버스 종점 부근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가지 위의 까치집이다
아니다
네가 사는 다세대주택 뒷산
민들레가 무더기로 피어나던 강아지 무덤 위다
아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피었다 진 원추리의 이파리다
아니다
외로운 선인장의 가시 위다
아니다
봉천동 달동네에 사는 소년의 똥무더기 위다
아니다
초파일 날
네가 술을 먹고 토하던 조계사 뒷골목이다
아니다
전경들이 진압봉을 들고 서 있던 명동성당 입구다
아니다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던 너의 입술 위다
그렇다
누굴 사랑해본 것은 네가 처음이라고 말하던
나의 입술 위다
그렇다
정호승 시인의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이라는
재미있는 시가 떠올랐다.
사방 눈 천지 하얀 설국을 걸으면서
눈이 하얀색이라는 것을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눈이 까만색이었다면, 빨간색이었다면..
아니 투명하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했을까
눈이 하얀색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어느새 설국의 궁전 같은 윗세오름 대피소가
눈 천지 속에 흐릿하게 나타났다.
윗세오름 대피소는 목하 도떼기 시장.
모든 산객이 좁은 대피소 안으로 모여들었다. 입김과 몸의
열기로 대피소 안은 김(?)이 자욱하다. 컵라면 김과 향기까지
범벅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얌체족들은 네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도 배낭까지 올려놓고 두 명이 넓게 쓴다. 자리 없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산에 들어서도 어찌 산 아래서 하던 짓들을 그대로 할까.
그 자리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없었겠지..
여기까지..
남벽분기점까지 가보려 했는데
돈내코 코스도 통제되었다.
어쩔 수 없다.
중국 사람들.. 정말 대책 없다.
등산화도 안 신었다. 옷도 등산복이 아니다.
그래도 눈밭에서 인생 최고 장면을 찍으려는 듯..
얼른 내려가야겠다.
소강상태였던 눈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다.
오후에 눈이 많이 올 것이라 예보하더니 그럴 모양이다.
버스가 끊기지는 않아야 할 텐데..
전망 좋은 웃세누운오름전망대도
구름 장막 친 오늘은 아니다, 미안하다.
설목 사이로 시위현장 취재하듯, 스케치하듯
셔트를 누르며 바쁘게 빠져나간다.
차가 끊길 때 끊기더라도
이런 광경을 두고 그냥 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벼량에서 눈을 뒤집어쓴 기암괴석과 나무들의
모습이 엉뚱하다. 곰 같기도 하고 사자 같기도 하고
대게의 집게발 같기도 한 모습, 모습들..
빨리 하산하려던 마음마저 고쳐 먹게 했다.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서귀포 방향 하늘이 열리면서 바다가 보인다.
맞은편 능선도 모습을 드러낸다.
저 아래 한참 앞서가는 산객들 모습도 보이고
옆 능선 추녀마루 잡상 같은 모습도 드러난다.
병풍바위와 오백나한이 어우러진 거대한 조각작품이
있는 골짜기로 눈구름이 밀고 내려왔다 밀려 올라갔다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일기예보도 오후에 더 많은 눈이 온다고 한데다
소강상태였던 눈이 펑펑 쏟아지길래 윗세오름에서
탈출하듯 하산했는데, 조금 전 서귀포 바다를 언뜻언뜻
보여주더니 이제 구름을 활짝 열어젖히고
파란 하늘을 보여준다.
날머리까지 융단 같은 눈길이 이어졌다.
대설주의보로 여기저기 등로가 통제되었지만
큰 눈이 내리지 않아 다행이다. 물론,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율배반적이게도 눈이 펑펑 내려 무릎까지 쌓였으면,
그러면서도 버스는 끊기지 않고 다녔으면 하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늘 눈길을 잘 걸은 것 같다.
다시 택시기사님 생각이 났다. 짐도 무거웠는데
아침도 안 먹고 산에 들었으면 어쩔 뻔 했을까?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파란 하늘도 보지 못했을 것 아닌가.
전화위복이다. 인생은 그렇게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끝나야 끝난 것이고, 최종 결산은 생을 마감할 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영실입구에서 중문 가는 버스 시간을 맞추려고
영실탐방지원센터에서 2.5lkm 나 되는 눈길을 바쁘게
걷는데 길섶의 눈사람이 잠시 발길을 붙잡는다.
버스정류장에 시간 맞춰 도착하였는데 버스는
나보다 한참 늦게 도착했다. 숙소를 성산에 잡은 터여서
중문으로 가는 게 빠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제주 시내로 가서
성산 가는 것이 빠를 것 같다. 중문에 내려 서귀포터미널로
가서, 다시 성산가는 버스를 타야 하니 환승도 불편하고,
시간도 더 많이 걸리는 것 같다.
싼 항공편에 숙소도 취소가 안 되는 조건이
달린 저렴한 가격이었지만 다시 가고 싶을 정도로
좋았던 '플레이스 캠프 제주'에 도착하니 6시 반.
신새벽부터 설친 바빴던 하루가 끝났다.
휴~
보름 전에 갔다 온 한라산 산행기를
오늘에야 끌쩍거리며 밀린 숙제같이 끝낸다.
언제부턴가 산행기를 정리하지 않으면 산행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습관은 병보다
무서워졌다. 그동안 바쁘기도 했고, 컴퓨터 자판 두드릴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무기력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우도 올래길 1-1 코스 걸은 것은 언제 정리하지?
그냥 갔다오지 않은 것으로 할까
그게 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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